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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건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라는 이름을 알게 되게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아마 '당대비평'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를 논하면서 문학을 통한 기억 조작의 예로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를 꼽았다.
불완전하지만 당시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지금에 와서는 '일본 1000년의 리더'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오다 노부나가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하는 사카모토 료마지만, <료마가 간다>가 출판되기 전까지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다고 했다. 꽤 오래전에 확립된 메이지유신 3인방(카츠라 고고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다카모리)에 료마의 이름이 끼지 못하는 것만 봐도 이 점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일본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 정확히는 내 세대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제외하고는 일본 근대사의 인물을 거의 알지 못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일본을 근대국가로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메이지유신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메이지유신이라는 혁명적인 변화는 다이세이(大政)봉환이라는, 바쿠후(막부)의 권력을 덴노(천황)에게 이양한 사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럼 수백년동안 권력을 쥐고 뒤흔든 바쿠후가 국가 발전을 위해 다이세이 봉환이라는 역사적 결단을 내린 것일까? 천만의 말씀. 세상에 그런 권력은 없다. 뭔가 다른 것을 얻기로 약속했거나, 적어도 살기 위해서 권력을 내어놓을 수 밖에 없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바쿠후의 강요한 바로 그 힘이 이른바 사쓰쵸 연합이다. (때문에 일본 근대사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이 지역 출신들이다. 이토오 히로부미도 초슈 출신이다)
지리적으로 일본 열도의 서쪽에 치우쳐 있는 사쓰마와 초슈는 일찍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에 가담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이래로 괄시당해왔기 때문에 반(反)바쿠후 세력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 두 지역 사이의 경쟁심리가 만만찮아 경원지간이기도 했다. 사카모토 료마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이 두 지역이 손잡고 바쿠후를 타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가 상당한 기간동안 잊혀져 있었던 인물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고 보면 당연하다. 사쓰쵸 연합을 성사시킬 당시, 아니 죽을 때까지도 료마는 공식직함이 없는 그저 한 사람의 우국청년일 뿐이었다. 날건달이었던 것이다.
이런 인물이 일본 1000년의 리더 1위로 꼽히게 된데에는 역시 역사소설을 통한 우상화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어렵지 않다. 27살에야 세상을 보는 눈을 뜨고 겨우 33살에 암살당한 그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틱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덧없이 죽어간 우국청년이야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 한둘이던가. 시바 료타로라는 걸출한 재담가를 둔 덕에 밀레니엄맨으로 거듭난 이 날건달을 보고 있자면, 이인화라는 실력좋은 작가가 필생의 목표로 쓴 전기의 주인공면서도 아직도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박정희라는 인물은 좀 서운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에 와서 사카모토 료마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도 역시 그가 날건달이었기 때문이다. 도몬 후유지라는, 역사의 영웅들의 전기를 빙자해서 경영철학과 리더십 이론을 펼치는(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책을 쓰는) 이 책의 작가는 사카모토 료마의 최대 장점을 료마의 말 한마디로 정의한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이말이야말로 바로 이 정신없는 시대가 가장 원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던가. 날건달인 그에게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어차피 빈 창고에서 도둑맞을 일이 뭐가 있나. 아니, 어차피 빈 창고인데 그냥 버리고 간들 달라지는게 뭐가 있나.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크고 작음에 차이가 있을 뿐 각자 자신의 창고를 채워가며 살고 있다. 어제의 날 부인하기란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어늘날 갑자기 치즈가 사라진걸 알아도 그나마 내 손에 남아 있는 치즈가 아까워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나지 못한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라는 말 속에 숨어있는 무서움이 느껴진다. 그나마 작디작은 내 창고마저도 내던져 버리란 말인가. 그나마 내 손에 묻은 치즈마저도 버리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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