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의 노래 (김훈) 2004. 5. 18 루프트한자 비행기 안에서. 1. 책을 읽고 그자리에서 쓰는 느낌 좀처럼 책이라는 것을 읽을 시간이 없는 내게, 일년에 한두번 있는 해외 출장길은 황금과 같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매번 출장 전에 이번에는 어떤 책을 읽을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해서 비행기 안에서 읽게되는 책이 내가 일년내내 읽는 책의 전부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이번에도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무지 무겁다), 절반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로마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인천공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 언젠가 노무현 대통령이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마디로 굉장합니다” 라며 추천을 한 것이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고, 빌어먹을 국회의 탄핵안 가결 이후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서 대통령이 다시 이 책을 잡았다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 이 책을 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보통 지하철에서나 찔끔찔끔 책을 읽게되는 나에게 책 한권을 앉은 자리에서 내리 읽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귀한 시간을 할애하여서 읽은 ‘칼의 노래’. 두어시간만에 단숨에 읽었다. 노무현 대톨령의 말대로 대단했다. 책을 덮은 지금, 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영웅이 있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이 참으로 불행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생각에 서글프기도 하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났을 때의 느낌도 그러했다. 사실 그 영화의 내용은 허무맹랑하다. 한국전쟁이라는 배경에 허리우드식의 람보를 섞어놓은 그다지 설득력없는 내용의 영화이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 나는 두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두려움이였다. 몇달전 마지막 6년차 예비군훈련을 마친 나에게 전쟁의 공포를 그렇게 다가왔다. 3사관학교에서 총들고 각개전투 훈련을 받을 때보다도, 장거리 행군을 하며 격전지 순례를 할 때에도, 나는 전쟁이 그렇게 두렵게 피부에 와 닫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나는 내가 그러한 전쟁터에 나가 있는 상황이 그렇게 두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둘째는 슬픔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진태(장동건)의 손에 죽어간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이유도 모른채 죽여야 했던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가진 슬픈 역사가 아니던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땅에서 불과 50년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바로 그러한 슬픔이 ‘칼의 노래’를 읽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지배한다. 나약한 임금, 불쌍하기 까지한 임금의 눈물, 백성들에게 아무런 보호를 해주지 못하는 조정,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무방비상태로 잔인한 왜구에 의해 파괴되는 우리 민족의 모습, 도도한 명나라, 그 앞에 비굴할 수 밖에 없는 임금, 모략… 2. 김 훈 저자는 이책의 대부분을 난중일기를 비롯한 원전들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의 문체가 워낙 탁월했는지, 김훈의 문장력이 탁월한 것인지는 모르나, 한시를 풀어서 쓴듯한 문체가 얼핏 보기에는 현학적이고 현란하여 보여 익숙해지는데에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반면, 정말 한문장 한문장이 탁월하다는 생각을 읽는 줄곧 했다. 다 읽고 나서 책을 죽 다시 한번 넘기면서 보아도 언뜻언뜻 보이는 문장들의 감동이 새롭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 개별성의 의미가 몸에 와닿는가? ‘태극기 휘날리며’ 에서 죽어간 그 수많은 사람들의 개별성을 생각해보았는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며 수 없이 죽어간 우리 민족, 그리고 남해안 연한을 가득메운 왜구들의 시체의 개별성을 생각해보았는가? “백성의 국물은 깊고 따뜻했다. 그 국물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액처럼 사람의 몸 속으로 스몄다.” –전쟁중에 민가의 한 아낙이 끓여준 국밥을 얻어먹는 장군의 느낌을 이렇게 기가 막히게 표현하였을끼? (워낙에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기도 하지만…) 의외였던 부분이 있다. 왜구의 장수의 배에 걸려있는 십자 문형이 그 적장이 믿는다는 야소교의 상징이며, 그 야소교는 누군가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믿는 다는 대목이다. 야소교란 예수교를 일컫는 듯 하고, 내용인즉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 인데, 임진왜란이 1592년에 발생했으니, 우리나라에는 1800년대 말에 전파된 기독교가 일본에는 300여년이나 빠르게 전파되었단 말인가? (돌아와서 확인한 결과 사실이었음) 3. 충무공 분명 ‘칼의 노래’는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알아왔던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는 분명 다른 모습을 제시한다.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지휘한 무장의 이면에서 볼 수 있는 인간적인 모습과 그의 섬세한 인간미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이순신 장군이 임금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과 함께 언제 그 임금에 의하여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이미 한차례 누명을 쓰고 백의종군을 하면서 임금과 조정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탓인지는 모르지만, 모략과 중상에 의해 언제 자신이 희생될 지 모른다는 고뇌가 그를 따라다녔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왜적의 칼과 임금의 칼. 그 두칼 모두 자신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매일 전장에 서서 싸우면서 이러한 생각을 해야하는 장군의 자리는 얼마나 외로운가. 강하게만 느껴지는 이순신장군의 내면은 어떠했을까. 매우 인간적인 면이 있다. 어깨에 입었던 총상과 모략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받은 고문으로 인하여 다리 허리의 통증이 수시로 그를 괴롭혔고, 그로 인하여 이른 새벽에 항상 식은 땀을 흘리며 깨어 가위 눌린 듯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 명나라 장군과의 과음으로 인하여 취하고 토하는 모습, 인간의 본성인 성욕을 느끼는 모습, 이 모든 모습이 실제 난중일기를 통하여 기록된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창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공호흡기만 떼면 죽어버릴 것 같은 조국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삼도수군통제사의 외로움과 고뇌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아들의 죽음을 묘사한 부분은 무척 남성적으로 무뚝뚝하게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더욱 슬프다. 자신을 빼닮아 특별히 사랑했던 세째아들 면. 그 아들이, 자신들을 명량해전에서 처참하게 부수어 버린 적장의 가족을 노리는 왜구 특공대의 칼에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충무공의 아픔은 “나는 소금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는 절제된 글귀에 절절하다. 내가 두 아들의 아빠여서일까. 그 아들의 아기 때의 젖냄새, 입에서 나던 보리차 냄새를 기억하는 아버지로서의 슬픔, 소리내어 울 수 없는 충무공의 슬픔에 내가 아프다. 저자에 의해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로 묘사된 충무공은 그렇게 현재의 자신의 위치에서 순결하게 충성했다. 그렇게 단순하고 순결하게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충성하다가 두려움 없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나약한 임금도, 시건방진 명나라 장군도, 정쟁으로 요란한 조정도, 충무공에는 아무 것도 아닌었다. 순결한 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있다. 단순하고 순결한 칼… 충무공에 대한 이보다 적절한 묘사가 있을까. 2004. 5. 18. |
| "오랫동안 반복의 늪 속에서 부유하고 있는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 이 글은 <칼의 노래="">를 2001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심사위원들의 평입니다.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 벼락을 감당하려면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앞의 몇 장을 읽다가 저는 준비의 일환으로 한 손에 볼펜을 들고,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다시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 나마의 준비도 없었다면 저 역시 벼락같은 이 책의 내용이 버거워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쓴 일인칭 소설. 저는 읽어보지도 않고 단지 흔히 보아왔던 역사 소설로 치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금실 장관이 썼다는 독후감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고는 그 작품에서 갑자기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그제사 사서 읽어본 <칼의 노래="">, 바로 오늘을 사는 저의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총체적 난국 가운데 살고 있는 현실의 우리 … 전쟁 중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죽는 사람이나 고층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이나 죽음 앞에서의 공포와 절망은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전쟁은 나의 죽음으로써 끝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외람되게도 일인칭 화자가 저 자신인양 착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글 속의 이야기가 역사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제 주위에서 아직도 꼭 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세 가지 점에 주목을 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소설 속의 장군은 적군보다도 정치적 농간에 더 절망하고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여야 할 것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 저도 이제껏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런 말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일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정치 논리에 휘둘려 골탕을 먹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다"고 말이죠. "임금은 가토의 머리에 걸린 정치적 상징성을 목말라 했다. …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 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했다. …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얘기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의 적은 단지 왜군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고뇌를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장군의 고독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에서 다름 아닌 오늘의 우리, 아니 저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본래부터 광화문 한복판 저 높은 곳에 위엄 있게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현충사의 영정처럼 늘 그렇게 평온한 얼굴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겁니다. 그에게도 인간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고 아픔이 있었을 것이고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없이 고뇌하고, 현실을 한없이 두려워하지만 맘놓고 울 수조차 없던 장군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 생각에 가슴 아픔이 내내 가시지 않습니다. "낡은 소금 창고들이 노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 수철아, 죽지 마라. 명령이다. - 네 나으리, 읍진에 무 싹이 올라오고 있으니…. 이제 주무실 시간입니다." 그나마 장군에게는 염화시중과도 같이 말없는 가운데 마음을 헤아려주는 부하가 있었지요. 또 400년이 지났지만 인간적 고뇌를 헤아려주는 김훈이라는 후손이 있고, 거기에 깊은 공감을 드러내는 독자들이 있어 다행이지요. 그러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늘 강인하고 당당한 모습만을 보여야 하고, 인간적인 대화나 하소연은 인터넷에 맡기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의 공허함과 외로움과 아픔은 누가 쓰다듬고 보듬어주려는지요. 그러나 세 번째, 이 책이 저에게 희망으로, 위안으로 남겨준 것은 절망도 때로는 힘이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장군은 극한 절망 가운데 늘 나아갈 길을 찾아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아갈 길은 절망과 싸우며 그 속에서 찾는 수밖에 없지만 길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 없었다." "물은 늘 거칠었고, 물은 노에 저항했다. 배는 그 저항의 힘으로만 나아갔다." 바로 이 말, "물은 늘 거칠었고, 물은 노에 저항했다. 배는 그 저항의 힘으로만 나아갔다." 이 말은, 세상살이가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고 위로 뛰어오르고 싶어하는, 욕심 많은 저에게 그 무엇보다 큰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칼의 노래="">를 읽고 건진 가장 멋진 말이지요.칼의>칼의>난중일기>칼의> |
| 세상은 온통 역설로 가득하다. 정의는 정의롭지 못하며, 정의롭지 못한 것이 곧 정의다. 2000년 가을에 언론인 김훈은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고 초야로 내려가 이 글을 썼다.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원고지에 성실하게 채워나간 이 글에 세상은 동인문학상이라는 큰 상을 안겼다. 이 책이 2001년 동인문학상의 수상작품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동인문학상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앞으로 나는 이상문학상을 믿듯 동인문학상도 믿기로 한다. 이 글을 읽은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은 이 글의 문체다. 김훈만의 아름다운 문체미학. 대학에서 학보사 주간을 했던 동생은 김훈이 시사저널의 편집장으로 칼럼을 써낼때부터 그를 좋아했다 한다. 그의 문체를 좋아했다 한다. 맞다. 그의 문장에는 맛이 있다. 멋이 있다. 그의 문장은 늘 이야기하듯 '지독한 단문'이다. 화려한 수식어를 모두다 배제하고 -김훈의 말에 의하면- "뼈다귀만으로" 쓴 글인데도 그 어떤 화려체 문장보다 화려하고 수식적이다. 이 역설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수식 없는 문장이 수식적이고 꾸밈 없는 문장이 화려한 이 역설은 김훈의 문장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설의 힘에서 나온다. 김훈의 문장은 거의 역설로 일관하고 있다. 매치 될 수 없는 두 가지를 매치 시키는 것으로 그는 역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역설이 또 재미있다. 우리의 눈으로는 매치 될 수 없는 것이라도 김훈의 눈으로는 완벽한 짝이다. 그러니까, 김훈은 역설이 되라고 쓴 글이 아닌데, 독자는 그 문장을 역설로 읽는다. 이런 역설이라니. 시대도 역설이고 인물도 역설이다. 간신이 충신을 고문하고 파직시키는 세상, 함대가 없는데 함장이 되는 세상, 적은 있으되 맞설 아군이 없는 장군, 이순신은 이러한 시대의 역설에 또한 역설로 당당히 맞서고, 우리의 김훈도 또한 역설로 세상에 맞선다. "권력은 무력하기 때문에 사악할 수 있다."는 역설을 통렬하게 터트리며. 그의 역설은 하나의 문장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 김훈의 표현에 의하면 "블랙홀"의 설치를 통해 두 개의 문장이 결합되면서 역설이 된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p. 128) 이 두 문장 사이의 블랙홀. 이 블랙홀로 두 개의 문장은 역설이 되고, 그래서 그 어떤 수사법을 쓴 글보다 화려해진다. 김훈은 소설의 대부분에서 거의 이런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의 특징은 김훈의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 2001)에 실려 있는 이순신에 대한 서술로 확인할 수 있는 바, 이순신의 서술법이었던 듯 하다. 「"저녁 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기로 베었다." 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김훈, 『자전거 여행』, 생각의 나무, 2001, p. 225 그러니까, 이순신에게는 그 문장과 문장사이의 블랙홀이 역설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에게는 '동등한 자격'의 사건일 뿐이니까. 단지, 그것을 동등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독자에게만 그것은 놀라운 역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역설은 참으로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칼의 노래는 역설을 통해 아름다워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만 블랙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도 워프는 계속된다. 1인칭 서술이라는 특성상 서술은 이순신 개인의 생각의 흐름에 따라 갈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라는 것이 사건과 사건 사이에 블랙홀을 만든다. 블랙홀 속으로 사라진 서술을 통한 긴장감, 사라진 생각을 통한 긴장감, 긴장, 긴장. 이 팽팽하고 칼날같은 긴장으로 소설은 내내 노래를 한다. 칼의 노래를. 깊디깊은 사유와 오래 갈고 닦은 고아한 문체들. 이 책은 고전이 될 것이다. |
| 『시신을 옮기면서 포로들은 울었다. 늙은 포로도 울었고, 젊은 포로도 울었다. 나는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 보았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 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나의 적은 전투 대형의 날개를 펼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 달려다는 적의 집단성이기에 앞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적의 개별성이었다. 그러나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의 울음과 개별성의 몸이 어째서 나의 칼로 베어 없애야 할 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적에게 물어보아도 적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어쩐일인지 전쟁영화를 보는 것이 언제나 힘들었었다. 영화의 주인공들로 이루어진 아군들과 동료들이 죽어나가서 슬퍼하는 그들의 모습과 그 슬픔으로 대상없던 적개심이 대상을 찾아 무형의 적이 실제의 적이 되고 신들린 듯 적을 죽여나가는 모습에서 어떤 공감은 있으나 뚜렷한 명분을 찾아낼수가 없어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과 적들의 관계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기에 그런 슬픔과 분노가 상대에게 퍼붓기에는 너무도 공허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군인들은 뭔가 특별한 감정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속의 짧은 글을 소개하는 곳에서 바로 저 대목의 글에 이끌려 이 책을 샀었다. 평생을... 앞으로도 뒤로도 갈수 없고, 숨을수도 없는 스스로 개별적인 삶을 살아 갈수 없었던 이순신 장군의... 그럼에도 적들의 개별성을 느낄때마다 섬뜩해하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개별성을 떨쳐버리려 눈을 지그시 감는... 그러기 위해서는 늘 스스로의 죽음을.... 다른곳에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 전쟁터에서, 그가 늘 수행해오던 바로 이 전투에서의 전사로서... 개별적이나 개별적일수 없었던 적들과 동료들처럼, 그렇게 죽기를 바랄 수밖에... 그래야 그들의 개별성앞에 무너지지 않을수 있으니까... 『 면의 칼솜씨는 크고도 섬세했다. 면은 상대의 공세를 극한에까지 유도해놓고, 그 극한이 주저앉는 순간의 허를 치고 들어가서 살했다. 적의 칼이 오른편 위에서 내려올 때 면의 칼은 적의 칼을 받아내기 보다는 적의 왼편 허를 향해 나아갔다. 발이 늘 먼저 나아가 칼의 자리를 예비하고 있었다. 칼을 낮추고 있을 때도, 면의 칼은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공세의 기운을 광배처럼 거느렸다. 면의 칼은 수세 안에 공세를 포함하고 있었고, 수세와 공세 사이에 간격이 없었다. 둥글게 말아나가는 부드러움 안에 찌르고 달려드는 격세가 살아 있었고 찌르고 나면 곧 둥글어졌다. 아름다운 솜씨였다.』 늘 번역본만을 읽어서 저런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껴보지 못하다가 자국의 말로써 한껏 섬세하고 자유자재로 유연하게 표현되는 글을 읽으니 특히 김훈의 글은 글귀 하나하나를 모두 공들여 세공한듯한 문장들로 연이어져 숨쉴틈도 없어 숨이 턱까지 차오른 듯 했었다. 그래서인지 중단편의 글을 아주 오래도록 읽었다. 다시 떼어놓고 읽어보니 정말 아름다운 묘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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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나는 논픽션에 기반을 둔 소설과 소설가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이 시각은 역사소설을 쓰는 소설가는 창작력이 고갈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라던 장정일의 말에 더욱 촉발된 바 큰데, 박종화도, 이문열도, 황석영도, 심지어는 장정일 자신도 창작력의 빈곤을 그렇게 드러낸 것으로 보였다. 어느정도 독자에게 낯익은 소재에 기대면서까지 작품을 써야 할 정도로 창작력이나 필력이 떨어진 것으로 보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칼의 노래=""> 역시도 내게 첫 만남에서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많이들 알고 있는 충무공의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의심스러웠다. 충분히도.
충무공의 해전, 즉 임진왜란 기간이 시간적 배경이 되는 만큼, 그리고 그 놀라울만한 전과들이 소설에서 빠질 수 없기에, 충무공의 행적, 전투중의 행동, 결과와 같은 서사적이며 기술적인 내용은 역사에 기반을 둔 여느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충무공에 관해서 현재 얻을 수 있는 사료들이 한정되어 있는 이상, 그리고 충무공과 그의 이야기가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상, 약간은 상투적이고 문체마저도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정말 깊숙히 감정이입했다고 충분히 느낄만한 심리묘사는 서사에 비해 소설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만, 그 순정함과 진솔함과 사실보다 더 사실같은 사실성은 진부할 수 있는 역사소설을 하나의 작품에 올려놓는다. 더욱이, 누구나 갖는 죽음 앞에서의 공포와 국가의 존망을 짊어졌다는 사명감 사이의 갈등, 수하들을 엄히 다스리는 권력을 가진 사령관으로서의 위치와, 정쟁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임금의 명과, 명나라라는 권위앞에서 그야말로 무력한 수하로서의 지위 사이의 갈등, 그리고 검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의인화된 검과 이를 통제해야 하는 검사의 내적 갈등을 저자는 충무공의 삶에서 꺼내고 창작하여 텍스트로 표면화함으로써 충무공의 삶이 소설적 인물로서 와 닿을 수 있게 만들어 낸다. 때문에, '칼에는 존망의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던 작가의 소설속 귀절 마냥, 작가의 펜이 지나간 자리에는 진부함이라 붙일 수 있는 흠결의 군더더기는 눈에 크게 띄지 않는다.
역사소설은 분명 <상투성>의 노린내를 가진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다. 다만, 노린내를 숙련된 요리사가 향신료와 조리법으로 숨기고 없애듯, 상투성의 노린내를 없애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손 끝에 달려있다. <칼의 노래="">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자유롭지는 않기에 노린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작가가 창조해 낸 얼마간의 소설적 장치들과 뛰어난 필력으로 노린내를 최대한 숨기고 없앤, 감칠맛이 있는 준수한 요리라 할 만하다. [인상깊은구절] 하루종일 물의 칼들이 일어섰다. 저녁 바다는 거칠었다. 인광의 칼날들이 어둠속에서 곤두서고 쓰러졌다. 캄캄한 바다에서 칼의 떼들이 부딪혔다. 전쟁은 천천히 죽어가는 말기 암과 같았다. 적이 죽어가는 것인지, 내가 죽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어로 개념화되는 어떠한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은 멀어서 보이지 않고, 희망없는 세상에서 죽음또한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있는 나에게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했다.칼의>상투성>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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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읽어야 한다고 해서였는지...내가 구입한 책은 이미 품절된지도 오래..그 사이 출판사는 바뀌였고, 개정판으로 계속 새옷을 입고 있는 <칼의 노래>를 마침내 읽었다,영화 <한산>을 본 덕분이다. 물론 얼마 전부터 계속 <난중일기>를 읽고 싶은 열망도 한몫했을게다.
"여름에 담근 된장은 2백 독이 넘었다.된장은 겨울을 넘겨야 익게 될 모양이었다. 나는 된장이 익는 봄을 기약할 수 없었다. 발진하기 전날 밤,백성들을 영내로 불러들여 된장을 나누어주었다."/306쪽
이순신장군이 이룬 업적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게다. 물론 어느 정도의 살이 붙여지거나, 혹은 잘못 와전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해도..명확하게 드러난 기록은 부정할 수 없을게다.그런데 나는 그러한 이유가,오히려 이순신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지 못했다.(너무 넘사벽이란 느낌...) 영웅이란 단어가 주느 함정에 빠질질 모른다는 두려움 등등.... 그런데 영화 '한산'을 보면서 한 나라의 장수가 감당해야 할 고뇌를 보게 되었다. 영화 연출의 힘일수도 있겠고,그러한 시선으로 보고 싶은 관객의 마음이 작용한 탓일수도 있겠지민 말이다.처음에는 소설의 제목이 '칼의 노래'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칼이 등장할 때마다..조금 과하게 언급되는 단어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장수로서 감당해야 할 무게가 너무 무겁게 다가왔다. 이런 생각이 들게 되면서부터 인간 이순신을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소설의 결말 즈음..된장 익는 모습을 자신이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소한 일상에서 나는 영화에서 처럼 살짝 눈물이.... 치열한 싸움과, 승전보, 혹은 서로의 암투..보다 된장이야기, 볏짚이 뿜어내는 가을 향기에 대한 묘사등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글로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리더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라, 선조의 무능과 이기심에 화가 치밀어야 했고, 헛소문을 퍼뜨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인간의 모습에는 참담함도 느껴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이순신의 시선으로 바라본 역사의 현장(?)이라 더더욱 선조에 대한 감정이 거칠게 드러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서 <난중일기> 보다는 역시 늘 해바라기 중인 <징비록>을 먼저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무튼 영화 '한산'을 보기 전까지 인간 이순신..은 바다위에서 어떤 마음이었을까..에 대한 생각 조차 해 보지 못했음을 알았다. 기록이 토대로 했다 해도 작가의 상상이 더해진..이순신의 목소리였지만...지극히 상상해 볼 수 있는 장군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건, 작가의 힘이 아니였을까 생각된다. (냄새와 칼에 대한 언급이 조금 과하게 들어간 느낌은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그래서 '난중일기'를 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ps 모두가 극찬하는 김훈작가의 글이 나는 이상하게 잘 읽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남한산성>을 읽다 포기했고.... <칼의 노래>를 한참전에 구입하고..이제서야 읽었으니...인간 이순신의 마음을, 목소리를 상상해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여전히 작가의 문체는 나와 잘 맞지 않는 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 여자사람에 대한 묘사가 몹시 불편했다 21세기와 다르니까..그럴수 있음을 감안해도...이미 죽은 여인의 몸을 벗기고...나신에 대한 묘사(102쪽) 를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불편하다. 죽은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처연함을 묘사하기 위해 굳이 옷을 찢어..나신을 드러낸다는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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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무언가를 잘 저며 최대한의 단면을 보여주면서 출혈을 또한 자제한 느낌..... 내 보던 앞에서는 몇방울 흐르던 피가 돌아가보면 철철 흐르고 있는 후면을 가졌을 것 같은 책. 한장 한장의 책장이 칼로 하나씩 저며가던 그 무언가를 보는 ..... 그대는 칼인가, 저며진 단면도인가.... 그대는 저자인가 충무공인가...아님, 그저 칼의 노래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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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라.... 처음 이 책을 내가 접하게 된 것은 모 방송국의 청소년퀴즈프로그램에서였다. 2001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으로 이 소설의 부분을 발췌해서 읽어주며 책 제목을 맞추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저 책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최근에야 읽게 되었다.
사실 내가 김훈이란 작가를 처음 들어본 것도 칼의 노래였고, 얼마 전 남한산성이라는 신작 소설을 사면서 김훈의 작품들을 하나씩 읽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한산성을 몇 페이지 넘기다 말고 새로 든 책이 바로 칼의 노래다. 칼의 노래라... 부제가 이순신-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인데, 처음 제목을 봤을 때부터 내가 아는 것이라곤 이순신장군은 거북선을 만들어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는 것 밖에 없었기에, 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그래서 맨 처음 든 생각이 이순신과 같은 무인에게 있어서 칼의 자신의 분신과도 같지 않을까 였다. 그리고나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칼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은 아직도 칼이라는 것에 대해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진 못하겠다. 딱 꼭 집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함축적인 의미가 칼이라는 것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칼은 이순신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고, 자신이 전장에서 겪었던 고통과 고뇌의 산물이고, 자신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적에 대한 반감이기도 하고, 백성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엄청난 치욕으로 기억 될 것이다. 당쟁의 결과로 일본의 침략을 미리 대항하지 못한 것, 일본의 침략을 받고서도 당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 백성을 생각하기 보다는 위정자들은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했다는 것, 임진왜란은 고통의 역사이자, 치욕의 역사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담담하게 임진왜란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위정자들 속에서도 백성을 먼저 생각했던 이순신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여기저기서 일어났던 의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순신이란 인물 자체에 대해서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적도, 임진왜란이란 것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본 적 없다. 이 책은 분명 사실이 아닌,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허구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서 정말 이순신이 전쟁터에서 느꼈을 사무치는 한과, 적에 대한 적대감,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백성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명장 이순신으로 기억되기 보다는 인간적 고뇌와 고독에 시달리는 이순신의 면모가 더 부각 되는 작품임이 틀림없다.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어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 -p.115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가 느껴지는 구절이다. 칼이라는 것이 유형의 물건이 아니라, 무형의 물건으로 그를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칼이라는 것이, 임금이 될 수도 있고, 이순신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사지(死地) 선택하고,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죽음 알리지 말라고 하는 이순신. 순고한 희생정신과 적과 싸워 이겨 나라를 지키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 그리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적과 끊임없이 싸우는 그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끝없는 고독과 인간적 고뇌 속에서 죽어간 이순신을 아마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은 내게 이순신이란 역사적 인물의 재조명과 함께 인간적 고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었다. 김훈이라는 작가의 문체 역시 내게는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담담하면서 가슴 찡하게 와 닿는 그런 느낌.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절묘한 조화와 그가 서술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고찰과 섬세한 내면적 심리묘사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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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칼의 노래』라는, 이상한 기운을 뿜는 제목 밑에는..
'이순신 ─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한없는 단순성'
'순결한 칼'
아.. 그 작은 글씨의 부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부제'는 고사하고, 책의 제목인 '칼의 노래'조차 이해할 수가 없다.
작품 속 이순신은 마음 깊은 곳에서 '칭칭'거리는 칼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조금씩 자신을 조이며 다가오는 적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소리일 수도 있고, '너와 나' 개인으로 보면 원수가 될 수 없으나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적이 되어 죽여야만 하는 참담한 현실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그 '칼의 노래'가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소리를 들으며 그가 매번 다짐하는 것은 자신이 죽어야 할 때에, 죽어야 할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죽겠다는 것이다.
전장에 나가 적의 손에 죽는 것이 그에게는 '자연사'이다.
그렇게.... 전쟁에 '길들여진' 그는,
전쟁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저세상으로 간 아들을 위해 목청껏 울 수 없는 못난 아비가 되어버렸고,
한 나라의 '종'의 신분으로 제 가정을 돌보지 못한, 못난 남편이 되어 버렸고,
홀어머니 가시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한, 먼곳에서 그 죽음을 전해듣고 입을 다문 못난 아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순신..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임진년에 수많은 왜구들을 물리친 나라의 영웅?
적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도 부하들의 사기를 염려하여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라고 말한 위대한 장수?
하루에도 몇번이고 마주칠 수 있는.. 100원짜리 동전 안의 위인?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만난 '이순신'은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의 모습을 넘어서서,
끝이 없는 정쟁(政爭)에 휘둘리는 무인으로서,
강국(명나라)의 압력 앞에 선 약소국의 백성으로서,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오는 칼의 소리 가운데 고민하고 번뇌하던...
..... 그런 사람이었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이순신의 모습은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 그는 언제나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땅히 죽어야 할 때에, 죽어야 할 곳에서 생을 마감하겠노라고..
이렇게 '죽음'도 초월('초월'이란 표현을 쓰기가 사뭇 민망하다)한 채,
날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칼의 노래를 듣던 그이기에 '한없이 단순하다'는 것일까?
적에게 내리꽂던 칼도, 적이 그를 향해 겨누던 칼도.. 서로의 '자연스런' 죽음에 합당한 것이기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운명이기에, '순결하다'는 것일까?
책을 읽으며 그의 숨결을 함께 느끼는 시간 되기를.
[인상깊은구절]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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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5일>
내 어릴적에 세계의 위인이라 할 만한 사람들을 한데 모은 '위인전집'이 책장 한 칸을 다 차지하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빤득빤득한 질감의 종이에 컬러풀한 삽화들이 페이지마다 그려진 위인집이었다. 그 책들 중 한 권에서 만난 이순신 장군. 거북선 배경과 함께 갑옷을 입고 칼을 높이 쳐든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어린 마음에도 존경스러울 만큼 멋있고 용맹스러운 모습이셨다. 그분의 동상이 초등학교 마다 세워져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랑스러웠던 장군님. 그분은 그렇게 우리가 어릴때부터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은 한국의 진정한 무인이며 장군이며 영웅이셨다.
이 책은 이순신이 53세 때 조정으로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국문을 당한 뒤 풀려나와 백의종군하는 시점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중간중간 회상으로 이전 이야기들을 풀어간다.
그는 처음에는 해군이 아니었다. 무과에 급제한 32세 때 함경도에 배치를 받아 여진족과 대치하며 국경을 지켰다. 4년 동안 산을 누비던 그에게 36세 때 처음으로 해상에 배치가 되었고 첫 해상전투는 자신도 수군들도 바다에서는 처음 치르는 전투였다고 한다. 하지만 뛰어난 지략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49세때 그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이는 전라, 경상, 충청의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수군의 최고 사령관이다. 그 후 2년 간 전쟁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고 조정 간신들의 터무니없는 발고로 그는 한산 통제영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간다. 2월 26일에 한산도를 떠나 3월 4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4월 1일에 출옥한 그는 출옥하자마자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7월 23일 임금은 그를 다시 복직시켜 바다를 지켜달라 부탁을 하고 그때로부터 전사하기 전까지 2년 동안 그는 고문과 총상의 후유증, 어머니의 죽음, 세째 아들 이면의 죽음 등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군사들을 잘 이끌며 장군으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이행해 나갔다. 그의 통솔력과 판단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는 또한 기록의 사나이었다. 함경도에서 근무할 때는 "함경도일기"라는 진중 일기를 썼고 말년인 임진왜란 때는 "난중일기"를 남겼다.
하지만 그도 장군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금에 의해서 일까봐 두려웠다. 그때의 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하면서도 전쟁중이었으므로 강한 신하가 필요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이순신은 전쟁이 끝나면 임금이 자신에게 칼을 내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고 싶었다. 적탄에 쓰러져 죽는 죽음이 자연사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자연사하고 싶었다. 남해 바다를 책임져 달라는 임금도,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도 그에게는 적이었다. 그는 외로웠고 무거웠고 두려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음으로써 조선에 주둔해 있던 일본 육군과 해군들은 철수를 서둘렀다. 명나라 육군과 해군이 경상도와 남해까지 내려와서 일본군을 압박하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명나라의 해군과 육군에 수급 일 천여 통을 바치고 자신의 퇴로를 열어줄 것을 부탁한다. 더 좋은 무기와 많은 병력을 소유하고 있던 명나라는 관망을 자세로 돌아서고 이순신은 홀로 자신의 군사들과 전선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의 적선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신다.
이 책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총 여섯개로 되어있는 지은이의 일러두기가 적혀 있었다. 그 첫째는 이렇다.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무심히 읽었다가 문득 갸우뚱했다. 소설을 소설로 읽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라고 해서 달리 읽겠는가... 라는게 내 의문이었다.
허나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처음부터 일인칭으로 시작되는 이 책에 푹 빠지다 보니 이순신 장군이 직접 자신의 일대기를 나직히 들려주는 것 같은 착각에 자꾸만 빠졌다. 문장은 그야말로 군더더기 없이 미끈했고 깔끔했고 중언부언하지 않았다.
오늘에 와서 이 책을 접하고 보니 어린이들을 위한 위인전에는 이순신을 그저 영웅에만 초점을 맞춘것이 아닌가 아쉬움이 든다. 뭐,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다 보니 그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우리나라 온 국민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 그들의 마음속에 거북선과 더불어 그저 영웅으로만, 초등학교에 세워진 동상으로만 남아 있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그분의 고뇌와 아픔과 애국.애민 정신에 대해 다시한번 가슴으로 느껴지는 기회가 되기를, 정말 진정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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