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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큰 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만우절인 4월 1일이라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거짓말이라고 알려진 사고였습니다. 학교 옆 작은 계곡에서 놀고 있었는데, 비탈 위에 있던 친구가 놓친 작은 돌덩이가 굴러 내려와 뒤통수를 맞춘 것입니다. 옆에서 놀던 친구가 놀라서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지만, 사태를 파악하고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나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돌이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의 테에 부딪힌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머리뼈에 구멍이 생겼기 때문에 출혈이 머리뼈 밖으로 흘러나올 수 있어서 뇌 안에 고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만 해도 신경외과를 전공하시는 의사선생님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니 지방 소도시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행수가 겹치는 바람에 이틀 밤 정도를 입원하여 경과를 관찰하다가 퇴원하여 학교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야트막한 산비탈을 따라 교실이 늘어서 있던 학교 주변에는 작은 계곡이 널려있어 천혜의 놀이터였습니다. 그 무렵 학교에서 존 웨인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영화 <알라모>를 단체로 관람했던 우리들은 영화에서처럼 요새를 구축하는 놀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또래 아이들은 남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비밀스러운 장소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스라한 기억 속에 남아 있어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가 있는가 하면 기억해야 할 곳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져가고 있는 장소도 있습니다. 앨러스테어 보네트의 <장소의 재발견>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숨겨진 비밀을 다루고 있습니다. 뉴캐슬 대학의 사회지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서양 세계의 사상, 향수와 기억의 지리학과 정치 문제, 반인종주의와 ‘백인성’의 국제역사, 유럽 아방가르드의 지리학적 이론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런던 근처에 있는 작고 오래된 마을 에핑(Epping)에서 태어난 저자는 어린 시절의 저처럼 어른들의 눈을 피해 언제라도 숨을 수 있는 비밀 장소 만들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과 J. G. 발라드의 <물에 잠긴 세계>를 즐겨 읽었던 그는 장소야 말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런던이 비대해지면서 자신의 고향을 삼켜버린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리학의 다양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묘하게 끌리는 제목도 그렇지만, 이번에 여행한 터키에 있는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를 목차에서 발견하고는 바로 주문해서 터키로 가는 여행짐에 집어넣었습니다. 기왕에 이야기를 꺼냈으니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방문한 곳은 터키 카파도키아 지방의 데린쿠유(Derinkuyu)에 있는 지하도시입니다. 터키어로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데린쿠유의 지하도시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이드는 닭을 치던 주민이 자꾸만 사라지는 닭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이 지하도시의 규모는 3만 명이 생활하던 공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지상을 점령한 적을 피해 지하에서 양까지 치면서 생활하고, 때로는 양을 지상으로 방목하기까지 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석연치 않았던 대목들은 이 책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는 8개의 층에 걸쳐 조성될 정도로 방대한 규모입니다. 위쪽으로 주거공간이 있고, 마구간과 식품창고들까지 있고 맨 아래층에는 지하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하교회의 규모는 작은 주거공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큰 편인데도 20여명이 들어서면 꽉 들어찰 정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상주하였다는 도시규모에 비하면 교회의 규모는 턱없이 작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는 적이 침략해왔을 때 임시로 대피하던 시설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8세기 경 카파도키아의 데린쿠유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변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이교도들의 침략이 잦았기 때문에 이곳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피난처로 삼기 위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설명합니다. 카파도키아 지역은 응회암지대로 견고하면서도 깍아내기가 수월해서 일찍부터 돌집을 만들어 거주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원 1세기전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500년 전에 이곳에 살던 프리지아(Phrysia)인들은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자연 상태 그대로의 언덕을 골라서, 자기한데 편리한 만큼 뚫고 파냈다.(94쪽)’라고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프리지아인들보다도 1,000년이나 앞선 히타이트(Hittite)인들로부터 시작된 주거형태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데린쿠유의 지하도시가 방어용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특징적 구조를 보면, 출입구가 좁고 각층은 안에서만 작동이 가능한 커다란 돌문으로 봉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0여 킬로나 떨어져 있는 또 다른 대규모의 지하도시 카이마클리(Kaymakli)로 연결되는 인공터널이 예비되어 있어 위급한 상황에서 지하도시를 탈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권위자들은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는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바깥이 위험해졌을 때만 사용하는 임시피난처로 예비해둔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자는 세계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47개의 특별한 장소들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곳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곳이기도 하며, 또는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인이 없는 장소이거나 고립된 곳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주 먼 곳일 수도 있고,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장소들입니다만, 한국에 있는 장소도 한 곳 등장합니다. 바로 죽은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는 기정동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조차 생소한 기정동(機井洞)은 1953년 남한과 북한이 맺은 평화협정의 산물입니다. 남북한 사이에 폭 4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를 두면서 그 안에 각각 한 개씩의 정착촌을 두기로 한 것에 따라 남한에서는 대성동을, 북한에서는 기정동을 조성한 것입니다. 기정동이 저자의 관심을 끈 이유는 첫머리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기정동(機井洞)은 창문에 유리조차 끼우지 않은 고층건물 안에 조명등만 켜놓은 가짜 장소이다. 이곳에는 주민도 없고, 방문객도 들어갈 수 없다. (…) 북한의 기정동, 일명 ‘평화마을’은 남한의 잠재적 망명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의 발전과 현대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지어졌다.(180쪽)” 남한의 평화마을 대성동이 벼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것과는 대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은 도시’로 분류된 것 같습니다.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사업에 관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의 경관>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건설되어 노후화된 고가도로가 도심의 경관을 해치면서도 교통의 흐름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대부분 철거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서울역 고가차도를 공원화하여 남겨두겠다는 서울시장의 발상은 뉴욕의 하이라인파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고가차도에 나무를 심은 커다란 화분을 늘어세우고 고가도로 하단에는 줄기나무를 늘어뜨리는 방식의 설계가 1등으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흉물스러운 고가차도를 도심의 스카이라인과 조화를 시키기 위해서는 웬만큼 단장하지 않고서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만큼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저자는 <시간의 경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경관>에 등장하는 장소는 역시 뉴욕의 라과디아 플레이스와 웨스트 휴스턴 스트리트가 만나는 길모퉁이에 있는 1,000제곱미터의 공간입니다. 울타리를 쳐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한 이 공간은 일종의 생태공원입니다. 1978년 미술가 앨런 손피스트가 17세기 이전에 뉴욕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붉은 삼나무, 흑벚나무, 풍년화, 미국담쟁이덩굴, 미국자리공, 아스클레피아스 같은 토착종 식물을 심어 조성하였습니다. 이른바 상실된 자연에 헌정된 <시간의 공간>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이 도시가 한때는 숲이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강과 샘과 자연적 노두(露頭) 같은 자연현상의 삶과 죽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반성의 장소로 활용하자는 주장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시간의 공간>은 나팔꽃이나 방가지똥 같은 외래종 잡초들의 침입으로 오염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곳은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개방된 실험실’로 여러 종의 식물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고 손피스트는 해명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작가의 주장에 대하여 저자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시간의 공간>은 공허한 기념물일 뿐이다. 이 장소가 이 도시의 다른 녹색 공간들과 차별화되는 요소는, 바로 이곳이 과거를 엄밀하게 환기시킨다는 점이다.(60쪽)”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저자는 여러 도시에서 자주 조성되는 환경 미술, 또는 대지 미술의 상당수가 넓은 자연경관 안에다가 방향상실한 듯한 인간의 장소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하기도 합니다.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서울역 고가차도 공원화사업도 큰 고민 없는 전시행정의 일환이 아닐까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자동차 전용도로가 공원화되면서 사람의 통행이 자유롭게 되면 마포대교의 대안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며, 도로공원에 늘어놓은 시설들이 공원 아래로 떨어지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내던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 공원 아래로 지나는 사람이나 차량이 크게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997년 요트를 타고 북태평양을 항해하던 찰스 무어가 발견한 북태평양의 거대한 쓰레기 구역(GPGP, Great Pacific Garbage Patch)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경고합니다. 주로 플라스틱과 어망이 해류를 따라 흐르다 모여들어 만들어낸 GPGP는 그 규모가 한반도면적(22만㎢)의 7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병이 강물에 흘러들고, 강물을 따라 바다로 나간 플라스틱 병이 해류를 타고 흘러가다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이 이곳이니 쓰레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쓰레기 섬이 결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가 인간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 가까이 있는 도심하천 가에는 오래 전에 들어온 너구리 한 쌍이 퍼뜨린 새끼들이 이제는 영역을 다툴 정도로 개체 수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처음 들어온 너구리들이 사람들 눈에 거의 띄지 않게 숨어 다니던 것과는 달리 요즘 너구리들은 대낮에 산책길을 어슬렁거리기도 합니다. 생태학자들은 자연과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좁혀진 것을 반기는 것 같습니다만, 수의학자들은 이들 야생동물을 통하여 광견병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살고 있는 영국의 뉴캐슬은 물론 호주의 멜버른, 노르웨이의 오슬로,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캐나다의 토론토, 가까운 일본의 삿포로 같은 대도시에서는 작은 여우들이 도심에 출몰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토종 여유가 멸종단계에 있기 때문에 도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멧돼지가 도심이 출몰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멀지 않은 앞날에 우리나라의 도심에서 여우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토포필리아(Topophilia), 즉 ‘장소에 대한 사랑’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지도에서만 발견되거나 심지어는 어떤 지도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장소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통하여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심리적 욕망을 채우고, 장소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나가며, 우리를 자연으로 연결시켜 나가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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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고 보고 듣는 장소는 엄청나게 많다. 지구 위에는 경위도 좌표를 통해 수많은 장소를 확인할 수 있고, 각 장소에는 나와 관련있거나 또는 무관하게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장소의 의미(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를 생각했을 때 크게 무리가 있지 않다. '장소'와 '위치'가 일상적으로는 크게 구분되지 않고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소(場所, place)라는 단어는 지리학에서 정의할때는 위치와 구분되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장소는 지구상에서의 물리적 공간으로서 어떠한 '위치'에서 사람이 의미 및 감정을 부여하는 곳을 말한다. 보통 지리학에서 다루는 것들로 여겨지는 산, 강, 바다, 도시 등 장소의 명칭에 굳이 개인적인 의미, 감정이 부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리 하면 떠올리는 일반적 이미지가 산, 강, 바다, 도시 등의 우리와 상관없는 지명을 외우는 분야이니... 하지만 이러한 무미건조한 것만 다루는 게 지리학은 아니다. 무미건조한 위치일지라도 그곳에서 태어났거나 살아가는 인간이 그곳과 유의미한 관계를 맺으면, 그곳은 그냥 위치가 아니라 '장소'가 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애착을 지니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소 개념 및 과정에 주목하면 지리학의 시선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이 책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살던 집, 동네의 여러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라온, 그리고 지리학에서 장소의 개념과 의미에 관심을 가진 지리학자가 쓴 책이다. 앞서 언급한 장소 개념은 소위 '인본주의 지리학'이라는 전통과 관련이 있다. 저자도 이를 계승하여 장소를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곳으로 이해하고,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과 집단이 의미를 부여한 장소들을 찾아간다. 모든 장소를 다 소개하리란 불가능하고, 저자는 책에서 47개의 장소를 소개한다. 얼핏 보면 우리가 들어보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고, 무작위로 나열한 지명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의 시선을 따라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찾아 볼 '장소'는 지구상에 여전히 많다. 저자는 각 장소의 경위도 좌표를 제시하면서 물리적 위치를 제시하고, 이어서 장소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놀랍고 재밌기도 한 장소들, 슬프고 이상하기도 한 장소들이 참 많이 소개되고, 이를 따라가다 보면 장소에 대한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관심과 애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장소들 중에는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미지의 장소에 대한 관심, 지리적 상상력을 일깨워주는 사례가 많다. 저자는 먼저 신화로 존재하였지만 결국 없는 섬으로 밝혀진 오스트레일리아 근해의 '샌디 섬(p.21~)'을 소개하면서, 탐험시대에 사람들의 지리적 상상력과 탐험의 욕구를 불러오던 샌디 섬과 같은 장소가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아서 아쉬워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로 더이상 장소가 의미가 없는게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해 우리의 지리적 상상력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새롭게 탐험할 장소는 없지만 우리가 상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장소 탐험을 할 곳은 무궁무진한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현대성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뭔가 상실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구글 어스에서 원래 샌디 섬이 있었던 자리를 차지한 터무니없고 환상적인 사진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샌디 섬은 지도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상상력을 위한 반란 기지가 된 셈이다. 이곳이야말로 얼떨결에 갑자기 나타남으로써 전지(omni-knowledge)의 방대한 기술로부터 순진하면서도 건방지게 벗어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p.27) 이와 관련하여 '미궁(p.75~)', '교통섬(p.153~)', '자투리 공간(p.244~)' 등 현대 도시인들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장소의 의미를 인식하고 되새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운 땅을 찾는게 아니라, 기존의 도시공간에서 하수도관, 터널 등 지하공간을 탐험한다던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사이의 좁은 공간에 관심을 가지고 그곳의 의미를 재평가한다던지, 뉴욕의 도시계획 과정에서 쓸데없는 자투리 땅을 사모으면서 땅을 열망하고 애착을 형성한다. 이외에도 여러 사례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지리적 상상력, 장소 재발견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일상적 장소도 세심하게 관찰하면 의미를 가지는 장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내 일상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도시 탐험의 핵심이란, 외관상 평범해 보이는 도시에서 의외로 비범한 것을 발견하는 짜릿함이기 때문이다.(...) 도시 탐험가들의 한 가지 놀라운 면모는, 이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장소들을 이들이 발견하고 또 사랑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종종 허름한 옷차림의 무법자를 자처하지만, 이들이 발견한 장소와 맺는 관계는 의외로 진실한 관심을 보여주는 관계다. 이들은 자기가 발견한 장소에 대해 조사하고 기록하며, 세부 사항에 주목하는 동시에 (비록 즉흥적이기는 해도) 깊은 존경심을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펑크족 콜럼버스라기보다는 도시의 알렉산더 폰 훔볼트라고 할 수 있다.(p.81) ![]() 이런 장소는 세상 어디에나 있으며, 모든 사람의 지리적 일상의 일부를 구성한다. 이런 장소는 손쉽게 무시당하지만, 여러분이 일단 그중 특별한 한 가지를 주목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은근히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마치 다른 모든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경관을,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비밀스럽고 친밀한 왕국을 여러분만 보는 것과 같다.(p.154) 이런 자투리 공간 대부분은 골목이었고,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출몰하는 이런 곳은 대개 은밀하고도 우울한 모습이다. 마타클라크가 이런 곳에 끌린 까닭은, 무엇보다도 접근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보이지도 않고 당연히 점유되지도 않은" 공간을 소유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좋아한다고 설명했다.(p.245) 이러한 장소에 대한 지리적 상상력은 때로는 엉뚱한 '장소 만들기'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기도 한다. 바다 가운데 인공섬에 자신만의 국가를 선포하고 살아가는 시랜드(p.313~)의 사례, 그리고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극단적인 자기표현이 가능한 축제의 공간 노웨어(p.389~)의 사례가 인상깊었다. 저자는 황당하고 이상한 장소 사례일지라도 이를 만든 행위자의 장소 인식을 이해하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장소에 대한 의미와 비교해보는 과정을 제안한다. 나만의 장소를 찾는걸 넘어서 바다 한가운데 나만의 나라를 만드는 것, 멋지지 않은가? 그리고 북극권이나 사막 한가운데서 어떠한 의무, 규칙도 없이 욕망과 젊음을 분출하고, 기간이 끝나면 깨끗이 철거해버리는... 재미있지 않은가? 이렇게 우리가 상상하기에 따라서 장소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해 주고, 내가 현재 있는 장소는 나에게 의미로운지, 나만의 장소를 찾거나 만들어본 적이 있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준다. ![]()
하지만 시랜드가 발휘하는 매력의 뿌리를 찾아 계속 파고들다 보면, 이 모든 모험에서 어렴풋이 암시하고 있는 한 가지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곳은 바로 독립된 주권을 확보한, 그리고 자기 혼자만의 장소를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의 영역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환상일지 몰라도, 동시에 중요하면서도 인간미가 물씬 느껴지는 환상이기도 하다.(p.322) 노웨어의 창설은 사실 상상력과 단조로움의 매력적인 혼합이었다. 예를 들어 사막의 작은 부분을 즐거운 공동체로 만들 방법을 고안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생각과 노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장소 만들기에서는 삶의 일상적인 실용성은 물론이고, 큰 그림에 대해서도 관심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한 점은 바로 이런 단조로운 세부 사항이야말로 우리의 상상력을 휘젓고 자극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분류함으로써 새로운 장소들이 우리 손닿는 범위 안에 있음을, 즉 우리가 텅 빈 경관에다가 새로운 세계를 불러낼 수 있음을 입증한다.(p.391~392) 그리고 인간이 지구의 표면의 일부를 점유하고 살아간다는 본질적인 측면, 자연과 인간이 상호작용한다는 지리학의 연구 대상을 다시한번 상기하도록 하는 장소 이야기도 많았다. 현대 도시문명 속에서 우리는 오롯이 인간이 창조한 문명공간이란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도시 속 사회경제적 논리에 치이고 소외되기도 한다. 하지만 도시 속 자연 및 생태적 요소를 우연히 발견하거나(시간의 경관 p.58~), (여우 굴 p.99~), 인간의 흔적이 지나간 뒤 자연이 되살아나는 모습(아르니 p.37~), (프리피야티 p.196~) 자연의 섭리인 삶과 죽음이 한 장소에서 공존하는 모습(마닐라의 북공동묘지 p.106~) 을 문득 발견할 때가 있다. 그제서야 비로소 지구 표면을 밟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다시한번 상기하고, 자연과 인간, 생태적 삶이 야생은 물론 도시의 장소에서도 실천될 수 있다는 점을 문득 깨닿게 해 준다. '장소에 애착을 가지는 토포필리아, 생태와 자연을 사랑하는 바이오필리아가 서로를 지탱해준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 * 뉴욕 <시간의 경관>(빨간 동그라미 안에 time landscape), 구글 스트릿뷰 캡쳐 도시란 자연을 도려내는 장소인 동시에, 뒤늦게야 자연을 애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일단 죽여버렸다가 도로 살려내는 셈이지만, 기껏해야 울타리 두른 공간 안에 헌화하며 안치하는 것 뿐이다. (...) 설령 <시간의 경관>이 과거의 자연과 과거의 미술 작품 모두에 대한 기념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하더라도, 아직 남아있는 자연의 잔재들은 제아무리 신중하게 유지 관리해도 그 위력이 너무 미약한 까닭에, 과거를 풍성하고 의미 있게 환기시키지는 못한다.(p.61) ![]() * 영국에서는 도시에서 여우을 꽤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길고양이, 그리고 여러 도시에서 길고양이와 사람들의 공존 및 '캣맘' 갈등 상황이 떠오른다. 출처 : https://www.bristolpost.co.uk/news/bristol-news/bristol-third-highest-uk-urban-26337 즉 도시를 여우와 공유하는 일이 때로는 어렵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 여우를 풀어주는 일은 또한 더 거창한 발상을 인정하는 셈이다. 즉 '토포필리아'와 '바이오필리아'는 서로를 지탱해준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도시가 여러 생물종이 어울려 사는 환경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경우, 우리의 장소 감각은 더욱 풍부해지고, 활기 넘치고, 아이러니하게도 인간화함으로써, 결국 우리 모두에게도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다.(p.105) 저자는 장소와 인간의 진정한 의미를 중시하고, 그러한 장소가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그러한 저자의 장소 철학과 관련하여, 지구상에는 버려진 탄광도시와 같이 무의미하게 권력에 의해 창조되었다가 필요없어지면 버려진 장소도 있다(위테눔 p.165~), (캉바시 p.173~). (기정동 p.180~). 또 팔레스타인 분쟁,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분쟁, 인도-방글라데시 접경지역의 복잡한 국경선 등 집단 간 다툼에 의해 어떤 장소가 무자비하게 강제 구획되고 파괴되면서 사람들이 애착이 있는 장소를 잃고 헤메기도 한다(트와일 아부 자르왈 p.144~), (아그담 p.187~). (치트마할 p.305~) 이러한 장소에 대해 저자는 장소성 측면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인본주의적 장소, 장소 애착 하면 낭만적이고 관조적인 느낌이 들지만, 저자는 인간이 지표와 진정한 관계맺음을 하는 장소가 더 많아지길 바라면서 그러지 않은 상황을 안타깝고 분노하며 보기를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사용되지 않고 버려진 장소도 또 미래의 우리 장소에 대한 기념물로서 남겨놔서, 미래지향적 장소감을 함께 공유하려는 노력도 느껴졌다. 나도 지도에서 책에 나온 여러 장소들을 살펴보면서, 이곳 사람들의 장소감에 대해 공감적으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면서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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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위테눔 같은 장소들은 단순히 지도에서 지워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탐욕과 무지가 빚어낸 뚜렷한 징후로써 계속 보존해야 한다. 이런 장소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고 우리 문명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차분하게, 그리고 양심에 따라 결연히 인정해야 마땅하다. 이런 장소들을 없앤다는 것은 기만적이고 설득력 없이 덧칠해버린 경관을 우리에게 남겨주는 꼴이다. 위테눔은 기념물로 간주되어 현재 우리가 전쟁터에 바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관심을 주어야 한다. (p.172)
아그담 파괴의 총력전 성격, 그리고 아그담이 텅 빈 채로 남아 있었던 기간,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아그담은 고통과 분노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슬픔은 외부 세계가 아그담이나 카라바흐의 재난을 주목하는 데 무능했던, 또는 무관심했던 까닭에 악화되고 말았다. (...) 장소의 말살은 그 희생자와 그 가해자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며, 아그담이라는 죽은 도시는 재건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증오와 폭력을 한층 부추길 것이기 때문이다. (p.194~195) 장소란 물건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연필이나 물뿌리개처럼, 생각 없이 버리거나 대체해도 되는 뭔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자기가 관심을 갖는 장소에 맹렬하고 섬세하게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 장소야말로 곧 그들 자신을 규정하는 특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장소를 잃는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p.144) 이외에도 흥미로운 장소와 사람들이 얽힌 이야기가 많았다. 근처에 여행을 가게 되면 한번 찾아가보고 싶은 곳들도 많았다. 물론 막상 가 보면 대단한 볼거리는 없는 곳일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언급한 장소 이야기를 알고 보면 그곳에서의 장소와 사람 간의 연계가 눈에 보이고, 또 그러지 못한 장소에 대한 연민도 느껴질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책에서 소개한 여러 장소를 통해, 우리에게 '토포필리아(Topophilia)'를 가지기를 제안한다. 장소에 관심을 가지고 탐험하고 사랑하는 우리 인간의 본성을 되찾자는 것이다. 그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작고 세심한 관찰, 의미 부여,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나를 되돌아보는 여유가 있으면 가능할 것이다. 주위 장소를 되돌아보고 장소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고 싶은 현대인들이 보았으면 좋을 책이다. 그리고 지리학에서 장소에 대해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 궁금한 일반인, 학생도 보면 좋을 것이다. 일상적이고 가벼운 내용이면서도 은근히 심오한 장소 철학을 고민해 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런 '제멋대로인 장소들'은 우리를 자극하며, 우리 삶에서 등한시되었지만 실제로는 근원적인 장소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런 장소들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직시하라고, 인간은 장소를 만드는 생물 종인 동시에 장소를 사랑하는 생물 종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라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p.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