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이 책이 헤겔의 교수논문이야! 교수논문이란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있는 것이지? 한번 읽어보아야 하겠다"라는 호기심때문에, 그리고 얇은 두께를 보고 다소 만만한 마음에 책을 들었다. 역서의편제가 독특하다. 주석 앞에 역자해제가 있다. 번역은 또 다른 창작이므로, 역자의 노고와 권위를 충분히 살려주려는 출판사의 배려가 아닐까? 그런데, 본문을 막상 읽으려고 하니 역자해제의 마지막 구절처럼 참으로 난해하다. 이것 참, 대가들의 글을 읽을 때에는 항상 부딪히는 문제이지만,글자는 읽을 수 잇으나 글은 읽기 어렵구나. 결국 한차례 통독하는데 3주 이상 걸린 것 같다. 난해한 헤겔 -십수년간 헤겔을 연구하고 고전번역이라는 힘들지만 필수적인 작업을 과제로 설정한 역자는 난해한 헤겔에대한 이해를 돕기위해서 여러가지 수단을 썼다. 기존의 여러 학자들이 해설해놓은 주석 외에도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구절에 많은 역주를 달았고, 무엇보다도 긴 역자해제를 달았다. 참 정성을 기울인 역서이다. 역시 주석 앞에 역자해제가 있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한 헤겔은 역시 난해하다. 나로서는 그 난해함은 헤겔이 사용하는 용어와 방법이 낯설기 때문일 것인데, [행성궤도론]에서는 자연과학에 대한 무지때문에 그 난해함이 두배로 된다. [행성궤도론]에서 중심이 되는 자연과학적 내용은 케플러의 3가지 법칙과 뉴튼의 원리인 것 같으므로, 그 내용을 여러 곳에서 다루고 있지만,비록 중복이 되더라도, 따로 떼어내서 주석 앞에서건 뒤에서건 혹은 부록의 형식으로든 독립적인 항목으로 다루었으면 더 낳았을 것 같다. 그랬으며, 대조하면서 읽기도 쉽지 않았을까? 역자해제를 보면, 헤겔은 자연을 유기체로 보았고,이런 관점에서 태양계를 해석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헤겔은 실험과학적 방법을 비판하면서 전체를 강조하고, 그래서 실험과학적 방법을 경험론적 혹은 기계론적 방법이라고 비판하면서 목적론적 접근을 보여주었던 것 등은 그의 유기체적 자연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과학혁명 초기에 자연과학자들은 하느님이 지어 하느님의 섭리가 녹아있을 자연이라는 책을 섭리를 드러내주는 또 다른 책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아마도, 자연이 기계론적 체계이든 아니든 섭리라는 목적아래있을 것임을 암시하는데, 다시 헤겔 당시 화학의 발전은 기계론적 체계에 대한 대안의 수립을 더욱 자극하지 않았을까? 헤겔의 유기체적 자연관이 뉴튼에 대한 그의 잘못된 이해나 비판과 얼마나 직접 관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계론적 결정론적 자연관을 탈피하려는 시도의 하나일 것이고, 이런 점에서 어쩌면 오늘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로 대표되는 비결정론적 자연관과 상통하는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어떻든, 이제 태양계가 유기체이고 생명이라면,자연은 어떤 조화를 이루고 있을 것인데, 헤겔은 유기체의 조화를 마치 피타고라스나 케플러가 그러했듯이 어떤 수학적, 기하학적 완전성을 보여주는 조화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그래서 헤겔이 [행성궤도론]에서 오류를 범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혹시 그러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조화는 절대이념과 상통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문득 한가지 상념이 든다. 만약 헤겔이 태양계라는 유기체의 조화를 어떤 수학적, 기하학적 완전성을 보여주는 조화로 보았다면, 그것은 역자해제에 있는 질병과 죽음을 매개로 한 개체와 유의 관계, 그리고 형태변화 등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개체에 있어 질병과 죽음의 의미는 유의 차원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일까? (유의 차원에는 형태변화만이 적용되는가?) 개체의 차원에서는 불변의 체계같은 조화가 있더라도, 역자해제에 의하면, 개체는 질병과 죽음을 매개로 유를 깨닫는 정신을 얻게된다. 그렇다면, 이제 태양계나 우주를 개체로 본다면, 중요한것은 조화가 아니라 질병과 죽음이 아닐까? (토론테제와 관련지어 말하면, 모순이 해소되어 조화가 된다면, 최소한 형태변화는 일어나지않을까?) 결국 헤겔의 유기체적 자연관 자체는 근대과학혁명의 전통 속에 있고, 또 그것의 한 갈래인 기계론적 자연관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리고 아무리 헤겔이 근대적인 '유한한 목적론'과 '심오한 본래적 의미의 목적론'을 구분했더라도, [행성궤도론]에서의 헤겔은 충분히 근대적인 자연관이기에는 불충분한 수준의 자연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더라도, 우리가 우주, 태양계, 지구를 유기체로 본다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유한한 목적론'의 입장에서 실용적으로 보기만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자연은 더 이상 생명없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연 자체 안에 어떤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헤겔의 생명유기체적 자연관은 오늘날의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이해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행성궤도론]이 헤겔의 전 체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든 간에, 이 책에서 (주로 양적 세계로 이해되는) 자연에 대립/모순과 통일/조화를 적용하려 한 것은 놀랍고도 신선하며, 또한 뉴튼의 수학과 물리학으 불충분한 결합을 방법론적/원리적? 차원에서 비판했던 것은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지식이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행성궤도론]은 학제적 차원에서 본다면, 그동안 물리학과 철학의 만남, 혹은 자연과학의 철학의 만남이 거의 대부분 물리학자나 자연과학자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이었다면, 철학자의 관점에서 기술적으로 우주를 생명 유기체로 보는 관점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행성궤도론]의 번역은 또한 필수적인 작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행성궤도론]의 번역서를 통해서 몇가지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었고, 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헤겔은 생명유기체 개념을 낭만주의와 공유하면서도 어떻게 '생명에 내재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스스로 창안'함으로써 낭만주의를 넘어설 수 있었을까? 시간을 내서 정독해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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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을 1687년에 발표한 이후 ‘천체’역학뿐 아니라 자연의 모든 현상을 수학적 체계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사고가 수학적 분석으로 맞춰진 것이다. 이것을 ‘근대과학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과학’과 ‘철학’의 만남은 사람들에게 어색한 것으로 느껴졌다. 같이 이웃하기에는 갈라져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대학시절 나는 ‘현대과학과 철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그 수업에서 나는 ‘자연철학’이라는 생소한 영역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이 이러한 근대적 ‘과학’만으로 맞춰져야 하는 것인가? 뉴턴적 사고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전부터 자연에 대한 여러 가지 인식이 있어왔고, 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행성궤도론에서 헤겔은 과학적 접근이 아니라 철학적 접근으로도 자연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이는 자연도 그 자체의 생명력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러한 자연의 본성을 ‘역학’이라는 개념으로 규정지으려는 근대적 사유방식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수학적 체계로 자연을 규정하는 가운데 사려지는 물질적 본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했던 헤겔의 노력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행성궤도론>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자연에 대한 과학(근대성, 즉 인간중심의 효율성)의 테러 앞에 순응해가는 요즘 우리에게 있어서 헤겔식 자연철학은 사뭇 신선하다.
역자가 헤겔의 자연철학에서 주목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하게 인식되는 근대적 과학, 혹은 근대적 ‘자연철학’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필요성일 것이다. 역자의 바람처럼, 모든 것을 수학적 규정으로 치환시켜버리는 천박한 기계주의와 수학주의에 반대해 사고한 헤겔의 자연철학이 천박한 자본주의적 효율성으로 무장해 자연을 사고하는 우리에게 반성의 시간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인상깊은구절] '역학'이 신이나 참된 힘에 관해서 알지 못하고 내면적이고 필연적인 것에 관해서도 인식하지 못한채, 관성적인 물질이 항상 외적인 자극에 의해, 또는 같은 말이지만 물질이 외면적인 힘들에 의해 움직인다고 한다면, 이때 역학은 이러한 물질의 본성을 비켜 가고 있는 것이다.행성궤도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