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류의 지난 역사는 변화의 연속이었다. 일방적으로 배제되고 억압되어왔던 것들이 우리네 것으로 통합되었고, 동시에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들이 위험한 것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끝이 어디인지 알진 못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견고해져 왔으며,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문명의 이기 속에서 우리는 물질적 풍요로움에 눈 멀어 버리고 말았다. 원고지에 한 글자씩 써 내려가던 것들도 이젠 키보드 자판 몇 번 두드리면 끝난다. 끔찍할 정도의 편리함 속에 길들여진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게으르고 나태해졌다. 조금 더 많은 여유가 허락되었고 이러한 여가를 위해 인류는 화려함을 창조해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돈’이라는 매개체를 소유한 이들에게만 향유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 모순 속에서 우리 모두는 울부짖는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잘못됨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기는 참으로 힘들다. 눈이 핑 돌 정도로 복잡한 세상, 모든 잘못을 정당화하는 기제들. 장 보드리야르에 대해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그를 일컬어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모순의 덩어리들에 대해 한 꺼풀씩 벗겨내는 즐거움에 취해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딱히 철학자나 사회학자라고 말하기 뭐할 정도로, 그의 분석은 실로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져 왔으며 그의 글쓰기 역시 현실과 이론을 오간다. 게다가, 어떻게 보면 이 책은 그의 저서 중 가장 난해한 편에 속하는 듯 하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낼 만 싶으면 그 때부터 갑자기 머리가 휑해지는 것이, 마치 기초 지식이라곤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읽는 기호학 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즐겁고, 보드리야르는 날카롭다. 문어로 태어났어도 잘 어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발은 넓디 넓어 각종 주제를 포괄하는 넓은 아량(!)을 선보이는데다가,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발상들로 가능한 것이 이 책인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문명에 대해 여느 때보다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다. 과거와 같은 무조건적인 핑크빛 미래에 대한 예찬은 많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 비판들의 농도는 참으로 피상적이기 이를 데 없다. 혹자는 오늘날의 문제점을 또 다른 기술 문명의 발달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또 다른 이는 마치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벌여야만 할 것처럼 무조건적인 과격함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제기치 못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물질 이상의 것에서 보여지는 붕괴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화가 우리의 삶 전반에 걸친 디지털화를 일구어냈음을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지독할 정도의 개인주의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금껏 구속해 오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었노라고 믿게 된다. 그 해방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그 해방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규정짓는 본질마저도 상실하고 말아버린다. 우리가 만들어낸 기술은 심지어 우리 자신 조차도 복제하기에 이른다. 지금쯤 어딘가에서 나와 꼭 닮은 누군가가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니, 나 조차도 복제된 무언가 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기술을 생성해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술에 의해 생성된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사회, 그 끔찍함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지금껏 여겨왔던 그 모든 것이 오히려 인간을 창조해내고 있는, 그 어처구니 없는 상황과 우리는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그른지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도덕이란 존재치 않으며, 하나의 가치판단을 위해 참고해야만 되는 정보가 너무 많다 못해 무한하기까지 한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가치판단을 유보해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선이 악으로 둔갑하고 악은 선이 되어버리고 마는, 그것은 교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의 교환이며, 궁극적으로 모든 교환이 불가능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 책을 통해 인쇄된 휴지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돈이라는 환각제에 취해 비틀거리는 우리 자신을 고백했다. 영원을 꿈꾸기에 존재할 수 없고, 풍요를 꿈꾸기에 빈곤해지는, 스스로를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킴으로써 발전을 꿈꾸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이보다 더 신랄하게 이야기하긴 힘들 것이다. 시니피에는 사라지고 시니피앙만이 존재하는 세상. 지금껏 우리의 하루하루를 황홀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화려함을 보드리야르와 함께 벗겨보는 즐거움을 다른 이들도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