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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블런의 경제학을 부분적으로나마, 그러나 그의 주요 개념을 접할 수 있게 해준 이 책이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수요공급곡선, 한계효용, 수확체감의 법칙과 같은 고전경제학이라는 썩은 구조물에 여전히 의존하는 경제학에 대한 무지의 교만을 반성 할 수 있는 중요한 근간을 제공하고 있음에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자본’의 본성을 엉뚱하게 정의하고 있다 보니 이것의 흐름인 경제를 제대로 착안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삶의 바탕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놓여 있다는 굳은 믿음만큼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지는 못한 것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생산요소의 하나이며, 생산성에 관여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 오늘의 주류 경제학의 교조적 믿음이다. 자본이 과연 산업의 생산에 기여하기는 할까? 그렇다면 산업 생산에 관여하는 이를테면 산업자본이란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자본주의 태동기의 자본과 21세기 지구화된 시대의 자본의 내용은 동일한 것인가? 이들 물음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 오늘의 경제가 야기하는 무수한 혼란과 문제점들을 규명하는데 그나마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자본의 본성에 대한 두 개의 논문과 현대의 영리적 자본에 대한 하나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기 산업자본과 무형자산의 자본화라는 화폐자본으로서의 투자개념, 그리고 영리적 자본인 금융자본의 본성을 파헤치고 있다.
1. 산업자본의 정체
우린 ‘자본주의’라 불리는 체제하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다시금 상기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만큼 친근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이것을 전통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면 ‘산업자본에 대한 소유권의 지배적 형태를 띠는 사회’를 일컫는다. ‘베블런’의 관점은 이 정의에서 말하는 ‘산업자본에 대한 소유권’이란 공동체 전체의 무형자산을 독점하기 위한 제도라는 토대에 놓여있다. 이로부터 무수한 물음이 가능해진다. 아마 자본가들은 산업자본이란 공동체 전체의 자산이라는 말에 경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역사를 더듬으면 ‘공동 지식 축적의 성장과 활용의 역사’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소위 자본재가 되는 것들이 어떻게 쓸모 있는 경제적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는 지를 추적하면 산업자본이 특정 개인의 소유권 대상이 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것인지를 이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마제석기부터 오늘의 거대한 산업장비의 개개에 이르기까지 집단 전체에 고루 스며있는 지식의 공동축적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형 자산으로 불리는 어떤 물질적 산업장비인 자본재가 이것이 속한 공동체의 오랜 기간의 경험과 창의성을 통해 천천히 일구어낸 정신적 추출물이라는 비물질적 기술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할 때,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반론의 제기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누군가 뛰어난 개인이 인류지식의 역사에는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던 기술이나 이론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설혹 가능하다고 해도 이것이 과연 공동체의 경제적 삶을 위해 바로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공동체 전체의 지식 축적이 토대를 제공하지 않으면 한 개인의 창의성이란 것도 있을 수 없으며, 일정한 성과를 가져오지도, 공동체 전체의 지식 축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아무런 효과도 낳지 못한다. 즉 공동체의 지식수준이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만큼 제고되는 것, 해당 공동체의 문화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회적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쓸모 있는 경제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공동체 구성원에 대대적인 학습과 관습의 확산을 이루고서야 자본재가 된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의 제기도 가능할 것이다. 자본재라는 것은 이처럼 모두 공동체의 축적된 지식과 경험이라는 비물질적 자산의 추출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산업장비와 같은 본질적 유형자산이나 인간 노동의 생산력처럼 그 자체만의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물질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 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는 것인데 아마 심한 착각일 것이다. 어떤 기계 장비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기술적 진보에 의해 새로운 기계장비로 대체하게 되었을 때 옛 기계장비는 고물상으로 간다.("goes to the junk-heap!") 이것은 물질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 힘은 자본재가 아니라는 입증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결국 자본재라는 물질적 산업장비 역시 ‘물체의 사용 가능성’이라는 산업 혹은 경제 집단의 이해 함수에 불과한 것이라는 의미로 귀환한다. 인간의 노동력 역시 근력과 같은 동물로서의 육체적 힘이 아니라 생산의 효율을 결정하는 기술적 정도에 따른 노동력이라는 측면에서 공동체의 축적된 정신적 산물이라는 토대를 벗어날 수 없다.
이제 이러한 자본재가 어떻게 특정 개인들의 소유가 될 수 있었는가하는 과제가 남는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어떻게 오늘의 인간 사회 대부분을 결정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고작 수공업과 같은 개인의 물질적 점유가 부담되지 않았던 18세기 이전의 시대에, 자본재란 해당 공동체의 지적 공유물로서 특정인 소유 대상이 될 필요도 없었으며, 되지도 않았다. 이것에 장애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인데, 산업혁명처럼 거대 산업장비의 집산은 개인의 노력으로 마련 할 수 있는 수준과 크기를 넘어서게 되고, 이로서 이들을 소유한 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권력구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본재가 비로소 이윤을 목적으로 전용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소유자들은 공동체 전체의 무형자산을 독점하기 위한 제도로서의 소유권 원리의 구체화, 제도화를 향한 폭력의 역사를 질주하게 된 것은 새삼 반복 할 얘기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베블런의 ‘자본재의 생산성’이라는 부제를 가진 논문,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1)」는 자본주의란 공동체의 자산을 자본가 개인들이 폭력적으로 강탈한 제도화의 결정체이고, 또한 ‘산업자본’이란, 공동체의 지식과 경험의 축적인 비물질적 자산임을 확인하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2. 무형 자산의 자본화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1)」이 ‘산업자본’화된 자본재의 본질을 규명하고, 이의 독점화라는 소유권 원리의 제도가 자본주의 요체임을 논의하였다면 , 논문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2); 투자, 무형자산, 금융의 거물」은 화폐가치로서 자본화되는 자산의 유형적 속성과 “자본을 매물로 삼는 거래”로서의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라 하겠다. 베블런은 이를 위해서 화폐 소득을 낳아주는 가치적 소유물로서 자본을 유형자산과 무형자산으로 구분하고, 생산요소로서 갖는 산업적 쓸모와의 관련성 유무에 구별의 착안점을 두고 있다. 즉 후자는 전자와 달리 공동체의 효용에는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소유자 개인의 이득에만 관여하는 자산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물질적 장비와 같은 유형 자산이 공동체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물질적 장비의 소유자는 공동체의 비물질적 장비에 대한 사용권의 전유는 물론 해당 소유물의 남용, 방기, 다른 사람이 쓰지 못하게 할 권리까지 획득함으로써 일종의 권력과 소득 획득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이 소유자는 소유물의 축소, 지연 사용이 자신의 금전상의 이득을 제공한다면 공동체의 효용과는 역행한다. 즉 자신의 차등적 이점이 된다면 공동체 전체의 경제적 이익이란 애초에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투자에서 나오는 이득의 양이 그 자본재가 실제 공동체에 가져다 준 효용이라는 의미에서 물질적 유용성과 동일하다거나 일정한 비례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오로지 자본가의 금전적 욕망 충족에만 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의 산업 효율성을 통제하여, 타경쟁자의 효율성을 방해하거나 공급의 제한, 가격의 압박 전략이 차등적 이점으로 확립되면 이것은 무형자산의 한 항목이 되어 자본화 된다. 즉 비효율성이 자본화 된다는 것이다.
물질적 자산으로서의 자본재가 이러한 비효율성의 얼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 공동체를 해치는데서 가치를 얻기도 한다. 예컨대, 공동체 전체의 희생을 대가로 차등적 이익을 얻는 무기공장과 같은 군수 산업이 있으며, 낭비의 관행, 허영심, 환상을 이윤의 원천으로 삼는 패션, 호화사치품, 광고회사처럼 왜곡의 형식으로 사용하여 자본화 가능가치를 획득하기도 한다. 결국 현대 경제에서 유형자산 조차도 기술적 유용성이나 공동체의 효용이 아니라 소유자에게 얼마나 소득을 낳아주는가라는 자본으로 측정되는 양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더욱 주목 할 것은 산업과 영리기업의 속성이 이질적이라는 점에 있다. 오늘날 기업은 ‘주식회사’라는 자본 주체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자본시장의 발달을 의미한다. 이로서 자본 자체인 기업은 거래대상이 되었으며, 그 가치는 지속적인 미래소득을 평균이상으로 가져다주는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자본화된 유, 무형자산이란 ‘권력’의 다름 아님을 확인하였듯이 평균 이상의 안정적 이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업이 경제적 과정을 둘러싼 사회 전체에 대하여 얼마큼의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인가, 그리고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산업 생산과 직접적 관련을 갖지 않으며, 인수합병이나 유가증권의 거래를 통한 이익 실현을 위해서 움직일 뿐이다. 자본이라는 지배구조가 경제의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는 곧 금융거물, 거대 자본가가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산업 생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오직 자기 이윤의 실현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결국 시장 지배력이라는 권력 확장이 곧 이윤의 획득이므로, 시장은 오직 권력 암투의 장소 이상이 아니게 된다. 이처럼 자본의 본성이란 ‘권력’임을 설파한 베블런의 선견은 금융거물이 지배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탁월한 시선을 제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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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베블런’이라는 이름을 접했다. 대학생 시절 사회학 수업을 통해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이론을 주장한 학자였다. 부르디외와 더불어 베블런을 떠올릴 때면 개개인이 지닌 취향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좋고 싫고는 타고난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들 학자는 그 안에 깃든 의미에 주목했다. 어떠한 물건을 구입하고, 어떠한 취미를 즐기느냐 등이 알고 보면 자신의 소속 계급(혹은 계층)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벌이를 초과한 지출 등을 통하여 때때로 타인에게 자신을 과시하기도 하는 게 인간이라고 이들은 말했다. 왠지 속마음을 들킨 것과도 같아서 민망했다. 내 지나친 씀씀이를 이보다 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그 떄까지 베블런은 나에게 사회학자였다. 다양한 사회 현상을 조금은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연구한 인물 말이다. 이번에 읽게 된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는 이제껏 내가 알아온 베블런이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전혀 기대치 않은 내용이었고, 어쩌면 그래서 많이 난해했다. 저자는 이를 통해 베블런이 실상 누구보다도 명석하게 앞날을 내다보았으며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줄 알았던 경제학자였음을 우리에게 보였다. 베블런은 1929년 대공황이 시작하기 몇 달 전에 사망했다. 이미 1926년경에 은퇴를 해 칩거 생활을 해 왔으므로, 경험에 기대어 신자유주의에 대해 경고했던 건 아니었다. 그가 보았던 것은 실체를 알 길 없는, 그러나 모든 이들이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던 투기였다. 전 세계를 휩쓴 전쟁도 실상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진 투기 붐과 연관이 있음을 그는 진작에 깨달았던 듯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누군가가 소유한 자본과, 그 자본의 가치를 드높일 수 있는 노동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자본과 노동의 합이 곧 사회 전체의 가치를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윤이라 하는 것이 생산 과정에서 창출되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땀 흘려 일한 노동자가 아닌 자본을 제공한 이의 몫으로 남는다. 마르크스는 이 대목을 부당하다 말했다. 노동자는 자신이 힘써 일함으로써 생산한 재화로부터 끝끝내 소외되는 현실에 분노했다. 물론 마르크스도 옳았다. 하지만 베블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생산된 부가 어느 쪽에도 귀속되지 않는 현실이야말로 비극이다. 자본이 이윤을 먹고 성장하는 단계를 지나 아예 자본 자체가 하나의 매물로 시장에 출현하는 상황을 베블런은 주시했다. 이제 자본주의적 영리 활동은 더 높은 가치를 지닌 자본의 축적을 목표로 삼는다. 어찌 보면 가장 단순한 방식을 선호하는 인간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것은 얼마, 저것은 얼마, 화폐를 빌려 가치를 말하는 방식보다 더 손쉽고 간편한 방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베블런이 예고했던 것은 금융 자본주의였다. 실체 없는, 그러나 나날이 거대해져만 가는 자본의 위험함을 그는 일찌감치 경고했던 셈이다. 저자는 베블런에게 ‘정치경제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사했다. 아니, 새롭다는 표현에는 어패가 있다. 베블런은 언제나 정치경제학자였지만, 나와 같은 뜨내기들이 베블런에 대해 오해를 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한계급론’에 이끌리는 건 왜일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돼 버린 베블런의 덫(?)을 떨쳐버리고픈 마음 탓인 듯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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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현재의 경제 시스템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만을 맹신할 수 없음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접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마국발 금융 자본주의가 큰 위기를 맞았고, 그동안 보이지않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이곳저곳에서 구멍이 뚫리고 있다. 이러한 때 먼저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경제구조의 문제점과 폐단을 이야기하였던 베블런의 진심어란 충고에 귀를 기울여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