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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20년 후의 나로부터 만나자는 문자가 왔다 20년 전의 나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늙은 나주댁 아지매가 아직도 술상을 거들고 있었다 십구공탄에 삼겹살을 구우며 어린 나는 빨간딱지 진로소주를 마시고 지금의 나는 조껍데기 막걸리를 마시고 늙은 나는 이젠 술을 못한다고 콩나물국만 홀짝거렸다
우리는 각자 가져온 기억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아내와 아이들 이야기는 빼자고 했다 서로 조금씩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긴 했지만 망각과 불안이 우리 생의 기본이 아니겠냐고 서로 위로했다 어린 나는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여행서적을 읽는다고 했다 늙은 나는 책 같은 건 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담화는 애매모호하게 시작되었다
삼겹살 불판을 두 번 갈고 소주잔과 막걸리잔이 섞이고 식은 콩나물국을 다시 데워오는 사이 나는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 언제인지 물었다 어린 나는 원래 행복한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 건방지다 싶자 늙은 내가 현재란 과거의 심연이며 늘 새로운 탈로 위장하는 것이니 겨우겨우 인생은 견뎌가는 것이 아니겠냐고 했다 그 순간 누군가 술잔을 엎었다
이후 세 시간 동안 끊어진 필름 조각을 이어보면 어린 나는 ‘진실’과 ‘사실’의 차이를 아냐고 악을 써댔고 지금의 나는 우리 회사 이 부장 ‘썩을 놈’이라고 욕을 해댔고 늙은 나는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자꾸 꺼냈다 나주집 아지매가 결국 등을 밀어낸 것은 알겠는데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기억이 없다 우리 중 누군가가, 다시 또 만나면 개새끼라고 꿈속에서인 듯 말한 것 같기도 하다 - 정한용, 「나주집에서의 만남」
20년 후의 나가 지금의 나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누구나 미래를 궁금해 한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시인도 미래의 모습이 궁금했을까? “20년 전의 나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답을 보냈다”. 지금의 나를 기점으로, 20년 전의 나와 20년 후의 나가 한 자리에 모인다. 20년 후의 나가 연락을 했으니, 만나는 장소 또한 지금의 나로 따지자면 20년 후의 술집이 되리라. 20년이나 흘렀는데도 늙은 나주댁 아지매가 아직도 술상을 거들고 있다. 십구공탄에 삼겹살을 구우며 세 사람은 술을 마신다. 어린 나는 소주를 마시고, 지금의 나는 막걸리를 마신다. 늙은 나는 이젠 술을 못 한다며 콩나물국만 홀짝거린다. 삼대가 한 자리에 모여 가족 모임을 하는 것만 같다.
늙은 나는 지금의 나와 어린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지금의 나야 적응이 되어도, 어린 나는 아무래도 생소하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누구에게 친근감을 더 느낄까? 아무래도 젊은 20년 전의 나일까? 아니다. 그 시절의 시행착오를 생각하며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럼 지혜가 많아졌을 늙은 나에게 친근감을 느낄까? 어린 나는 이미 지나온 시절을 나타내고, 늙은 나는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시간을 나타낸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나를 기억할 수 있을 뿐,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추억으로 간직해야 한다는 말이다. 늙은 나는 다르다. 지금의 나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늙은 나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어린 나는 지금의 나와 늙은 나를 보는 게 그저 신기하지 않을까? 20년 후도 까마득한데, 40년 후의 모습까지 함께 만나다니.
“우리는 각자 가져온 기억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기억은 살아온 시간만큼 쌓일 것이니, 어린 나가 당연히 적을 수밖에 없다. 돌려 말하면 어린 나는 앞으로 무수한 경험을 하며 차근차근 기억들을 쌓아가게 될 것이다. 늙은 나는 이미 살 만큼 살았으므로 기억해야 할 것 또한 많다. 늙은 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을 바탕으로 어린 나가 살아갈 길을 제시하려고 한다. 어린 나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늙은 나는 경험했다. 늙은 나는 경험을 통해 어린 나를 장악하려고 하지만, 어린 나는 늙은 나가 말한 경험을 신뢰하지 않는다. 늙은 나가 살아온 세상과 어린 나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 당연히 지금의 나가 사는 세상 또한 다르다. 세 사람은 “서로 조금씩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같은 존재라고 해도, 시대를 달리 산 사람들이다. 한 몸에 세 개의 사상이 모여 있는 격이라고나 할까.
“망각과 불안이 우리 생의 기본이 아니겠냐고 서로 위로”를 해도, 그들이 생각하는 망각과 불안은 살아온 시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어린 나는 마르크스를 읽는다. 지금의 나는 여행 서적을 읽는다. 늙은 나는 책 같은 건 보지 않는다. 어린 나는 마르크스를 빌려 말을 할 것이고, 지금의 나는 즐겨 여행한 곳을 말할 것이다. 늙은 나는 무엇을 얘기할까? 저마다 관심사가 다르니 저마다 얘기하는 것 또한 다르다. 마르크스의 시선으로 보면 여행을 즐기는 지금의 나는 부르주아적 삶을 살고 있고, 책을 읽지 않는 늙은 나는 자기 생각에 빠진 고집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나는 늙은 나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을 테고, 늙은 나는 어린 나의 치기어린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중간에 낀 지금의 나는 여행한 곳을 얘기하며 자기만의 말 세상으로 빠져들 것이다.
소통이야 되든 말든 시간은 흐른다. 삼겹살 불판을 두 번 갈았고, 소주잔과 막걸리잔도 이리저리 섞였다. 무언가 어색함이 감도는 분위기를 살리려고 지금의 나가 가장 다른 두 사람에게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 언제인지 묻는다. 어린 나가 대뜸 원래 행복한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린놈이 얼마나 살아봤다고 저리 말하는가 생각하며 늙은 나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현재란 과거의 심연이며 새로운 탈로 위장하는 것이니/ 겨우겨우 인생은 견뎌가는 것이 아니겠냐”고. 늙은 나가 말을 끝낸 순간 누군가 술잔을 엎었다. 아직 말을 하지 않은 지금의 나일까? 어린 나는 과거를 살고 있고, 늙은 나는 미래를 살고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은 지금의 나뿐이다. 그들이 현재를 부정하면 지금의 나는 무엇이 되는 것일까? 하나면서 동시에 셋인 사람들은 이렇게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싸움을 벌인다.
시인은 세 시간 동안 끊어진 기억의 필름을 어렵게 복원한다. 그 속에서 어린 나는 ‘진실’과 ‘사실’의 차이를 아느냐며 악을 써대고, 지금의 나는 회사 부장을 ‘썩을 놈’이라고 욕하고, 늙은 나는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자꾸만 꺼낸다. 지금의 나가 욕하는 회사 부장은 진실과 사실로는 판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회사 부장은 지금의 나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썩은 놈’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찌 밝힐 수 있으며,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또한 어찌 밝힐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나에게 중요한 것은 회사 부장이 썩을 짓을 하는 썩을 놈이라는 사실이자 진실이다. 사회생활에서 물러난 늙은 나는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이니 시간적으로 과거에 사는 어머니이다.
어린 나는 미래를 위해 진실과 사실을 구분하고, 지금의 나는 지금 이 순간인 현재를 중시하며, 늙은 나는 과거에 매여 틈만 나면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산다.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세 사람 중 누군가가 다시 만나면 개새끼라고 말한 것을 시인은 꿈결인 듯 어렴풋이 떠올린다. 늙은 나는 왜 애초부터 어린 나와 지금의 나를 만나려고 했을까? 늙은 나가 되어 얻은 지혜를 어린 나와 지금의 나에게 알려주고 싶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후회스러워 두 사람을 부른 것일까? 무엇이 됐든, 어린 나는 어린 나대로 살 것이고,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대로 살 것이다. 늙은 나가 늙은 나로 사는 것처럼.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 사람이 다시 만나도 변할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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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는 이야기다. 그가 쭈욱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니 시가 되버렸다. 무슨 마법이 깃들었길래 신은 사람을 차별한다. 너무나 큰 능력을 그에게 줘버린 거다. 난 나의 이야기를 아무리 풀어봐도 시가 되지 않는데 불평하면 들어줄까? 절대 아닐 거다. 원래 신을 불공평하니까 그런 신 갖다 버리고 싶지만, 작고 사소한 것들을 믿지 않았기에 신을 공경하지 않았기에 괘씸죄에 걸린거다 낼 부터라도 내 맘속의 하나님을 들여야 하려나
뼈가 없이 몽글몽글한 말, 갈비뼈를 하나 빼줄 듯한 넉넉한 언어들 부럽다!! 나는 내게 없는 것만 부러워하라고 운명지어진 듯 싶다. 그래도 내가 자랑스러운 건 야속한 운명을 탓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사는 나의 지갑이다. 인터넷서점에서 7,200원인 그 사람의 뼈와 살인 것을 고작 이렇게 그들을 이렇게 착취하는게 눈물나게 미안하다 자본가만 인민을 착취하는 게 아니다.
-서 있는 사람-
봄비가 내린다. 어제 환하던 햇살이 오늘은 물보라로 바 뀌어 흩어진다. 내일이면 연두빛 나뭇잎들이 초록의 계절로 들어설 것이다. 당신, 빗속 걷기를 좋아하는가. 누군가 맨몸 으로 비를 맞으며 총총 뛰어간다면, 나는 얼른 쫓아가 손이 라도 잡아보고 싶어진다. 지난번에 정말 그런 적이 있다. 옛 애인처럼 보이는 낯선 여자였을 것이다.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 색 스커트를 입었을 것이다. 카페 앞 가로수길이었을 것이다. 내가 손을 잡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당황한 듯, 아니 황당한 듯, 서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그렇게 30초쯤 서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난 30년 세 월과 겹쳐졌다. 다음날, 비 그치고 햇살 났을 때, 나는 보 았다, 그가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는 것을. 그 머리카락 끝 에 매달린 잎사귀들이 더 푸르고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거식증-
아무래도 책을 끊어야겠다.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몸이 붓는다. 달포 새 5킬로그램쯤 늘었다면, 비정상이긴 해도,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백 근 나가 던 몸무게가 1년 만에 이백 근에 근접한다는 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게 다 지난 열두 달 동안 멋모르고 먹어 치운 책들 때문이다.
짐작하시겠지만, 가장 가벼운 건 여행 서적이다. 참살이 채식같다. 살이 안 찐다. 딱딱하고 무거운 "그라마톨로지" 를 읽었을 땐 3.2킬로그램이나 쪘다. 맛도 없는 걸 꾸역꾸역 참았다. "통섭"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땐 무려 4.5킬로그램이 나 늘었다. 아주 질기고 팍팍했다. 다이어트용으로 가볍게 봤던 "하자르 사전"에도 0.5킬로그램이나 올랐다.
책을 끊어야겠다. 일절 곡기를 끊고 공복에 비타민과 뒷 산 약수만 삼켜야 하겠다. 내리 3년은 단식 요양에 들어야 겠다. 그러면 불쌍한 나를 가엾이 여겨, '대한거식증환우회' 에서 나를 단골 나주집으로 불러내리라. 식탁에 백과사전만 큼 두꺼운 삼겹살과 세계문학전집만큼 긴 소주병을 차려놓 고 나를 기다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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