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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하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지사로 알려진 인물이다.그의 저서 '매천야록'도 유명한데, 내게는 머리에는 갓을 쓰고 안경을 착용한 그의 모습이 꽤나 강렬하게 기억되고 있다. 이 꼬장꼬장한 노선비가 서구문물인 안경을 걸치고 있으니, 그 부조화가 묘하게 인상에 남았던 것이다. 황현이 사용할 정도라면 안경이 꽤 많이 보급돼 있었던 모양인데, 안경은 조선후기 조선에 건너온 서양 물건 중 가장 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경우였다.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에서 다루고 있는 물건은 다섯 가지이다. 안경, 망원경, 유리거울,자명종,양금(洋琴) 이렇게. 이 책에서는 물건들이 조선에서 어떻게 수용됐고, 보급이 됐는지를 살피고 있는데, 그 과정을 읽으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러니 조선이 봉건사회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결국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망하는 비운을 겪을 수 밖에 없었겠구나 확인사살할 수 있었으니.
저 물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과학적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원천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다보니 제대로 활용하거나 상품으로 만들어내는데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망원경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어떤 원리로 망원경이 만들어진 것인지 알지를 못하니, 제대로 활용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망원경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해서 분실하기도 했다. 심지어 영조는 해를 바라보는 불경한 물건이라며 부수기도 했다. 그러니 서양에서처럼 천체 관측이나 항해에 적폭적으로 활용했을리는 만무했다.
저 물건들은 서양에서는 세상의 변화나 일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혁혁하게 이바지했고, 근대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그러한 영향력이 발휘되지 못했다. 그나마 안경과 유리거울 정도가 신분 막론하고 보급이 됐다. 안경은 숙종, 정조도 착용했고, 정약용도 사용했다. 안경은 시력때문에 독서와 저술에 지장받았던 지식인들의 활동을 연장시키면서 조선후기 학문 발달을 촉진시켰다. 유리거울도 여성이 외모를 치장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렇게 일상을 파고들었다.
자명종은 자체적으로 제작이 되고, 요즘으로 치자면 얼리 어답터들에 해당되는 경제력있는 일부 지식인의 완호물에 머물렀다. 농업이 주였던 조선 사회에서는 시분초를 다투는 즉 시계를 요구하는 생활이 나이었으니 자명종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양금은 그 재료를 구하기가 용이해 자체 제작됐고, 조선화된 악기로 연주에 활용되었다.
이 다섯가지 물품들은 조선에 수용되는 양상은 이렇게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시대에 뒤쳐져있던 조선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필자 강명관은 맥락없이 조선사회에 던져져서 그런거지, 굳이 조선만의 실패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지만, 과학적 원리를 밝히고,기술력을 확보해 상품화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거기에 서학이 금지되면서 소수의 애호품이 됐던 이런 서양물건들을 수용하는 분위기는 더더욱 경색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기억해 둘 인물들이 있다. 망원경과 자명종을 들여왔던 정두원이나 망원경에 관심을 가졌던 이규경, 최한기,홍대용 등은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최천약은 원리를 파악해 자명종을 제작했다는 것을. 원리를 밝혀내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지만 그것은 개인보다는 조선사회가 안고있는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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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 있는 책 속의 장면. 정두원이었을 것이다. 북경에 외교사절로 다녀온 그는 신기한 서양 물건들을 조정에 펼쳐놓는다. 기억으로는 자명종, 망원경 같은 것이 있었다. 조정 관료들은 신기해 했다. 아마도 그 책에서는 조선이 그로써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식의 서술을 이어갔던 것 같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림의 느낌이 그렇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정두원이 자명종, 망원경 같은 물건들을 가지고 온 것은 물론이고, 그 밖의 인물들이 부지런히(?) 서양의 신기한 물건들을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임금에게 바치고, 자신의 소유하고, 다른 이에게 팔기도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물건들을 아주 신기해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들여온 물건들로 조선 사람들의 눈이 뜨여 멀리 깊이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렇다고 말하기가 힘들다. 강명관 교수의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은 그렇게 쓰고 있다.
강명관 교수가 주목해서 쫓아가본 서양 물건은 다섯 가지다. 안경, 망원경, 유리거울, 자명종, 양금. (여기서 양금이라는 것은 지금도 그렇게 익숙한 물건은 아니다. 그리고 서양의 물건이라고 했을 때 연상되는 그런 이미지도 아니다. 서술
분량도 다른 것들에 비해 매우 짧다.) 양금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 삶에, 혹은 사회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물건들이다. 나도
쓰고 있지만, 안경이 없는 사회, 유리거울이 없는 사회, 시계가 없는 사회를 생각해보면 이 물건들의 근대 이후의 삶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물건들이 양란(兩亂) 이후 조선에
유입되면서 조선 사람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책을 읽는 유가(儒家)가 통치하는 조선인 만큼 책 읽는 데 도움을 주는 안경이 그나마 실용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망원경은 그 쓸모를 찾지 못했고, 유리거울도 화장을 하는 여인네
등에 퍼졌을 뿐이다. 자명종도 조선의 시간에 어울리지 못했다. 안경마저도
그 원리에 대한 탐구가 없이 그저 필요에 의해 수입되거나 개별적으로 생산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물건들은 그저 신기한 볼 거리였을 뿐이다(책에서는
경화세족의 ‘완호물’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강명관 교수는
그 자체로 ‘조선의 실패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감추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해보고 있다. 사회, 문화적 맥락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일 만한 조선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학문적 위계 때문에, 조선 지배계급의 경제관 때문에, 17세기 이후의 조선 사회의 경직성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 경직성이지 강명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사족 사회는 서울의 경화세족과 지방의
사족으로 분리되기 시작했고, 18세기가 되면 그 분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소수의 경화세족이 국가의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경화세족은 그 범위가 날로 축소되었다.
18세기 당쟁은 당파적 대립이라기보다는 정치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경화세족 내부의 갈등과 투쟁이었던 바, 계속되는 투쟁으로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가문의 수는 점점 축소된 것이다.”
(304쪽)
그러니까 사회의
구조가 경직되면서 서양의 문물에 접근할 수 있는 세력이 격리된 공간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그 세력이
굉장히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권력 싸움에 집착하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원리를 탐구해
확장하는 창조성을 발휘할 수 없는 사회였다는 얘기다. 비록 17~19세기의 조선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렇게 적고 보니
이 이야기는 무척이나 현재성을 띤 얘기다.
강명관 교수의
책들은 조선 사회에 대해 전문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자료의 해석이 대중적이라 읽는
데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다. 그리고 무엇을 얘기하는지도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