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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숭배자의 최후, [유형지에서]
"기계 숭배자의 최후, [유형지에서]" 내용보기
카프카의 단편소설을 읽다 보면 추리소설을 읽을 때와 비슷한 데가 있다는 걸 느낀다. 긴장과 동시에 질문을 던지며 읽게 된다는 점이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는 '범인이 누구일까?'라는 질문이 중심이라면, 카프카의 소설을 읽을 때는 '일어난 일과 나타난 사물의 상징이나 은유가 뭘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게 다르다.   한 사회에서 금지한 일을 저지른 인간이 추방당해 머무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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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단편소설을 읽다 보면 추리소설을 읽을 때와 비슷한 데가 있다는 걸 느낀다. 긴장과 동시에 질문을 던지며 읽게 된다는 점이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는 '범인이 누구일까?'라는 질문이 중심이라면, 카프카의 소설을 읽을 때는 '일어난 일과 나타난 사물의 상징이나 은유가 뭘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게 다르다.

 

 한 사회에서 금지한 일을 저지른 인간이 추방당해 머무는 장소인 유형지는 심판과 최후, 절대 고독과 자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상징이다. 카프카 소설의 중심 화두인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대립과 교체, 인간의 부조리한 운명에 대한 아픔, 인간소외의 비극성이 가져오는 뜻밖의 결말은 <유형지에서>도 계속된다. 이 작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인간소외의 중심에 기계화와 낡은 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던 탐험가는 우연히 사형집행을 참관하는 자격을 얻게 된 이방인이다. 그런데 이 섬의 처형 방식이 참 특이하다. 써레처럼 여러 개의 바늘이 달려 있는 기계장치가 있는데 침대에 맨 몸으로 묶인 채 누워있는 사형수의 몸에 바늘이 내려와 죄목이 몸에 씌어지도록 고안된 것이다. "다시 말해 침대의 움직임과 써레의 움직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게 되는 겁니다. 이 써레가 실질적으로 판결을 집행하는 거니까요."라고 장교는 탐험가에게 기계장치를 보여주며 설명한다.

 

  이 처형 기계장치는 선임 사령관이 직접 설계하고 만든 거다. 장교는 선임 사령관 아래서 도왔던 부하로 선임 사령관과 기계장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대단한 사람이다. 장교에겐 사형수와 사형수의 죄목은 관심 밖이다. 반면에 탐험가는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않았고 자신이 사형될 것도 모른 채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형수에게 관심이 간다. 알고 보니 그의 죄목은 전날 늦잠을 잤다는 거다. 탐험가는 끔찍하고 이상한 처형 방식을 고집하는 장교와 기계장치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장교는 탐험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기계장치가 신임 사령관은 물론 탐험가로부터도 호의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어, 다음 날 예정된 회의에서 폐지되는 수순을 밟게 될 것임을 예감한다. 사형수를 풀어주도록 명령한 장교는 옷을 벗고 사형수 대신 기계장치에 매달린다. 그의 최후는 기계의 고장으로 더욱 끔찍하게 된다.

 

"게다가 장치는 또 오작동을 하기 시작했다. 시체가 써레의 긴 바늘 끝에 매달려 계속 피를 뿜어대고 있는데도 구덩이 위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원초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이 소설을 통해서도 맞닥뜨린다. 이 소설에선 그 대상이 기계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자신이 존경하고 따랐던 선임자와 그가 고안한 기계장치에 대한 장교의 남다른 애착은 줄리엣을 따라 죽은 로미오, 로미오를 따라 죽은 줄리엣의 헌신과 다를 바 없다.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속 인물들에게 동일시하고 감정이입하며 하나되기를 멈출 수 없는 불가해한 우리의 모습이다.

 

 융학파의 심리학자인 이부영 교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에서, "원시인이 돌멩이에서 혼령의 힘을 느끼듯 물질은 인간에게 살아 숨쉬는 심혼의 상이 된다."고 말한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새로운 신이 되었다. 그것은 여신의 매력과 영웅신의 위세를 갖추고 인간들을 유혹한다. 신화는 이제 인간의 마음속에서 숨쉬지 않고 인간이 만든 기계와 기술 속에 투사될 뿐, 인간은 이제 그 거대한 신화의 한 단역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는 현대인의 불합리한 운명과 인간소외의 중심에 있는 기계화와 더불어 낡은 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이 빚는 비극성을 한 장교의 끔찍한 최후를 통해 부각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더 나아가 인간이 기계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통찰이 담겨있다. 

 

a*******5 2017.10.05. 신고 공감 12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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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단식 광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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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의 욕망이 음식을 먹는 행위로 나타난다면 단식은 죽음에의 욕망일 거다. 하지만 단식은 죽음을 바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삶 위를 아슬아슬하게 줄 타기 하며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성취 욕구를 가진 행위다. 자신의 능력이 단식을 보여주는 것뿐인 카프카의 '단식 광대'에게 이루고자 하는 꿈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모습을 우습게 변형시켜 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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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의 욕망이 음식을 먹는 행위로 나타난다면 단식은 죽음에의 욕망일 거다. 하지만 단식은 죽음을 바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삶 위를 아슬아슬하게 줄 타기 하며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성취 욕구를 가진 행위다. 자신의 능력이 단식을 보여주는 것뿐인 카프카의 '단식 광대'에게 이루고자 하는 꿈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모습을 우습게 변형시켜 타인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광대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사람들에 속한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존 버거는 프란스 할스의 그림 <웃고있는 어부 소년>을 소개하며, "이 그림 속의 가난뱅이는 자신이 팔 물건들을 보여주며 웃는다."고 설명한다. "가난뱅이들은 이를 드러내며 웃지만 부자들은 절대 이렇게 웃지 않는다."고 한다. 가진 자본이 없는 약자들의 무기가 바로 웃음과 몸이 아닌가.

 

 창백한 얼굴의 단식 광대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단식 광대는 의자에 앉는 것도 사양하고 짚더미 위에 앉아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미소를 띠며 질문에 대답하기도 했다.

 

  단식 광대는 동물원의 동물처럼 우리 안에 갇혀 있다. 관객들이 직접 뽑은 감시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약간의 물로 목을 축일 뿐이다. 지난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단식 광대를 보려고 온 관중들이 많았다. 그당시 단식이 끝나는 사십 일째가 되는 날이면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군악대가 연주했으며 두 명의 의사가 그를 진찰했다. 사람들은 그를 의심해 감시원들까지 붙여놓았지만 사실 단식 광대는 단식 기간을 최대 사십 일로 정해놓은 것이 불만이다.

 

 왜 사람들은 내가 단식을 계속할 수 있는 영예를 빼앗으려는 것인가? ... 나는 계속 단식할 수 있는데 왜 그들은 참지 못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단식 광대에게 단식 행위는 단지 보여주기 위한 공연, 자신을 상품으로서 파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일생을 걸고 추구할 만한 마지막 가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극단을 두려워하며 '적절한 시간'을 정해두고 거기에 맞추길 바란다. 그래야 몸이 자본인 단식 광대의 단식 행위도 자본처럼 순환시킬 수 있지 않은가. 

 

  몇 년 사이에 큰 변화가 생기고 단식 광대가 한때 큰 공연장에서 멋진 공연을 했다는 이야기는 과거가 되어 버렸다. 단식 광대의 우리는 마구간 옆 한적한 곳으로 옮겨졌고 사람들이 관리를 소홀히 하면서 숫자판도 언젠가부터 같은 내용이 적혀 있을 뿐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짚더미 속에서 발견된 단식 광대는 죽어가고 있다.

 

 저는 맛있는 음식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찾았다면 아마도 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며,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배불리 먹으며 살았을 겁니다.

 

  단식 광대가 남긴 마지막 말을 통해 그가 단식을 하게 된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가 찾지 못한 '맛있는 음식'은 대체 무엇일까? 여기에서 기독교적인 표현 '생명의 양식'이 떠오른다. 인간은 몸을 유지시키는 빵만으로 살 수 없고, 정신을 유지시키는 '생명의 양식'이 더욱 필요한 존재다. 단식 광대의 '맛있는 음식'은 그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는 '삶의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의 의미를 잃고 마침내 자신의 상품가치마저 잃은 인간이 처하게 되는 귀결은 죽음뿐이라는 걸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도 서글프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단식 광대>는 <변신>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금세 변하고 대체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소외와 인간 관계의 비극성을 절감하는 카프카의 고뇌를 전하는 작품이다. 

 

 

a*******5 2017.09.27. 신고 공감 12 댓글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