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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손홍규 작가를 접하게 된 것은 문학사상 월간지에서였다. 엄마께서 국어국문학과가 문예지정도는 읽어야하지 않겠냐면서 신청하셨지만 나는 한달에 한번 찾아오는 문예지를 그 날 주욱 훑고는 책장에 꽂아놓았다. 내가 바로 지식인이오- 하는 책장 속 자랑거리가 되버렸다.
심심했던 어느 날 문학사상이나 한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2014년 9월 잡지를 뒤적였고 그곳에서 마주했던 것이 손홍규 작가의 <배회>이다. 분명 삶을 이야기하는데, 모든 것이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강렬했다. 뒤틀려진 인물들도, 죽음에서 도망치려하지만 결국 죽음을 택하는 인물들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2015년 12월, 송홍규 작가의 단편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한번 <배회>를 읽어보았다. 1년 반을 더 보낸 나에게 <배회>는 또 다르게 다가왔다. "죽음"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되었다.
우리는 뉴스, 신문 어디에서나 "죽음"을 접한다. 이렇게 자주 접하는 것이라면 친근할만도 한데 아직도 죽음은 너무도 무섭고 "악"하다. 삶을 가진 사람들에게 죽음은 "악"이다. "두렵기"때문이다. 두려운 이유는 누구도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험하는 순간 모든게 끝이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담겨있는 이 삶은 밝고 선하냐, 그것도 아니다. 나아가 삶을 다 경험해 본 것도 아니다. 삶도 죽음과 마찬가지로 무지의 영역이고, 때문에 우리는 삶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배회> 주인공들에게 삶은 "어둠"이고 "악"이다. 박부장이 이야기처럼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울었는데 그치는 법을 몰라 여태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그리고 우리는 삶을 "악"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 안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삶을 기필코 희망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 배회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세상엔 삶의 어둠을 외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은 소설 속 '아들'과 '박 부장' 처럼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그들의 죽음을 옳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와 함께 뉴스를 보는 도중 자살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께서는 "저거 다 나약해서 그래"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에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것을 알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삶을 버린 사람들을 "나약"하다고 치부해버린다.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삶을 밝게 볼 수 없는, 그래서 사는게 오히려 죽음보다 힘든 사람들의 상황을 타인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배회>에는 죽음을 보지만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그’, '고모', ‘박 부장의 막내아들’은 살고 싶어 한다. ‘아들’과 ‘박 부장’의 선택이 죽음이었듯이 남겨진 세 명 나름대로의 선택은 삶이었다. 때문에 ‘그’는 아들의 친구를 위로할 수 있었고, ‘고모’는 끝까지 생명의 잉태를 꿈꿀 수 있었으며 ‘막내아들’은 죽은 아버지를 원망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계속해서 삶과 죽음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가 죽은 아들이 서있다는 고모의 말에 뒤를 돌아볼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인 것처럼 말이다. 삶이 죽음과 같은 무지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앞을 보고 살아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