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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페이지에 달하는 양을 때로는 버겁게,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궁금함으로 눈이 바쁘게 읽었다. 오랜만에 접하게 된 두툼한 두께와 가끔씩 '우수 학술 도서'의 이미지에 걸맞는 딱딱함에 압도당해 밥상 앞에서 먹기 싫어 엄마 눈치만 보는 아이마냥 께작대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두고두고 떠올릴 수 있는 양서임에 틀림이 없다.
방대한 분량에 비해 줄거리는 간단하다. 대지주 올워디씨의 집에 갓난 아이가 버려지고, 양자로 입양된 톰존스가 이웃 지주의 딸 소피아를 사랑하게 된다. 재산에 대한 욕심으로 소피아와 결혼하려는 블리필의 위선적인 행동으로 톰은 올워디씨의 신뢰를 잃게 되고 양자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소피아는 주위를 환히 밝히는 아름다움의 소유자로 자신의 미모에 절대로 누가 되지 않을 심성과 지혜를 가진 여성이다. 일찌기 블리필의 인간됨을 꿰뚫어보고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를 피해 런던으로 도피를 한다. 소피아를 쫓아온 톰과 많은 우여곡절 끝에 톰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소피아와 사랑을 이룬다. 주요 인물인 올워디씨는 너그러운 인품과 합리적 이성의 소유자이다. 올워디의 판단의 핵심축은 동기의 선악이다. 너무나 선명하고 투명한 근거! 만인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이 기준은 그것을 가진자의 강점이자 최대의 헛점이 될 수도 있겠다. 너무 맑아 속이 훤히 보이는 관계로 쉽게 예측당하고 악용되기 싶기에. 올워디씨 자신도 오랜 세월 블리필의 위선에 속아온 자신에게 놀라지 않았던가? 폭넓은 마음에 섬광같은 통찰력이 더해져야 선량한 심성이 제대로 진가를 발휘할 수 있겠다. 소피아! 참으로 이상적인 사람이다. 미모와 지성과 현상너머를 감지할 수 있는 촉각까지 가졌으니... 여성이 인권을 가진 존재로 인식이 되지 못하던 시대에 아버지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가출을 감행하는 여성! 작품이 발표되던 시절엔 꽤 말들이 많았을듯도 하다. 아버지가 정해진 배우자를 거부했다고 집에 감금되고, 독자적 생활기반없이 남자나 상속받은 재산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는 시대! 지주의 자선에 머리를 조아리고 구걸하듯 자선을 바라는 삶! 정당한 노동의 대가에 대한 개념도 없는 삶! 비참한 평민들과 여자들의 삶을 보며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평등, 선거권 쟁취를 위해 뭇사람들의 돌팔매질을 받으며 고생하셨을 수많은 선인들께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작가인 헨리필딩은 전지적 작가요, 해설가요, 작가의 변론인으로 어느 이야기에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리고 지금 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전개되고 있는지, 자신의 견해에 대한 입장과 이론적 근거를 끌어대며 논리적으로 풀어놓는다. 책을 읽으며 때로 짜증스러웠다. '대체 누가 물어봤다고 이렇게 구구절절이 변명을 늘어놓는거야? ^^' 알고 보니 이 책은 '오이디푸스왕', '연금술사'와 더불어 역사상 가장 완벽한 플롯 구조로 손꼽히는 책이었다. 플롯구조란 사건의 구조와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가, 사건과 관계된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나 외부 환경의 조건이 어떠한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적어도 플롯구조를 이해하고 읽었더라면 톰 존스를 읽는 재미가 배가 되지 않았을까? 플롯 구조를 위한 요건에도 불구하고 평가에 대한 지나친 의식은 헨리 필딩을 소심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이 책은 1700년대에 쓰여진 책이다. 책의 전면에서 풍겨져 나오는 서사시적인 분위기와 넘쳐나는 아름다운 묘사들의 배경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톰 존스는 영국 최초의 본격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고, 후대에 소설이라는 쟝르를 확립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필딩이 꼭 꼬집어가며 새로운 창작쟝르인 소설이라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는듯한 느낌은 작품을 읽는 내내 함께한다. 빼어난 묘사가 그렇고, 작은 현상에 대한 통찰력과 철학적 사고로의 연결이 그렇다. 불현듯 이 책을 영어로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살짝 고개를 든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묘사가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될까? 구절구절 영상으로 찍어 앨범으로 만들어 간직하고 싶던 아름다움들이 영어로 어찌 표현되었을지 상상하는 동안 괜시리 머릿 속이 춤을 춘다. 필딩의 소설이 이럴진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또 어떠하리! 풍부한 표현으로 영어의 질을 끌어올렸다는 셰익스피어! 원문들의 느낌이 마구 궁금해진다. 책은 18권(실제 책 권수가 아님)으로 되어있고, 각 권마다 서론이 나온다. 대부분 필딩이 잡지의 편집자를 할 때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권마다 서론이 등장하는 구성이 새롭다. 게다가 다양한 주제, 이론적 근거를 끌어오는 해박한 지식, 사고의 깊이에 입이 벌어질 뿐이다. 굳이 서론을 읽지 않아도 책을 읽는데는 문제가 없다. 또한 플롯 구조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지 않아도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굵은 뼈대만 간추리면 사랑 이야기인가 싶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그 분량이 아니고는 도저히 해결이 안될만큼 다양하다. 서론부분과 플롯 구조를 이용해 마치 할머니가 손주에게 삶의 지혜를 전달하듯 작가의 학문적 성과와 인생살이를 통해 건져낸 엑기스들을 받아먹지 못한다면 헨리필딩이 17세기에서 되살아나 버럭 소리를 지를것만 같다. 나 자신 이 책을 읽으며 50%도 이해 못했다고 생각한다. 곱씹어 볼 수록 의미가 새록새록 나오는 책이기에 시간을 두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읽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