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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말 나온 이 책은 2007년도 인터넷 언론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한 중심에 서있었지만,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정작 그 내용에 대해선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논쟁의 시작은 서평이었지만, 그 서평에서 논란이 된 것은 개인적인 단상으로 시작한 현실 정치세력에 대한 비평이었고, 그것이 저자가 고전 마르크스주의를 계승-발전시켰다고 평가하는 트로츠키의 역사적 행위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15년전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이 오타 및 중복 수정 후 실려있기도 할 정도로 긴 역사를 가진 논문이 여럿 실려있는 논문집의 성격이 있고, 저자는 논문들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해 왔으므로 내용에 대해서 그닥 말할꺼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제학비판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방법과 마르크스주의 역사를 복원하고, 이에 기초하여최근 우리나라 진보 진영의 지배적 경향들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오랫동안 공백상태로 남아있는 우리 나라 진보 진영의 마르크스주의 커리큘럼을 다시 채우는 자원의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이 책의 내용이 과연 저자의 의도를 충족시킬만한 것인지 그 내용을 살펴보며 검토해 보는게 의미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스스로 이 책을 읽으면서 독창적 그리고 인상적으로 느낀 부분에 대한 비평과 한 권의 단행본으로서, 그리고 한 학자의 꾸준히 연구 성과로서 이 책의 내용이 갖는 의미를 말하려고 한다.
제1장 마르크스의 경제 비판의 방법은 부제목이 스탈린주의와 리카도주의 비판이 잘 말해주듯이, 그동안 마르크스의 방법을 오해하고 왜곡해온 일련의 경향들을 자본논리학파의 입장을 대체로 수용하여 비판하고 있다. 논리역사주의는 자본의 서술방식을 역사적 진행과정의 논리적 표현으로 해석하며, 따라서 상품생산과 추상노동 범주를 초역사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스탈린주의자가 주장하는 '사회주의에서 관철 혹은 완성(?)되는 가치법칙'을 두둔하는 해석으로 귀결된다. 이런 주장의 근원은 소련의 로젠탈이나 독일의 홀쯔캄프가 대표적이지만, 엥겔스나 레닌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을 남겨놓았고, 책에서 나온바와 같이 자본논리학파의 원조라 할 수 로스돌스키 역시 이런 해석을 지지하는 언급을 했었다.(국내의 경우 더 무슨 말을 하랴~)
사실 이 장의 가장 독창적이고 인상적인 부분은 소제목인 '사회주의론 비판'이라고 생각되는데, 논리역사주의나 신리카도주의적 해석의 비판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며, 국외에서는 충분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장에서 저자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이 사적 소유를 폐지하면서도 자본주의로 남아있을 수 있고, 자본주의가 사적 소유 보다 소외된 노동에 기초한다는 입장이었음을 지적하며, 소유관계의 변혁(생산수단의 사회화)이나 분배관계의 변혁(계획) 그 자체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지양과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은 시장과 사적 소유로 환원되는게 아니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부와 노동의 형태
이 책의 각각 장들은 독립된 논문이기 때문에, 따로 읽을 수 있지만 얼핏 생각해보면 단점일 수 있는오래된 논문들이 최근에 나온 논문과 갖는 연관성에 주목을 해 본다면 좀 더 저자의 문제의식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와 같은 논지에서 아쉬운 부분을 지적하자면, 저자는 제1장 13번 각주에서알튀세르가 '자본 제1권 제1편의 가치형태의 분석을 평가절하하고, 신리카도 학파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론만을 진정한 공헌이라 인식하고, 노동의 이중성에 침묵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청년 마르크스와 중기 마르크스 간에 있지도 않은 '인식론적 단절'을 주장하며, 소외론의 의의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스탈린주의적 문제설정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어쩃든, 1장에서 정의한 '사회주의론'은 제5장 소련 사회의 성격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으로 이어지는데, 그는 마르크스 자신이 선언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 경향을 지적했었고, 따라서 마르크스적 의미의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점에서 스탈린주의 러시아는 사회주의가 아니었음은 매우 명확한데, 왜 그 체제가 자본주의인가에 대해 설명을 시도한다.
사실 저자가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의 입장에 서있다는 것은 이전부터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국가자본주의론 자체가 오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소련 사회성격을 21세기에 논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새롭게 더 나올 것이 있는지의문스러울수도 있겠다. 하지만, 스탈린주의 체제 붕괴 훨씬 이전에 나온 이론인 만큼 그 이후 접근할 수 있었던 '크레믈린 문서고'와 같은 새로운 자료에 의한 업데이트와 국가자본주의론 연구의 새로운 전개를 다루기 위한 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단행본으로서 이 책을 살펴볼 때 제5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토니 클리프의 사상을 소개하는 제13장과의 연계성이다.
13장은 1992년 이론지에 발표된 논문으로 이 책 중에 글 중 가장 오래되기도 하였고, 저자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이라는 한 국가 단위의 가치법칙 작동과 임금노동범주의 실존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즉, 세계체제 속에서 군사적 경쟁으로 매개해야만 가치법칙이 작동한다는 것이며, '다수자본' 범주에서의 경쟁은 소련 국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관 자체가 임금노동 범주가 없이는 성립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모순되는 점이기도 하며,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인 동시에, 이를 비판하는 논자들의 강력한 근거였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92년에 발된 13장에서는 소련에서의 임금노동 범주에 대해서 국제사회주의경향 내부에서도 논쟁이 있다고만 소개만하고, 덧붙여 배틀렘이나 샤방스 계통의 국가자본주의론을 간략히 소개하며, 마오주의적 소련 비판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2006년에 쓴 5장에서는 평의회 공산주의적 입장에 있는 샤토파디야(퀘벡사람이라 발음이 정확한지는;;;)와 함께 소련 국내에서의 임금노동 범주 및 경쟁, 가치법칙 등의 문제에 있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를 근거로 클리프의 주장 중 오류를 비판한다. 그는 배틀렘, 샤토파디야 등의 이론적 경향을 '일국적' 국가자본주의론으로, 클리프 와 IS의 이론적 경향을 '세계체제론적' 국가자본주의론으로 명명하고, 후자의 입장에서 전자를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는 소련의 붕괴를 설명하는데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하먼같이 1970년대 이후 서방 자본주의의 변화에 적응이 실폐했다는 외인론 보다 소련 국가자본주의 축적의 내적 모순에서 접근하는, 배틀렘 계통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점에서 하나의 단행본으로서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또 다른 장점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92년도에는 해외의 논자들이 이러저러한 쟁점에서 논쟁(캘리니코스)을 하고 있으며, 이런저런 이론이 있다라는 소개(배틀렘의 경우)에서 그치고, 소련 국내에서의 가치법칙 관철과 임금노동 실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적어도 '논문'을 통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약 15년 이후 그동안 접근할 수 없었던 소련 시절 자료들이 본격적으로 연구대상이 되면서 나온 새로운 근거들을 바탕으로 입장을 정립하고, 새로운 쟁점을 제기한다. 이는 저자의 연구가 오랫동안 일관되었으며, 학문적 성실함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며, 15년 전에 나온 13장이 저자의 말대로 유효성과 시의성을 잃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서문에서 '포스트스탈린주의'로 비판한 '알튀세르주의' 경향의 논자들이 주장하는 국가자본주의론의 결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데, 저자의 정치적 입장과 완전히 다르거나 적대적인 입장에서 근거한 각종 연구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례는 가치론 분야의 TSS 해석 및 참여계획경제 모델에서도 드러나고, '세계체제론적' 국가자본주의라는 명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실 9장은 '최근 좌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구조적 위기 종식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주 내용이지만, TSS 해석의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으로의 적용이 그림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폴리와 뒤메닐이 제시한 '신해석'이 사후적 정의, 불변자본의 가치 전형문제, 이원론이라는 신리카도주의적 문제설정 등의 문제와 비판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국가의 통계를 이용한 마르크스 비율의 실증으로 확장되어 큰 기여를 한 점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가치결정의 시간성을 표현할 수 있는 TSS 해석의 확장과 공황론에 대한 적용은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시도해 볼만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점은 TSS 해석의 주요 논자인 클라이만은 저자가 15장 '21세기 사회주의와 참여계획경제를 위하여'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칵샷과 코트렐의 '노동시간 계산모델'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논쟁을 주도한바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저자의 학문적 입장이 열려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되며,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이질적 조류에 대한 어설픈 종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5장의 내용은 '고타강령비판'의 해석 및 3가지 조류의 참여계획경제론 소개와 비판, 그리고 실행가능성의 검토인데, 저자는 일관되게
그리고, 저자가 서문에서 훗날 업데이트하기로 한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의 문제는 다른 무엇보다 참여계획경제모델에서 마르크주의적으로 심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시장을 존치한 사회주의 모델(최종 소비재 시장이든 중간재 시장이든)은 생태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생태적 관점의 시장사회주의론 비판이 가능하며, 자원배분의 동태적 효율성을 보장하는 기술혁신이 어떻게 그 기술에 영향받는 사람들과 생태계를 고려하며 통제될 것인가? 좀 더 나아가서 참여계획경제모델에서는 자본주의와 같은 생태적 위기를 발생시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지구온난화 문제를 얼만큼 효율적(투입하는 최소의 에너지로 최대의 사용가치량을 얻어낸다는 의미의)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적극적인 '증명'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보다 어떤 점에서, 얼마나 우월한지 증명하는 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정치적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쨋든, '고타강령비판'에서 마르크스가 인정한 '노동력의 질적 차이에 따른 분배의 차이'가 노동의 성과에 따른 분배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수 있냐는 쟁점에서부터, J. 그레이의 '시간증권' 유토피아 비판의 핵심인 '개별 노동의 사회적 노동의 전환 기준'의 충족 여부 등등 여러가지 쟁점이 남아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마르크스가 언급하기를 꺼려서 남아있는 문헌도 별로 없는 분야인 '사회주의모델'을 그려보는데도,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해석하고, 그 방법을 복원하는 데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방법의 복원은 훈고학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과 논쟁에서 재해석되는 것이며,저자는 이 책에 실린 논문들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한 여러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를 검토, 비판하는데 결국 저장의 주장은 마르크스 자신의 방법에서 일탈한 여러 시도들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보다 더 나은 점이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될 것인데, '경제학비판'의 범주에서는 1장의 내용처럼 가치형태론,물신성비판, 소외론의 변증법적 통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천적-정치적 측면에서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일것이며, '스탈린주의'의 왜곡에 맞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방어한 트로츠키를 통해 계승-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이론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검증'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추신 : "스탈린주의는 청산되기는커녕 알튀세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민주주의, 시장사회주의, 자율주의 등 '포스트스탈린주의' 경향으로 변이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진보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재영씨의 첫 서평에서 자의적이라고 비판했던 서문의 일부분이다. 저자 역시 책(14장)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국면을 극복하기 위해 트로츠키의 사상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저 문구는 부당한 평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결국은 방법론에 관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스탈린주의가 마르크스의 방법론을 왜곡하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했듯이, 마르크스의 방법론은 따르지 않으면서, 마르크스주의의를 계승한다고 주장한다는 의미에서의 '포스트스탈린주의'라는 규정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물론 나는 아직 위의 경향들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 하므로 저 규정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