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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할 것처럼 살아간다. 나에게 내일은 늘 다가오는 것처럼. 늘 주어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간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나의 어제는 그때 뿐이었다. 나의 어제는 더이상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 나의 오늘은 어떨까. 나의 오늘도 마찬가지. 오늘 주어진 순간이 내일 혹은 모레 다시 오지 않는다. 나의 하루는 그저 그 하루에 머물뿐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훗날에 가서야 느껴지는 게 그 때의 하루하루, 내가 살아왔던 순간순간이 굉장히 아름다운 나날이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작가의 책에서처럼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는 나에게 작별의 나날이다. 작별의 인사를 해야하는 나의 모든 하루. 나의 모든 하루를 작별의 나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오늘을 더 뜻깊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지내게 될까. 어쩌면 예전처럼 다시 그렇게 무심하게 보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서야 후회를 하게 되는 것. 나의 하루를 무심히 보내버렸구나. 나의 소중한 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보내버렸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를 깨닫게 하는 책을 만났다. 프랑스 작가인 알랭 레몽의 자전적 소설인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책이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어린시절을 이야기하는데, 유년 시절을 추억하게 되며 지나온 시간에 대한 애틋함, 그리움을 엿볼 수 있다. 유년 시절에 머물렀던 시골집에 대한 풍경, 형제가 하나씩 늘어갈때마다 집을 옮겨갔던 곳의 추억. 유년 시절의 추억은 우리를 과거로 흘러가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부모님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가족들이 함께 머물렀던 집을 생각할때 그때가 굉장히 좋았던 시절이며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는 걸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우리가 머물렀던 집에 대한 애틋함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살았던 곳을 지날때의 감정이라니. 우리가 머물렀던 흔적이 사라지고 없겠지만 아련한 눈빛으로 내가 살았던 집을 바라보게 된다. 남의 집인데도, '우리 집 잘 있나' 하고 창문을 바라보고, 집안의 풍경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아마 작가도 이런 감정이었으리라. 어제저녁, 이브가 트랑에 들렀다가 우리 집 앞을 지나왔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집에 지금은 누가 살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17페이지)로 시작하는 소설. 갑자기 책의 첫 문장을 읽는데 과거 내가 살았던 집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돌아가신지 몇십 년은 된 증조할머니와 살았던 오래된 집. 할머니와 함께 내다보았던 바깥의 풍경들. 유년 시절의 풍경이 마치 그림처럼, 영화속 화면처럼 펼쳐진 것이다. 누군가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많이 없다고들 하는데 이상하게 나는 네 살 적 기억들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과거의 기억들은 모두 그리움이며 애틋함인 것 같다. 아무리 아픈 기억이 있어도 현재의 우리에게 기억되는 건 모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인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거쳐 지금의 시간까지. 우리가 머물렀던 공간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의 삶을 함께 해왔던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생각해보면 늘 그리움이다.
쉰셋의 작가의 나이. 작가가 열다섯 살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가 쉰셋이었다. 아버지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얼마나 그리운지 모른다. 아버지를 사랑했던때,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지만 잠시 시간을 보냈던 때를 그리워하며,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도 몇번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그리운 것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것을, 아버지를 많이 사랑했던 것을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삶은 이처럼 흐르는 시간처럼 우리의 감정도 흐른다는 것을.
나는 종족을 초월하여, 종족의 그토록 강한 유대를 초월하여 나를 찾고 있다. 나는 나를 닮은 삶, 나라면 선택했을 삶을 찾아내고 싶다. (194페이지,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중에서)
오늘 하루 내가 살아가는 시간. 어제 나한테 소홀히 대했다고 해서 서운하지도 말며,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살아왔던 집의 추억들. 추억의 시간들. 다시는 가지못할 그리운 기억들. 나는 오늘 아침 하루를 시작하는 인사를 건넸지만 내일이면 돌아오질 시간을 시작하고 있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오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싶다. 돌아오지 않은 유년 시절의 추억들과 한 젊은이였던 때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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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소한 것에 삐치고, 한 번 삐치면 회복하는 데 아주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뒤끝도 한없이 긴, 배 나오고, 머리 듬성듬성한, 오십 넘은 쓸쓸한 인간.' 이것은 '아빠'의 새로운 정의다. 김정운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의 글 <왜 그래? 아빠처럼>에서 그의 가족들이 아빠라는 말에 담은 뜻을 이렇게 설명한다. 뒤끝 없는 사람도 있고, 머리 숱 많은 사람도 있고 근육질에 탄탄한 체형을 갖춘 아빠들도 있다. 가정마다 제각기 다르겠지만 '아빠'에게 적용되는 정의에 들어가는 공통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쓸쓸함일 것이다. 남자가 나이먹어가는 것에는 쓸쓸함이 따라다닌다. 중년 남자의 쓸쓸함은 가끔은 딱하고, 가끔은 애틋하고, 또 가끔은 안타깝다. 그들에게도 한 때는 사랑스럽고 달콤한 어린 시절과 북적이는 젊음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한 때는 부드러운 미소와 대화가 있었는데.. 이 책은 알랭 레몽의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과 함께 지나온 시간들에 바치는 연가다. 자전적 소설인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과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두 개가 실려있다. 두 작품 모두 모두 작가 알랭 레몽의 인생을 어린 시절부터 훑어 오지만, 서로 내용적으로 보충해주고 각각의 구멍을 메꾼다. 두 작품은 별개의 주제와 흐름을 가진 독립적 소설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가족과 더불어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더듬고,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보다 개인적인 이야기, 주어진 교육환경 속에서 어떻게 정신적으로 성장해나가고 사고의 틀이 변화해갔는지를 조명하고 소년시절을 거쳐 성인이 되고 작가가 된 이야기 모두를 담고 있다. 두 소설 모두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주 조금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실린 두 개의 개별적 소설 모두 아버지를 위해 쓰여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끝부분에서 그는 아버지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책을 썼다고 말했다. 트랭 이전에 살던 두 개의 집은 허물어졌고, 주무대였던 브루타뉴 지방 트랭의 집은 팔려버린 후다. 평생의 정서적 에너지로 남을 행복했고 아름다운, 그러나 상처로 얼룩진 어린 시절의 기억이 형성된 그곳에서 두려웠던 존재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서적 휴식처이자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정신병을 앓던 누이가 죽었다. 소설을 쓸 때 작가의 나이와 돌아가실 때 아버지의 나이는 쉰 세살로 같다. 꿈 속에서 그와 둘이 마주 앉아 그에게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아버지, 그는 아버지가 무엇을 기다리는 지 안다. 그는 아버지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용서?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열형제를 먹여 살렸다. 무엇을 누구에게 용서받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만큼 산 작가가 아버지와 풀지 못한 숙제는 무엇이었을까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자신이 살던 트랑이라는 마을의 집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덧없이 흐른 시간을 유일하게 품고 기억하는 장소가 집이다. 어릴 때 살던 집안의 구석구석에는 온갖 추억들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살던 식구들이 하나 둘 떠나고 명절이 되면 다시 각지에 살던 형제들이 돌아오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 집은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덧없는 곳이 되어 남에게 팔린다. 트랑의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10명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정겹다. 더불어 내가 살은 인생, 내 부모가 해준 부모가 살았던 인생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리서 이 책을 읽으면 그리움과 애틋함을 함께 읽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몇은 결혼을 하여 집을 떠난다. 그게 바로 삶이다. 어느 가정에나 있는 일이다 마치 땅거미가 내릴 때처럼 그 불확실한 순간, 하나의 역사가 끝나고 다른 역사가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이제 다른 방식으로 가족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추억과 향수의 몫을 인정하고 아직도 잘 짐작이 가지 않는 다른 것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혼자가 되셨다 109 부모와 10명의 아이들이 복작복작 모여 가족을 이루고 살던 정겨운 날들의 풍경은 한국전쟁과 급격한 경제 발전을 경험한 우리 부모세대와 많이 닮아 있었다. 부모와 아이들은 2차대전의 빗발치던 공습과 피난을 치렀고 빗발치는 전쟁의 포화속을 뚫고 모두 살아 남았다. 알랭의 가족과 비슷한 대부대의 가족 속에서 일찍 아버지를 잃고 국토의 최전방에서 가까운 곳에서 한국전을 치러냈던 내 엄마의 이야기와 겹쳤다. 늘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었다던 부모의 세대가 이제 겨울이면 뜨끈뜨끈한 바닥에서 자고 여름이면 쾌적한 공기가 습한 더운 공기를 차단하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알랭의 형제들은 수도도 전기도 없는 단칸방에서 오골오골 지내고 부엌에 목욕통에서 커튼을 치고 장작불로 데운 물로 차례로 목욕을 한다. 저녁마다 열명의 아이를 차례차례 한 명씩 매일 목욕시켰을 알랭의 어머니, 아침마다 여덟명의 아이를 깨워 수돗가로 업어가 턱받이를 씌우고 세수를 시켜 학교를 보내던 내 어머니의 아버지. 그렇게 자상하던 내 엄마의 아버지도 병으로 알랭이 아버지를 잃던 비슷한 나이의 내 엄마와 8형제를 두고 돌아가셨다. 처음 TV가 들어오던 날의 기억처럼, 처음 전화기가 들어오던 날의 기억과 처음 냉장고가 들어오던 날의 기억처럼 알랭의 시대에 처음 수돗물이 나오던 날과 처음 전기가 들어오던 날의 소란들을 아련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조금씩 문명의 이기들이 불편함을 대체하고 채워지는 과정은 언제나 정겹다. 행복이 공기의 입자를 타고 햇빛 비치는 창 가득 떨리는 먼지처럼 지면을 채운다. 그 정겨운 풍경속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다. 언뜻언뜻 비치는 희미한 그림자가 아버지의 실체를 암시하기는 하지만, 즐겁게 깔깔대는 대식구의 소란 속에 아버지의 이미지는 좀처럼 가시적이지 않다. 아버지는 이러한 즐거은 일상의 풍경의 반대쪽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아버지는 행복 속에 내재된 불행에 대한 기억이다. 심연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걸어들어가 검은 그림자를 조심스럽게 들춰내면 전투 장면이 재생된다. 티없이 맑고 행복한 어린 아이들의 눈에 비친 부모의 싸움은 평생동안 각인될 두려움이다. 전쟁마저도 영웅담이 되던 그 시절의 향수 속에 숨어 있는 검은 그림자는 바로 아버지의 존재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들어온다. 집에 와서는 어머니와 싸운다. 밤이 되면 아이들은 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를 듣는다. 환한 대낮의 유쾌함과 저녁 이후의 부모님의 다툼. 이렇게 아버지는 작가의 어린 시절을 두 종류의 질적으로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나눈다. 트랭에서 유년의 행복은 그 속에 내재된 더 큰 불행을 감추기 위해 더욱 강화되었을지 모른다. 어둠이 내리고 아버지의 존재가 고함과 욕설과 주먹질을 몰고 부부간의 전쟁을 향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아이들은 '계속 살아가기 위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온갖 의식의 놀이들과 마법의 세계에 들어앉아 행복의 문을 닫고 그 속에 꽁꽁 몸을 숨긴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칠듯한 행복을 이기지 못하며 매일 매 순간을 그윽하게 음미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저녁마다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모두가 다 함께 뜨거운 가족애 속에서 진하게 살고 있는 바로 그때 가정의 심장부는 모든 것이 타버린 재에 불과하다.75 가족들과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저녁 늦게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싸움만 벌이는 아버지의 전혀 다른 모습을 아버지가 입원한 병실에서 우연히 목격한 12살 소년 알랭은 충격에 빠진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대화를 하며 다른 사람을 웃기는 밝고 유머러스한 인기 만점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훗날 아버지의 장례식날 또다시 놀란다. 교회가 미어터지듯 도처에서 몰려든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받는 인물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원히 수수께키에 쌓인 채 돌아가셨지만, 그는 아버지가 가족에게 주지 않은 것, 파괴해 버린 것들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한다. 그의 죽음 이후, 더이상은 집안에 싸움도 폭력도 더는 없을 것임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하지만, 죽기 직전 한 명씩 아이들을 불러 표현했던 마지막 사랑의 말들로 그의 내부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을 어렴풋이나마 의식하게 된다.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하고 죽을 때에야 고백하듯, 간직하라는 듯, 남기고 간 표현. 아마도 그 때문에 그는 아버지 죽음 이후에도 숙제처럼 아버지에 대한 풀지 못한 감정들을 안고 살아간 듯하다. 두 분 사이의 그 전쟁에 대해서 나는 한번도 말해 보지 못했다. 그것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입을 다물어 버릴 수밖에. 그리고 침묵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간다. 그리고 너무 늦어 버린다 132 일상중 아버지의 부재는 어머니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한다. 어머니는 억세고 드센,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을 한국의 어머니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많은 자식들을 낳아 기르면서 집안을 쓸고 닦고 전쟁의 파편들을 기념품삼아 반짝반짝 윤기나게 닦고, 그 무거운 빨래들을 담은 수레를 끌고 빨래터까지 가서 깨끗하게 빨래를 하고, 꽃과 태양을 사랑하고 읽는 것과 쓰는 것을 좋아하고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과 서신 교환을 자주 하고, 어린 형제들이 마당에서 역할놀이를 할 때면 함께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내주곤 한다. 아이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즐겁고 재미있는 어머니가 있다.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이웃 사람들, 상인들, 지나가다 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축복받는 시간들을 공유한다. 바꾸어 말하면 어머니와의 유대 속에서 아버지는 설 자리를 잃었던 것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렇다. 어머니와의 강한 유대감 속에서 어머니의 적수가 된 아버지들은 낄 곳이 없다. 책임과 의무가 무겁게 눌렀을 때, 권위를 가장한 소외가 덩그마니 남겨진 것이다.
집요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그 이미지다. 저녁에 길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는 즐거움과 어머니가 부새 부인과 나누는 그 노래 같은 대화. 그것은 마치 단도로 곽 찌르는 듯 내 몸이 사방을 뚫고 지나간다.136 너무 좋았던 시간들이 이젠 다시 올 수 없으며, 영원히 하루하루 헤어짐이었음을 알기에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면 비수로 찌른 듯 아플 때가 있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머물러 있는 줄 알았던 어린 시절과 청춘을 하루 하루 이별하고 살고 있었지만, 이별을 깨닫는 건 훗날의 일이다. 장소에 대한 회상은 달콤하지만 아프다. 그 장소 속에 그 이별,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자취가 상실의 상처를 건드리며 가슴을 찌르는 아픔으로 되살아난다. 작가 역시 이제 트랑의 집이 팔렸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과거의 이미지는 자주 과장되거나 미화되지만, 미화 속에 있던 아픔까지도 아름다움으로 남겨지는 이유는 그 과거로의 지점은 이미 떠나온 곳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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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올리면 부모에 이어 형제가 떠오른다. 지금은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원래 집은 가족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 낯선 세상에서 가족은 최초의 내 편이다. 가족이라도 함께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즐거운 날도 많지만 전쟁의 날도 숱하다.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건 가족이라도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가족이 동상이몽 하며 지지고 볶으며 사는 곳이라고. 알랭 레몽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에는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책 제목과 같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과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가 그것이다. 두 소설은 작가인 알랭 레몽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알랭 레몽은 오십 년이 흐른 후 가족과 함께했던, 때로 가족과 분리되어 혼자였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두 편의 소설은 정치·사회적 변화의 물결 속에 그와 가족이 살고 머물렀던 집과 꿈을 찾아 방황했던 스무 살 무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난 이야기들은 기억의 왜곡과 상실 덕에 대부분 과장되기 마련이다. 지독하게 불행하거나 그리울 만큼 아름답거나. 그의 소설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모두에겐 지나간 시절이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고 이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았던 시절이지만 오늘의 나를 만든 시간이다.
그 집으로 이사 갔을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그렇게 따져보니 한 이십 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십오 년도 넘었다. 그렇대도 그 집은 우리 집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불청객들은 나가라, 감히 어디라고! 꺼지란 말야! 그 집은 당신네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이란 말야. 그 집에 살면서 겪은 일들이 너무 많고 너무 지독하고 너무 찐해. 거기서 우린 너무나 행복했어. 그리고 때로는 여지없이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 열 명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 전부. 그리고 부모님들도. 지금 나는 트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오래전부터. 집에서 먼 곳에. 그 모든 것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러나 가끔 브르타뉴로 다시 돌아가 트랑을 지나기도 하고 거기서 걸음을 멈추는 때도 있다. 떨리는 가슴으로 그 집을 지나는 때도 있다. 모르는 체하며 슬며시 창문 저쪽으로 눈길을 던져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창 쪽으로 가까이 가려고 하면 꼭 화상이라도 입을 것만 같다. 쳐다볼 수가 없다. 정말이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18-19쪽) 옛집에 간 적이 있다. 그 집은 새로 지어져 있었다. 태어난 집은 아니지만 여덟 살 여름부터 스무 살 봄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여러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란 단어에 떠오르는 집은 그 집뿐이다. 당시에는 그 집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에선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옛집에서의 내 부모님 역시 그랬다. 그것은 나에게 슬픔을 넘어 절망이었다. 잊었던 건 아니지만 그리움 앞에 절망은 무뎌졌다. 안 좋았던 기억들은 다른 집에서도 계속됐지만 특별한 기억은 그 집에서만 유일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집은 작았지만 있을 것이 다 있는 집이었다. 훗날 넓은 친구 집에 놀러 가기 전까지는 그 집이 작은지도 몰랐다. 그 집에는 마당과 옥상과 지하실과 다락방이 있었다. 그 집은 숨바꼭질하기 좋았고 보물찾기하기 좋았고 틀어박혀 책읽기 좋았다. 함께 했던 가족과 이웃들이 살지 않는 그 골목은 낯설었다. 다행이랄까. 그 골목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골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 골목 역시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 남은 내 기억의 조각도 사라질 것이다. 골목이 사라지는 건 차라리 낫다. 맘에 들진 않지만 다른 집들이 세워지니까.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나’는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 너머의 회상》에서 ‘나의 모든 하루하루는 작별의 나날이었다.’라는 글을 읽었다고 했다. 살아오면서 많은 이들과 이별을 했다. 어떤 이별은 언젠가 만날 거라는 기대를 품거나 잘살고 있겠지 여기며 살았지만, 어떤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었다. 조금씩 잊혀져 간다 /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의 일부다. 산다는 건은 결국 이별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지나온 시간과. ‘나’의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나의 부모님도 언젠가 세상을 떠나실 것이다. 노년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지만 재작년 가을 무렵부터 작년 봄까지는 아주 나빴다. 게다가 어머니의 건강 역시 안 좋았다. 아버지를 보며 돌아가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자식으로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다는 죄송함과 ‘내 속에서 나를 무섭게 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는 어떤 존재’(93쪽)가 있어 마음이 복잡했다.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추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지독한 현실 앞에 기억은 때로 길은 잃는다. 추운 날들이 이어지는 것을 제외하면 고요하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나’는 ‘산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 그들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148쪽)고 했다. 지금의 나는 이 평화가 지속하길 바란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길 바란다. 산다는 건 결국 이별하는 것인데 이별은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녜스, 자크, 마들렌, 베르나르, 그리고 나. 커버리고 나면 아이들은 더는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녜스는 어느 날 놀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크도. 어느 날 문득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비밀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걸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온갖 삶들을 마음속으로 지어내고 그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게 끝나버린다. 그냥 그렇게 갑자기 딱 멈춰버린 것이다. 놀이의 상실, 놀이의 망각, 나는 그게 바로 일생 중 최악의 날이 아닌가 싶다. 누구나 그런 날을 거치게 마련이다. 어느 날 내 차례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마지막 날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남김없이 즐겼다. 내가 기록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가장 오랫동안 즐긴 것이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느 날 내 또래의 친구 하나가 나를 찾아서 마당으로 왔다가 내가 마들렌, 베르나르와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쏘아붙였다. 아니 그 나이에 아직도 이런 놀이를 하는 거야? 그렇다. 아직도 그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런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된 그를 동정했다. 나중에, 그 울타리를, 그 경계를 넘어와버리면 끝이다.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결코.(「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40-41쪽) 파티는 끝났다. 내 몸이 겪는 고통의 여름.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의 부재. 목숨을 부지하고 견디는 일이 남았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깊이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사고가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던져놓은 것이다. 이것이 눈앞의 현실이다. 몽유병자나 자동인형같이 된 나는 이미 정상이 아니다. 나는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이다. 삶이 딱 소리를 내며 부러져버렸다. 사고가 나기 전의 삶과 후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생트 크롸, 나의 소명, 이런 것은 이제 다 지워져버렸다. 죽은 것이다. 끝난 것이다. 그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이 기적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 발, 다시 한 발, 하루가 지나가고 다시 또 하루. 내 나이 스물두 살. 삶은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255쪽) 그 시절은, 우리가 트랑에 살던 그 시절은 끝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집이 팔렸다. 나 역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간다. 나는 이제 트랑에 살지 않고 생트 크롸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물렝 베르를 떠난다. 물렝 베르에 살던 사람들 각자는 저마다의 시절을, 저마다의 시간을 마감하고 결국은 떠나버린다. 자신의 내면에서 작업이 끝났다. 다른 더 바쁜 일들이 생겼고 다른 욕구가 생겼다. 이제 나는 내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안느, 나를 사랑하는 안느와 함께. 이렇게 행복을 꿈꾸었던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생생하고 살아 있고 싶어 했던 한 젊은이가 살아서. 그러니 이젠 어서, 어서. 삶이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295쪽) 우리가 밭에 도착하는 바로 그 순간, 숲에서 암사슴 두 마리가 불쑥 나타나더니 바로 집이 있던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선다. 정확하게 집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다. 그놈들이 바르르 떨면서 우리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빗속으로 저만큼 달아나버린다. 달려라, 달려라, 삶이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304쪽) 내가 살아왔던 시간과 ‘나’가 살아왔던 시간은 다르다. 내가 살고 머물렀던 곳과 ‘나’가 살고 머물렀던 곳 역시 다르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도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작별의 나날 혹은 잠재된 작별의 나날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랭 레몽은 말한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사라진 것들은 다시 소생하지 않지만 삶은 여전히 기적이라고.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 기나긴 여정의 끝에 있는 것이 작별일지라도. 파티는 끝났다. 그러나 다른 파티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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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동이 아닌 고정된 삶이었다. 주어진 환경을 벗어난 적이 없다.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다. 내게 아버지는 아버지로만 존재했다. 소년이나 남자가 아닌 아버지로만. 알랭 레몽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버지의 집이자 내가 태어난 곳으로 나의 마음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집은 이미 사라졌다. 부모도 떠나버렸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한 과정이다. 그러나 사랑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건 인정하기 어렵다. 사랑에 대해 인색했다면 더욱 그렇다. 가족은, 그런 존재다. 서로를 사랑하면서 사랑에 대해 인색하다. 형제보다 부모에게 특히. 그들의 생 일부가 불꽃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열다섯 살, 아버지와의 이별을 슬픔보다 낯선 느낌일 것이다. 전쟁을 겪고, 아주 작고 작은 집에서 10남매를 낳고 키우며 삶을 지탱해 온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와의 다툼이 속상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아버지가 없다는 삶이 가져올 상실의 슬픔을 예측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가 있어 든든했고 영원히 곁에 머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말하지 못했다. 서툴게라도 말해야 했는데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자녀들이 그렇다.
‘칼을 산 것은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물어물 서투르게 속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 속에서, 부모님들 사이에서 난파한 사랑, 죽은 사랑에 대해서는 서로 간에 절대로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삼 형제처럼. 그리하여 각기 저 혼자서 침묵을 지켰던, 침묵 속에서 괴로워했던 삼 형제, 멀어져가는, 자신들 스스로도 물리치고 있는 그 아버지에 대해서 감히 말하지 못했던 삼 형제처럼.’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87쪽)
‘삶은, 진짜 삶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다. 그런 삶이 아닌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아버지 없이 혼자 사는 것 말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120쪽)
무뚝뚝한 아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버지의 삶, 그를 향한 사랑은 뒤늦게 찾아왔다. 원망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랭 레몽의 자전적 이야기라서 더욱 슬픔이 크게 밀려온다. 사라지지 않는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를 통해 부모, 형제, 고향에 대한 애틋한 애정을 만났다면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알랭 레몽의 청년기,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신부가 되기 위해 캐나다와 로마에서 공부를 했던 그가 다른 삶을 살게 된 과정, 아름다운 방황, 운명적인 사랑을 들려준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나는 아버지를 놓쳐버렸다. 나는 아버지를 그들처럼 알고 지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을 거야. 그렇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모든 사람들 속에서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301쪽)
상상할 수 없었던 소년이며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생경하다. 우리의 지난날이 그러했듯이 아버지의 삶도 그러했는 걸 뒤늦게 마주한다. 삶이 진행될수록 작별의 날들이 다가온다. 우리 삶은 작별과 동시에 전진한다. 어쩔 수 없다. 뒤늦은 이해, 뒤늦은 평안. 아름답고 찬연한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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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을 한 입 깨어 물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감각적이다. 마들렌의 맛과 홍차의 향을 좇으면 언제든 주인공은 과거의 한 시기로 여행을 하게 된다. 내가 살던 집을 통해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이 여행은 투박하면서도 허전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이미 누군가가 차지해 버려서, 그것은 한 때 나의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증명할 수 없는 일이다. 증명해 주는 흔적은 오직 나의 기억과, 함께 시간을 보낸 가족들. 그 뿐. 그렇다 그것이 전부다. 이 이야기는 그 흔적을 따라 잔잔하게 이야기 하는 알랭의 자전적 소설이다. 트랑에 들렀던 이브는 알랭이 살던 집을 지났왔었다고, 그 집엔 누가 사는 지 아느냐고 묻는다. 무심한듯 집에 대해서는 잊은척 하던 알랭의 기억은 순식간에 과거를 거슬러 오른다. 주인이 바뀐 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나는 더이상 과거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더는 과거로 돌아 갈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사 내가 그 집에 다시 들어가 산다고 하더라도 그때와 같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가 작별인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이 내 남은 인생의 첫날'이라는 그럴듯한 문구는, '오늘은 내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말로 대치되어야 한다. 남은 날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처음을 생각하는 것은 근사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무책임하다.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으로 지금을 기억하는 것이 나와 기억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진실한 예의이다. 하나 둘 떠나는 트랑의 집, 그리고 어느 순간엔 마지막 남은 가족마저도 머물수 없게 되어버린 그 집에 그들이 놓고 온 것은 집이 아니라, 인생의 한 부분이다. 유년의 한 축이 집이라면, 알랭의 나머지 한 축은 아버지였다. 그것은 덮어놓고 좋은 의미의 것만은 아니다. 열남매를 두고도 매일 밖으로 다니던 아버지, 돌아가시는 순간이 될 때까지 따뜻한 말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아버지는 좋은 축이 될 수 없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지만, 비중이 크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긍정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고, 이제 내가 그의 나이가 되어 옆에 앉아 있는 듯한 당신을 보니 이제 이해할 것도 같은 느낌이 든다. 신해철의 노래 '아버지와 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은 그 기억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의 영향을 축소시키고, 내 방식으로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제 알랭은 아버지를 이해한다. 아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항상 악역으로 존재했던 아버지를 이제 행복의 영역에 옮겨 놓고 비로소 아버지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이 책은 작가가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와의 평화로운 종전을 위한 조용한 평화 선언문이다. 알랭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생각한다. 아기들의 무덤에서 아기천사상을 수집하곤 했던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를 보낸다. 항상 뭔가 얻어가는 곳이라 생각했던 보물창고에서 보물을 놓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훌쩍 성장한다.
2006년 과학 학술지에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는 미국 여성의 사례가 처음 발표되었는데, 그녀는 모든 날의 모든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잊지 못한다는 말인데, 가끔 그것은 매우 큰 축복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픈 기억과 힘든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면서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 나간다. 특정한 순간의 기억과 괴로움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것은, 행복한 일을 잊지 않으면서 얻는 기쁨에 비해 더할 수 없는 고통이다. 모든 것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기 마련이다. 뭐든 들어왔다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삶이고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의 모음이다. 특히 감정에 있어서는 그것이 절실하다. 슬픔이 들어왔다면 그것은 어디론가 반드시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사람은 서서히 죽어간다. 하루하루가 작별인 나날들은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면서, 이제는 그것을 놓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보는 예쁜 강아지 같은 느낌이다. 다시 한번 그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기억은 내게서 서서히 빠져 나간다. 마치 모든 것이 잊혀지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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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로 쌍을 이루는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과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가 어린 시절 가족과 살았던 집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연대기적으로 외연적으로 회상하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그 시간 사이의 갭을 메우는 이야기를 다시 돌아가고 다시 돌아가면서 내면적 성장통에 섞어 펼쳐놓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전 이야기에서 10남매와 부모와 함께 살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의 이야기가 '비어' 있는데,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자신에게 비어 있던 아버지의 인생을 들추어 내어 그 속에서 자신의 젊은 날을 포개어놓는 이야기라고 보면 될까.
사실 비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표현은 아닐 지도 모른다. 사실 두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이미 갭이 있었다. 작가는 트랑에서 보낸 자신의 꿈 많고 자연회귀적인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시골 가정에서 누렸던 지상낙원같은 행복 속에 유일한 흠으로 아버지를 꼽는다. 10남매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도로공사 감독으로 일했던 아버지는 느지막에 들어와 집안을 한 바탕 뒤엎고 들쑤시곤 하였던 것이다. 자서전적인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 먼저 출간된 후, 이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그를 찾아와 이제 그가 놓쳤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모는 아버지가 모로코에서 군복무를 하던 당시 보냈던 편지들을 저자에게 보여주는데, 이는 저자가 평생 모르고 지나갈 뻔한 아버지를 알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그의 인생에 빠져 있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이야기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로 이어진다.
이 책의 첫 시작이 매우 낯익다. 저자는 기숙사학교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옛 친구가 그의 옛날 집 근처에 가 보았다며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더라라는 말로 그에게 과거를 환기시킨다. 그와 비슷한 경험이 우리 자매에게도 있었는데, 동생이 어느 날 우리가 20년 동안 살았던 집에 대해 궁금하지 않냐며 찾아가 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궁금해져서 일대를 돌아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 일대가 새로 구획, 정비되어 우리가 살던 집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그래도 우리 집을 헌 터에 새로운 주택이 섰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는데, 우리가 살던 집이 허물어지고 새로 지어졌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집에 우리가 아닌 다른 가정이 살고 있다는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보낸 가정 생활은 저자가 트랑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다른 남매들과 보낸 '신나는' 생활 같지는 않았다. 저자와 같이 '모험을 꿈꾸는 시절'에 살았던 집이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서울의 집은 저자처럼 시골 생활을 만끽할 수 있는 모험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저자는 수도도 없고, 화장실도 길 건너 가서 가야 하고 10명의 아이들이 남자아이들 방 여자 아이들 방에 나눠서 한 침대에서 엇갈려 자야 하는 불편한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2차대전을 겪었던 위에 다섯 남매들이 가사를 돕고 학업에 매진하는 동안 전후 태어난 아래 다섯 남매들(저자가 가운데에 속한)과 함께 저자는 암탉과 토끼가 뛰노는 마당에서, 빌카르티에 연못가에서 모든 순간이 마법과 같은 모험심 다분하고 상상력을 키우는 놀이에 열중하며, 서점을 겸한 잡화점에서 그림책과 모험소설을 읽으며, 몸과 영혼을 살찌웠다. 하지만 나이가 들자 가장 위의 아녜스가 놀이에서 이탈하고 자크가 그 뒤를 이으며 놀이의 감각을 잃는다. 이 이야기를 읽으니 빨간머리 앤의 자녀들 이야기 <무지개 골짜기>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신의 개성을 뚜렷하게 보이며 골짜기에서 함께 노는 두 가정의 사 남매들의 이야기에 얼마나 매료되었던가. - 이들의 이야기에 매료되면서 그 모험을 꿈꾸었던 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그 서울 집이었다. 서울 집은 그렇게 어린 소녀를 매료시킨 이야기들을 읽은 장소라는 점에서 소녀에게 잊을 수 없는 꿈의 집이 되었다. - 하지만 13세를 넘어가는 <무지개 골짜기>의 아이들처럼, 또 가난한 집안의 다자녀들이라면 달리 할 수 없는 초이스로, 남자 아이들은 장학생(대개는 수도회에 입소하는 조건)으로 기숙학교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가정의 보호와 자연 속에 뛰놀던 시절과 작별하며 규칙과 건조함 일색의 우울한 생활을 하는 단체생활을 하는 학교에서 비로소 사회를 맛보고 청소년기로 접어든다. 그리고 15살에 저자는 아버지를 잃고 그로부터 10년 후 어머니를 잃으면서 그의 인생 전반부의 종지부를 찍는다. 안타까운 것은 저자가 속했던 마지막 5남매의 첫째인 아녜스의 이야기인데, 마치 그 모든 어린 시절 행복의 이면을 담당해야 할 불운의 대상에 낙점된 듯 아녜스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정신병원을 전전하다가 자살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만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마치고, 이제 다음 이야기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로 이어진다. 모로코에서 군 복무를 한 아버지의 흔적을 보고, 저자는 자신이 보낸 알제리 시절을 떠올리며 둘을 아버지와 자신을 잇는 공통분모로 취합한다. 군 복무 대신 하는 2년 짜리 해외파견요원으로 알제리에 갔던 그에게 알제리 전쟁은 프랑스 인의 부끄러움으로 통했고, 그래서 그가 해야 할 일은 그 프랑스인들이 알제리 인들에게 한 잔악한 행위에 대한 속죄에 속한 것이었다. 그 알제리에 가기 전까지 그는 수도회 장학생 조건으로 입학한 기숙학교에서부터 줄곧 '신부가 될 생각'으로 신부 수업을 받고 있었다. 워낙 지적이고 실용주의적 좌파 사상에 젖어 있어서 '신화적'인 가톨릭 사상에 대해 동화되지 않는 저자는 주변인들의 의혹 속에서 꾸준히, 혹은 도중에 포기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라도 신부의 길에 매진한다. 그는 캐나다에서 수련 생활을 하고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2년을 공부한 후 알제리에 교육자가 되어 떠난다. 하지만 그의 성향은 전혀 체제순응적이지 않았고 진보적이었고 그래서 우연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저자가 일부러 필연을 부여한 교통사고를 계기로 신부의 '소명'에서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 아마도 파리 젊은이들이 반체제 혁명을 일으켰던 1968년 5월 혁명이 바꾸어 놓은 의식의 변화도 그 '돌아섦'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신부의 삶을 놓은 순간 저자는 밑바닥부터 다시 인생을 시작해야 했다. 저자가 살았던 모든 장소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다녔던 그 모든 시간, 그 모든 장소가, 저자에겐 진지한 성찰과 폭넓은 경험의 장이 되었다. 트랑은 물론이고 가톨릭 기숙학교가 있던 디낭과 생트 크롸 수도회 수련생으로 보냈던 캐나다에서, 자유로운 내면의 장을 확장시키며 사회당원 생활을 했던 물렝 베르까지, 그 어느 시절도 작가의 인생에서 무의미하게 남거나 버릴 게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어린 시절의 '끝'이, 아버지의 재발견(아마도 사랑일 것인)으로 그에게 비어 있던 '구멍'을 메움으로써, 그는 완전한 어른으로 이제 사랑을 향해 '삶을 전진한다'. 남성으로서 그에게 부여된 반쪽짜리 삶을 완성하고, 이제 나머지 반쪽을 찾아 그 반쪽과 함께 부부라는 완전체를 이루는 인생 후반부 삶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다.
클리셰와 같은 성장 절차를 예외 없이 보여주는데도, 그 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힘 있고 흡입력있는 소설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벌써 일상에서 보기 어려운 다자녀 가정이라는 예외 때문일까.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이 과장 없이 사실적으로 하지만 열정의 감미료를 쳐서 담겨 있다. 청년기의 고뇌를 담은 <한 청년이 지나갔다> 역시 매우 아름답고 삶에 대한 진한 열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의 소박한 모험과 자신 안으로부터 변화를 맞는 삶을 살고자 했던 청년의 방황이 그 모든 존재를 남김없이 소진시키는 청춘의 불꽃으로 한 때 불타오르다가 또 다른 인생의 시기를 맞이하며 사그라지는 것이...... 씁쓸하면서도 아련한 긴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사그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열정은 가슴 깊이 남아 그의 인생을 구성하는 핵심으로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한다고 한다. 사람들의 몸은 늙어갈지라도 영혼은 늙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보고 겪은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허무하지도 외롭지도 않다는 고흐의 말이 떠오른다. (이건 아트메신저 이소영의 '모지스 할머니의 행복'이라는 책에 있었던 글 같다)
본문보다 해설을 먼저 보는 독자의 허를 찌르는 역자 해설은 이 모든 이야기를 다 읽어본 후에 읽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책이 남기는 여운 속에 잠겨 읽어보는 역자 해설은 그 여운을 잡고 예기치 않은 진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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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무엇인가가 끝나버렸다는 것밖에는. 젊음이 말이다. 나의 젊음이. (p.294)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내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말과 글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 것, 머리가 하얗게 새어 버린 것 등 대부분은 무언가를 ‘잃은 것’의 형태로 나타난 그것은 간략하게 ‘청년의 저묾’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어떤 한 시기’의 종말을 맺게 된 것인데, 그것은 기실 나를 구축하고 있던거의 모든 것의 붕괴를 의미했다. 20대 중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밤을 샐만큼 일이 많았던가 아니면 잠이 잘 안 오는 밤이었던가 그랬을 거다. 아무튼 모든 식구들이 잠든 깊은 밤에 혼자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나갔다. 그 당시 살던 우리집은 거실과 주방 사이에 피아노가 있었고 그 위에 아빠가 학위 딸 때 찍은 사진과 내가 학부 졸업할 때 찍은 사진이 같이 걸려 있었다. 두 사진 모두 그 자리에 걸린지 꽤 됐었지만 한 번도 유심히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물을 마시며 벽에 걸린 아빠 사진과 내 사진을 유심히 봤다. 나란히 걸린 두 사진을. 그런데... 아...! 웃는 모습이, 눈매며 입매가 너무 똑같은 거다. 아빠가 웃는 모습이랑 내가 웃는 모습이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아, 우린 정말 부녀지간이구나.’ 그때 처음 깨달았다. 사실 그 즈음 아빠를 참 미워해서(엄마가 아픈 게 모두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용서할 수 없었다.) 아빠랑 눈도 안 마주치고 대화도 안 나누고 살 때였는데 그 사진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진이 참 마음에 든다. 아무리 무뚝뚝한 남자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한 여자('딸'이라는 이름을 가진) 앞에서는 웃게 마련인 것 같다. 이윤기 선생님이 저렇게 웃으면서 사진 찍은 건 내 기억으로는 저 사진이 거의 유일한 것 같다. 어색하지만 활짝 웃을 수 있는 건 옆에 딸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이 사진의 진정성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지만, 어쩔 수 없이 환하게 웃는 이윤기 선생님의 표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게 ‘아빠 마음’이 아닐까? 괜히 또 눈물이 날 것 같다. ‘아빠와 딸’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의 웃는 모습이 닮은 걸 보면 정말 신기하다. 이다희씨도 웃을 때의 눈매며 입매가 천상 아빠와 닮은꼴이다. 이런 거... 참 좋다. 감사하고. 그런데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이 ‘부녀지간’을 잃게 됐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끈끈한 인연인 것 같은, 하늘이 주신 선물인 그 관계 말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것이다. 한때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 ‘아빠’라고 불리던 그 사람을 말이다. 엄마의 죽음 이후 많이 힘들었던 건 엄마를 잃었다는 슬픔도 있었지만, ‘부녀지간’이란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랑에서의 행복, 내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셨던 그 행복은 거짓이었다. 그 행복의 내부에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 적절한 말을 찾아낼 수 있을지 그 지상낙원의 지옥을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p.72) 알랭 레몽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지상낙원에 드리워진 지옥’이라고 표현하는데, 내 유소년기와 청년기도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몸이 아픈 엄마를 대신해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 나는 유달리 아빠와 친했다. 대개의 아이들이 아프면 엄마를 찾으며 우는 데 비해 나는 “아빠”하며 울었다니, 내가 아빠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성인이 된 이후의 나, 그러니깐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도 아빠다. 책을 좋아하는 것,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 등등을 비롯해 라이프 스타일이나 가치관의 대부분은 아빠의 영향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빠를 그대로 빼다박았다. 그런데 ‘여성’으로서의 자각이 시작된 20대부터 아빠의 그늘에 있어 보지 못했던 엄마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여성으로서 엄마에게 동지애를 느끼면 느낄수록 아빠에 대한 실망과 서운함이 조금씩 커졌던 것 같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천국인 줄 알았던 ‘우리집’에 드리워진 지옥을 인지하게 된 것은. 어쩌면 그것은 실체가 있는 ‘무엇’이 아니라, 내가 ‘여성’으로서 점점 눈을 떴다는 것, 인간으로서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조금씩 아빠와 멀어졌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그 거리감으로 인한 아픔은 컸다.
놀이를 잃는 순간 아이의 삶도 끝난다. 그리고 그 이후의 남은 삶은 모두 작별의 나날이 되어버린다. 나와 아빠 사이도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일까? ‘아버지’라 불리는 한 남자에 대해 문득 문득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이해’라고 할 수 있을지, 우리의 관계가 엄마가 살아 있을 때처럼 회복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너무나도 닮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부녀지간’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애정과 미움이 혼합된 복잡미묘한 양가감정 속에서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C. S. 루이스에게는 젊어서부터 친했던 두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그 중 한 친구가 죽었다. 남은 둘은 많이 슬펐지만, 남아 있는 자들끼리 더 친해질 수도 있을 거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남은 둘은 결국 소원해지고 말았다. C. S. 루이스는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관계라는 건 그 자체여야만 존재 가능하다는 것, 그 중 하나라도 빠지면 절대로 그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어쩌면 내게도 그런 것 같다. 엄마와 아빠와 있을 때 우리 셋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어떤 것’이 될 수 있었지만, 엄마가 사라짐으로 인해 남아 있는 우리 둘은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무언가’가 되고 말았다.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재빨리 늙어버렸고, 그 이후의 나는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청년은 죽어버린 것이다. 화려한 유적
이윤학 무당벌레 한 마리 바닥에 뒤집혀 있다. 무당벌레는 지금, 견딜 수 없다 등뒤에 화려한 무늬를 지고 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은 줄곧 날개가 되어주었다 이제 짐을 부려놓는 무당벌레의 느리고 조그만 발들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고 있다 알랭 레몽의 이 소설에서 나는 ‘벌써 늙어버린’ 한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읽었다. 그런데 그건 바로 내 모습이기도 했다. 조로(早老)해버린 나. 바닥에 뒤집힌 무당벌레 같은 나. 엄마와 아빠는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이었지만, 이제 나는 과거의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들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나라 잃은 유민처럼, 돌아갈 곳이 없어진 나는, 찬란했던 그 시절을 아파하며 회고한다. 그리고, 그리고, 이제… 내겐 무엇이 남았을까
삶은, 진짜 삶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다. 그런 삶이 아닌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아버지 없이 혼자 사는 것 말이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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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서로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는데, 서로 알지도 못하는데 어쩌겠는가? (p.77)
나의 시골집은 매우 오래되었다. 할머니가 그 집에 사셨을 적을 기억하는데, 할머니 말로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외형이 바뀌어 기와를 얻고 시멘트를 바르고 입식부엌을 들이고 수세식 화장실과 세면실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집의 원형은 100년 넘게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 집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아버지. 아버지라는 이름의 한 남자말이다. 나는 아버지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 철이 들기 전부터 아버지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온 날은 무슨 일이 터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집안의 세간살이들이 날아다녔다. 아버지의 고함소리와 엄마의 울음소리.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 행해지던 폭력. 그걸 말리는 우리들에게 행해지던 폭력. 나는 맞는 게 두려워 엄마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는 걸 보면서도 문고리만 잡고 있었다. 소리내 울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며 제발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지 않길 바랐다. 내 유년은 온통 그런 기억들 밖에 없다. 술 마시는 아버지, 술 마신 뒤 고함치는 아버지, 물건을 집어던지는 아버지, 엄마를 때리는 아버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데다 얼굴까지 붉어진 아버지는 옛날이야기 속에서만 듣던 도깨비나 괴물 같았다. ‘저 사람은 진짜 우리 아버지가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진짜 우리 아버지가 아니기를 바랐다. 매일 엄마를 울리는 아버지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으니까. 그리고 나는 의식적으로 아버지란 존재를 지웠다. 아버지는 왜 가족들에게 그렇게도 폭력적이었을까? 술 때문에?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술을 마셔야만 했을까?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사는 게 힘들었던 것일까? 부모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나로서는 설명할 능력이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를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더는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에 아버지는 술을 마셨던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사랑이 죽어버린 것일까? 어린아이는 이런 의문들을 품지 못한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내가 겪는 것은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그 벽이었고 우리 모두가 굴러떨어지게 될 그 구렁텅이였다. 저녁마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면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고함, 욕설, 때로는 주먹질, 우리는 무서움 때문에 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캄캄한 악몽의 밑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pp.73-74) 알랭 레몽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읽다가 애써 무의식 깊이 숨겨두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고함과 욕설, 주먹질은 내게도 매우 익숙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서움 때문에 덜덜 떨리던 내 손, 싸늘하게 식었던 내 몸도 기억난다. 행여 내 울음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폭력에 나한테까지 미칠까봐 두려워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던 어렸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다. 나는 아주 빨리 어른이 되었다. 어쩌면 ‘어린이’라는 단계를 거치치 않고 바로 어른이 된 것 같다. 적어도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는 그렇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적어도 알랭의 유년시절은 지상낙원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을 아는 순간 천국인 줄 알았던 ‘가정’이 실은 지옥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지옥’을 경험한다. 천국이 될 수 없는 가정, 한 번도 천국이지 않았던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는 실질적으로 한 번도 ‘어린이’였던 적이 없다. 내가 바로 그런 아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동정하거나 연민하진 않는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더더욱이 나의 잘못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아주 덤덤하게 읽었다. 감정이입을 하거나 감응을 하기엔 내 기억과 추억이 지나치게 아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나는 아직까지도 ‘아버지’라고 불리는 한 남자를 용서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해해보려고 한 번도 노력해보지 않았던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에 이르러 이러한 생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봉투가 여기 내 앞 책상 위에 놓여 있다. 크라프트지로 된 두툼한 봉투. 나는 속에 든 것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그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손에 집혀 나오는 한 뭉치의 편지들. 보라색 잉크로 쓴 백 통도 넘는 편지들. 첫 번째 것은 1930년 11월 8일자이고 마지막 것은 1931년 8월 19일자로 되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그의 부모님과 누이 로잘리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모로코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내가 그 편지들을 발견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때 나는 막 책을 한 권 펴낸 참이었다. 우리 부모님 이야기, 우리 가족 이야기였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내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싶었지만 끝내 한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pp.157-158) 알랭 레몽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아버지’라는 이름을 떼어낸다. 그러자 ‘브르타뉴의 궁벽한 마을을 떠나 모로코에 오게 된 스물한 살의 젊은이’(p.159)가 나타난다. 스물한 살의 젊은 아버지라니! 알랭 레몽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스물한 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프랑스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모로코에 가 있다.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스물한 살의 젊은 아버지가 말이다. 편지 속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그곳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편지를 자주 해달라고 애원하며, 돈을 부쳐달라고 부탁한다. 이렇듯 철없는 젊은이가 열명의 자녀를 둔 가장이 되었다니, 상전벽해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다. 스물한 살의 젊은이와 알랭 레몽이 열다섯 살 때 죽은 아버지를 어떻게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술만 마시면 고함과 욕설, 때로는 주먹질을 일삼던 그 남자와 이 심약한 젊은이는 정말 같은 사람이었을까? 모르탱에서 겪은 진짜 가족 이야기는 전쟁이다. 모든 것을 발칵 뒤집어놓은 1944년 6월과 8월 사이의 그 몇 주일. 그리하여 그 작고 보잘것없는 집에서 살았던 여러 해의 삶을 가족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그 몇 주일. (p.22) 아버지의 청년 시절과 장년 시절엔 전쟁이 드리워져 있다. 전쟁을 빼놓고 아버지의 삶을 말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 동안 줄곧 나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들, 할머니들, 아주머니들을 보았다. 참호 속에서 죽은, 혹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죽은 남편들의 상을 영원히 치르고 있는 여인들. 그 남편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준 저 더러운 독가스. 무겁고 음산한 분위기. 틀 속에 넣어서 찬장 위에 걸어놓은 사진들, 가족들의 생명을 앗아간 재난의 추억. (p.26) 어렸던 알랭 레몽의 기억 속에서 전쟁이라는 것이 생명을 앗아간 재난의 추억 정도라면, 아버지에게 있어 전쟁은 좀더 실존적이고 처철한, 생사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모로코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했었을 뿐만아니라, 가족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두번째 전쟁에선 아내를 비롯해 가족을 잃을 뻔하기까지 했다!) 일생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겪었다면 그것은 한 개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을텐데, 그것은 대부분 매우 부정적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나 ‘트라우마’라는 것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내 아버지 역시 그랬다. 아버지는 1945년에 태어났다. 일명 ‘해방둥이’. 그러나 애석하게도 4.3 때 아버지를 잃는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채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없는 삶, 어린 나이부터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또래의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몰래몰래 숨죽이며 나누던 4.3 때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는 어떤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을까? 한때 나는 참 열심히 한국 현대사를 공부했다. 제주 4.3 민중항쟁에 대한 자료들도 많이 접했고 심지어 그걸로 논문까지 썼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열심은 ‘아버지’라는 한 남자의 삶을 이해하는 데로까지는 가 닿지 못했다. 나는 왜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걸까? 왜 한 번도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이 4.3의 이면이라는 걸 왜 인지하지 못했을까? 4.3과 한국전쟁이 가한 폭력이 아버지와 우리 가족의 삶에 스며들어 상흔과 고통을 남긴 것이라는 점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살면서 나는 한 번도 내 아버지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의 인생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과 트라우마를 말하면서도 내 아버지가 바로 그 희생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와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늘 가해자였으니깐. 유년의 기억은 그만큼 지독하다. 일생을 지배한다. 그 지난했던 시간 동안 아버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가족들 사이에서도 철저히 이방인으로 살면서 얼마나 고독했을까? 비로소 나는 나의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이자 한 남자로서의 아버지를 마주본다. 가엾는 한 사내. 우리는 트랑에 있는 집을 판다. 가족은 이제 전과 같지 않다. 그 시절은, 우리가 트랑에 살던 그 시절은 끝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집이 팔렸다. 나 역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건너간다. (……) 이렇게 행복을 꿈꾸었던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생생하게 살아 있고 싶어했던 한 젊은이가 살아서. 그러니 이젠 어서, 어서. 삶이 전진한다. (p.295) 아버지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계신다. 한 번도 ‘가족’이란 울타리를 느껴보지 못했던 그 집에서 아버지는 늙어가고 있다. 자식들이 빠르게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건너가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그 집에 머물렀다. 그 집에서 태어나 그 집에서 자라고 젊은이가 되었던 한 사내가, 열아홉에 결혼하여 스물에 첫 아이를 낳았던 한 사내가, 일흔이 되어서도 그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집’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하여, 그 이름으로 불리는 한 남자에 대하여 생각한다. 남이나 마찬가지였던 한 사내.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던 한 남자에 대해서 말이다. 이제 와서 감히 ‘이해’나 ‘용서’라는 말로 미화를 하거나 윤색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재빨리 늙어버린’ 한 남자의 삶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돌아보고 싶다. 그리고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아버지와 두 눈을 마주보며 “아버지”라고 진심을 다해 불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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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기억하는데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속에는 사람과 자신이 속했던 공간이 가장 큰 영향을 둔다고 생각한다. 알랭 레몽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잊을 수만 있다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저자의 자전적 소설로 자신을 포함 가족들의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했던 '집'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집이란 것을 다시 떠올리는 이야기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저자가 태어나서 아주 조금 지낸 집에서는 온 가족이 다 방한칸에 지내도 좋았다. 그 바탕에는 서로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중심에 있어서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통에서 살아남은 가족은 전쟁 난민 자격으로 방이 세 개나 되는 목조 건물로 이사를 한다. 새로운 집에서 화자의 동생들이 태어나고 그들에게 진짜 집이라고 할 수 있는 트랑의 집에서 소중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트랑의 집에서 더 이상 엄마, 아빠가 예전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남녀가 만나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마음일 것이다. 그 마음이 끝이 났을 때... 알코올에 빠진 아버지의 모습에 엄마는 물론이고 자식들에게 어떤 모습이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술에 빠져 지내는 아버지를 저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많은 자식을 키우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동안 TV 이를 통해 보아왔던 생활력 강한 어머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이들이 자라 학교를 다니면서 집을 나서게 되고 저자 역시 기숙학교에 입학하며 방학 때마다 트랑에 오게 된다. 넌 지금 여기 트랑에서 사는 네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라서 그래. 기숙사는 너무 우울해......... -p66- 왜 어린 시절부터 사람은 사랑하는 모든 것과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일까? 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p85- 아버지, 어머니, 예민한 누이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만 하게 된다. 지적인 싸움의 즐거움과는 별도로 '내가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이고 당연한 회의를 점점 더 강하게 느낀다. -p187- 형제자매와 뛰어놀며 즐거운 추억과 아픔 추억을 가진 트랑에서의 이야기와 선교사가 되어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닌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로 되어 있는데 두 번째 이야기는 자신을 한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가톨릭 학교에서 배우며 알제리로 선교사로 떠난 이야기 등...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과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저자처럼 예민한 사람에게 전쟁을 몸으로 느끼지 않았다면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그가 가진 배경으로 인게 믄학적으로 뛰어난 성장소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볼 때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생각이 나지만 속상하고 마음 아팠던 시간이 더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살면서 자신을 지탱해 주는 것은 현재의 모습이 바탕이 된 과거의 내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상처, 아픔, 고통을 갖고 힘들고 지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진실한 삶을 사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책이다. 지금의 내가 가장 젊을 때라는 말처럼 과거에 묶여 있기보다는 현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나와 내 가족, 지인, 친구를 아끼고 사랑하며 인생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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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하여 사랑을 받는 고전문학부터 지금 이시대를 그려내는 현대의 문제작까지 여러문학들을 모아서 펴내고 있는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 올해 읽었던 작품들 중에는 유난히 일인칭 시점으로 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듯이 쓰여진 작품이 많았다. [푸줏간소년]도 그랬고 [스톤다어이어리]도 그랬고 이 작품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집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심통이 난다는 김점선님의 작품소개에 이어지는 글은 역시 집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오래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자라고 그 집에서 살다가 그 집에서 죽는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집이라는 개념 또한 약간은 변해오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지금은 그냥 정착해 있지만 학교 다닐때는 참 많이도 옮겨다녔었다. 어렸을때는 아빠가 회사때문에 가시면 온 가족이 따라서 왔다갔다를 반복했었고 외국에 나가서 살 때에는 당연히 남의 집에 얹혀 살았고 돈에 맞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옮겨 다녀야만 했었다.
이 책의 주인공에게는 특별한 집이 있다. 자신의 가족이 모두 함께 살았던 행복했던 그 때를 나타내는 그 집.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는 남아 있지 않은 그집. 그 자신의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린 그 집. 그러나 자신은 영원히 그 집을 기억하고 그 집을 추억한다. 자신의 유년시절의 즐거움이 행복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이 책이 일종의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했다. 이 글을 쓰면서 부모님이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순간마다 그때 시절이 생각났고 기억을 되돌렸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작업이기도 했었다고 추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아련한 향수같은 것들이 묻어서 나온다. 소설 같으면서도 에세이같은 느낌이 곳곳에서 넘쳐난다.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써서 그럴까 자연스러움이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담담함도 느낄수가 있다. 최대한 자기자신의 감정을 누르면서 쓰려고 노력한듯한 느낌을 받을수도 있다. 전혀 객관적일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그속에서 혼자만 유영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자신과 같이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러난다. 그래서 읽는 사람들은 외롭지 않다. 작가가 혼자서 자기 멋대로 자신의 즐거움에만 빠져서 쓴 것같은 느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유년시절로 초대된듯한 느낌을 받을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어찌 즐거운 일만 있을까. 작가 또한 그랬다. 전쟁 중, 딱 한가운데 있던 집에서 포탄을 맞기도 하고 그럼으로 인해서 집을 떠나야 하기도 했었고 아버지로부터 시달리기도 했었다. 그래도 많은 가족들때문에 자신은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물도 나오지 않고 아이들의 인원수에 비해서 방도 모자라고 난방도 되지 않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행복했었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 아무것 없이 단지 모여있기만 해도 행복한 존재들 말이다. 서로 온기를 나주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면서 없는 것도 서로 보태가면서 살아가나가는 것. 그것이 가족과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점일것이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이 글을 썼다다는 작가. 두 편으로 이루어진 이 글의 첫번째 글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자신은 산 사람들, 죽은 사람들 그 모두와 평화롭게 니내고 싶었다는 그. 그는 과연 그 중간자 입장에서 행복함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앞의 이야기를 펴낸 후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앞의 이야기가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기의 이야기였다면 뒤쪽의 이야기는 그 후 청년기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두 편의 이야기가 맞물려서 한편의 자서전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앞의 편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뒤의 이야기는 역시 어머니의 죽음과 맞물려있다. 두 이야기의 분위기상 큰 차이점은 없다. 하지만 주인공의 나이가 든만큼 그만큼 격동적인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그 당시 상황이 그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러저리 방황하는 모습조차 그려내고 있다. 또한 자신이 추구하던 목표도 바뀌게 된다. 그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내었을까.
사람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루하루 늙어가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다. 즉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살아있는 한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인지도 모르겠다. 왠지 울컥하는 감정이 드는 것을 참아낼 수 있을까. 최대한 담담한 필체로 쓰여진 한 사람의 일대기를 좇아가며 우리 모두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임을 기억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