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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책은 사실 진지하게 읽은 책은 몇권 되지 않는다. (뭐 진지하게 읽지 않은 책이 있냐고 묻는다면 할말은 없다) 기껏해야 <미학 오디세이>를 읽으면서 감동에 파도 속에서 넘실거린 정도 혹은 <레퀴엠>을 읽으면서 그의 감각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느낀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진중권이 사회에 대해서 그것도 한국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을 나는 처음 읽는 셈이다. 사실 그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 (얼마전에 모 방송사 시사토론회에 나왔다고 하던데 못 봐서 아쉬웠다) 이 책은 나와 그가 오롯이 현실을 두고 마주하는 첫 책인 것이다. 잔뜩 긴장하고 책을 읽었고 심난하게 이 글을 쓴다.
진중권, 그의 한국 혹은 한국인에 대하여 내가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이야기한 책 중에서 가장 뼈져리게 느끼면서 읽었던 책은 박노자씨의 책이다. 한국 땅에서 살지만 어려서부터 자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뼈속까지 한국인은 아닌 제 3자의 눈으로 한국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참 뼈아팠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하철에서 저자 자신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줄테니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말을 걸던 청년을 보면서 그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읽는다고 말했다. 그의 책은 읽고 있는 독자를 - 만약 한국인이라면 더 하겠지만 - 엄청나게 불편하게 만든다. 한국에 대한 다소 심하다 싶은 글을 쓱쓱 이야기하는 그의 글은 한국인인 나에게 엄청난 부담이고 불편함이었지만 난 그 글 속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박노자의 시선을 읽었다. 그래서 그의 글은 그 불편함을 참아가면서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가치를 느끼게 했다.
진중권은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독일에서 오랫동안 유학을 하고 왔기 때문인지 제 3자의 시선으로 한국을 보겠다는 점을 강조한다. 책 표지에서부터 '한국인 낯설게 읽기'라는 문구를 넣어서 시작을 할 정도이니 그 자신감은 하늘을 찌른다고 봐도 좋으리라.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가능한 현재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되 그가 이야기하는데로 가능한 낮설게 읽기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때로는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도 있고, 때로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곱씹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진중권은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가 진정으로 많이 궁금했다.
수직적 위계를 위한 예법이 매우 복잡하게 발달된 한국 사회. 수평적 교재를 위한 예법에는 이렇게 구멍이 나 있다. 원래 전통 예법 자체가 신분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데다가, 근대화마저 군대를 모델로 하여 이루어지다 보니, 예법이 주로 수직적 위계를 세우는 데에 소용된 것이다. 그 결과 개인과 개인의 평등한 교제를 규제하는 품위 있고, 격조 있는 시민적 예법은 발달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 한국인이 느끼는 어색함은 거기서 비롯된다. (pp122-123)
진중권의 분석의 틀 - 전근대 vs 근대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가능한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한번쯤 이야기가 나올만한 것들이다. 군대, 매스게임, 짝퉁. 개똥녀, 황우석, 디지털. 이러한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기 위해서 그는 다양한 미학 이야기를 끌어오며, 다양한 논의 거리를 독자에게 남겨준다. 때로는 기막힌 그의 분석에 무릎을 치면서 읽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읽기도 했다.
내가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읽으면서 불편하다고 느낀 부분은 이 책이 한국인을 적나라 하게 이야기하는 것 때문은 아니다. 이미 한국인에 대해 낯설게든 혹은 그렇지 않든 이야기하는 책은 많이 읽었으니 그 점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흥미롭게 읽었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이 책에서 전근대 파트와 미래주의를 다루는 파트에 있어서 진중권은 전근대와 근대 나아가 포스트 모던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에 대한 부분이다.
서양에 비해서 한국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다양한 것들을 그는 지적한다. 서로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나 취미의 부재(無在), 구술문화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그는 끊임없이 전근대와 근대의 틀을 가지고 분석한다. 한국의 빠른 역사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그는 예법의 근대화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점이나, 섬세한 감각 능력이 한국 사회에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들어 문명화 과정이 덜 된 것이 아닌가라는 뉘앙스를 상당히 풍긴다.(나만 그렇게 느낀다면 정말 다행이다) 이러한 그의 분석틀은 서양의 근대화가 상당히 귀감으로 삼아야 할만한 기준이 되는 것이고, 그러한 틀로 한국 사회를 분석함으로써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수긍이 가지만 소위 뒤끝이 찝찝한 것이다. 다소 서양 위주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려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 부분에서 그 찝찝함은 때로 씁쓸함이 되기도 했다.(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표현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야 하는 이유 다소 뒤끝이 찜찜하고 심지어 씁쓸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 찜찜함을 참고서라고 읽을만한 섬세함이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섬세하게 현대 앞만 보고 달려가는 한국 사회를 붙잡고 이리저리 이야기를 걸고 있는 것이다. 미학자라는 독특한 시선이 한몫 하는 것이겠지만 그의 글에서는 지금까지 진보 논객들이 제시 하지 못한 시선을 느끼게 한다. 짝퉁 강국 한국을 분석하는 그의 시선이 시뮬라스크에서 올지 예상도 못했으니 그 신선함은 말할 수가 없었다.
시작할 때 한 이야기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박노자를 곰곰히 생각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심난하게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내가 박노자의 글을 읽으면서 짜증을 내고 심지어 '그렇게 싫으면 한국을 떠나던가'(그는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라고 이야기 하면서도 계속 읽는 이유는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사람을 연구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것을 고민하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인문학을 기초라고 하는게 아닐까? 진중권씨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시선에서는 '온기'를 찾기에는 날이 파랗게 선 칼날 같았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그의 글을 불편하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선은 날카롭고 탄복할만 했으나 뒤에 남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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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프로그램에서 영화 '디워'로 100분토론을 할 때였다. 토론자로 진중권씨가 나왔는데 토론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몇 년간 고생해서 만든 '헐리우드에 진출한 한국영화'를 비평했으니 애국자들의 들고 일어날만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보면 공감하는 부분이 없잖아 있어 그가 지은 책을 찾아보았다. 미학을 전공했음에도 사회에 관한 특히 한국현대사에 관한 책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 눈에 띈 책이 '호모코레이아쿠스'.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나올 법한 '호모 OOO'라는 이름에 코레아니쿠스라는 한국인의 학명이 들어간 것이다. 인종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듯이 한국인종에는 한국인만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지은이는 코레아니쿠스라는 한국인종을 적은 듯 싶다. 하지만 지은이는 한국인종의 특수성을 '국민성'이 아닌, '하비투스'라는 개념을 들고 나온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습속'이라고 하는데 국민성은 아니지만 무언가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몸에 배인 습관같은 느낌이다. 그 느낌은 무엇일까? 우선 급속한 근대화로 인해 우리의 몸은 근대화와 전근대화가 섞여 있다. 서양에서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것을 수십년만에 해낸 우리 대한민국. 근대화 과정에서 농경민족이던 우리의 몸은 기계에 몸으로 바꾸어야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급속하게 진행되어 몸은 미처 근대화된 몸으로 완전히 바뀌지 못하여 몸 속에 전근대적 습속이 남아있게 되었다. 지은 이는 우리 '한국인의 모습'을 프랑켄슈타인에 비유하였다. 또한 우리는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근대화 과정의 '군대화'는 서구의 근대화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중세 유럽귀족의 예절은 근대 일반시민에게까지 확산되었지만 우리양반사회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와 6.25, 산업화를 거치면서 양반의 예절은 사라지고 서구의 예절이 그 자리를 매웠다. 그나마 전통예절로 내려오던 것들도 본질은 사라지고 그 껍데기만 남았을 뿐이다. 즉 '전통과 단절된 근대화'이다. 마지막으로 전근대와 근대의 몸이 공존하는 우리의 몸은 정보화 시대를 맞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전 산업사회의 특징을 문자, 숫자로 할 수 있다면 정보화 사회의 특징은 탈문자, 숫자화이다. 따라서 영상적 요소가 강조되고 일방적 소통이 아닌 인터넷이라는 다방향적인 소통을 하게 되었다. 아직 전근대적인 몸이 남았이어 문자, 숫자에 익숙치 않은 우리의 신체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사회에 서구인에 비해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우리의 몸은 전근대적인 몸과 근대적인 몸 그리고 정보화시대의 몸이 섞여 있는 상황이다. 이 몸으로 우리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는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미래에는 섞여 있는 우리의 몸을 조금씩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이상적인 몸으로 지은이는 차차 전근대적인 신체의 비율을 줄여 나가라고 조언하고 있다. 또한 지은이는 정보화 사회가 되더라도 그 기반은 근대사회의 문자,숫자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가올 미래사회를 대비하여 '나 자신을 디자인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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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노동시간(47.6시간)을 소화하고 있는 '산업 전사'들. 어떻게 하면 서로 편하게 더불어 살까를 걱정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남들의 위에 서느냐를 고민하는 사람들. 천민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원초적 폭력의 세계에서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선택하는 다수에의 편입, 쏠림에의 쏠림.
미학자 진중권은 이 책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박정희/전두환식 군사 정권과 '기적'으로 미화된 강제적 근대화 건설 시대를 겪은 한국인들이 왜 이토록 치열하고 몰인정하게, 또 왜 그토록 여유롭지 못한 패닉 상태를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또는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를 수 십개의 특징적 키워드를 통해 냉철하고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
언뜻 강준만의 '한국인 코드'와 비슷한 코드인 것 같지만, 강준만이 정치적인 시선으로 한국인의 특성에 접근한데 반해 진중권은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담부터 객관적 역사 사실, 철학적 이론, 미학적 비유 등 자기가 가진 지식과 자료의 메스를 총동원해 한국인의 일반화된 의식과 특징을 갈가리 찢고 발기는 것이다.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 공감하였고 많은 부분에 내 치부도 상당수 있어 부끄럽고 때론 화도 났다. 그 동안 내가 이렇게, 이런 곳에서, 겨우 이따위로 살아왔단 말인가, 라는 자각도 후회도 아닌 인식과 인정을 반복하며 이 사회의 현재를 냉소했고 이 나라의 역사를 원망하였다.
혹자는 일본의 선진 문화와 한국의 후진 문화를 비교하며 한국의 치부를 자연스레 도출해내는 진중권을 '좌파 매국노'라며 입에 거품을 물지만,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으로 자국의 후진성을 선진국의 그것과 비교하여 깨닫게 하는 행위에다 그런 식의 비판을 가하는 그들이야말로 덜떨어진 '우파 꼴통'이라고 나는 부르겠다. 도무지 논리와 합리가 없는 그들의 맹목적 전체주의 발언은 들어도 들어도 납득도 가지 않을 뿐더러 들으면 들을 수록 짜증만 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책에서 진중권이 틀린 말을 한 것이 뭔가. 책 안에는 학문적, 경험적 근거가 충분하며 책 밖에는 그걸 읽는 사람들의 수많은 경험들과 공감들이 즐비하다. 나는 그저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뭔가 분명히 잘못 돌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바꿀 생각도 능력도 없는 기성 세대들에게 맡기고 조아리며 살게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우리부터라도 바꿔 보자, 다짐할 수 있는 불씨가 이 책으로 지펴졌으면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진중권은 이 책에서 한국인을 비하한 것이 아니다. 외려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묻으려하는 '비하되고 있는 한국인(한국 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발하고 고민하여 더 이상은 무시당하며 살지 말자는 '진정한' 애국적 제안을 하고 있다. 부디 그의 사상적 취향이나 '색깔'만으로 저러한 공평하고 논리정연한 주장을 무시하려들지는 말자. 할 말이 있으면 그처럼 다시 수 십개의 반대 코드를 놓고 하나 하나 논리적으로 반박해내면 그만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도 이 책 속의 '비참한' 한국인임을 인정하고 진중권과 그의 생각을 지지하고 동조하는 모든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고민하고 반성하도록 해보자. 그것이 곧 애국이요 선진국으로 가는 첩경일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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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을 그 집단의 눈이 아닌 집단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살펴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마도 생경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너무나도 익숙하게 혹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나도 낮선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진중권의 이야기는 바로 여기 집단을 벗어나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속해있어 생각하기 힘든 한국인 , '한국인 - 호모 코레아니쿠스'을 말한다.
흔히 민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진선생은 거부하고 다른 단어를 제시하는데 하비투스다. 흔히 습속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하비투스란 말을 쓰면서 민족성이란 것이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습속이 굳어져서 예전부터 그러했다고 믿어서 생기는 민족성이라는 개념으로 굳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만하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인의 습속을 살필 때 가장 중요한 도구는 상대성이다. 진선생은 독일 유학을 통해서 상대성을 확립한다. 이 상대성은 다시 낮설게 보기라는 도구로 재구성된다. 낮설게 볼 때 그 집단이 다른 집단과 가지는 이질적인 습속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선생의 글은 짤막짤막하게 분절되어 있다. 군살이 하나도 붙지 않은 날렵한 문장을 구사하고 하나의 소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방만하지 않다. 짧게 이야기할 것은 짧게 이야기하고 깊게 이야기할 것은 깊게 이야기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일련의 사건들을 한국인의 감정과 정서에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건조하게 읽어낸다. 건조하게 읽어낸다는 것은 건조함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실과 과학적 증명 밖에 없다.
근대성 전근대성 미래주의는 각각의 파트지만 서사적으로 이어져 있다. 각각의 장마다 읽을만한 꼭지가 있게 마련이다
근대주의에서는 신체에 대한 이야기가 읽어둘 만 하다. 마지막에 언급되는 내용인데 신체의 자본화를 이야기한다. 신체는 자본화되고 이렇게 신체가 자본화 된 것은 시선의 권력 때문이라고 해두어도 좋은데 이러한 시선의 권력을 주도해온 사람들이 남자라는 족속들이다.
전근대성에서는 밴다이어그램 챕터를 읽어 볼만 하다 벤다이어 그램은 교집합을 가진 집합의 의미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경계라고 봐도 좋다. 한국과 유럽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고 해야하나 명확히 이야기해보자면 동양과 서양의 하비투스의 이질감이라고 말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미래주의에서는 시뮬라시옹과 시뮬라르크 원본의 복제와 복제의 확산 복제품의 원본화에 대한 이야기도 진행되고 키치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그중 짝퉁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는데 시뮬라시옹과 시뮬라르크의 개념을 잡기에 적당하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글쓰기의 르네상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읽어볼만한 기사다.
이 책을 읽다보면 독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독일 유학 때의 일을 예화로 들면서 글을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다. 비틀어 생각해보면 비교하기 위해서 끌어온 것이 아니라 넘치는 독일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당사자만이 알 일이다. 진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생뚱맞게도 전혜린 - 전혜린의 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전혜린은 병적으로 독일에 대한 향수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생각났고 , 박노자 홍세화 등의 이름이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특히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1,2>은 연관지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외국인이 자신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것과 한국인이 다른 시선을 꾸며 읽는 것이 어떤 차이점을 나타낼지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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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중권씨의 팬이었다. 지금은 좀 시들해져서 과거형을 쓰고있지만 과거 꽤 열렬했던 팬으로서 애정은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어, 그의 신간은 모두 사보곤 한다. 그의 책은 한 때 내게 인문학의 꿈을 꾸게 했고, 사회를 다르게 보게 했으며, 호흡을 사용하는 글쓰기를 배우게 했다. 그는 삐딱한 불평분자의 역할을 멋지게 수행해냈고,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그는 그간 많은 발언을 했고, 많은 칼럼을 썼고, 많은 책을 펴냈다. 독설적이고 풍자적인 그의 글은 자주 화제가 되었다. 미학을 다룬 일부를 제외하면 그의 글의 상당수는 다 [여기 한국]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 한국의 삐뚤어진 박정희 찬양론에 대한 반발(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로 시작된 그의 시사평론은 레퀴엠, 시칠리아의 암소, 폭력과 상스러움 등으로 계속 이어져왔다. 그는 고전을 교묘히 인용하며 한국사회를 빗댔다. 폭력과 성스러움을 꼬아내는 폭력과 상스러움. 한국사회의 야만성에 대한 일갈. 그야말로 진중권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멋진 말장난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가 한국인을 다루는 책을 냈다고 했을 때는 의아함이 먼저 다가왔다. 그는 지금껏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이야기 해왔는데 굳이 책을 따로 내어 [호모 코레아니쿠스] 즉 한국인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의문은 상당히 맞아들어갔다.
안타깝게도 진중권의 책을 섭렵하는 팬들에게 이 책은 그리 환상적인 선물상자는 아니다. 그가 이 책에서 주제로 잡아낸 한국인은 전작에서도 늘 보아온 그 한국인일뿐이다. 전근대, 근대, 탈근대가 뒤죽박죽으로 섞인채 문명과 야만 사이를 오가는 모습이다. 우리는 그의 전작에서 그가 인식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충분히 보아왔기에, 이 책에는 (그가 책에서 한국을 대상으로 시도하는) '낯설음'이 없다. 진중권이라는 필터를 거친 한국이 익숙한 표정으로 서있을 따름이다.
이 책의 새로움은 도리어 낯설게 보자는 목표 아래 냉소하지 않으려는 진중권의 노력에 있다. 날아갈 듯한 호흡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비웃고 그러느라 지나치게 가볍다는 평가를 받던 그의 목소리는 이 책에서 꽤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방인의 차분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한국을 설명해보고자 애쓴다. 그러한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이 책에서 톡톡 튀는 말맛을 절제시키고 독자를 내용에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책은 한국에 대해 일부 칭찬하고 -다이나믹한 한국은 재미있고, 타인에 대한 순수한 친근함을 표하는 게 가능하지만- 일부 비판하는 -바쁜만큼 피곤하기 마련이고, 타인의 공간에 대해 침해하지 않으려는 배려가 없다- 식의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보다 많은 독자를 포용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전히 그의 책엔 눈에 띄는 지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이 열렸을 때, 남한 남성들은 경기보다 북에서 온 응원단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조선일보>의 우려대로 과연 유미주의는 반공주의를 압도해버렸다. 유전자처럼 뿌리깊은 레드 컴플렉스도 '미'라는 가치 앞에선 무력했다. 여기에는 어떤 통쾌함이 있다. 하지만 그 통쾌함 이면에는 극성스러운 반공주의조차 압도해버리는 막강한 남성주의적 시선의 권력이 있다. 바로 이것이 한국 여성의 성형수술과 다이어트가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 더 처절하고 필사적인 이유일 것이다.pp.78-79] [그래선지 한국에 돌아와서 유난히 자주 듣는 말이 '감동'이다. (...) 정치의 영역에서 노무현씨가 대통령후보가 되고 당선까지 되는 과정은 '감동적'이라 묘사되었다. 정치인의 말도 논리적 옳고그름이 아니라 이른바 '진정성'에 따라 평가된다.pp.95-96] [한국음식은 매운 맛이 강하다. 이 역시 엄밀히 말하면 미각이 아니라 통증에 가까운 촉각이라고 들었다. 이렇게 한국의 음식문화는 촉각적이다. 맥루언의 표현을 훔치자면 한국에서 '음식은 마사지'다.p.148] [과거에 문자는 소통매체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오늘날 문자는 소리와 영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 아직 문자문화가 충분히 무르익지 못한 후진성이 외려 문자문화 '이후'를 만들어나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잔혹하기 짝이 없었던 역사가 한국에 보여주는 약간의 공정함이랄까.p.187]
그러나 그가 다루는 주제는 한국인의 음식, 한국의 성형, 한국부모의 치마바람, 한국의 IT기술, 줄기세포사건 등이다. 기존의 한국분석서나 여러 칼럼(특히 진중권의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는 꽤 익숙한 소재이다. 게다가 문화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이나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 역시 접한 바 있을 것이다. 그만큼 신선함을 포기하고 시작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깊은 분석까지 파고들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연예인의 성형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를 중세 종교재판에 비유하며 ['진실'을 추적하던 중세의 종교재판관들이 되살아난듯 하다. '나는 묻노라(inquisitio), 그대의 가슴은 성형인가, 자연인가?']라고 글을 맺는다. 그의 의도는 충분히 파악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아쉽다.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짚어낼 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그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내면을 파헤치고 후벼내면 안되는가? 그릇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과감하게 한 자 더 파들어갈 수는 없었을까. 소재 하나마다 부여되는 짤막한 글길이에,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에 감질맛이 계속 맴돌았다.
나는 이 책을 그를 처음 접하는 중고생에게 권해주고 싶다.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국분석을 원하는 일반독자들도 괜찮을 것이나, 청소년들이 더욱 반색할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책이 남겨준 흥분과 덮어야하는 아쉬움이 교차하는 상태로 그의 다른 책을 찾아보기 시작하면 당분간 꽤 멋진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훨씬 자극적인 글도 썼다는 사실에 기쁨을 누릴 것이고, 미학과 미술사도 매우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진중권 읽기의 부수입으로 논술답안에 써낼 적당한 멘트를 챙겨둘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그의 책을 죽 읽어온 사람들에게는 어서 읽어야지! 라는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저 그가 그리울 때 가벼운 기분으로 되새김질하면 되겠다. 안다, 그의 팬인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일단 사서 읽으리라는 걸. 이렇게 써놓은 나도 여전히 그의 새 책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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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이해와 절반의 아집으로 구성된 불편한 책!
뒤틀린 단상의 연속, 그리고 천박한 보수 좌파(저자는 자신을 좌파라 명시하고 있음)의 산만하고 허접한 자기비하의 나열과 서구 역사의 우월을 찬양하는 내용이외에는 어떠한 내용도 찾아낼 수 없었다. 사족같은 에필로그로 마무리되는 이 저술의 의도가 무엇인지 책을 읽는 동안 이처럼 불편함이 가시지 않은 책은 실로 오랜만이다.
우리의 근대화와 관련한 저자의 역사인식은 일부 편협된 서구학자의 시각을 빌어 시종일관한다. 에피소드는 기업들의 상상력을 비하하는- 인사하는 동작을 형식화한 고문(?)기계(조형물?)의 등장-무지한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비웃음을 보낸다.
문명화를 이야기하는 곳에서는 우리의 초상이 저자의 가이드경험에서 마주친 상스럽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계층들의 행동에서 비롯되어 오감, 취미에서는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을 인용하여 문명적으로 미개한 민족으로 몰아부친다.(대다수의 한국인은 밥을 쩝쩝대고 먹지 않는다.일본인들이나 후루룩 쩝쩝대지...)
이 책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한국인의 보편적 의식과 행동양식의 통찰을 통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제언을 기대해서였다. 그러나 이 책은 박정희시대의 군사문화가 우리의 근대화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논리와 황우석사건의 국민적 실패를 책장 도처에서 거봐라 꼴이 그게 뭐냐는 식의 제3자적 시각에서 역시 비아냥을 내뿜는다. 이는 저자가 북한의 여성응원단을 향한 조선일보 기사를 비웃는 보수 우익의 논리와 다름이 없다.
저자는 또하나의 큰 줄기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문자문화와 구술문화의 차이점에서 오는 문명사적 시각이다. 우리에게 문자문화가 완전히 체화되기전에 제2의 구술문화 융성기에 처했음을 문제의식과 이의 지적을 통해 미래에 대한 방향제시를 하고 있다. 또한 짝퉁문화가 가지는 다양한 시각, 아우라의 파괴와 같은 우리의 천박함에 대한 시사는 그나마 저자가 애초 지녔던 저술의 진심을 엿볼 수 있어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호모코레아니쿠스"는 저자가 현정치세력의 옹호와 야권세력의 비하를 중심사고로 하였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책의 언급만으로는 호모코레아니쿠스가 19C에 불현듯 나타난 종족이란 이미지를 지울수가 없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언급하였던 민족성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부정적 의미와 정체성이라는 이념적 형식을 배제하고 "하비투스"(습속)에 대한 순수한 통찰적 의미를 견지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우파,좌파의 논리에 메달린 인상은 정말 아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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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대표 논객.. 진중권만한 말쟁이가 있을까.. 자신의 주장을 유머를 섞어 발랄하게 펴면서도 상대방의 약점은 정확하게 파고드는.. 가끔.. 천재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미학오딧세이도.. 참 재밌었고... 춤추는 죽음도 정말 강추 책이다.. 젠장.. 말도 잘하면서.. 글도 잘쓰고.. 똑똑하고.. 다 갖춘것 같다.. 아니다.. 목소리는.. 쪼금..^^ 역시 신은.. 네무덤에 침을 뱉으마에 이어..진중권님의 책 중에 강추하고픈 책 넘버.. 투 한국인을 알고 싶다면.. 꼭 읽어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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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종종 그런 책이 있다. 읽고나서 할 말을 없게 만드는 책. 어이없다거나 화가난다거나 어정쩡한 책이라거나 그런 게 아니라, 생각할 시간을 주는 책.
처음으로 읽어본 진중권 교수님의 책인데 유명하다는 그 분을, 나는 이 책을 읽어보고 나서야 알게되었다.
우리가 가끔씩 볼 수 있는, 한국에 있는 어글리 코리안의 모습이 쉽게 떠올려졌기 때문에 글 자체가 어렵다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의, 내 몫이 어려웠다.
글을 다시 해석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일이 어렵다. 그의 글을 내 언어로 나에게 해석해주는일.
한국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게해준 고마운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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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주도의 경제가 민간 주도로 넘어가면서, 오늘날에는 국가를 대신하여 시장이 인간의 신체를 개조하는 역할을 넘겨받았다. 요즘 신문 지면에서 ‘맞춤형 인재’라는 말을 종종 본다. 이 말은 주로 대학에서 기업의 요구에 맞는 인간을 생산해주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이제 인간도 양복처럼 맞춰진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산학협동만이 아니다. 기업의 요구대로 맞추어진 인재는 지식이나 관심사뿐 아니라 세계관 자체도 기업의 코드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42 첫 번째 이야기를 꿰는 코드는 ‘인간 개조’이다. 진중권의 건조한 이 분석은 다분히 절망적이다. 비단 기업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중동에 입사한 기자들은 SKY를 나온 이른바 일류대 출신들이지만 그들은 지식이나 관심사뿐 아니라 세계관 자체도 철저하게 조중동의 코드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파리가 그 세계를 변화시켜보겠다고 거미줄에 뛰어들었으나 결국 좁은 영역에서 파닥거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순응적’ 태도는 버스에서도 나타난다. 버스의 작동을 인간의 생체 리듬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인간 생체의 움직임을 버스의 속도에 맞춘다. 한국의 버스는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거꾸로 인간이 버스의 편의를 배려한다. p.62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청준의 한 소설 중에 인격화된 버스와의 일전(一戰)이 묘사된 단편이 하나 떠오른다. 그러나 이청준의 소설에 등장하는 버스는 도심을 질주하는 대포알 버스가 아니다. 언제 올지 모르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70년대 시골 버스다. 소설에서도 버스는 개인을 지운다. 이미 버스편인 시골 승객들은 그 개인의 저항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내심 버스 편이다.’ 느린 버스든 빠른 버스든 상관이 없다. ‘기계적 체계’는 체계 자체를 위해 개인을 길들이며 순응하도록 ‘개조’한다. 한마디로 한국인은 근거리 지각에 따르는 쾌, 불쾌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일단 내가 불쾌해야 남도 불쾌할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않겠는가. 자신이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행동은 당연히 남에게도 별 생각 없이 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것은 ‘배려’의 문제이기 이전에 먼저 ‘감각’의 문제다. 이른바 에티켓의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불쾌를 불쾌로 느끼는 미적 취미다. p.141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벽이 있다면 그것은 체계와 습속의 벽이리라. 소통의 전제가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 ‘쾌’와 ‘불쾌’를 이루는 감각이라고 한다면, ‘불쾌한’ 상대방을 배려하기 힘들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하다. 물론 우리의 소통 불능을 규정하는 체계와 습속은 변한다. 때에 따라 아주 급속히. 고도로 발달한 미디어 문화는 자극적인 소리와 영상으로 신체의 촉각성을 강화하게 마련이다. 한국 문화의 강렬함은 여기서 비롯된다. 자극에 노출된 신체는 감흥을 받기 위해 더 큰 자극을 요하는 법. 강렬한 자극은 취미를 파괴한다. p.150 진중권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문자 문화’로 진입하기도 전인 ‘구술 문화’ 단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미디어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인의 신체는 취미의 섬세함을 갖추지 못하고 말초 신경적 감각만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것도 매우 짧은 시기에. 아주 신속한 신체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막 자라나고 있는 세대들에게 희망을 걸어볼 수 있을까? 한국의 많은 엄마들은 아이를 어른으로 키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도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여전히 통제의 ‘대상’으로 머문다. p.155 서글프도록 정확한 진단이다. 학업 성적이 우수할수록 엄마들의 관리는 더욱 집요하고 철저하다. 입시 설명회에서 보이는 엄마들의 열정은 학생들의 몇 곱절이다. 한국인의 엄마들은 엄마이기보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대행해주는 ‘매니저’다. 대체 왜 이렇게 한국에서는 당당한 하나의 주체로 성장하기 어려운 것일까? 한국인의 무의식에 깔린 더 큰 공포는 다른 데서 온다. 사회적 안전망의 결여, 지나친 경쟁의 강조, 점증하는 고용의 불안정성이야말로 한국인들이 가진 공포의 주된 근원이다. p.179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겠다는 학부모들의 극성, 선뜻 주체적 용기를 향한 결단이 어려운 아이들의 나약함, 이 두 가지 양상은 이러한 사회적 공포의 반영이다. 공포는 “판단의 유연함과 섬세함을 없애버린다.” 한국인의 창의성 결여 역시 이 공포로부터 비롯된다. 한국에서 창의성의 결여는 두개골 용적의 한계가 아니라 신체 전체의 한계. 그것은 인식론적 현상이 아니라 이제까지 한국인 살아온 역사를 반영하는 존재론적 현상이다. p.182 공포의 가장 근원적인, 그리하여 역사적인 원인은 ‘사회적 안전망의 결여’, 혹은 ‘체제에 대한 불신’에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부터 내내 공정성을 잃고 기득권에게만 관대했던 법과 제도는 법과 제도에 대한 불신과 아울러 생존의 공포를 낳았다. 이런 공포가 가족 이기주의로 귀결되어 ‘변호사 한 명’, ‘의사 한 명’ 만들기 프로젝트를 집안의 보편적 사명으로 만들었다. 낙후성과 첨단성이 모순적으로 결합된 한국의 디지털 푸트리스모(未來主義). 그것은 물론 동시에 가능성과 한계의 모순적 결합을 의미한다. p.190 구술은 ‘휘발성’이다. 문자는 ‘증착성’이다. 따라서 구술의 기억은 쉽게 ‘휘발’된다. 바로 구술이 아니라 문자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이유이다. 문자는 기본적으로 역사를 가능하게 한다. 기록은 스스로를 들춰보며 끊임없이 반성할 수 있는 비판의 기초를 제공한다. 쉽게 휘발되는 구술에 기초한 ‘푸트리스모’는 위험하다. 거꾸로 그 미래의 끝은 ‘과거’가 아닐까? 진중권의 결론을 들어본다. 오늘의 고통을 제거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한국인의 몸을 이루는 세 가지 역사적 층위가 최적의 배합을 이루도록 재배치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존재의 미학. 즉 요소들을 선택하는 테크네(techne)와 그것들을 배치하는 메트릭(Metrik)이다. p. 289 여기서 세 가지 역사적 층위란 전근대, 근대, 탈근대를 말한다. 저자는 ‘종합’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각각을 서로 극복의 대상이라기보다 선택과 배치의 문제, 즉 존재의 미학으로 보고 있다. 이미 역사는 비선형적으로 흘러갔으며 각각이 서로 균형점 없이 불안하게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세 가지의 선형적 체험 없이도 공존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미 문자의 기본적인 정착없이 인터넷과 게임으로 직행해 버린 너무도 많은 아이들에게 자기 존재 미학의 구축이라는 창의적 놀이가 가능할까?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분석하고 있는 한국 사회는 ‘경쾌하지만’ ‘절망스럽다.’ 때문에 저자의 결론은 당위적일 수밖에 없다. 아닌게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한예종 사태를 맞이하여 저자는 이 세 가지 존재 미학의 추구를 잠시 유보한 듯하다. 어쩌면 그 사태를 경유하며 저자는 더 절망적이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늦더라도 시대적 선형성을 경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낼 지도 모른다. 그 시대적 선형성의 첫머리는 ‘계몽’이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온몸을 내던지면서까지 실천하려 했던 바로 그 계몽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