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측천무후>가 그 재미나 문학성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를 경계하는 습관이 그 책을 좀 멀리하게 만들었다. 또 <바둑 두는 여자>를 두고도 대신 먼저 잡은 것이 새로 나온 책이었다. 인정받은 작가의 새 책, <알렉산더의 연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좀 실망스러웠다. 그 이유는 꼭 동양 작가가 자신의 문화나 문학, 역사, 철학이 아닌 생소한 서양의 한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잡아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문학이란 것은 상상력의 소산물로 그 소재가 무엇이건 간에 그 구조나 스토리, 또는 주제가 보편성을 띠면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커서 배운 외국어로 소설을 쓰는 그녀의 능력은 이미 성공한 것으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기에, 그 또한 태클을 걸만한 건 아니다. 비슷한 느낌으로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재미도 있었고 정서도 아름다웠지만, 언어적인 느낌 때문인지 그런 깊이의 부재가 느껴졌었다. 이와는 다르게, 이 책은 소설로서 성공적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의 한 남자로서의 숨은 욕망, 사랑, 열정 그리고 슬픔과 광기까지 그녀의 붓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감각적인 문체와 잘 어우러졌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연인 녹산의 기원 그리고 그녀를 그리는 스토리는 아마존의 여인들에 대한 우리의 환상과 꿈을 한껏 키워놓았다. 위대한 왕으로서의 알렉산더의 모습이 아니고, 고통 받고 억눌린 한 인간으로서의 심리 또한 멋진 필체로 살아났다. 그의 전사로서의 힘찬 발걸음, 한 인간을 향한 사랑과 욕망도 감각적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인도까지 대영토를 점령한 알렉산더의 위대함보다는 광기와 열정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심리와 고뇌를 그린 것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소설은 한편의 서사시였다. 소설에서의 고저나 갈등 그리고 정점을 지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마무리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열정적이고 광적이고 싶어 하는 열망이 서사로 펼쳐지는 바람에 깊이 있게 표현되던 한 인간의 심리와 사랑이 묻혀버렸다. 맛있는 것만 먹다보면 결국 그 어느 것도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과 비슷하게, 너무 높게만 몰고 가는 그 상황들, 격정적이고자 하는 정신 상태는 결국 지루함을 가져왔다. 휴식 없는 서사처럼 식상한 건 없다.
여자처럼 아름다운 얼굴, 부드러운 손길, 여자처럼 입고 시를 사랑했던 부드러웠던 아이, 알렉산더가 아버지를 둑이고 사랑하게 된 청년들과 욕망을 나누고 하는 사이에 무시무시하게 강한 전사가 되는 과정은 좀 부족해보였고, 유일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난 상대에게 사랑에 빠졌지만, 그 상대를 남들과 똑같은 여자로서의 왕비로 만들어 자유를 허용치 않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후계자를 낳아줄 것을 종용하고, 또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던 남자 못지 않던 여전사가, 매이는 게 싫어 사랑을 나눴던 남자 목을 베던 그 여전사가 한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튜닉을 입고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후방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로 변하는 것 또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었다. 그토록 격렬한 사랑이 그토록 순종적이고 그토록 뻔한 과정을 거치는 게 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나는 성실하고 총명한 학생이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고문기술자이자 창녀였다. 동료들에게 나는 폭군적인 스승이자 비열한 연인이었다.’ 실제로 폭군이 되고 광기로 뒤덮이는 알렉산더, 살인, 처형, 살육의 이유를 ‘더 나은 선이 악의 길을 통해 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는 알렉산더는 영토를 확장하고 전쟁을 계속한다.
‘탈레스트리아는 아마존들의 여왕이다. (...) 우리 부족은 태생을 모르는 여자들, 고아와 버려진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전사들의 손에 길러진 우리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자로 자랐다. 추위, 전쟁, 굶주림은 얼음의 신이 우리를 시베리아 산 정상으로 이끌기 위해 보내는 세 마리의 독수리였다.’ 그런 아마존의 여왕이 사랑에 대해 말한다. ‘아냐는 남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사랑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는 연인들이 재회할 때, 그들의 사지가 휘감길 때, 그들이 꿈속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 잠이 들 때 느끼는 행복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연인들이 헤어질 때 가슴을 에는 그 아픔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비방, 배신, 비난, 음모에 무감각하게 만드는 그 힘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 광기를 몰랐다. 알렉산더는 내게서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었고, 나는 그의 부재까지 참아내며 내 모든 것을 그에게 바쳤다. 사랑은 몸 내부, 가슴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없어지지도 않고, 도둑맞을 수도 없다. 사랑은 날 고문했고, 날 아름답게 만들었다. 사랑은 날 절망에 빠뜨렸고, 희망으로 가득 채웠다. 나는 알렉산더를 사랑했다! 이 한 마디가 날 얼음 물속에, 화염 속에 빠뜨렸다. 나에게 기쁨과 고통을 주었다. 이 마술적인 문구가 날 위대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푸른 하늘을 펼쳐놓았고, 폭풍우를 불러일으켰다!’
‘!’가 이렇게 많은 작품은 처음 본 것 같을 정도로 스토리나 두 연인의 심리는 높은 곳으로만 달려간다. 이런 게 정말 격렬하고 열정적인 최고 정점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내가 그런 사랑을 해보지 못해서 그런 거라면... 할 말 없다. 내겐 좀 식상하기까지 한 사랑의 서사시인 이 책이 어쩌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그 광기까지 포함한 격한 사랑과 열정의 증거라고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곧바로 <바둑 두는 여자>를 읽었다. 단숨에... 너무 재밌게... 그래서 좀 덜 미안해졌다. |
|
샨사를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닌 ‘중독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측전무후> 이후의 신작이 대체 무엇일까, 스포일러조차 모르고 있었을 때부터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알렉산더’라니! 무엇을 기대했을지 몰라도, 기대한 것 이상, 이하도 아닌... 기대한 것을 모조리 비켜 나갔다고 해야 옳다. 신화와 전설과 역사의 궁극의 결정체에 가장 극적인 서사시를 덧붙이면 ‘알렉산더’라는 키워드가 나올 법도 하겠지만, 샨사의 필력 앞에서 서사는 부재하고, 휘황한 이미지들이 어지러이 펼쳐진다. 기대를 모조리 빗나갔기에, <알렉산더의 연인>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불분명해진다. 내가 알던 ‘알렉산더’와 샨사가 그리는 ‘알렉산더’가 그토록 상이한 이유를 내 빈곤한 상상력의 탓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하겠는가? <플루타르크 영웅전>으로 알렉산더를 처음 만난 이들이 의례 그렇듯, 가장 찬란하게 빛나다 스러져간 신적인 영웅의 구현이라고 그를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알렉산더가 변주되기 시작한 것은 동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감히 숭배 이외의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이 희대의 영웅이 섹스어필한 코드로 무장한 채 등장한 헐리우드 영화며, 막 MTV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한국계 애니메이터 피터 정의 캐릭터 디자인으로 탄생한 패셔너블한 애니메이션이며, RPG게임의 미디어믹스 같은 판타지소설에서의 알렉산더까지, 샨사의 ‘알렉산더’가 알렉산더가 아닌 이유가 하등 없지 않겠는가! 샨사는 절대 독자에게 친절한 작가가 아니다. 가장 불편한 치부를 끝도 없이 드러내놓고 얼굴을 돌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야멸찬 구석이 많다. 늘 사랑과 파멸의 순간이 동일선상에서 공존하고, 모든 대치되는 관념들을 동원해 뫼비우스의 띠 같은 고뇌를 풀어놓는다. <알렉산더의 연인>은 그 가운데서도 절정을 이루는 작품이다. 남성성과 여성성, 삶과 죽음, 불과 얼음, 태양과 달, 서양과 동양,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 타고난 미모와 매혹으로 주위의 남성들을 매혹시켜 육체적인 관계 속에서 구축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제국의 축을 쌓아올리는 알렉산더는 팜므파탈과 다를 바가 없다. 그가 고결한 영혼을 추구하는 금욕주의자라서 숭배 받는 것이 아니듯, 동서양을 뒤섞으려는 야심 속에서 관계 맺는 이성은 오로지 알레스트리아 뿐이다. 시베리아 아마존의 여왕인 탈레스트리아는 평생에 걸쳐 사랑한 여성을 찾아 헤매는 여전사족의 여왕이다. 알렉산더와 조우하고 그가 남성이라는 것에 경악하지만, 결국 그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금기를 깨고 아마존의 존엄성의 상징인 'T'를 버린 채, 알레스트리아로 거듭난다.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가 사랑하며 결합하는 것은 알렉산더가 원정에서 부닥트리는 저항 이상으로, 어느 하나 순탄한 것이 없다. 자신이 상실한 고결한 영혼을 알레스트리아에게서 찾는 알렉산더와 전장에서 호흡해야 살아갈 수 있는 운명을 버린 순간부터 질식해가는 알레스트리아지만, 거대한 사랑 앞에서는 저항할 수가 없다. 전투력을 상실하고 왕을 벗고 인간적인 삶으로 회귀한 알렉산더와 순결과 불임의 금기가 전부 해제된 아마존의 여왕 알레스트리아를 통해 샨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화도, 전설도, 역사도 아닌 내 영혼을 잃지 않으면 절대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사랑의 파괴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참모습이다. 원제인 <Alexandre et Alestria>를 <알렉산더의 연인>으로 번역한 의도는 충분히 짐작하는 바이나, 플라톤이 주창하는, 태초에 양성을 지니고 살았던 인류가 남성과 여성으로 쪼개진 채, 평생을 한 몸이었던 이성을 추구하며 사는 삶의 현신인 두 사람이기에, 완전한 동격으로 내세우지 않으면 소설의 의미는 거진 소멸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어판의 왜곡된 제목을 통해 샨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절대적인 사랑의 원형은 무참히 빛을 잃은 듯하다. 대서사시 같아 보이는 외형 속에서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해서 한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대착점의 이미지들이 향연을 벌인다. 서양에서 동양을 관통하며 전쟁의 길 위에서 살다 간 알렉산더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피해가기를 바란다. 모국어인 중국어 대신 불어로 작품을 쓰는 샨사가 알렉산더의 길을 거슬러서 맞으러 간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샨사의 차기작은 명멸하는 어지러운 이미지의 휘발성이 아닌, 중국색이 듬뿍 들어간 거대한 특유의 중독성 짙은 서사구조로 돌아가 주기를 열망해본다. 설마 샨사의 작품세계가 과도적 변신의 순간에 놓여있는 것을 목도하게 된 것은 아닐까 불안에 떨면서도, 매혹당한 자의 치명적 약점으로 인한 소리 없는 중얼거림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사그러든다.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셈하지 않고 나 자신을 그에게 맡겨야 했다. 사랑하는 것은 전쟁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것은 과거, 비밀들, 불가능한 것들을 물리치는 것이다." (156p) |
|
<여황 측천무후>에서 샨사의 점증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주는 서사적 구조와 서정적 문체에 반해 내친김에 <음모자들>까지 읽었을 때 비록 내용면에서는 처음의 감흥만큼 완벽한 서사구조는 아니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샨사만의 문장을 다시 만날 수 있어 기쁘기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그녀의 작품을 다시 만나기를 기다렸다. 예전 것도, 새로운 것도 감정이 메말라 촉촉한 소설이 필요할 때 읽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작품의 순서를 따질 겨를 없이 꽁꽁 담아두던 샨사의 소설을 다시 꺼내보는 일은 한 인터넷 서점의 할인행사 때문에 가능했는데 2,900원에 구입하면서 내내 마음이 찜찜했던 이유도 중국 태생이지만 독학 끝에 프랑스어로 소설을 발표한 그녀의 감성과 문체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감동적이고 촉촉한 이야기가 저평가되는 것이 안타깝기도, 다시 만나서 반갑기도, 했다.
<알렉산더의 연인>은 유라시아를 통일하고자 했던 위대한 정복자이자 영웅 알렉산더의 일대기를 그림과 동시에 그의 연인인 시베리아 아마존의 야성적인 여왕 알레스트리아의 삶, 그리고 대립하는 모든 기질을 타고난 두 연인의 운명같은 만남과 영원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무찌르고 20세에 왕위에 오른다. <알렉산더의 연인>은 알렉산더의 지위가 그의 타고난 태생적 아름다움 때문이라는 데에 긴 묘사를 할애하는데, 알렉산더의 일대기를 더이상 자세히 알지 못하는 터라 진위여부는 모르겠다.
Alexander the Great
왕위에 오른 뒤 10년만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세 대륙을 통합, 정복하여 도시 곳곳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 이름 붙였다. 샨사의 소설 <알렉산더의 연인>은 사실상 알렉산더의 정복보다는 운명적인 연인 알레스트리아와의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서 알렉산더가 정복하는 도시는 연인에게 바치는 선물이자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서만 작용한다. 작가는 애초부터 서사적 구조에 아름다운 묘사를 덧붙인 점증적 문장으로 여성적이고 감상적인 서사시를 그리려 한 것 같다. 역사상, 신화상 위대한 힘을 가진 정복자로만 알려진 알렉산더에게 인간미를 불어넣음으로서 오랜 세월 전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과 교감을 일으키려 한 것 같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알레스트리아와 결합한 알렉산더야 말로 가장 강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정복자이기도 했다.
날아라, 새들아,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라!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가 구름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드넓은 세상에 길을 열 것이다. 우리는 땅을 비옥하게 하고, 빙하의 아름다움과 불의 힘을 퍼뜨릴 것이다. 날아라, 새들아! 너희들이 떠나온 곳을 쳐다보지 말고 힘껏 날개를 저어라. 너희들의 둥지를 돌아보지 마라. 날개를 저어라. 바람을 헤치고, 태양을 바라보아라. 그 붉은색, 그 노란색, 그 오렌지색을, 그 얼음과 화염의 융합을 바라보아라. 날아라, 새들아! 모든 새들을 이끌고 날아라. 세상 그 무엇보다 자유의 도취를 사랑하는 너희들아. (pp.160~161)
사내에게 의지하지 않고, 사내의 씨를 통해 후손을 만들지 않겠다는 전통을 가진 시베리아 아마존의 여왕이기도 했던 탈레스트리아를 알렉산더만의 여왕, 알레스트리아로 만든 힘은 과연 어디에 존재했을까. 나는 그 힘이 단지 위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여인을 오로지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와 세상 전부를 지배하려는 의지는 결국 같은 뿌리를 가지고 태어난 불타는 욕망에 불과할 테니까. 알렉산더가 뜨겁고 열정적인 불과 태양의 정복자였다면 시베리아의 얼음처럼 이지적인 미소로 끊임없이 알렉산더를 기다리고 품어주었던 알레스트리아 역시 위대한 여왕이자 왕비였다. 그들의 결합은 애초부터 완벽하고 영원했다. 사랑은 영혼의 교감이자 꿈이고, 희망이자 자유다. 연인에게 사랑은 무엇이며, 사내에게 또는 여인에게 연인의 존재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한 여자가 왔다. 두통이 날 신음하게 할 때 그녀가 내 위로 올라와 누웠다. 그녀의 피부가 날 식혀주었다. 그녀의 침묵이 날 가만히 흔들어주었다. 그녀가 날 껴안고 어루만져주었다. 비록 그 감촉을 느끼지는 못해도, 나는 온몸으로 퍼져가는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p.283)
그, 알렉산더와 그녀, 알레스트리아의 영원한 결합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함께한 아마존 여왕의 시녀 타냐, 아니 아냐에 의해 기록되었다. 남과 여, 음과 양, 태양과 달, 불과 얼음, 이 융합될 수 없는 모든 것, 대립할 수 밖에 없는 모든 것이 만났지만 둘은 결국 하나가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 이치라면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의 사랑이 신화처럼 언제나 빛나기를.
오랜만에 철제무기를 들고, 목숨 걸면서 싸우다 죽어가는 이들이 나오는 모든 영화들이 보고 싶어졌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독서로 정복할 날을 꿈꾸며. 신화 속,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는 일은 항상 즐겁다. |
|
「알렉산더의 연인」을 읽기 전에는 묵직한 설렘 같은 것이 있었다. 첫사랑을 대하듯, ‘샨사’라 불리는 작가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자리였기에 더욱 그랬다. 의례 사람의 첫인상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듯이, 작가의 소설작품을 읽기 전에는 그의 첫 느낌을 중요시하는 개인적인 습관에 기여한 탓이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국내에 소개된 몇몇 작품들에서 그녀의 탁월한 기량을 인정받은 ‘샨사’의 차기작에 개인적인 기대심이 다소 다른 방향으로 어긋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알렉산더의 연인」은 굉장히 분주한 소설이다. 다르게 말하면 ‘산만’ 내지는, ‘어지러운’느낌을 자아내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즐비했다. 간결하게 끊어지는 문장이 긴 호흡을 요하지는 않으나, 맺고 끊음이 확실하지 않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만큼 대체적으로 차분하지 못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가 제시하고 있는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의 관계는 단순한 에로티즘을 넘어선 영혼의 화합이라는 거대한 목적아래 탄생된 인물이다. 그러나 허상의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순수한 열정을 잃어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역사가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을 다시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작가나 연출가의 개인적인 견해가 포함되기 마련이다. 일부 매체에서 다루어진 ‘알렉산더’라는 인물의 중추적인 묘사는 동서양을 화합해 대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정복자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부여해두었다. 반면 ‘샨사’가 말하고자하는 ‘알렉산더’라는 인물은, 동성애라는 성적인 취향의 퇴폐적인 측면을 강조한 채 수습은 엉뚱한 여인에게서 찾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의 사랑에는 무언가가 빠져있다. 그 공허함의 중심에는 ‘알렉산더 2세’의 간절한 염원만이 가득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게 나타나있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운명’에 기초하여 부득이하게 이루어진 행위의 결과가 못내 안타까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샨사가 전기소설을 쓰고자 노력했다면, 최소한 인물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고뇌와 번민의 깊이, 그리고 인물들 간에 이루어지는 폭넓은 갈등의 순간들 또한 헤아렸어야 한다. 스펙터클한 전쟁의 묘사는 애초에 이 책이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기에, 알렉산더대왕의 사적인 부분들의 솔직함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방탕한 폭군 아버지를 둔 ‘알렉산더’는 그의 어머니에게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증오를 품게 되고, 그것은 어긋난 여성에의 거부감으로 표출되어, 창남이나 남자하인들을 탐하게 된다. 스스로도 남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후에는 여왕을 맞이해 사랑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그리고, 유목하는 시베리아 아마존부족의 여왕으로서, 남성들을 능가하는 기상과 전투능력을 갖춘 ‘알레스트리아’…. 그러나 그녀는 여자들만 이루어진 집단에서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깨고, 알렉산더라는 남성을 사랑하게 되어 결국 그를 차지한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어머니 같은 ‘무력한 아내’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남성 못잖은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 알렉스트리아를 선택하게 된다. 그녀에게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이다. 알렉산더 역시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기에, 많은 남성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차지하게 된다.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그러하듯, 작가가 그려낸 두 인물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자웅동체’의 이미지를 중점으로, 모든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양성을 탐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인간의 욕망이다. 오히려 모든 성적인 의미에서 탈피해서 한 영혼을 사랑하는 길이 모든 세상사의 순리일지도 모른다. ‘샨사’는 男女라는 염색체가 주는 기능을 떠나서, 사람 대 사람의 순수 운명적인 사랑 그 자체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에, 희미한 전설로 남아있는 알렉산더라는 인물을 선택했다. 내가보기엔, 알렉산더가 샨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알렉산더라는 고급 인물을 선택했을 뿐, 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