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올라왔다. 그 때 살던 곳이 봉천동이다.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 촌으로 변해버렸지만 당시만해도 봉천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남부순환도로를 제외하곤 거의가 흙 길이었다. 논들도 많았고, 산비탈은 그야말로 달동네였다. 중간에 군대시절 3년을 제외하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십 수년간 일상이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다. 회사에 입사하고선 집을 안양으로 옮겼지만 직장은 서울이었기에 그렇게 또 10여 년을 서울에서 보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덕수궁 뒤쪽에 있었고, 대학교는 창덕궁 뒤쪽에, 그리고 회사는 시청 뒤에 있었기에 서울의 한복판은 말 그대로 텃밭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20여 년을 서울한복판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IMF가 터지기 몇 달 전 회사는 경기도로 이전했고, 그 후로는 서울에 갈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일년에 몇 번, 약속 때문에 간 일이 고작 이었고, 그것도 최근 수년 내에는 가본적이 한,두 번으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당시 헤집고 다녔던 길들, 덕수궁을 돌아 광화문으로 빠지던 길, 광화문과 종로 뒤쪽 골목길들, 무교동과 을지로의 샛길 등, 수많은 길들을 밤낮없이 헤매고 다녔지만 그 길들은 당연히 그곳에 있어야만 했던 것처럼 생각되었지, 그 주위의 풍경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긴 거의 매일같이 보는 길이나 건물에 관심을 주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내가 이렇게 서울에서 생활했던 것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고 있는 까닭은, 너무나 변해버린 서울의 모습이 내가 과거에 그곳에서 생활했었다는 사실을 꿈같이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쩌다 읽은 책에서 서울의 길들과 건축물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다른 나라의 일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 그곳을 떠나있던 시간에 너무나 변해버린, 아니 자주 가지를 못해 변화의 과정을 보지 못했기에 느끼는 당혹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 [기억이 머무는 풍경] 역시 그런 당혹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저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알게 될 때, 그 도시는 비로소 나의 도시가 되고, 그리고 나의 도시에서 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이주했고, 그 후 스물아홉에 다시 서울 땅을 밟아 15년째 살고 있다는 저자. 예전에 부모님이 살았던 답십리나 자신이 서울에 와 처음 살았던 은평구 대조동의 모습은 이제 간 곳이 없고 그저 주소상의 숫자로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집과 회사주변 그리고 자주 다녀서 익숙해진 곳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저자가 찾아나선 이야기는 그곳이 품고 있는 시간의 흔적이기에 아련한 옛 기억과 함께 지금의 모습까지 보여주는 활동사진으로 다가오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사진대신 저자가 연필로 드로잉 한 스케치가 더 사실적이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종로길 뒤편 주점들이 늘어서 있던 좁은 골목길, 그곳 주점들에선 막걸리와 생선구이가 기본적으로 나왔다. 조선시대 조성된 이 길, 피맛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도 살아남았지만 도시재개발로 인해 하나씩 지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작년인가 블로거들을 만나 갔던 주점은 재개발을 앞두고 가림막으로 가려진 틈 속에 남은 몇 안 되는 집이었다. 대한민국의 도시들은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래된 것들을 모조리 밀어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의 흔적을 찾는 것은 보물찾기와 같다고 말하는 저자는, 현대와 과거가 만나는 공간으로 영등포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찾는다. 타임스퀘어 뒤에는 아직도 소규모 철공소가 있고, 밤에는 사창가가 붉은 등을 밝히는가 하면, 영등포 역 앞 좁은 골목길의 쪽방촌도 아직은 여전하다. 저자가 손으로 그린 그곳의 풍경은 사진이 아니어서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연필로 그린 스케치이기에 더 애잔하게 가슴속에 머문다. 그 밖에도 건물이 곧 길이 되어버린 건축물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 건축가들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 건물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 건축가 없는 건축으로 삶의 의지가 표현된 달동네에서 인간의 진솔한 삶이 품고 있는 이야기, 그리고 용도 폐기된 정수장위에서 부활한 건축들이 간직한 이야기들이 저자의 손끝에서 글과 그림으로 다시 살아난다. 굳이 건축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것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그대로 하나의 풍경이 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무른다. 우리가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도시, 그저 스쳐 지나갔던 풍경들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고, 이제 그 기억을 따라 그것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때, 저자의 말마냥 바로 나의 도시, 우리들의 도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서울서 멀어진 삶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주위 풍경들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그저 그 도시가 아니라 나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