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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라... 이 글을 쓴 저자도 키치에 대한 정의를 쉽게 못내리고, 추상적이고 어려운 단어들을 남발하며 둥그스름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예술을 감상하고 개인적인 유희와 연계하여 울고 웃고하는 이들을 싸구려라고 매도하기전에 저자 자신부터 당신이 그렇게 찬양하는 고급수준의 인생을 느끼게 하는 예술에 대해 명확하게 말해보아라. 우리 싸구려 일반들에게 예술을 강요하지 말고 당신들이 말하는 수준높은 사람들이나 그 잘난 예술을 실컷 누리세요. 라고 저자한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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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값싼 거짓 낭만과 삶의 역겨운 기만적 행복 속에 몸을 담그고 있을 것이냐.”
예술사와 철학을 접목한 장르의 책이었다. 그야말로 지식 전람회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내가 손에 잡았던 책 중 끝까지 완독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책이다.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도, '키치'라고 하면 대학 1학년 조형의 세계 교수님이 칠판에 직접 변기통 그림을 그리며 난잡한 쓰레기 예술이라고 설명부터 번뜩 떠오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정의하기 힘들기로 유명한 '키치'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키치와 통속예술, 고전예술, 현대예술의 범주와 의미를 짐짓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고급문화를 흉내내는 키치적 예술을 상대하며 일부러 감정 이입을 하려고 노력하는 키치적 인간들, 아울러 쉽게 쇼핑에 현혹되고 소비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된 현대인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무엇이라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불쌍한 현대인들의 키치적 요소 등 우선 내 자신에 대한 반성과 함께 세상을 뒤집어 보는 통찰력을 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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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 수업을 들으면서 태어나서 처음 듣는 단어도 있고, 처음듣는 작가도 있고, 책도 있고...
'키치'란 단어를 수업에서 처음 들었다. 두가지가 난감했다. 키츠라고 하는건지, 키취라고 하는건지, 아니면 다른 말을 하는건지... 알아야 보이고, 알아야 느끼고, 알아야 들을 수 있으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두번째 난감했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는 것에 대해 나만 모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숫자와 화학식 놀음만 했던 출신의 한계와, 기본 소양 부족에 대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선생님과 다른 사람들간의 소통은 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난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인데다가 나중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다는 말과 함께 워낙 툭 내뱉듯이 빠르게 지나가버려 질문할 기회조차 가질 수가 없었다. 난 나의 무지를 자책하며 차라리 집에서 인터넷을 뒤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터넷을 봐도 무슨말인지 잘 몰라서 그냥 무지를 유지하던 중, 이 책이 출간되었다.
"키치는 어떤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된 미학, 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고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입니다. (밀란쿤데라)"
이 책은 키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며, 키치를 넘어선 여러 현대 예술의 시도에 대해 서술한다.키치는 예술 뿐만 아니라 삶의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에 가깝다고 저자는 얘기한다.
현대는 '키치'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질을 꿰뚫는 대신 편하고 쉽고 부차적인 효과들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내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참이나 힘들다고 느꼈던 것이 '키치'적이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는 이를 '건강한 불행'이라고 얘기한다.
가끔 부적응자 또는 부유하는 자 같아 괴롭기는 하지만... 거짓과 허위의식을 경멸하면서 삶의 진정성과 본질을 추구하느라고 겪게되는 통증... 즉, '키치'적이지 않아서 겪게되는 충돌일 뿐이라는 위안이 생겼다.
그러나 위안은 위안이었고, 키치를 넘어서고 해체한 현대 예술에 대한 서술은 역시나 용량 초과에 과부하가 걸린듯한 느낌으로 읽어내려갔다.
어렵지 않게 써 내려간 책이란 건 알겠지만... 현대예술을 철학적으로 이해하여 기술한 종합선물세트같은 책인데다가, 내 기본적인 소양의 절대적 부족으로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야 했다. 강의를 듣고 있어서 그나마 조금 더 이해하고 있다는 안도. 연말 즈음에는 부드럽게 소화 가능한 책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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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너무나도 낯선 단어다. 예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나에게..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에서야 비로서 나는 저자가 말하는 세상 모든것이 키치적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왜 역겨운 세상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해 이해가 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동안 키치적으로 살아온 내 인생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고, 상실과 좌절의 현대사회에서 겪는 고통이 바로 본능적으로 키치를 극복하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저자는 예술에서 예술인들이 어떻게 키치를 극복해가느냐를 제시 해 줌으로써, 일반 대중이 키치적 삶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의 예를 알려주고자 한 것 같다.
책을 읽고 저자와 얘길 나눴는데,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인생에 있어 병든 행복 보다는 건강한 불행을 기꺼이 선택하길!!!"
물론,... 예술과는 거리가 있는 나로서는 그 방법이 아직 마음에 팍!! 와 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나는... 내 모든 행동이 키치적이지 않은가를 반성할 줄 알게되고, 키치적 삶을 최소한... 멀리하고자 노력은 하게 된다. 정답은 여전히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조만간 그 답을 알 수 있게 된다면,나는 무지 행복할 것 같다. 키치 극복 하는 법. 이것이 궁금하다.
참으로 용감해야만 건강한 불행을 기꺼이 택할 수 있다. 그게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그러한 선택을 감행할 수 있을까. 이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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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Kitsch)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키치’를 ‘이발소 그림’으로 이해하는 것은 키치를 설명하기에 구체적인 스타일이 있는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어떤 인식론적 태도라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카르스텐 해리스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저자들은 키치를 이발소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인식론적 태도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키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영국 경험론을 이야기하고 현대 물리학과 현대의 추상 미술의 기원을 탐구해야만 한다. 이를 다 설명해야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실은 이 설명을 듣고 있는 (지적으로 무능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대부분의 한국의 대)학생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교수나 강사도 드물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키치'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몇몇 독자들은 쉽게 이해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정신과 삶 전반에서 키치적 것들을 다 몰아내고 한순간이라도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분투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본 이가 있을까?
(나에게 서양 미술사를 가르쳐 준 분이기도 한) 저자는 지성사(특히 철학과 역사)를 바탕으로 예술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대 철학(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과 데카르트를 구분짓는 방식으로 기하학을 이용한다. 좌표 평면 상에서의 직선의 움직임을 이야기하면서 근대에 있어서의 ‘운동’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과 바로크 예술의 연관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인상주의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베르그송의 철학과 드뷔시의 음악, 프루스트의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러한 지성사적 이해에 기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우저는 철저하게 유물론적 입장에 서있었기 때문에 고딕 양식이나 르네상스 고전주의에 대해서는 통찰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조중걸의 말대로 ‘예술은 기술의 문제라기 보다는 예술의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욕’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예술에 대한 기술은 매우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왜냐면, 기술은 철저히 인과적 관계 위에서 예술을 설명할 수 있지만, 예술의욕은 인과적 관계를 무시하며 그 당시의 사람들의 심성, 일상적 삶, 학문과 역사 등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먼저 요구한다. 이 책에서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고 철학과 과학을 가로지르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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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연초부터 대략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던 글로벌 경제불황에 대한 염려가 사실로 들어났지만, 에너지 시장의 급락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일어난 많은 사건들은 무척이나 나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굳이 내가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책을 나즈막히 읽는다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는 변명을 하고 싶어서다.
사실, 예술작품과 그에 깃든 고도로 상징화되고 표현된, 어쩌면 그 이면에 보이는 창조자의 고뇌 그리고 그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들을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자신있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나 자신에게는 특별한 장르를 선호하는 매니아적 기질도 부족하니, 좋다는 즉각적 감정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책을 오랜 시간 읽으면서 (사실 중간 중간 그 책을 읽고 쉬는 그 사이가 본의아니게 무척이나 길어졌지만), 과연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였느냐는 물음도 한번 해보았고, 키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나는 과연 올바르게 그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물어보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는 조금은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고 해야겠다.
키치라는 개념은 19세기 독일에서 생겨났으나, 그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우선 키치는 고급예술을 위장한 비천한 예술, 즉 키치는 진실을 추구하기 보다는 아름답게 보이거나 진실인 것처럼 보이기를 추구한다. 따라서 그 자체만으로도 키치는 역겨운 예술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이러한 인간에 내재한 허영과 허위의식은 키치적 정서를 형성하며, 이는 대상으로부터 대상이 조성하는 어떤 다른 표상으로 감정의 전이가 일어나게 된다. 즉, 예술작품 그 자체의 미적 가치가 아닌,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환각적 회상으로 키치적 정서에 함몰되고 이러한 점에서 키치는 '이차적 눈물 (The Second Tear)'라고 저자는 말한다.
키치가 무의미한 세계에 덧칠을 하고, 절망적인 우리 삶에서 눈을 돌리게 하며, 우리 자신이 허구적인 모습에 살아가게 됨에 따라 우리 자신도 키치적인 삶을 살게 된다. 즉, 저자는 키치를 단순한 예술형식으로 보지 않고, 이를 더욱 확장하여 철학의 문제로까지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서의 내용은 키치 그 자체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근대철학의 움직임과 이에 대응하는 예술의 발전, 즉 키치를 극복하고 해체하는 다양한 시도, 다다이즘, 기하학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기능주의, 소격효과, 모더니즘, 메티픽션 등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먼저 앞서 읽었던 '찰리의 철학공장'을 통해서 근대철학의 움직임을 읽어본 후, 본서를 읽는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며, 현대예술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일독하기를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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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행복보다는 건강한 불행을 택하라는 저자는, 어쩐지 엄청 시니컬해보인다.
2007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책 치고는 대중이 두루 두루 읽기에는 매우 어렵다. 예술계에 그래도 몸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도 너무 어렵고 각주도 달려있지 않은 불친절한 책이다.
좋은 부분을 지적하고는 있으나, 음. 예술은 예술이고 행복은 행복인 것같다.
저자의 의견에는, 100% 동의할 수는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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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막연하게 내가 알고 있던 키치란.. 고급예술의 허위성을 비웃으며 다소 촌스럽고 천박한듯한 예술? 정도... 알록달록 울긋불긋한 촌스러운 패션 같은거나 만화느낌 뭐 그런게 그런 느낌 아닐까 했는데... 그게 아니라 예술을 예술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만적인 예술'이라는 것을 알았다.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제대로 그 뜻을 정의하지 못하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하고..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예술가들의 다양한 해체시도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좀 아무래도 예술이나 철학에 대해 심도있는 관심과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좀 어려운 책이다. 한국어는 한국어이나 그 철학적 사유의 세계를 누비다보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영 이해가 안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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