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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대문호는 자신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서도 형에게 가장 먼저 털어놓았다.<형,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연구하는 데 꽤 긴 진척을 보이고 있어.인간은 신비 그 자체야.우리는 그 신비를 풀어야 해.그러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결코 시간을 허비했다고 할 수 없을 거야.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나는 이 수수께끼에 골몰하고 있는 거야>"/57~59쪽 오로지 도스토옙스키에만 집중한 책으로 읽는 두 번째 책이다.<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를 읽었을 때는 도선생의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작가의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읽고 반했고.그리고 실제 읽기를 시작했고,너무 잘,그것도 재미나게 읽게 되어 살짝 흥분했던 기억이..그러나 계속 읽어 나갈 줄 알았던 계획은 느려졌고,조금씩 다른 책들에 밀리고 있었는데,<매핑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인간이고 싶어..소설을 쓴다는 말에 시선이 멈추게 되었고, 다시 차근 차근 읽어 나가고 싶어졌다.특히 처녀작부터 차례대로 읽어보고 싶어 <가난한 사람들>을 꺼내 들었다.
공병학교 소위로 임관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집어 치우고 하숙집에 들어 앉아 쓰게 된 소설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했다.출간되자 마자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였다고..그런데 작가 자신도 소설을 쓰면서 이런 상상을 이미 했던 건 아닐까..아니 상상이 현실이 된걸까..이후 고백하길 가장 황홀한 순간이였다고 회고를 했다고도 하는데,<가난한 사람들>속 하급관리 남자의 꿈이 소설가는 아니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더 그렇게 느껴진 모양이다. 소설은 가난한 중년 하급관리와 가난한 아가씨가 주고 받는 연애편지 형식을 띤 서간체소설이다.연애편지 형식을 띠기도 해서,살짝 오그라드는 듯한 문체가 느껴져 당혹스럽기까지 했다.도선생의 후기소설들만 읽었던 터라,느끼게 되는 기분이였을 게다.그러나 본질을 들여다 보게 되면 이 소설이 꼭 연애소설이기만 한 걸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그런 부분이 이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라면 하급관리인 남자 자신도 가난하면서,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의 마음이 너무 멋져서,존경스러워서는 아니였을까...길지 않은 소설임에도 읽기를 마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남자 주인공의 지리멸렬한,아니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묘사되는,매일의 가난한 일상이 버거워서였던 걸까..아니였다.이 소설에는 고골의<외투>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는데,고골선생이 이 소설에 대한 평을 한 부분에 나 역시 고개가 끄덕여지는..부분을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에서 찾아냈다.수다스럽고,집중력이 떨어지고..무엇보다 압축되었다면..이 부분에서 공감이...그런데 또 생각해보면,주인공 남자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아마추어라 생각하고 보면,글이 유려하고 덜 수다스러웠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무튼 가난한 시대,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읽는 내내 편한 마음으로만 읽을수는 없었는데,그럼에도 이 남자가 버틸수 있었던 건 글을 쓰는 시간이 있어서 가능했던 건 아니였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하급관리인 그 남자와,남자의 편지를 받던 바르바라 둘은 똑같이,아니 거의 비슷하게 가난했는데,남자와 여자,직업이 있고,불안정하고의 차이는 있다 해도,바르바라가 결혼을 하게 된 건,가난속에서 벗어날 희망을 부여 잡을수가 없어서는 아니였을까,하급관리남자에게는 여전히 글쓰기가 가난을 대체할 수 있다는 무언의 확신이 있었을수도...그녀에게 더이상 편지를 보내게 되지 않았을때 자신은 절망할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이후에도 그는 계속 글쓰기를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가난을 벗어날수 있는 길도 있을지 모른다는 확신,아니 작가 자신에게 그렇게 최면을 걸면서 쓴 소설은 아니였을까? 소설이 씌여지게 된 이유를 조금 들여다 보고 읽은 까닭게 그렇게 읽어낼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르지만,동시에 그래서 읽어낼 수 있었던 소설이였다.<가난한 사람들>은 말랑말랑하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였다.<분신>은 조금 쉬었다 읽어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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Бедные люди / Двойник. Петербургская поэма ::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평소에 정치나 정세에 관심없던 사람들도 짐짓 아는 척 한마디를 하게 되는 선거철이다. 자주 들여다보는 정치 게시판은 너나 할거 없는 의견과 토론, 혹은 상호 비방으로 글이 넘쳐흘러 차마 다 따라잡지 못할 정도다. 지지하는 진보 정당이 맥을 못쓰는 터라 덩달아 풀이 죽어 현장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판세를 관전만 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러다보니 가까이 있을 때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라든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의 윤곽이 조금은 납득할 만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보수주의자나 신자유주의자들의 이유 있는 항변에 대한 일말의 수긍이랄까. 또한 진보를 부르짖는 이들의 자기 밥그릇 투쟁도 안타깝지만 인정하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풀어 말해, 돈이 그리 중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사연에 뿔난 가슴이 누그러지기도 하고 분배를 명목 삼는 이들의 비타협성과 비겁함에 화가 나기도 한다는 얘기다. 그들은 곧잘 언론에 호도되는 '무식한 우민' 이 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노인 세대를 판단력이 결여 되었다 폄하하는 강경한 무리도 있다. 자신이 선호하는 정당이나 정책과 반대되는 세태에 아쉬움과 불만을 갖게되는 심정은 십분 이해해도 대척점의 대상을 무조건 매도하는 것은 분명 잘못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불만의 소리를 높이는 이들 중에서 정녕 정책으로 인한 생활고를 호소하는 이는 생각보다 적다. 생활고를 걱정할 지경이라면 한가롭게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끼적일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힘들게 사는 이들이 우매하다고 하기에 앞서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절박한지, 왜 인터넷 게시판을 드나드는 이들보다 현실적 정보가 부족할 수 밖에 없는지를 헤아리려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막말로, 말로 갑론을박을 하는 사람은 그만한 '여유' 가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진보를 내세운 정당이 그들을 대변한다는 '서민' 과 온도차를 보이는 것은 이런 탓이 아닐까. [가난한 사람들] 의 주인공 제부쉬낀과 바르바라는 제목 그대로 궁핍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다. 그러나 없는 생활 속에서도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정신적인 즐거움을 나누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편은 더 어려워지고, 낭만적이었던 서로의 편지는 갈수록 없는 생활의 고초를 토로하는 글로 채워져 간다. 바르바라는 멘토라 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 지성을 깨치지만 결국 물질의 노예가 되어 돈을 따라 결혼을 선택한다. 제부쉬낀은 바르바라만한 지성도 없고 그걸 향유할 여유도 없다. 그래서 제대로 깨치치 못해 똑바로 봐야할 것도 왜곡시켜 보거나 무가치한 것을 가치있게 여기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한다. 그런 무지한 상태를 스스로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인지하고 있어 무시 당하는 것에 민감하며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늘 자신에 대해 장황하게 얘기하려 한다. 돈이 없는 가운데 지성이 무슨 소용이며 무지몽매한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죄가 있다면 많게든 적게든 가진 자들의 무심함에 있지 않겠는가. [분신] 의 골랴드낀은 속물 성향은 다소 있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일에 성실하고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이다. 고지식해서 상관에게나 하관에게나 무시 당해도 품성이 정직하고 꼼수를 쓰려하지 않는다. 그런 그 앞에 그와 똑닮은 사람이 나타나 골랴드낀의 위치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약삭 빠르고 상관의 비위를 맞추면서 호감을 사 골랴드낀의 일을 가로채거나 사칭을 하는 등 점점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마침내 골랴드낀의 분신은 골랴드낀이 바라지마지 않던 위치까지 올라가 그를 조롱하며 골랴드낀의 존재를 완전히 몰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중편을 한줄로 요약하자면 대략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봤자 소용없다] 라 하겠다. 참 맥빠지는 결론이 아닌가. 100여년전 사회주의 나라의 작가가 도출해낸 단상이 현대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다 못해 구속감마저 느끼게 된다. 아니, 자본주의 나라라서 더 두드러지는 건 아닐까? 연예인 이름에 빗댄 정부의 내각 인사들을 보면 계급제의 독재 정권보다 훨씬 끔찍하지 않은가. 어느 체제에서건 돈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돈이 없으면, 아니 의식주의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에게 지성도 문화도 요원한 것이 되고만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돈이 전부가 되야 한다는 결론은 결코 안된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 역시 돈에 의해, 돈을 위해 글을 썼지만 적어도 작품내에서는 끊임없이 돈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을 그렸다. (※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석영중 저] 참조)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이 작품 두편은 '돈과 신분 상승의 절대 가치' 를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경계코자 작가는 서문에 '현실을 보게 하는 작가의 글은 중단 시켜야 한다' 는 오도예프스키 공작의 글을 역설적으로 인용해 놓았다. 비록 현실이 그럴지언정, 현실이 그렇기에 더더욱 돈을 경계하고 자본의 망상에 주의하며 절대 가치 상실에 대비하라는 절박한 호소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모쪼록 '여유있는' 진보주의자들이 이를 잘 체득하고 반성하여 진정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 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을 대변하는 길을 찾아내었음 좋겠다. 그들을 '계도' 할 것이 아니라, 비난이나 멸시보다 공감을 우선하고 현장 소통에 보다 더 적극적이 되어 그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주고 그 안에 올바른 가치와 지성이 스며들 수 있도록 마음과 행동의 자세를 넓혔으면 좋겠다. 나를 비롯해서 말이다. 우리는 남과의 상대 비교로 돈의 여유없음에 늘 안달하면서 세상을 향한 마음의 여유가 없음에는 무지하고 무심하고 무책임하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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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의 눈에 정의 내려지는 빈곤과 본인이 느끼는 빈곤간의 간극은 분명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다. 타인들의 시선에 분명하게 구별되는 빈곤의 척도는 찢어지게 가난하여 입에 풀칠 할 여력도 없는 첨예한 상황이 가장 큰 빈곤이라 일컫어질 것이다. 남루한 형색, 무지함에서 오는 불손 혹은 선천적인 비루함은 분명 가난한 죄인에게만 주어지는 상징들이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가 <가난한 사람들>에서 대립시키고자 하는 타인과 구별되는 가난의 인식은 '배우지 못한 자들의 지적 빈곤'이다.
신분의 제약을 받은 채 궁핍함 속에서 뭄부림 치더라도 배움의 정도에 따라 진정한 빈곤함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지적 빈곤과 기근은 분명히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까르 제부쉬낀은 하급 관리인으로 살아가며 더 이상 가난할 수도 없을 만큼 가난하지만, 본인의 진정한 가난이란, 배우지 못함에서 비롯된 무지몽매함이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박약된 채로 바르바라만을 무조건적으로 사모하여 그녀에게 모든 순정을 바쳐 헌신 한다. 중년의 늙은이로 그려지고 있는 마까르 제부쉬낀은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근성의 소유자로 매우 번잡스럽고, 자기 비하에 사로잡혀 권력 앞에 맹신하게 되는 나약한 인간임으로 묘사된다. '저는 높으신 분들에게 발이나 문지르는 걸레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제 목을 조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느껴지는 불안함, 사람들의 수근거림, 야릇한 미소, 비웃음 입니다.' 본인이 자초해서 가난한 자에게서 나오는 특유의 비루함을 선택해 버린 것이다. 그에게선 고귀한 인간의 자존심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제부쉬낀은 바르바라에게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지만, 그 내용은 두서 없고, 장광한 연설만을 늘어놓을 뿐이며, 그녀에 대한 맹몽적인 집착과 헌신만을 강조하는 특유의 상투적인 내용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바르바라는 그런 제부쉬낀에 대한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바르바라의 첫사랑 뽀끄로프스끼는 가난하지만 매우 지적인 문학 청년이었고,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자신 내면에 숨겨져 있던 알 수 없는 욕망에 이끌려 책을 접하게 된다. 어쩌면 자신이 짝사랑 했던 청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책을 접했을지도 모르지만, 뽀끄로프스끼가 죽은 후에도 지속적으로 책과 더불어 살았던 점을 비추어 볼 때 분명 지적 유희가 주는 쾌감을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사이에는 도스또예프스끼가 그려내고자 했던 정확한 지적 능력의 차이에 따른 '빈곤의 척도'가 뚜렷이 구분된다. 작가가 영향을 받았던 뿌쉬낀과 고골리의 작품을 은연중에 나타남으로써 가난조차 막을 수 없었던 문학으로의 해방구를 발견할 수 있다. 서신체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의 수 없이 많은 서신들을 읽어보면서 신발 밑창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그 선택을 자초한 인물의 어지러운 맹목이 선사하는 앞으로의 영향들을 가늠해 보았다.
※ 분신 : 가면을 쓴 두 자아의 충돌
<분신>은 도스또예프스끼가 그의 작품 평생토록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갈 '자아 분열'의 전형을 제시한 작품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인간의 양면성을 리얼하게 분출한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때는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의 속 뜻을 일일이 헤아리기 쉽지 않다. 선과 악, 권력 앞에 헌신 하면서 뒤로는 욕을 해대는 이중적인 간신들의 이율배반적인 음모, 그리고 자기 혐오와 오만한 자존심들이 가학과 피학성으로 대치된다.
<분신>에서 골라드낀씨는 어느 날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난 작은 골랴드낀을 만나게 되는데, 갑작스럽게 자신의 인생으로 침범한 그 남자로 인해 점점 황폐해져 가는, 그리고 점정을 향해 달려 나가면서 더욱 크게 파괴되어 나가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골랴드낀은 상위 계급에 대해서 질투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본인 역시 자신의 하인에게는 윗사람들이 대하던 의례 그 무례함으로 일관한다. 신분에 대한 열등감에 휩싸여 비열하게 행동하지만 작가는 그의 인간적인 면에 치중을 두고 악인의 이미지 보다는, 다소 어리석은 행동등으로 주변에서 소외되는 나약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분신>이 발표될 당시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혹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는 아주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다. 두 자아가 총돌해서 갈등을 겪는 혼란속의 심리묘사가 아주 압권이었다. 마지막 장의 의사 끄레스찌얀의 또 다른 분열된 자아의 분신이 등장할 때는 오싹한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양면성, 그리고 닮고 싶어하는 내면의 은밀한 속삼임이 투영되어 나타난 자신의 분신을 섬뜩하게 재연해 놓은 작품이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던 골랴드낀이지만, 자신을 흉내낸 '분신 골랴드낀'은 모두가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들고 복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것은 골랴드낀이 바라던 이상 세계의 분열에 대한 표출이었을 것이다. 비록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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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을 읽는 것은 가시 많은 갈치를 먹는 것과 같다. 수 많은 가시를 발라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글을 읽어줘야한다. 러시아 인명은 너무나도 어렵다. 유령처럼 한 사람이 세 사람이 되는 것은 일도 아니다.하지만 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스팩트럼에 불과하다. 나라는 한 존재가 아버지의 아들이고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하고 내 친구들의 친구이기도 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러시아 대문호라고 불려지는 - 문학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많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어서 그렇단다 - 도끼 아저씨의 처녀작이라고 한다. 마까르 알렉세예비치 (마까르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알렉셰예브나의 사랑이야기를 서간체를 빌어 나타내는 글이다. 바르바라가 가난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비극적인 연애입니다. 그것을 또 제부쉬낀은 마지막까지 도와줍니다.비극적이지요. 제부쉬낀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팔아가면서까지 챙겨줬는데 말입니다. 역시 여자들은 김중배의 다이아가 더욱 좋은 모양입니다. 사실 여자들만 욕할 것은 못됩니다. 남자도 김중배의 다이아를 더 좋아할 겁니다. 그래서 방송이나 소설에서 사랑의 배신은 꼭 남자들이 때리는 모양입니다.
제부쉬낀 아저씨는 바르바라를 사랑하지요 하급관리입니다. 하급관리하니까 고골의 외투가 기어나옵니다. 왜 고골이냐구요 사실 제가 러시아 문학에 짧아 겨우 읽어 본 것이 고골의 '코' '외투'였는데 외투에서 주인공이 하급관리였거든요.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제부쉬낀과 바르바라가 다른 것이 있다면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인데요 선대 작가인 고골의 소설을 비판하는 듯한 부분도 등장합니다.7월 8일 편지를 보시면 알게 될겁니다. 그리고 책에 대해서 제부쉬낀이 이런 글을 씁니다.
"그놈의 책책 책 도대체 책이 뭡니까? 책은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소설도 다 엉터리에요.헛소리나 지껄이려고 쓴거죠 하릴없는 사람들이나 읽으라고 쓴 거라고요 나의 소중한 사람 , 제 말을 믿어요 조금이라도 세상을 더 산 사람의 경험을 믿으라고요 사람들이 <문학이라면 셰익스피어가 있지 그런 대가도 무시할 테야!>라고 윽박지르며 셰익스피어의 작품 따위로 당신의 말문을 막으려 들어도 절대로 넘어가지 말아요. 셰익스피어도 다 엉터리에요. 말장 헛거라고요. 추잡스런 얘기나 늘어놓으려고 쓴 것들뿐이라고요!"
책을 읽는 자로써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인데말입니다.소설이니 허구인 것은 당연합니다만 도끼아저씨 이 글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보통 소설에 나ㅏ나는 생각은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이 베어나오는 것이라면 도끼 아저씨는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쓰면서 자신이 매설가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글줄이나 좀 읽으신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도 궁금해집니다
두번 째 이야기 <분신>입니다. 전태일 아저씨가 하신 분신이 아니라 분신술의 그 분신이더군요 전 사실 몸에 불싸지르는 분신인 줄 알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야꼬프 뻬뜨로비치 골랴드긴의 이야기입니다. 역시 9등 문관입니다. 하급관리지요..그런데 이 이야기 열심히 읽다가 보니까 고골 생각이 또 납니다. '코'라는 글에서 자신의 코가 자기 행세를 하고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고골이 하거든요 가만 그 사람 이름이 뭐드라 기억이 안납니다만 고골의 이야기와 도끼 아저씨의 이야기가 닮아 있습니다. 도끼 아저씨의 주인공 야꼬프는 소심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큰 일 났습니다. 자기랑 똑 같은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 때부터 야꼬프의 심리 상태는 급속도로 무너집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이 가야하는 곳이 정해져 있습니다. 다 아시는 곳 '정신병원'으로 입원 당하면서 이야기는 끝납니다. 분열과 하급관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고골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제가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는 모릅니다만 보니까 말입니다. 도끼 아저씨의 두 작품은 고골이라는 작가를 부모로 해 만들어낸 글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새내기 작가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글발을 쌓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끼 아저씨는 고골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잘 들여다 보면 말입니다 꼭 이러는 것 같습니다 " 아버지 같이는 살지 않겠어"라고 말하지만 결국 보면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고 있는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이 두편의 글을 읽으면서 러시아 문학의 난점은 이름이 너무 많아서 동일시의 문제가 생기지만 거대한 서사에서 돋보이는 묘사가 장점인 것 같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요 뭐. 그런데 읽을 때는 힘들더니 바보같이 그 고생을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겁니다 도끼 아저시 전집 2번이 백야가 표제작이던데 내일은 오프라인 서점이나 한 번 가볼까 합니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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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스타 작가로 등단시킨 "가난한 사람들"과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혹독한 비판과 외면을 받은 "분신" 두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번역한 석영중씨가 쓴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잡은 책이다. "가난한 사람들"에는 사랑하는 두 남녀의 편지가 번갈아 등장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난한 관리인 제부쉬낀과 궁핍을 피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택한 바르바라의 구별되는 문체 속에서 읽는 이로 하여금 몰입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어쩜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선택해 연인을 배반하는 심순애와 이수일 사이와도 비슷한 것 같다. 결국 가난 때문에 마음을 주고 받는 연인을 버리게 되고 버림받은 "가난한" 연인은 애타게 하소연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그 여운은...안타까움...이다. "분신'은 사실 이해하기 힘든 지루한 내용이다. 옮긴이가 서평에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의 반응이라고 동조하지 않았다면 내가 정독하지 않아서인가 자책할 뻔 했다. 저자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보다 열 배는 더 좋은 작품이라고 평했다고 하니 비평가들의 악평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대작들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다니 도스토예프스키를 좀더 이해하려는 이들에게는 긴요한 작품일 수도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