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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게 있어 최고의 <죄와 벌>은 시이나 링고의 동명 제목을 가진 노래다. 현대판 죄와 벌을 말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그렇기에, 이미 오래 전에 읽었던 죄와 벌을 다시 읽게 된 것은 그 느낌을 다시 재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1860년대, 러시아의 수도 뻬쩨부르끄는 우리나라의 1960-70년대처럼 갑작스런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갖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 궤도로 들어 서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서울의 팽창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 주택 부족, 상하수도 문제, 부동산 투기 열풍 등 생활수준의 격차가 점차 벌어지던 시기였다. 이와 비슷한 1860년대의 뻬쩨부르끄는 농노 해방과 더불어 과다한 인구가 몰려 들면서 위와 같은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죄와 벌>은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이 배경의 서술을 통해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죄와 벌>은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와 그 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으킨 후, 그것을 고백하고 죄를 뉘우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죄를 뉘우치리라고 여겨지는 예견까지를 담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인간의 본성과 선과 악의 애매모한 기준, 그리고 사회적 문제 등이 담겨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가난한 환경에 찌들어 사는 인물이다. 골방에 틀어 박혀 자신의 삶을 실현시키기에는 이 세상의 원리가 황금만능에 찌들려 있기 때문이다.
- 있는 그대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활동하고 살고 사랑하는 모든 권리를 거부하고,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목 졸라 죽여 버려야만 한다! (상권 73쪽)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전당포의 주인인 노파를 살해하게 된다. 자신을 살해할 용기도 없는 그는 처음부터 노파를 살해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이러저러한 우연이 겹치며 결국 실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죄인과 다르다. 가난과 상처받은 자존심의 회복을 위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나폴레옹이 말한 <비범인의 우월성>에 대해 논한 바 있듯이, 비범인은 살인을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 살인을 통해 자신이 비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 악마가 나를 유혹했어. 그러고는 나중에 그 악마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이기 때문에 그곳에 갈 권리르 지니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 녀석은 나를 실컷 조롱한 거야. 자, 그리고 이제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왔어! 손님은 맞아들이시지! 만일 내가 <이>가 아니었다면, 당신에게 왔을까? 들어 봐, 내가 그 때 노파에게 간 것은 다만 <시험해 보기 위해서> 갔던 거야. (하권 616쪽)
라스꼴리니꼬프가 두냐에게 고백한 이러한 '시험'은 마침내 그가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자신이 행한 범죄의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파를 살해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이 아닌가! (상권 101쪽)
-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그냥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 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거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도 지갑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 그러면서 왜 넌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이런 비열하고 추악하고 저급한 짓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느냐? (상권 163쪽)
게다가 그가 내세운 이론 또한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나고 만다. 그와 같은 생각을 나누던 사람들 또한 직접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생각한 논리에 의한 판단으로 범죄를 행하지만, 그것은 그 논리를 주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악마가 자신을 유혹하여 노파를 살해했다고 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꼼꼼한 계획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운명의 우연과 논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 사형 선고를 받은 어던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상권 231쪽)
- 내 장담하건대, 너 같은 족속들은 말이야. 다 하나같이 수다쟁이에 허풍선이들이야! 무언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너 같은 족속들은 그 일을 마치 닭이 알을 품고 다니듯이 품고 다니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도용하기까지 해.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는 그 어떤 독립적인 삶의 징후라고는 없어! 너희는 고래 기름으로 만들어 졌어. 네놈들 몸에는 피가 아니라 우유 찌꺼기가 흐르고 있어! (상권 244쪽)
그렇기 때문에 노파와 리자베따의 살해에 대한 충격으로 지금껏 사랑해 왔던 타인을 탓하고, 그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 까지 서슴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의 속에 내재해 왔던 무수한 욕망이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그가 스스로 상처입힌 양심과 내면의 근본적인 선함이 파괴되어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모두들 철저한 무개성을 요구하고, 거기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낀다니까요!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가장 닮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을 그들은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요. (상권 293쪽)
이처럼 그의 친구인 라주미힌은 라스꼴리니꼬프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선함을 믿었고, 그것에 충실했지만 본의 아니게 그를 비난하게 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지고 있던 사상에 대해 진심어린 비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라스꼴리니꼬프의 자신의 동생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비관성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사상에 대한 반대로 또 첨예하게 대립한다. 분명 둘은 범죄자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비난할 수 밖에 없다.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가 행한 범죄로써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죄가 용서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는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른 행동은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그 또한 스스로 그것을 인정한다. 이 가운데 더욱 비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개인적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곧 사회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둘 모두 범죄를 저지른 것은 틀림없지만, 서로의 사상적 차이가 서로를 역겨운 존재로 추락시키게 된다.
- 여전히 우리는 영원성을 한낱 이해할 수 없는 사상, 무언가 거대하고 거창한 것으로만 상상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반드시 거창해야만 할까요? (하권 423쪽)
이러한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 노선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그 뿐이지, 자신과 관계없는 거창함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것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 서민들은 술에 취해 있고, 젊은 지식들은 이룰 수 없는 꿈과 환영 속에서 할 일이 없어 말라비틀어진 채 이론의 기형아가 되어 버리고, 어딘가에선 유대 인들이 몰려들어 돈을 감추고, 그 밖의 사람들은 퇴폐적인 삶을 살아가지요. (하권 710쪽)
하지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사상의 출발점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말하는 세상의 추악함은 그를 타락한 존재로 이끌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마찬가지로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살해하도록 부추긴 것 또한 세상의 추악함이라는 것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원인 속에서도 태어나는 사상은 다르며, 그들이 겪는 체험과 받아들이는 방식은 언제나 다르다.
- 자연을 변화시키고 조정하는 것은 인간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편견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버렸을 거야. (상권 101쪽)
그렇기 때문에 환경론은 물론이오, 유전론까지 버무리지 않으면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행한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분명 문제점은 환경적인 요인이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사상과 이론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환경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는 결국 자수를 하게 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죄를 뉘우쳤다기 보다 그렇게 하는 편이 형벌을 받을 때 유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어 좌절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스스로 택한 길이기 때문에, 그로써 자신을 탓하게 되는 것이다. 즉, 조여드는 압박감과 죄의식을 버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수하기 바로 전까지도 이것을 결행하는 것에 대해서 망설인다.
- 왜 이런 쓸데없는 시련들이 필요하다는 거지? 왜 그것들이 필요한 거지? 20년 동안의 유형 생활 이후에 늙어 빠져서 힘없고 고통에 찌들어 백치가 다 되고 난 다음에 깨닫는 것이 지금 깨닫는 것보다 더 낫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왜 그렇게 살게다는 데 동의하는 걸까? 아아, 오늘 새벽 네바 강 위에 서 있을 때 나는 내가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하권 766쪽)
그가 자수를 한 이유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추측하건대, 자신이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 비열해지기 위해 자수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소냐의 권유와 빼뜨로비치의 압박이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가 저지른 범죄에 우연성이 큰 작용을 했던 것처럼, 자수를 하는 것 역시 스스로의 선택이기 보다는 외부의 압력이 개입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인간의 운명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처럼 표현된다.
또한 에필로그에서도 보여지듯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참회하지 않는다. 단지 결말에서 그가 참회하지 않겠느냐는 예견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물론 그의 남은 인생까지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행위로 점철되어 있다. 남은 유형생활에서 그가 죄를 참회하고 진정으로 벌의 참담함을 느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회개의 예견을 통해, 그가 남은 생을 소냐와 함께 평화롭게 살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적 성향 또한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것이 불가지론자인 내게도 그 어떤 불쾌감을 주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도스또예프스끼는 <죄와 벌>을 통해 삶과 인생의 성찰,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 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과 내면의 탐구를 끝없이 취하도록 도와준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이 되려했던 인간의 좌절과 운명의 타락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불운한 인생과 범죄에 대한 공감을 자아낸 것은 분명 훌륭하지 않은가.
막심 고리끼의 말처럼,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임에 틀림없다. 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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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1.11~1881.2.9).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남긴 많은 걸작들을 모두, 최소한 한 개라도 완독을 한 이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떤 작가일까?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그에 대해 간단히 정리 해보면, 모스크바 말린스키 시립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838~4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846년에 처녀작《가난한 사람들》발표 하였다. 1849년에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로 유형 되었는데 이때 총살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감형된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후《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惡靈)》(1871∼1872) 등을 발표한다.(자료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48095) 도스토예프스키가 남긴 대작들을 모두 읽고,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수많은 고전이나 걸작들이 그렇듯이 그의 작품들 또한 깊은 의미와 사색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작품을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욕심을 내어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여건 상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그의 여러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죄와 벌만 읽고자 마음먹었다. 죄와 벌은 1866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근대 도시를 배경으로 법과 대학을 중퇴한 가난한 라스꼴리니꼬프를 그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기아상태에 빠져 자신이 가진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으로 하숙방 비를 해결하는 등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전당포를 몇 번 드나들며 헛된 공상을 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다.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한 것이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 여인으로 인해 차츰 동요가 일어난다. 죄란 무엇일까? 사회적인, 성문법 안에서의 죄는 법에 반하고, 그것이 정해 놓은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의 죄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벌은 무엇일까? 법적 측면에서는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것에 합당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행동의 빈도수를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유쾌한 자극을 빼앗고, 불쾌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객관화 시킬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생각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죄와 네가 생각하는 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도모하기 위하여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제한하기 위한 강제적 장치인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한 벌의 종류와 강도를 정하는 데에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그것을 하나로 제한하기 위하여 법적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죄는 상대적이다. ‘너와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의 어떠한 행동은 죄’라고 합의 하였기에 그것이 죄라고 인식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합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인식 된다. 살인을 예로 들어보자. 내가 평상시에 누군가를 살인 하였다면 그것은 명백히 죄이다. 그러나 전시에 적군을 죽였다면 누구도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살인, 곧 죄를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이해하였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죄 인식은 다른 측면에서도 가능하다. 전시에 적군을 살인하였다고 해도 나의 마음속에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이 생긴다. 이것은 죄를 ‘도덕과 양심의 측면’에서 이해한 결과이다. 어느 측면으로 인식하든 ‘너와 내’가 죄라고 합의한 - 혹은 교육에 의해 그렇다고 인식된, 어쩌면 인간이 날 때부터 이미 그 내부에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잠재된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유로 - 행위에 대해서만 죄라고 인식하기에 그것을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는 무척 빈궁한 생활에 허덕였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죄를 짓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에 국한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작은 죄’가 아니라 인류가 정한 ‘가장 극악한 죄’인 살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 했다. 그저 여느 살인범과 같이 자신의 죄를 숨기고, 벌을 피하려 할 뿐이었다. 그처럼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죄에 대해 - 법학도이기에 누구보다 자신의 죄의 잘못과 심각성을 (법적 측면에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 무감각 했던 이유는 ‘너와 나’라는 죄의 상대적 충족조건 중 ‘너’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결핍 중에 한 여인으로 인해 자수를 하고, 벌을 받게 된다. 왜 인간은 죄를 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피의자에게 심한 고통을 줌으로 같은 고통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는 인간의 심리와 육체적 거부를 이용하여 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양심과 종교적 측면에서는 죄로 더럽혀진 순결한 영혼을 벌을 통하여 깨끗했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의식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순결한 영혼을 악(죄)으로 물들이지 않으려는 영혼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수를 하여 벌을 받지만 죄질에 비해 가벼운 벌인 8년의 시베리아 유형을 받게 된다. 벌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죄에 대한 물리적 벌은 - 비록 합당한 만큼은 아니지만 - 받았지만 양심에 대한 벌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지 범인으로서 들킨 것에 대한 자책을 할 뿐이다. 그의 자수는 죄를 법적 측면에서만 인식한 결과이다. 여전히 그의 죄 인식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냐라는 한 여인으로 인해 그는 결핍된 ‘너’가 충족됨으로, 다시 말해서 죄 인식에 대한 상대성이 완성됨으로 마침내 그의 마음은 동요를 일으킨다. 이제 자신의 죄와 그 잘못을 양심으로 인식하게 된다. ‘너와 나’의 합의가 드디어 모든 측면 - 법과 양심 - 에서의 죄 인식을 가져 온 것이다. 인간의 죄 인식은 법과 양심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합의된 것이다. 교육에 의해 강제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넣어 준, 날 때부터 갖게 되는 프로그래밍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든 죄 인식은 인간의 편의, 즉 서로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보편적 상황에서는 그것에 일조를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편의만을 추구한다. 상대의 피해는 생각하지 않는다. 죄를 저지른다. 과연 죄에 대한 벌로 보편적 상황을 넘어 특수한 상황에서까지 죄에 대한 욕구를 소멸시켜서 마침내 모두의 안녕을 이룰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법은 그것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법도 범죄를 막지 못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한다. 오늘의 뉴스가 증거 한다. 그렇다면 양심은 어떠할까? 그 또한 법과 다를 바 없다. 보편적 상황에서는 법과 양심이 모두 발동을 하여 죄의 충동을 막는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 둘 다 힘을 잃는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 안녕을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마침내 양심으로까지 죄를 인식하게 된 것은 소냐의 사랑 덕분이다. 그에 대한 소냐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는 죽기 전까지도 죄 인식의 완성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냐의 사랑은 그의 양심을 흔들었고, 마침내 그의 죄를 - 진정한 의미에서 - 알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앎은 어떠한 의미에서 그에게는 진정한 벌이 된다. 인간이 정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죄는 분명히 나쁜 것이다.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한 벌은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양심은 죄에 대한 법의 태도에 동의하지만 벌에 대해서는 - 부분적으로 -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인권에 호소하여 사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죄를 지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다수의 인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 의해 다수의 인권이 침해 된다면 그 사람의 인권이 어느 정도 희생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영혼은 귀하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영혼은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죄에 대한 일정한 벌을 주되 범법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 만약 내가 피해자가 된다면 솔직히 말해서 나의 주장을 실천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만약 반인륜적인 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지 않고, 떳떳하다면 어찌 해야 할까? 죄에 찌들고, 악에 철저하게 물든 그의 영혼도 사랑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사랑’이 그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떠한 경우의 예외도 두지 않는다. 만약 예외를 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것이고,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인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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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기억 『죄와 벌』은 내가 접한 최초의 살인사건이었다. 발음할 때마다 혀가 돌돌 말리는 이름, 라스꼴리니꼬프- 가난한 청년의 모습과 깐깐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노파,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도끼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선명한 각인을 남겼다. 지금에야 영화, TV화면을 통해 접한 기억 때문에, 살인의 이미지가 관습적으로 남아 저절로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오직 순수하게 상상했을 때에는 지금과 다른, 정말 ‘순수한’ 공포가 있었다. 도끼로 머리를 찍었다-는 말을 맨 처음 보고 상상했던 그 열세 살 시절에는, 그 장면이 『죄와 벌』의 상징하는 그림이었고, 홀로 깨어 있는 어둠 속에서 문득 생각할 때면 어깨를 움츠리게 할 정도로 두려운 것이었다. 『죄와 벌』의 첫 기억은 그러하다. 내게는 오로지 ‘죄’의 무게와 잔상만이 소설을 압도했다. 내 스무 살을 닮아있기 때문에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는 그 어떤 변명의 여지없이 중죄이고, 그의 행동을 결코 옹호하지 않지만, 나는 매번 책을 읽을 때마나 라스꼴리니꼬프와 거리두기가 무척 어렵다. 어느새 나는 그의 존재에 밀착되어 때론 그가 되어 사건과 마주한다. 매번 읽을 때마다 나는 이 캐릭터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가난하고, 무모하고 고집스러운데다가 소심하고 멋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낀다. 그의 모습이 내 스무 살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홀든처럼 좀 더 어리든지, 게츠비처럼 좀 더 쿨했더라면 대학생이 되어, 대학생인 라스꼴리니꼬프를 마주하는 느낌은 더욱 특별했다. 연민과 애정은 더욱 커졌고, 그에게서 발견되는 나의 모습들은 더욱 뚜렷해졌다. 나는 그를 볼때마다 그저 연민밖에 줄 것이 없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홀든처럼 어리기라도하면 위로라도 해줬을텐데,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처럼 무모하더라도 하나뿐인 순정이 있었더라면, 하나만 볼 줄 아는 쿨한 용기라도 있었더라면 그의 순수한 열정은 숭고해질 수 있었을텐데, <돈키호테>의 돈키호테처럼 대책없이 무모하기라도 했으면, 모른척하고 응원이라도 해줬을텐데. 그는 어쩜 그렇게 인간적인지. 어쩌면 나처럼 나약하기 짝이없는지, 나는 그저 라스꼴리니꼬프처럼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같이 울어주는 것밖에는 해줄 것이 없었다. 그와 나의, 우리들의 스무 살 미성년의 세계에서 어른이라는 기성세계로 넘어가는 사이, 그 시간 위에 서있는 이십 대는 끊임없이 변화의 충동을 겪는 시간이다. 정작 아무것도 이뤄내지도 이뤄낼 수도 없으면서, 몽상에 망상을 더해 변화를 꿈꾼다. 이십 대는 비로소 엄마 품에서 벗어났는데, 막상 집밖에 나오니 망망대해 우주 속에 홀로 서있음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어디도 쉽게 안착하지 못하고, 어디도 나를 반기는 곳이 없음을 실감한다. 그렇게 외로움과 친숙해지는 20대의 상상력은 종종 비관적일 때도 많다. 신입생 시절, 학교 친구들의 글 속에서 유난히도 죽음, 종말이 자주 발견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라스꼴리니꼬프의 행위 하나하나가, 납득하긴 어렵지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만 보이는, 거울같은 시야로 허나 본능적으로 저지를 줄만 알지, 수습하는 법은 모른다. 그저 쩔쩔매고 고민할 뿐이다. 대의를 꿈꾸고, 앞을 보던 라스꼴리니꼬프의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사유의 대상도 점점 작아진다. 백해무익한 노인을 심판하는 큰일을 치르고 난 뒤에 라스꼴리니꼬프는 시종일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짐작해보는 데에 여념이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저 추측하고 고민에 빠질 뿐이다. 남들에게서 얘기되는 내 모습을 들으러 귀를 쫑긋 세우고, 남들이 보는 내 모습을 엿보기 위해 앞발을 간신히 세운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그런 일들로 마음을 태우던 밤들이 있었다. 나 조차도 나를 이해할 수 없기에 공부하고 알면 알수록, 나는 더 반듯한 사람이 되어 갈 줄 알았다. 헌데 나는 오히려 반듯한 그 선을 넘을 궁리, 탈주하고 싶은 충동에만 사로잡혔다. 그것이 범죄와 같이 극단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비상식적인 일탈을 시도한다. 스무 살, 상기된 에너지가 시종일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없는 상태로 이끌었다. 도무지 나 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의 행동들은 나름의 내 시간을 향한 투쟁이었다.
하물며 남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고, 내가 이해받을 수 있다고도 여기지 않았다. 이 세계가 나를 향해 보내고 있던 크고 작은 애정들, 나를 염려하고 사랑해주던 사람들에게 조금도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라스꼴리니꼬프를 통해 영락없이 그때의 내 모습을 본다. 그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누이와 소냐의 호의를 그는 좀체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근심과 걱정, 십자가를 자신의 어깨 위에 홀로 지고자 한다. 그래 봤자 그 순간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나약한 자신일 뿐이다.
하지만 그를 통해 이제는 본다. 그 외롭고 고독했던 시절. 아름답더라도 선뜻 되돌아가기 망설여지는 그때, 우리 곁에 얼마나 많은 사랑들이 있었는지 이제는 안다. 물론 다시 돌아가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뒤늦게나마 두냐와 소냐의 그녀들 자신보다 더 큰 사랑들을 통해 여기에 있는 내가 지나온 시절을 위로 받고 있다. 스무 살에서 그리 멀리 떨어나오지 않은 지금, 나는 조금더 사랑스러운 눈을 하고, 주변을 돌아본다. 내가 아직 받지 못한 사랑이 어디에 있나, 내가 아직 주지 못한 사랑이 행여 어디에 있나. 우리의 웃음은 늘 그렇게 자조적이다
행위에 정당한 이유를 부여한다. 하지만 대게 그 이유의 정당성은 타인의 동의를 구하기 어렵다. 가진 돈을 몽땅 술 마시는 데 써버린 마르멜라도프가 아내에게 타박을 받자, 라스꼴리니꼬프는 슬쩍 돈을 두고 온다. 이윽고 후회를 하지만, 스스로 정당한 이유를 ‘찾아내’ 어리석은 행동은 이내 성스러운 행위로 납득된다. 그래서 우리의 웃음은 늘 그렇게 자조적이다. 이십 대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진부하게 ‘내 안의 적은 내 안에 있다’는 명언을 들먹이고 싶진 않지만, 결국 나다. 나만 생각하는 때이기 때문에, 결국 나와 싸우고 지고, 이기고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죄의식 역시 나의 커다란 일부다. 때문에 결국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수를 하게 된 까닭도 내면에서 겪는 죄의식과 자의식에 의한 것이다. 이때, 포르피리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혐의를 두고 어느 정도 증거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절대 미리 가두는 법이 없소. 왜냐고요?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가만히 놔두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기 때문이죠. 즉 상대를 불안하게 해서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뜨리는 거란 말이오. 그러면 상대는 스스로 혼란에 빠져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든지, 미행당하고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불안에 떨게 되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자수를 하게 되고…… 그러니까 피의자가 아무리 거리를 싸돌아 다녀도 난 그다지 걱정하지 않소.” (178p)
소설 속에서 가장 큰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사람은 바로 뽀르피리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라스꼴리니꼬프를 불안하게도 오싹하게도 만든다. 그럴 때마다 나 역시 움츠러듬을 느꼈다. 나는 내가 정말로 복잡한 인간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굳이 남다르다, 특별하다고 내세울만한건 없지만, 남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인간이라고 규정해왔다. 결국 이것 역시- 나폴레옹을 들먹이며, 자신은 나폴레옹 같은 위인이 아니라고 목청껏 외치는 라스꼴리니꼬프가, 혹시 나폴레옹을 꿈꾸며 그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는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대목에서, 숨어있는 내 욕망 역시 슬그머니 드러난다. 아, 정말이지 놀랍게도 어쩜 이렇게 일거수 일투족에서 내 모습이 투영될 수 있을까. 나 스스로는 이렇게 복잡하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나는, 그렇게도 쉽게 간파될 수가 없다. 남들은 몇 마디 문장으로도 나를 읽어내기까지 한다. 마치 뽀르피리가 라스꼴리니꼬프를 단번에 파악해낸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천성적으로 굉장히 신경질적인 분이에요. 로지온 로마노비치. 내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몇 가지 당신의 기본적인 기질과 성격, 성정(性情)으로 미뤄 볼 때, 당신은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극을 잘 받는 분이에요.”(662P) 이것은 바로, 스스로 ‘복잡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서도 고스란히 발견되는 면이다. 내가 스무 살을 거치면서, 더 많은 일을 겪고, 더 많은 것을 배우면서 느낀 것은 결국 나는 얼마나 나약한가-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일에 시험을 겪고, 얼마나 작은 판결에도 온 불안을 곤두세웠던가. 결국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수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그제서야 비소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내가 더럽고 해로운 <이>같은 존재, 아무에게도 필요치 않은 고리 대금업자 노파를 죽인 범죄 말이냐?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그 즙을 빨아먹은 그 여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40가지의 죄도 용서해 줄거야. 과연 그런 게 범죄일까? 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 죄를 씻을 생각도 없어. 모두들 사방에서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하지. <범죄다, 범죄다!>라고, 하지만 그 불필요한 수치를 향해 가기로 결심한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는 내 소심함과 어리석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어! 난 단지 비열함과 무능함 때문에 가려고 결심한 거야. 그리고 또 그… 뽀르피리가 제안한 것처럼 그것이 유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 (763p) 나약함이 부릅뜬 눈 그 나약함이 나의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고, 가장 사랑이 많은 부분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내 몸 가장 정수리에 있는 그 나약함은 흰 눈을 뜨고 있다. 어떤 사람의 가슴에는 그 눈이 푸른 빛을 번쩍이며 살아있고, 어떤 사람의 가슴에는 희끄무레 안개낀 듯 떠있기도 할 것이다. 푸른 빛을 내는 눈은 그 사람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그 길을 인도해나갈 것이다. 마치 라스꼴리니꼬프가 죄책감, 죄의식에 ‘눈떠’ 자수를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청년의 때에 불을 밝히던 눈들도, 세월을 거치면서 때때로 가려지기도 하고, 감고 있기도 한 듯 하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 제 마음의 눈을 가린 사람들- 끊지 못하는 담배처럼 죄를 일삼는 (그러고도 부끄러움도 없는) 뾰뜨르 뻬뜨로비치 루쥔 같은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마지막까지 그에게 애정을 거둘 수 없는 까닭은 이렇게 나는 죄와 벌을 읽으면서, 지난 날의 내 모습을 추억하고,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본다. 내 삶에 어떤 분명한 영향력을 휘두르는 책이기에 ‘내 인생의 책’으로 ‘고전’으로 부르기에 망설일 것이 없다. 다시 돌이켜보면, 그 때와 난 참으로 달라진 것도 없고, 나아진 것이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나약했던 그때의 나, 바람 불때마다 거침없이 흔들렸던 나는 참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애정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 내가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마지막까지 애정을 버릴 수가 없는 까닭은 바로 이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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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간이 전집으로 8권을 사고 몇 년 만에 겨우 죄와 벌을 끝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열린책들 출판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에 더 늦어졌다.
한 마디로 응축하자면,
한 번의 정독으로는 부족하다.
현미밥을 씹듯, 오물오물 오랫동안 다시 음미하며 읽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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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생활이 어렵지도 않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그다지 없는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있지만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살아가는데 걱정은 없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까. 살기 위해 살아야하는 입장을 벗어난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나는 최근에 그런 걱정에 빠져 있었으며 근심과 회의로 일에 대한 추진력을 완전히 소실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접한 것이 이 죄와 벌이다. 죄와 벌의 기본적인 플롯은 단순하다. 주인공의 살인과 그에 대한 회개. 그러나 그 과정의 심리 묘사가 이 소설을 명작에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한다. 도스토 예프스키의 심리 묘사는 무서울 정도이다. 그 스스로 그런 상황에 대한 성찰이 깊이 했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죄와 벌이라는 표면적으로 그렇게 매력적인 주제를 택하고 있지 않음에도 이 소설이 지금에도 재미있게 읽혀지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 심리 묘사야 말로 나에겐 길을 제시해줄 그 무엇이었다. 하루하루를 고뇌와 근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라스꼴리니코프는 나의 입장과 유사했다. 입장은 조금 달랐지만 그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사람을 죽였다. 비범한 사람은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렇게 타산적이며 계산적인 이론으로 이루어진 곳은 아니었다. 그럼 이제 사람까지 죽인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까.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만의 이론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그 이론은 세상에 의해 부정되었다. 본인 또한 그 이론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보다 괴로운 것이다. 나를 지탱해온 삶의 가치, 사상이 의심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결국 그는 자수하게 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성녀와 같은 소냐는 그를 묵묵히 바라봐주고 기다려준다. 그 변치않는 사랑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무엇을 발견했으리라. 사랑에서 무한하며 변치않는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답이 되진 못했으나 나 또한 이런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것이 사랑이든 또 다른 것이든. 답이 보이지 않는 고민을 할때는 괴롭다. 그러나 답이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지게 되어 더이상 괴롭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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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명작의 감동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떤 작품도 죄와 벌 만큼 격한 감동과 일치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비록 주인공의 상황이 살인이라는 보통사람이 겪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지만 주인공이 고뇌하고 뉘우치는 과정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악한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범죄가 되지 않더라도 양심에 가책을 느낄만한 일을 해 죄책감에 시달린 일이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지 백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명작으로 빛을 발하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이런 죄책감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은 이런 죄책감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홰개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나같은 경우 소설을 읽어내려 가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무거움 마음을 나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주인공처럼 죄의식에 시달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경찰서로 와서 죄를 자백하는 장면에서는 뭔가 막혀있는 것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고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시중에 나와있는 죄와 벌이 대부분 여백이 거의 없이 글씨들이 페이지를 뺵빽하게 채우고 있어서 한번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그 흡입력은 대단하다. 특히 이 책을 기독교인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 소설을 통해서 죄의 고통과 홰개의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
| 말이 필요없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첫장을 넘기는 순간 숨막힐듯한 광기과 열정에 사로잡혀 한순간도 책을 손에 놓을수 없는 최대의 걸작. 과연 그 광기의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 인간의 삶속에서 법은 객관적인 틀일뿐 그것을 분연히 깨치고 나가는 광기는 정말로 진리라 할수 있을까? 보지 않고서는 인간 내면에 숨겨진 광기의 흉폭함을 알수없는 러시아 문학의 필독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