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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루이스 교수는 평소 제일 좋아하는 글 짓는 분이시다.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도 감동있게 보았고... 이 책도 재미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차용한 이야기들을, 기독교 진리에 대입하여 쓴 소설인데... '프시케'와 '오루알'의 양면성을 가진 한 여인이, 끝내 한자리에 앉아... 마지막, 진실한 '얼굴'을 찾는다고 쓰고 있다. 신랑되신 예수님으로 비유된 '신'은 말없이, 혹은 끊임없이 이 여인을 따라 여행을 하고 있다. 저 끝날, 우리들이 가면을 모두 벗어던지게 되었을 때. 마지막 남는 신부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신랑되신 예수의 얼굴은? 그 광경을 보기 위하여, 우리 믿는 자들은 더욱 부지런히 주를 섬기고, 따라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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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문제>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로 C.S.Lewis를 처음 접한 이래 팬이 되어버렸지만, <나니아 연대기>를 제외한 그의 글은 처음엔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특히나 이 책처럼 소설인 경우엔 좀 편한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집중하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책 여기저기에 숨겨진 그만의 하나님과의 경험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루이스 특유의 투철한 이성과 논리로 글을 전개하는 중 그 논리적인 언어로 논리 저편에 계신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아주 어렸을 때 읽은 <토마스 불빈치의 그리스 신화> 속의 한 로맨틱하고도 슬픈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던 것을 그는 우리네와 하나님의 관계를 찾아냈다. 언니 오루알의 부추김으로 신랑의 얼굴을 확인하기까지 프시케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아니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이를테면, 알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 완전한 교감 혹은 소통 들-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이성과 상식의 이름으로 의심이 파고듦으로써 프시케가 누리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만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그 모든 것들을 누리려면, 내가 아는 지식, 이성, 논리, 상식, 가치관.. 들의 잣대을 내려놓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맞이해야 한다. 프시케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이미 내 일부로 자리잡은 상식과 이성, 욕심이 그걸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이 길에 진리가 있음을 믿고 따라갈 수 있는 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쌓인 사건들과 명쾌한 그만의 논리전개로 하나님이,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루이스의 글들이 나를 격려해주기 때문이다.
[인상깊은 구절] .. 내가 웅깃이라는 것은 내 영혼이 웅깃처럼 추하다는 의미였다. 탐욕스럽고 피에 굶주렸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진정한 철학을 연마한다면 내 추한 영혼도 아름답게 변화되리라. 신들이 도와준다면 할 수 있으리라. 지금 당장 시작하리라. 신들이 도와준다면..... 하지만 그들이 과연 도와줄까? 모든 생각과 행동을 공정하고 평온하고 지혜롭게 하기 위해 매일 아침 하루를 담대하게 시작하리라. 그러나 옷을 다 차려입기도 전에 예전의 분노나 원한이나 괴로운 상상이나 움울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되돌아가겠지.(그리고 언제 그렇게 되돌아갔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하겠지.) 나는 채 반 시간도 버틸 수가 없었다. 머리 모양과 옷 색깔을 새롭게 해서 추한 육신을 고쳐 보고자 했던 옛날의 끔찍한 기억들이 마음속에 기어들었다. 또 다시 같은 짓을 하고있다는 두려움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얼굴을 고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영혼도 고칠 수가 없었다. 신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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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을까? 단숨에 한번을 읽고서는 곧바로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너무나 진한 이 감동과 아름다움을 그저 감상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젖어들고 동화되고 싶었다.
이야기는 슬퍼서, 너무나도 슬퍼서 주름진 육신과 함께 메말라버린 오루알의 가슴 속 독백으로 시작된다. "난 이제 늙어서 신들의 노여움을 두려워할 이유가 별로 없다. 남편도 없고 아이도 없고 친구도 거의 없으니 그들로 인해 해를 입을 일이 없는 것이다. … … 이런 연유로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나는 이 책을 통해 행복한 사람은 감히 쓰지 못할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나는 신들을 고소할 것이다. 특히 회색산의 신을 고소하련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린, 아니 자신의 전부를 주고서도 바꾸지 못할 삶의 의미를 가져가버린 신들을 고소하겠노라고. 그녀의 삶은 언제나 신들의 잔인한 장난으로 인해 상처입고 부서졌다. 그들은 언제나 그녀의 행복을 부풀릴 대로 부풀리고서는 무자비하게 터뜨려 버렸다. 그녀는 사랑했다. 아름다운 프시케를. 애끓는 어미의 심정으로, 불같은 연인의 가슴으로.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으로 그녀는 사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잔인한 신들이 그 사랑을 가로채가 버렸다. 차라리 프시케를 죽였더라면, 차라리 그랬다면 나았을 것이다. 어째서 프시케로 하여금 신들을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게 만들었는가? 왜 자신의 선택에 의해 프시케를 파멸하게끔 만들었는가? 왜 “너 또한 프시케가 되리라”고 저주하며 피해자인 자신의 파멸까지 예언하는가? 결코 용납할 수 없노라고, 그것은 부당하고 잔인한 짓이라고 그녀는 소리쳐 절규한다. 소리치고 소리치며 이름 없는 재판관 앞에서 잔인한 신들을 신랄하게 고소한다.
프시케를 잃고, 여왕이 된 오루알은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싼다. 추한 얼굴 뿐 아니라 상처 입은 오루알도 여왕이라는 베일로 감싸버린 것이다. 그 베일 뒤에서 오루알은 점차 사라져 가고 대신 일에 미친, 프시케를 향한 사랑으로 타는듯한 갈증에 허덕이는 여왕만이 외롭게 남는다. 베일에 가려진 그녀의 눈에는 끝내 떨어뜨릴 수 없는 눈물이 맺힌다. 그러나 그 눈물을 떨어뜨릴 수 없음은, 끝까지 여왕으로 남기 위해서, 오직 슬픔에 젖은 오루알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오루알은 인생의 황혼에서 이웃나라를 여행하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의 동생 프시케를 섬기는 사원의 사제에게서 프시케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원래 ‘큐피드와 프시케’의 이야기에서처럼 언니들의 질투가 프시케를 파멸로 이끌었다는 내용이었다. 오루알이 신들을 고소하는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옛 상처들이 다시 사무쳐오면서, 억울한 분노에 몸서리리가 쳐지던 오루알에게는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차갑게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신들보다 인간에 유해한 존재는 없다 … … 신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으면 한번 해보라고 하라. 당연히 대답하는 대신 나를 쳐서 미치광이나 문둥병자로 만들어 버리거나 짐승이나 새나 나무로 둔갑시켜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신들에게 대답할 말이 없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신들도 세상이 그 점을 안다는 걸 알리라) 일이 아니겠는가?”
‘신들에게는 대답할 말이 없다’는 말로 모든 것이 끝난 듯 했으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이 책을 다 쓴 후,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만나게 된다. 그녀가 여왕으로써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장군 바르디아가 갑자기 죽게 된 것이다. 프시케를 잃은 그녀에게 바르디아는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으며 가장 충실한 부하였고 전부였다. 그런 바르디아의 죽음 앞에서 그녀는 그의 아내 안싯을 통해서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듣게 된다. 바르디아의 죽음은 다름아닌 오루알 자신의 뒤틀리고 왜곡된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 … 일을 잔뜩 쌓아 놓고 그를 늦게까지 궁전에 붙잡아 놓았다. 단지 그의 목소리를 듣는게 좋아서 질문들을 퍼부었다. 그가 가고 나만 공허하게 남는 순간을 늦추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 … 또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아내를 과하게 사랑하는 남편을 놀리는 수백 가지 방법이 있는데, 바르디아는 거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했다. … … 내가 직접 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베일 뒤에서 은밀하게) 끝도 없이 모략과 계략을 세움으로써 그런 쪽의 소문을 퍼뜨려 남들의 조롱을 사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는 건 싫었지만, 수심에 찬 얼굴을 보면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 … 한밤중의 터무니없는 상상 속에서 (안싯은 죽거나, 그보다 더 기분 좋은 경우에는 창녀나 마녀나 배신자로 판명 나곤 했다) 그가 마침내 내 사랑을 구하러 올 때면 나는 항상 용서부터 구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그를 용서해 줄 때까지 수많은 고생을 시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거의 죽을 지경까지 밀어붙이곤 했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사랑이라는 허울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리고 자기 합리화만 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프시케에 대한 사랑도 그랬던 것이 아닐까? 너무나 두려웠다. 그녀가 분노의 보호를 받은 것은 잠시뿐이었다. 분노가 제풀에 스러지면서 진실이 그 자리로 밀고 들어왔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 … 그 황폐한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었다. … … 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존재, 태처럼 생겼으나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왕국은 거미줄이었고, 나는 그 중앙에 웅크리고 앉아 훔친 목숨으로 배를 채워 퉁퉁하게 부푼 거미였다.”
이제 하늘의 의사들은 그녀를 눕혀놓고 수술을 하기 시작했다. 베일에 가려졌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법정에 세워졌고 재판장은 그녀의 베일과 옷을 모조리 다 벗겨버렸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없이 알몸으로 섰다. 오직 신들을 고소하는 책 한권을 들고서. 그러자 재판장은 그 고소장을 읽으라고 명령했고 그녀는 그것을 읽어나갔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신들을 향해 신랄하게 비난하고 힐난하면서 읽고 또 읽어 나갔다. 읽고 싶지 않았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재판관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읽었을 것이다. 재판관이 물었다.
“대답을 얻었느냐?”
“네.”
‘신들에게 대답할 말이 없다’고 소리쳤던 그녀였지만 결국 대답은 자신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나는 신들이 우리에게 드러내놓고 말해 주지도 않고 우리 스스로 대답을 찾지도 못하게 하는 이유를 잘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자기중심에 무슨 말이 있는지 찾아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게 내 말의 의미입네 떠드는 소리를 신들이 뭐하러 귀 기울여 듣겠는가?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신들의 수술이 끝나가고 있었다. 신들을 향한 그녀의 고소는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준비단계였다. 그녀는 자신의 깊은 상처들을 되짚어보고 마음 것 아파하며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꿈속에서(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지만) 그녀는 비로소 프시케를 다시 만난다. 그 후에 일어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직접 읽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름답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마치 아름다움의 궁극적인 모습을 언뜻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살짝 열린 창문 같이. 그리고 그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은 너무도 눈부시다. 나는 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감상한 그 순간, 아름다움은 나를 내 몸 밖으로 불러내어 나 자신과 나를 구속하는 차원의 속박을 벗기고 영원의 세계로 이끌어갔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 자기 손 안의 보물은 결코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독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끝없이 관대해진다. 함께 계곡을 탐험하다가 어떤 사람이 우연히 숨 막히게 아름다운 비경을 발견한다면 그는 결코 그 광경을 혼자만 누리려고 하지는 않으리라. 그는 분명 목이 터져라 사람들을 불러 이 아름다움을 공유하자고 벅찬 가슴으로 외칠 것이다.
나도 지금 그러한 심정이다. 더 없이 벅찬 가슴으로 모두에게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께 공유하자고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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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라는 분은 굉장히 유명한 기독교 관련 작가이신것 같습니다. 비록 저는 기독
교신자는 아니지만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훌딱 읽어버렸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신과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섬긴다고 하는
그런 신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그 의도는 무엇인지. 어찌보면 매우 불경스런
의문이기도 하지만 그저 궁금해졌습니다. 누군가 내게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도 내
가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건 적절한 대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옳다고
해도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말이지요. 또한 신의 문제도 그렇거니
와 사랑에 관한 문제도 궁금해졌습니다. 신은 언제나 우리를 감싸고 있는 사랑이라
면 우리는 누구일까요? 사랑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지. 그런 궁금증들이 생겼습
니다. 몇 권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즐겁기만한 책들도 분명 의미가 있지만 그
것보다 조금 더 좋은 책이라고 생각되는 건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인 것 같아요.
이 책도 그런 것 같네요. 얼굴을 찾는다면,,,그 곳엔 누가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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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내용인 푸시케 신화를 재구성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푸시케 신화는 이런 것인데, 사실은 그게 원래 이야기가 아니라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는 정도의 소설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의미에서만 기독교 적일뿐입니다. 기독교와는 상관 없는 책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시간이 남는 것이 아니라면 전 읽지 마실 것을 권합니다. 저는 제목만 보고, '우리 인간이 근원적으로 갈구하는 그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혹은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주제를 소설로 풀어서 형상화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듯합니다. 만일 루이스가 이 주제를 소설로 표현하려 한 것이었다면, 실패한 듯합니다. 전혀 감동이 없습니다. 아마도 루이스가 이 소설을 자기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것은, 그 우수성 때문이 아니라, 써보고 싶었던 내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통찰력을 얻을 목적이거나, 어떤 소설 감상의 즐거움을 얻으시려는 목적이라 하더라도, 이 책은 비추입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별로입니다. 차라리 원래의 푸시케 신화를 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보여주는 약간의 통찰력 때문에, 이 책을 높이 평가하시는 분이 있으신 듯한데, 그건 루이스가 원래 다른 작품에서도 보여주는 정도의 통찰력입니다. 같은 주제에 대한 통찰력에 감탄하시고 싶다면 차라리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이 훨씬 더 낫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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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너무 어려 양심이 무엇인지 모른다네.’ 세익스피어 이 책의 시작하는 첫페이지에 있는 말이다. 이야기 시작 전보다 더 앞인 있는 저자의 말 앞에 있다. 처음에는 왜 이 말이 이 책의 첫페이지에 있는지 몰랐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오루알이 동생을 사랑한 것은 어린 사랑이라는 것이다. 오루알 자신은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프시케를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동생 프시케를 돌보고 사랑했다고 생각하지만, 댓가를 바라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부분 중에 내가 찾아낸 부분은 세 곳이다. 프시케가 전염병이 걸린 백성들을 치료해주지만 얼마 있다 재물로 바쳐질 때 백성들이 말리지 않은 부분,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동한 부분에서 오루알은 백성들이 은혜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프시케가 재물로 바쳐진 후 다시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프시케는 행복하다고 했고, 왕궁으로 가기 싫어했는데도 다시 왕궁으로 프시케를 데려가려는 오루알의 모습이 두 번째다. 세 번째는 여우선생과 바르디아에게 자기중심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대했지만, 그것을 깨달은 것은 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이다. 여우선생이 자유인이 되었을 때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고, 바르디아가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어도 당연히 생각할 뿐 오루알은 알지 못했다. 그 전까지 신을 고소하는 고소장을 쓰던 오루알이 신의 얼굴을 마주 대했을 때에야, 즉 신을 제대로 만났을 때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 역시 그런 어린 사랑, 조금 유식한 말로 하면 저급한 철학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내 아이에게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댓가를 바라고 있고,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대하기에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렇게 정성을 쏟고 노력하고 있는데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화내고 있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정말 상대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배려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일까? 프시케는 그렇게 하면 잘못된다는 것과 벌을 받게 된다는 것, 또 그것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루알의 청을 들어주어 주는 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인다. 백성들이 치료에 고마워하든 안 하든 오히려 원망하든 자신이 사랑으로 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신의 재물이 되는 것도 주저함이 없었다. 왜 루이스는 그 많은 그리스로마신화 중에 큐피트와 프시케의 사랑을 가져와서 이 이야기를 썼을까? 또 신화와 달리 프시케의 궁전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만들어야 했을까? 왜 못생긴 여자의 마음이 필요했을까?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신의 얼굴을 마주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프시케는 오루알과 달리 어떻게 어릴 때부터 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일까? 저자인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나 다른 저작물보다 왜 이것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던 것일까? 이런 궁금증들을 해결하면 처음에 언급한 세익스피어의 말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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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후 감상문을 당시에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프시케의 신화를 차용한 글이다"라는 문구만 남겼었죠.
오늘 감상문을 쓰려고 하다가, 다른 분들이 쓴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은 것과 다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음, 저런 게 있었던가?"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다른 분들이 이야기 한 것처럼 분리된 것 같은, 또는 뭔가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이 있었고, 특히 뒷부분은 (내용 전개가) 불만족스러웠었는데 다시 읽다보니 제가 잘못 읽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이것은 프시케의 신화를 차용한 글입니다. 그런데, 작가가 말하지 않은 것은 기독교의 이념을 그대로 넣어뒀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해 아는 분이라면 주의를 기울여 생각할 경우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우선생은 세상의 지식입니다. 그래서 웅깃(신)이 없다고, 그냥 지어낸 것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아버지 왕은 물질을 대표합니다. 그런 식으로 기독사상을 잘 짜맞추어 프시케 신화처럼 보이게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단순히 소설로 생각했을 때에는 (전개상) 불합리해 보이던 것이 재해석을 하자 맞아떨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루이스의 문학적인 재능을 새삼 깨달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을 빼내고 읽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는 작품입니다. 이러한 수준의 변화(신화를 새로운 신화로 창조)라면 끝없는 지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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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수님이 쓰신 논문을 90% 활용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주제로 살짝 비틀어 본 글입니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과정-
C.S 루이스는 자신이 쓴 소설 중 최고의 소설로 이 책을 꼽았었다. <나니아 연대기> 등의 걸출한 작품을 제치고 사랑을 독차지한 이 작품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난 , 이 책을 통해 모든 신앙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얼굴 찾기’ 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진정한 나’ 를 발견하는 시간이라고 표현해도 좋겠지만 , 난 좀 더 단순한 문체를 이용해 ‘얼굴 찾기’ 시간이라고 이야기해 보고 싶다.
클라이드 S. 킬비(Clyde S. Kilby) 는 루이스에게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라는 이 책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냐고 물었었다.
그러자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가 반드시 자기 작품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보다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이다. 이러한 전제를 기반에 두고 그는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의미의 4단계를 제시했었다.
(1) 역사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2) 타고난 그리스도인 다운 영혼의 예로써 사이키(Psyche) (3)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애정이 지닐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구현하는 인물의 예로서의 오루얼(Orual). (4) 특별한 삶의 길을 가는 개인을 대하는 가족 , 친지들의 반응.
마지막 4번 같은 경우는 일종이 ‘소명에 대한 반응’ 이라고 볼 수 있는데 , 이 책의 주인공인 오루얼은 점점 신에게 헌신해 가는(소명에 순종하는) 사이키(사랑하는 동생) 를 바라보며 , 신이 자신으로부터 동생을 뺏어간다고 생각하며 그 신들을 고소하고 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 많이 경험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소명’ 을 따라 걸어가려 하는데 , 오히려 사랑하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그 길을 막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때론 그러한 것들이 ‘아버지의 뜻’ 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 때론 그러한 주변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가던 길을 걸어 가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 우리는 이 상황들을 결코 3자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LEWIS 는 <나니아 연대기> , <공상과학소설3부작> 등에서도 많은 것들을 함축시키는 능력을 발휘했지만 , 특히 이 번 작품은 ‘신화’ 를 각색하여서 그 속에 굉장히 많은 신앙적인 메세지를 포함시키고 있다.
난 특히 그 중에서도 , ‘하나님’ 과 진실되이 대면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필수적으로 치뤄내야 하는 삶의 과정으로 , ‘얼굴 찾기’ 를 강조하고 싶다.
난 , 이 표현을 그냥 ‘진실된 만남’ , ‘진실된 마음가짐’ 등으로 해석해 보고 싶다. 이게 이해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오루얼이 신들에게 탄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형식인데 , 이 오루얼을 창조해 낸 사람이 Lewis 이기에 , 그가 의도하는 바가 바로 오루얼의 글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루얼은 여기서 ‘종교적인 체험’ 을 언어로 어떻게든 표현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 아마도 Lewis 가 생각하기에 이런 ‘신비적 종교 체험 이야기’ , ‘하나님과의 대면’ 등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직설적 논술이나 사실주의적 묘사보다는 오히려 동화나 신화 등을 이용해서 글을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오루얼’ 의 변화과정을 ‘나 자신’ 의 변화과정과 함께 연결시켜 생각해 보는 시도를 마땅히 해봐야 할 것이다.
‘오루얼’ 이 또 다른 ‘사이키’ 가 되어가는 여정이 바로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의 핵심적 사건 전개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거듭’ 나기 위해서 , 오루얼의 입장에 서서 정직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보는 것은 참으로 유용한 사고다.
일단 이 오루얼의 이야기에 쓰인 ‘얼굴’ 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데 ,
(1) 미모를 상징…(외모 지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해 봄 직 하다) (2) 인간이 사회 속에서 대인 관계를 맺을 때에 채택하는 사회적 역할…또는 사회적 정체성(칼 융이 말한 페르조나….) (3) 인격의 진실성. 견고성 , 신 앞에서 정직한 자기 인정
난 특히 3번에 주목하고 싶은데 , 이 소설에서는 인간이 참 얼굴을 지니는 것을 신과의 만남의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굴을 가지기 전에 어떻게 신들이 얼굴을 맞대고 우리를 만날 수 있겠는가 ”
e 여기서 ‘얼굴’ 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완벽함에 도달해야 한다기 보다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다.
오루얼이 걸어가는 삶의 여정은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 이라고 통칭하는 , ‘삶의 큰 목표’ 를 이뤄 나가는 과정이라고 보여지는데 , 그 과정 중에 오루얼이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모습을 주목해 보고자 한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 내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주제만 가지고 이야기 해 보자면 , 오루얼의 이러한 행위는 “은연 중에 진실로 나아가는 첫 몸짓” 으로서 , 그녀 스스로가 “신들을 바라보고 신들의 눈길을 받을 수 있는 정체성” 으로서의 얼굴이 자신에게 없음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도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 을 하고 싶은데 , 그게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음을 경험하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그 분과 멀어져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성경적으로도 우리는 신의 얼굴을 직접 맞대고 볼 수 없으며(출애굽기 33,20). (모세 같은 경우는 약간 예외가 있지만.) , 신과 대면하고도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것은 놀라운 특전이라고 설명한다.(창세기 32,31 ; <st1:personname w:st="on"><st2:sn w:st="on">신</st2:sn><st2:givenname w:st="on">명기</st2:givenname></st1:personname> 5,24). 결국 ‘베일’ 은 인간의 아둔함을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고후 3,14~16) , 동시에 감당하기 힘든 실재인 신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인격적 만남’ 을 이뤄 가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베일을 쓰는 단계’ 는 과정 상 필요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시간을 거쳐 가면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성격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기를 꺼리어 무의식 속으로 억압해 버리는 부분이 곧 융이 말하는 ‘그림자’ 라고 볼 때 , 오루얼의 베일은 외적인 가면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억압하고 있는 그림자의 상징이다. 오루얼은 또 산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후 베일을 쓴다. 베일은 그녀의 신체적 추함과 동생의 유배를 불러온 죄스런 행동을 가릴 뿐 아니라 신의 목소리를 들은 초자연적 체험까지를 감추려 하면서도 오히려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즉 그녀의 베일은 자신의 특정 모습을 숨기기도 하지만, 한편 알아듣기 어려운 초자연적 신비를 본의 아니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베일은 자기 표현과 숨김 , 보호와 속죄 , 거부와 단절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영적인 잠수기’ 를 보내는 과정 중에는 자기 표현 , 숨김 , 속죄 , 거부 , 단절 등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이는 경우가 많다. 이 시간들을 잘 견뎌내야 하리라.
그 이후에 스승인 폭스(그리스의 합리주의 이성을 가진) 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리자 이에 오루얼은 사이키를 잃은 슬픔과 상처를 억압해 버리고 , 여왕직에 몸을 바쳐 일에 매진하게 된다. 결국 , 가장 중요한 문제(“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이 잘 이뤄지지 못할 때 , 우리가 취하는 삶의 모습은 ‘다른 것으로 도피’ 해 버리는 것이다. ‘잠시 신경을 끄고’ , 다른 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내가 깡그리 여왕 속으로 사라져 버릴 수 있다면 , 신들도 거의 속고 말 것이다.” 라고 오루얼은 다짐하고 있는데 , 그녀는 신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 베일을 둘러 쓰고 살아간다.
진실을 외면한 이러한 착각과 망상의 단계는 우리 내면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 들이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에 집중해 버린다든지 , 이성 친구를 사귀는 만나는 것으로 ,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 을 대체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우리도 오루얼과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여정’ 은 일종의 위기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 이러한 모습을 거치면서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얼굴을 찾는 시간’ 에 한층 다가선다고 볼 수 있다.
무의식(특히 내 안에 숨기고픈 그 무언가)의 영역이 의식화되고 ,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가식과 기만의 굴레) 를 포용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온전하게 통합된 인격이 되어가는 과정(진정한 ‘나’ 와 직면) 이 바로 융이 말하는 전인격화 과정이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를 보면 오루얼이 꼭꼭 숨겨둔 말을 꺼내는데 , 이 과정 자체를 ‘얼굴을 찾는 것’ 과 동일시하는 대목이 있다.
“당신의 영혼 한가운데 수십 년 동안 자리 잡고 있던 말 , 그 동안 줄곧 얼간이처럼 수없이 되뇌던 그 말을 마침내 털어놓도록 강요받는 시간이 오게 되어…. 우리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그 말이 우리 안 깊은 곳으로부터 파내어지기 전에 우리가 뜻한다고 생각하여 지껄여대는 허튼 소리를 신들이 왜 들어야만 하는가? 우리가 얼굴을 가지기 전에 어떻게 신들이 우리를 ‘얼굴’ 을 맞대고 만날 수 있겠는가
인간 내면의 깊은 진실을 숨김 없이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곧 가림 없이 맨 얼굴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을 통해 우리는 ‘진실된 내 얼굴’ 을 가지고 ,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진행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오루얼은 어느 덧 사이키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늘 주장했던 대로 온전히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실은 사이키의 행복을 질투하고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이기적 욕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죄의 고백’ 단계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매우 필수적인 영역이다. [역대하7:14] , [사도행전2:38]
또한 오루얼은 책의 2부 즈음에서 자신이 결국 그토록 증오하던 웅깃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웅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 황폐한 얼굴은 바로 나의 얼굴이었다… 모든 것을 잡아먹고 , 자궁같이 생겼으면서도 ,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불임증에 걸린 존재는 나였다… 글롬 왕국은 하나의 거미줄이었고 나는 그 한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사람들의 목숨을 훔쳐 배불리 먹고 퉁퉁하게 살이 찐 한 마리의 거미였다.”
결국 사이키를 빼앗아간 장본인으로 그토록 혐오하던 웅깃 여신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 외면해 오던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본 오루얼은 절망에 빠진다.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 이러한 ‘절망’ 과 ‘탄식’ 에 빠져야 한다. 자신의 흉악함에 직면하지 않아보고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 자신의 것이 되기는 불가능하다. 의인은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롬 3:10] , 내 안에 선을 행함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롬7:18] , 그리고 내 자신이 곤고함을 고백해야 한다.[롬7:24]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오루얼은 베일을 벗어버리고(도피와 침체의 시간은 지났다.) , 맨 얼굴로 나서서 절망 속에 강물 속으로 뛰어 들려고 한다. 그 때 , “그렇게 하지 말아라” 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에 답하여 “주님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라고 말하는 오루얼의 질문은 사도행전의 사울의 외침을 연상시키며 (다마스커스 도상에서..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의..) , 결정적인 변화와 회심을 가져올 신의 현현을 암시한다.(사도행전 9,5). 이어서 “죽기 전에 죽어라. 후에는 기회가 없다.” 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데 , 이는 추한 영혼에게 합당한 영적인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 죽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끊어버려야 한다는 영성적 가르침을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안이숙 사모님의 책인 <그런데 죽어요 , 당신은 안 죽어요>라는 책의 제목도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자기를 부인해야 할 중대한 시기에 오루얼은 놓이게 된다.)
이에 오루얼은 “주님 , 나는 웅깃입니다” 라고 답한다. 죽어야 할 자는 ‘거짓된 나’ 이며 , 가면과 베일을 쓰고 살아온 온전하지 못한 자아가 ‘진정한 나’ 로 변화되어 가는 길은 ‘거짓된 나에 대한 얼굴’ 들을 버리는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오루얼이 웅깃임을 인정하는 것은 영혼이 추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 따라서 추한 영혼을 아름다운 영혼으로 바꾸는 것이 자신의 과제임을 깨닫늗다.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결국 자신을 부인하고 ,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진정한 회개에 이른 그녀… 그리고 그 때 “신이 오루얼을 심판하러 오신다.” 는 소리를 듣게 된 그녀.. 그녀는 “나는 해체되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느낌을 가지며 , 곧 이어 “너도 또한 사이키이다.” 라는 큰 목소리를 듣는다.
웅깃처럼 종잡을 수 없으며 가면을 쓰고 살던 오루얼이 신 앞에 현존하는 하나의 영혼 , 곧 사이키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오루얼’ 의 소명이 완성되었다. 그녀는 ‘하나님과 인격적 대면’ 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한 생애를 끝까지 치열하게 삶으로써 “너 자신을 알고 네가 한 일을 알게 되리라” 고 한 산에서 들은 본래의 예언 말씀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 이쯤에서 오루얼이 이런 삶의 변화를 이룩하게 된 과정상의 방법을 한번 고민해 봐야 하는데 , 일단 오루얼에게 있어 자기 삶을 고백하는 글쓰기는 식별의 작업이자 그릇된 인식을 깨는 우상타파의 작업이었다. 이렇게 정직하게 문제점에 직면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필수적이다. 오루얼은 글로써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 을 가졌다면 , 그리고 전 과정을 “신들이 행하는 수술” 이라고 표현했다면(굉장한 고통이 수반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 우리도 ‘거짓된 나’ ,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로막는 내적 , 외적 장애물’ 을 제거하는 작업을 꼭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해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또한 오루얼은 자신의 글쓰기를 즉 자신의 넋두리로 여겼는데 , “불평이 곧 답이었다. 나 자신이 불평을 하는 것을 스스로 듣는 것이 곧 답을 받는 것이었다.” 라는 말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결국 신을 향한 글쓰기는 하나의 넋두리였고 , 이 과정 자체가 ‘답이 됨을 그녀는 체험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나의 내면적 성찰’ 을 통해서도 (기도 등을 통해) , 수행되어 지지만 또한 ‘사람들과의 만남’ (만남과 환경) 을 통해서도 이러한 놀라운 ‘수술’ 이 이뤄질 수 있음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 예는 오루얼에게서 찾아내 보자.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글을 쓰던 무렵 오루얼은 자신이 사이키에 대한 애착으로 고통 받고 있는 동안 예쁘지만 허영심 많고 지각 없는 아이라고 무시하고 등한시했던 또 다른 여동생 레디발(Redival) 이 자신의 따돌림 속에 무척 외로워했었다는 얘기를 레디발의 옛 남자친구로부터 듣고는 동생의 처지와 자신의 행적을 새롭게 보는 계기를 맞는다. 또 충직한 신하이자 용감한 장군이었던 바디아(Bardia) 가 죽은 후 그 아내인 안싯(Ansit) 을 만나면서 자신이 바디아를 혹사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었으며 , 생명을 집어삼키는 웅깃(Ungit) 여신 같은 존재였음을 깨닫고 동시에 바디아를 한 남자로 사랑했떤 자신의 감정도 인정하게 된다. 이처럼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제 3자의 눈인 ‘거울’ 에 비추어 보는 것은 ‘진정한 내 얼굴’ 을 찾는 과정의 일부이며 , 고통스러우면서도 진실과 치유로 인도되어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도 이처럼 , 다른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그러한 ‘진실로 향하는 길’ 을 발견하게 되는 다양한 과정들을 겪게 될 것이다.
결국 어거스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찬미를 고백하며 [참회록] 을 썼었다고 표현해 본다면 , 그리고 그는 이미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후에 이러한 고백록을 썼다면 , 이와 대조적으로 오루얼은 하나님에 대한 불평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가 그 과정을 통해 회심을 하게 되었다고 알기 쉽게 표현해 볼 수 있다.
결국 , 루이스는 굉장히 큰 작업을 수행했었다. 이 속에는 큰 ‘주제’ 와 맞물려 , 다양한 ‘영적 지혜’ 가 녹아져 있는데 , 그 한 예로 오루얼이 합리주의자인 그리스인 스승 폭스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를 증언하는 사제 간의 두가지 세계관을 경험하면서 갈등을 경험하는 부분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잡아낼 수 있는 교훈은 초월적 , 초자연적 사랑이 결국 이런 양극단의 세계관 대립을 아우르게 된다는 점이다.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화합’ 을 놓고 고뇌하는 현대인들에게 한 자락 던져 주는 메시지가 되리라 생각된다. (루이스 자체가 통합 운동에 긍정적이어서 이런 견해가 나온 것이리라.)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회심’ 의 과정 ,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 을 글로 표현하기는 참 어려울 텐데 , 루이스는 언어로 표현하기에 한계가 있는 이러한 초자연적 , 초월적 체험에 대한 서술을 오루얼의 입을 빌려 ‘고백록’ 이라는 서사 양식을 이용해 글로 표현해 냈다.
이 책이 함축하는 메시지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고 중요하기에 아마 루이스는 ‘자신의 신앙 생활 그 자체’ 를 회상해 보며 , 담담하게 이러한 글을 써 내려간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참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소설이다.
“우리의 얼굴을 찾을 때까지” … 오루얼이 걸었던 그 ‘삶의 여정’ 에 참여해 보는 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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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C. S. 루이스가 큐피드와 프시케의 신화를 읽고 영감을 받아 쓴 이 책은 다소 어려운 주제를 갖고 있다. 나의 얼굴과 신의 얼굴을 찾기 위한 기다림과 노력. 신과 대면을 대면하기 전 나의 얼굴,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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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c.s. 루이스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저 이 책을 구입했을 때에는 기독교를 더욱 알고자 기독 서적을 읽자는 생각이 있었는데, 마침내 기독 사상을 소설로 쓴 책이 있어 '아, 지루하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 싶어 이 책에 관심이 끌리게 되었다. 또한 이유중 하나가 이 책 제목과 표지 때문이었다. '얼굴을 찾는다'라는 말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다'는 말인데, 도대체 찾으려는 '얼굴'이란 무엇일까 궁금했다. 내가 얼추 추측하기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자신'일것 같았다.
책이 집에 도착해서 읽기 시작했다. 글씨 읽는 걸 무지 싫어하는 나는 이 책을 언제 쯤 읽게 될까 미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데에는 여유있게 봐서 4일이 걸렸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읽어 보긴 정말 오랜 만이었다.
지금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있는데, 아 글쎄.. 제목에서 언급한 것 처럼 내용이 조금 난해해서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얼굴이 못생긴 공주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가 서술적 작가가 되어 어렸을 때부터 죽기까지의 일을 쓴 것 인데, 그 내용의 중점은 신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에서 온 사람에게 교육을 받아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현실주의와 이성주의적인 교육을 받은 주인공이 그가 사랑하는 여동생이 신을 경험하면서 신이 존재하며 그는 사랑을 주시는 분이라는 동생의 생각과 충돌을 겪으면서 점차 주인공이 신에 대해 반박도 하고 이러저러 생각한 내용과 그의 경험을 쓴 일종의 일기이다.
이 소설은 책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프시케와 에로스'를 각색해서 쓴 것인데, 역시나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이 신화의 내용을 큰 틀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신화와는 다르게 새롭게 각색해서 쓴 소설인지라 작가의 생각이 담겨있기 때문에 중점을 둔 내용은 달랐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은 그저 중심 내용을 담기 위한 껍질일 뿐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같은 영상이 마구 떠올랐는데, 정말 루이스의 글 솜씨는 대단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책이 그리스 로마신화와 다르게 중요한 건 '프시케와 에로스'신화에서는 언니들이 프시케를 질투하는 것이 프시케의 화려한 궁전과 음식을 보고 한 것임에 반해, 이 소설에서는 언니가 프시케의 화려한 궁전이 보이지 않는데 궁전이 있다면서 행복해 하는 프시케를 보고 프시케를 데려간 신(?)-언니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여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함-이 프시케를 홀리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프시케를 이상하게 만든 신(?)에 대해 의심과 질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의 의도가 출발한다.
내용이 길어 질 것 같고 혼잡해 질 것 같으니 이만 여기서 간단히 써야 겠다.
전체를 다 읽고 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는 신이 있음에도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아서 신이 없다고 한다. 어떻게는 신이 있긴하지만 그는 항상 선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도 행하며 단지 엄청난 능력이 있을 뿐이지 인간에게 그렇게 도움을 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 루이스는 아직 우리가 우리 얼굴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신을 바로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부분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에 대한 언급인것 같다. 자신의 '죄'가 뭔지도 모르고서 또 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신은 없다', '신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신은 존재하며 그는 전능하며 선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신은 '하나님'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까지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을 해석 할 수 있었는데, 글쎄다. 맞는 거 같긴 한데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건 왜 일까.. 이 책이 함축적이라서 조금 난해하긴 한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는데, 나는 제목을 보고 또 내용의 처음부분을 보고 글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겠다 짐작이 갔다. 역시나 짐작은 내용 끝에가서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면서 우리의 어떻게 생각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신을 우리의 판단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이 글이 후반부에 가서 너무 의도를 막~ 끌고 가려는 작가의 흔적이 눈에 띄게 보였다. 작가는 '이성'이라고 표현했는데, 글쎄.. 도대체 그럼 '이성'이란 의미는 어떤 것이 되는 거일까? 주인공이 '환상'을 보게 되면서 신을 체험하게 되는 내용이다. 작가는 '환상'과는 구별되게 '이성'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주인공이 어렸을 때부터 경험해왔고 생각해왔던 것이 차츰차츰 쌓여서 이제 깨닫게 된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갑자기 너무 전개가 빨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제야 말로 작가의 본 의도를 제대로 들어 내겠다는 듯이.. 아무튼 이런 점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이해를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 '환상'의 의미에 가까운데 작가는 주인공이 환상이 아닌 '이성'에 들어갔다고 한 거에서 '이성'이란 의미는 무엇일까. 아, 어렵다. -_-
책을 마치고 나서 느낀 점은 "내가 처음 의도 했던 기독교를 진실로 받아들이는데에 가까워지자는 것과는 달리 단순히 내용만을 읽은 것 같고 달랑 얻은 의미로는 아까 말한대로 '우리가 우리 얼굴을 모르는데 신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라는 것이다.
글 마지막이 '이성'에 들어간다는 내용이 이해가 안가고 뭔가 독자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라는 글의 끝맫음 때문에 아,,, 뭔가 껄쩍지근?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다시한번 읽어봐야겠다. 루이스가 정말 재능이 있는지 내용은 정말 푹 빠져들게 잘 만들었다.
뭐, 뭔가 흐리멍텅하게 글을 쓴 것 같은데, 이만 리뷰를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