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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덮고 나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텍스트로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정립하고 그 과정에서 또한 텍스트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는 정말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책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평을 하기 전에 단언컨대 이 소설은 보르헤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120% 더 즐길 수 있다. 왜냐하면 책의 소개에서 언급되었듯,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온전히 보르헤스를 위한 오마쥬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진행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보르헤스가 살던 곳이며, 주인공이 키우던 고양이 이름인 알렙은 보르헤스의 단편 「알렙」에서 차용했다. 또한 주인공이 쉰이 되도록 교사에 별반 특별할 것이 없는 번역가라는 점(게다가 주인공이 번역한 책들 중에서는 보르헤스의 책도 있지 않은가)은 보르헤스가 늦은 소설가 데뷔를 했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책에서 이미 보르헤스가 등장하는 것만이 오마쥬가 아니라 아예 주인공의 설정 자체가 보르헤스의 모방인 것이다.
나 역시 보르헤스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 보르헤스를 발견하기란 쉽다. 일단 등장인물이 보르헤스다. 하지만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중 화자가 언급하는 것들은 교묘하게 보르헤스의 단편집에서 나왔던 구절이며 보르헤스가 소설에서 사용한 모티프를 사용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추리가 이루어지는 과정 또한 '보르헤스적'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추리가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범인은 추리 현장에 다시금 찾아들 수밖에 없다는 오래된 진리를 떠올린다. 그렇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책으로부터 시작함이 마땅하다. 그것도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부터 말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어디가 어떻게 '보르헤스적'일 수밖에 없는지 알아볼까.
사건의 중심에 등장하는 교수들과 잡지의 이름들은 모두 허구다. 보르헤스 역시 그의 단편에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 어떤 것이 허구인지 알 수 없도록 교묘한 장치들을 사용하는데 이 또한 그대로다. 에드가 앨런 포가 소설들을 썼으며 그의 팬이 있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그에 관한 <황금 곤충>이라는 간행물도 교수들은 허구다. 게다가 자주 등장하는 러브크래프트의 책에서 언급된 《네크로노미콘》이라는 책의 존재의 유무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그 존재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지만 추론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등장하는 이유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진실과 허구의 결합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것까지가 진실인지 허구인지 헛갈리게 하는 이른바 보르헤스의 방법이 전 부분에 걸쳐서 사용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가 보르헤스가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보르헤스가 맞는가?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보르헤스는 저자가 온전히 사유로 만들어낸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가진 카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르헤스가 말하고 써낸 책들의 구절에서 보르헤스라는 것을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보르헤스가 실제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그러니까 이중 텍스트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이는 결말에 이르러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서의 묘사가 아닌 사건의 후에 화자가 서간의 형식으로 보내는 것을 다시 보르헤스가 시간이 흐른 후에 편지로 써서 되돌리는 부분에서 이미 있었던 일과 쓰여진 일의 간극이 드러난다.
텍스트의 전 부분에 걸쳐서 사용되는 '거울' 모티프는 어떠한가. 텍스트 안에서도 언급되지만 보르헤스의 단편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서 그 기본적인 틀을 끄집어낸다. 그 안에서는 거울과 부성은 끝없이 재생산하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다라는 부분이 있는데(이 부분은 책 안에서도 처음에는 성욕이었다가 부성으로 바뀌었다.) 이 역시 부성과 거울이라는 키워드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끝없는 자음과 모음 그리고 언어에 대한 고찰 역시 같은 단편에서 나오는 고찰이었다. 언어에 대한, 궁극적으로 텍스트가 깨지기 쉬운 언어라는 구조 위에 서 있으며 그것에 대한 끝없는 회의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로도 재창출 될 수 있다는 이른바 탈구조주의적인 면을 보인다.
또한 출처에 대한 끊임없는 텍스트 분석 방법과 그 실마리를 찾는 방식에 있다. 역시 위의 단편에서 사건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나온 한 구절의 출처를 찾아내면서 시작하는데(그 구절이 바로 거울과 부성에 관한 구절.) 이렇듯 어떤 책에서 한 구절을 보고 그 구절의 출처를 찾아가는 방식의 추리방식은 보르헤스가 처음으로 시도한 방법이었다. 후일 이 방법은 여러 작가에게 이식되었고 대표적으로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이 있다. 게다가 텍스트의 출처를 찾기 위해서 또 다른 텍스트에서 그 해결점을 찾는 방식이나 여러 가지 텍스트를 한 가지의 범주에 의하여 묶고 연계시키는 방식 또한 보르헤스가 자주 쓰는 방식이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서처럼 그 뒤를 맡고 있는 거대조직이 실체가 불확실하지만 분명 음모를 지니고 있다고 추측하는 것처럼 이 텍스트에서도 이스라펠 소사이어티라는 음모를 지닌 거대조직이 등장하고 끝까지 그 실체가 부정확하고 그저 추측을 할 수 있을 뿐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 것도 그렇다.
물론 이 말고도 독자들이 느낄 수 있는 보르헤스의 자취는 많다. 보르헤스가 쓴 소설과 시들의 구절을 찾아내고 재인식하면서 진정으로 보르헤스적인 텍스트의 해체와 재정립 가능함을 만끽하면서 같은 보르헤스 팬으로의 동질감과 공모자의 은밀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작은 부분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면서 글귀를 되새김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르헤스 팬이라면 알 수 있을 무신론자라는 점이나 보르헤스가 말년에 비서와 결혼을 했다는 점이나 보르헤스 자신이 장님이며 또한 그것을 물려준 아버지, 즉 부성과의 관계, 필연과 우연에 대한 생각 등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다. 마치 미로가 더 깊어질수록 웃음 짓는 텍스트 안에서의 보르헤스처럼 말이다.
모든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말이 되어야 한다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우리는 텍스트의 긴밀함과 끝없는 정보의 바다에서 모든 해답이 도서관에 있다고 믿는, 그래서 자신의 단편「바벨의 도서관」에서 자신을 그 속을 헤매고 정리하는 사서 노인으로 표현했던 것처럼 정말로 진실은 책들 안에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고 금이 되기도 한다.
끝으로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하고 보르헤스의 자취를 따랐을 저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 또한 지극히 보르헤스를 따른 방법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낸다. 마지막까지 독자에게 던지는 재해석의 여지를 위해 텍스트를 닫지 않고 열어둔 것에서도 감사하다. 나는 처음에 보르헤스를 알면 더 책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보르헤스의 방식처럼 이 책은 보르헤스를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거기서 뽑아내는 의미들은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 할 수 없다. 단지 추리소설로 보던 보르헤스의 오마쥬로 읽던 읽고서 판단을 내릴 여지는 크고 또 커서 온전히 독자의 마음에 달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 보르헤스가 추구했던 탈구조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말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 읽어보면 좋을 책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황병하 역, 민음사,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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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 대한 오마주인가. 교묘한 장치인가.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웅진지식하우스. 2007)의 첫 장을 읽는 동안 혼란스러움에 힘겨웠다. 난해한 단어의 나열이 아님에도, 편지의 형식을 빌린 따라가기 쉬어 보이는 템포에도 불구하고 독해가 결코 녹녹치 않았던 것은 내 얕은 문학적 소양 때문일까 아니면 작가의 언어적 시비일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도 책의 무게는 묵직하게 느껴졌다.
초반의 혼란스러움을 조장하는 것은 ‘보르헤스’에 대한 두려운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시종일관 언급되는 ‘애드거 앨런 포우’의 이름 역시 머리를 무겁게 하는데 일조한다. 그뿐이 아니다. 소설 속에 언급되는 많은 작가의 이름의 태반이 생소하다. 이쯤 되면 작가의 글이 시비처럼 느껴지는 것이 결코 억지는 아닐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숫자 보다 많은 작가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으면 즐길 수 없는 것인가’ 하고 반쯤 포기한 상태로 읽기 시작한 것도 작가의 의도를 시비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에 독자의 추리가 기본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이 공평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글의 전개에 숨겨있는 해답의 꼬리가 낯선 작가들의 작품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명탐정으로(혹은 ‘양들의 침묵’에서의 ‘한니발’같은 존재)로 등장한 ‘보르헤스’가 용의자 또는 참고인의 자격으로 불러내는 것은 여러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 속의 등장인물(혹은 등장 동물, 소재, 개념까지)이다. 보통의 추리소설에서는 드문 일이다. 물론 명장으로 꼽히는 작가와 명작으로 꼽히는 그들의 소설이 극의 모티브가 되거나 단서가 되는 일은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이 소설의 그것은 그들 자체가 극을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이며 독자에게 불공평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아니, 그 작품들을 읽었다고 할지라도 추리의 과정이 그리 녹녹치는 않은 것을 보면 소위 문학적 엘리트를 위한 유희인가 하는 반감마저 들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 재미가 있다. 뭉그적댐 없이 경쾌한 템포로 몰입시키는 매력이 있고, 억지웃음의 장치가 없음에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묘한 재치가 있다. 자존심이 상해 생긴 반감으로 읽었음에도 끝에 가서 허벅지를 내리치는 통쾌한 반전도 있다. ‘다 빈치 코드’에서 나왔을 법한 음모론의 냄새도 풍기는 이 소설은 일흔 살의 작가가 고집스럽게 펼쳐낸 엘리트 소설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유행에 민감한 대중소설로도 손색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소설의 주가 되는 사건은 ‘밀실살인’이다. 그 살인의 저변에는 다소 의심스러운 단체와 역사적인 사건의 흔적이 있고, 범죄의 주체가 되는 인간의 본성과 한이 있다. 이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 다소 어려운 작품과 작가들로 가득 차 있지만 탄탄한 이야기의 틀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이 소설이 잘 짜인 추리소설로 손색이 없는 점이다. 사건과 인물, 그리고 그것을 연결해주는 배경에 의한 탄탄한 틀 위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말이다.
또한, 이 소설은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재치가 있다. ‘보르헤스’와 화자가 주고받는 농담의 소재가 낯선 작품 속의 밑줄 긋기인지라 그로 인한 웃음의 타이밍은 잡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등장인물의 면면에 대한 묘사와 무엇보다도 그것을 확연히 드러내는 대화를 읽다보면 실로 웃음이 나온다. 억지웃음의 장치라고 폄하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사건과 이미지로 웃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식상하게 느껴졌다면 이 소설에서 상쾌한 웃음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미 고전으로 평가받는 소설에서 틀을 갖춘 ‘밀실살인’이라는 소재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거장들에 대한 오마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피카소’의 등장으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미술은 죽었다고 평가한 후대 미술가들의 탄식처럼 추리소설 역시 ‘애드거 앨런 포우’나 ‘보르헤스’ 등의 거장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쳇바퀴 돌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의 추리소설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가치가 있다. 지금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질 시대상을 담아내며 빠르게 변하는 문화의 배경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흔의 이 고집스러운 작가의 자존심은 전혀 다른 방향의 글을 탄생시켰다. 거장에 대한 오마주가 난무하지만 전혀 비굴하지 않는 그만의 특이한 소설을 내놓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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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라는 제목만으로도 알았어야 했다. 이 책을 읽기에 내 이해력이 부족할 거라는 것을. 물론 추리적으로 접근하면 처음에 범인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트릭이야 너무 흔하기 때문에 이젠 신본격 추리소설을 쓰는 일본 작가들을 빼면 누구도 이런 구식 트릭을 구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제목에서 나와 있듯이 보르헤스라는 작가가 추구했던 사실적 환상 문학이다. 남미 작가들 대부분이 이런 식의 구성을 좋아하다보니 아주 제대로 그 사실과 환상 사이의 늪에 빠져버렸다. 책의 시작이 보르헤스에 대한 편지처럼 펼쳐지는 것도 흥미롭다. 여기에 보르헤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포우를 연구하는 클럽이 등장하니 포우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고 그와 비교되는 러브크래프트는 아주 이 작품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이 작품을 보기 전에 보르헤스와 포우,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읽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들만 존재한다면 이 작은 책이 너무도 뻔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들과 함께 역사를 넘나드는 보르헤스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존 디와 그의 도서관과 불멸의 오랑우탄에 대해서 말이다. 보르헤스를 작가가 등장시켜 독자를 어지럽게 만들다니 이제 보르헤스는 내게 멀미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것만 같다.
여기서 우리는 알게 된다. 작가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말이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것도 글로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쓴 글은 허구라 할지라도 나중에 그것이 진짜로 뒤바뀌는 경우도 발생한다. 오랑우탄이 글로써 불멸하려 했던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허구는 허구여야 한다. 그것이 독자에게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를 작가는 간절히 바라지만 그것이 불멸의 진실성으로 남아서는 안 되고 그렇게 각인되어 왜곡되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라 생각된다.
허구와 왜곡은 다르다. 작가는 자신이 불멸의 오랑우탄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보르헤스가 거울을 두려워한 것도 이런 뜻은 아니었을까. 거울은 같은 것을 만들어내지만 사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비춰주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거울을 보고 거꾸로 보이는 상을 진짜라고 믿게 된다면 그것을 보르헤스라 믿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작가는 그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꼬리를 잡아서도 잡혀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작가는 단순한 플롯의 작품 속에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제목에 뚜렷이 나타나있다. 보르헤스라는 거울과 불멸의 오랑우탄이라는 있어서는 안 되는 글 쓰는 이들의 자세다. 이렇게 명쾌하고 단순하게 그것을 말하는 작가의 실력이 놀랍다. 다음 작품이 정말 기대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좋은 작가를 만나게 된다. 독자로써 정말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다음 작품은 좀 쉽게 나왔으면 좋겠다. 아이고, 어지러워라... 그 놈의 오랑우탄 꼬리 한번 빙빙 우주적으로 잘도 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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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서적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고 있던 나는 이 책을 제목만 보고 보르헤스의 서적인 줄 알고 무작정 집어들었다.첫장을 넘기다 보르헤스가 쓴 글이 아님을 알고 무척 실망했다.하지만 보르헤스를 등장인물로 설정 할 정도의 작가라면 그는 분명 보르헤스에게 반해버린 작가일 거라는 생각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56쪽까지는 지루해서 이 책을 그냥 덮어버릴까? 고민을 했다.하지만 59쪽 부터는 안 읽었으면 내가 내 발등을 찍었겠구나 !! 싶을 만큼 재미있다.알고 보니 서두 부분을 지루하게 만든 것은 저자의 농간이었다!! 아~추리소설의 답은 항상 직감에 있다!! 그 직감을 계속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나는 저자의 농간에 빠져 들어서 읽는 내내 추리라는 것을 하느라고 녹슨 머리를 계속 돌려야 했다 ㅎㅎ최초의 추리소설은 <모르그가의 살인>이 아니라 <오디푸스콤플렉스 >였구나! 우연히 이스라펠 소사이어티 컨퍼런스에 참가한 포겔슈타인은 로트코프씨가 살해당한 것을 목격한다.로트코프의 시신은 거울 앞에 V자 모양으로 놓여 있다.하지만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거울과 부성(夫性)은 사물을 증식시키는 역할을 한다.그래서 V는 X라는 글자로 추리된다.하지만 V가 거울의 어떤 부분과 접촉 되느냐에 따라 W나 M이 될 수 도 있다.보르헤스의 시선으로로 볼 때 글자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수준을 벗어난 고대 언어까지 접근한다. 저자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에게 놀라운 점은,추리소설인데 어쩌면 이렇게도 완벽하게 보르헤스적일 수 있을까!!! 보르헤스적이라는 것은 보르헤스의 전집에서 자주 사용했던 요소들인 거울,미로,우주,영원,카발라,윤회사상,언어적 유희등 모든 것들을 아주 잘 조합시켰다는 사실이다.추리소설에 유머,보르헤스적인 환상문학적인 요소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많이 웃게 된다.저자는 보르헤스라면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 했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보르헤스의 시선으로 사건을 추리하게 만든다.물론 보르헤스는 애드거 앨런 포를 좋아했다. 에드거앨런 포의 <우울과 몽상>,<보르헤스의 전집1~5>를 읽었다면 이 책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하지만 추리소설은 항상 직감에 있기 때문에 굳이 읽지 않았어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읽는데 지장이 없을 것 같다.독자로 하여금 포의 소설과 보르헤스와 고대 소설에서 단서를 찾도록 유도하는 시도가 흥미진진하다.주인공이 보르헤스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저자나 독자가 보르헤스를 좋아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추리소설에 반영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보르헤스의 팬으로써 보르헤스에 대해 잘 몰랐던 부분을 이 책을 통해서 더 알게 되는 재미도 있다.또한 책 속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책들을 알게 되는 재미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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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보르헤스를 아느냐고?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난 할 말이 없다. 이름만 아주 많이 들어본 사람이다. 게다가 책속의 주인공 이름으로도 심심찮게 나오기도 한다. 이 책 제목과 관련있는 보르헤스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러고나서 다시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다. 이 짧은 책을 읽고 , 많은 사람들이 리뷰를 써놓아서 이 책보다 더 길 것 같은 리뷰들을 읽고 내린 결론이다. 왜냐하면 똑같은 한글로 번역 인쇄해놓은 책을 읽고서도 내가 읽은 내용과 다른 사람이 읽은 내용이 어째 좀 다른 것처럼 느껴지니말이다.
그런데 하여간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그 음악에 대해서 잘 몰라도 들으면 좋은 것이 있듯이, 이 책도 보르헤스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문장 하나하나에 들어있는 의미까지도 파악해내고 기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도 그 흐름을 따라잡으며 나름대로 즐거웠다는 점이다.
이 책을 추리소설이라고도 하고, 팬픽션이라도 하고, 뭐 여러가지로 표현하더라만 나에게는 책들에 관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작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다가 더 읽어보고싶어지는 책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난 보르헤스에 대한 것을 더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다음에 이 책을 또 한번 읽고 더 깊이 느껴보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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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관심을 확 잡아 끄는 이 소설은
보르헤스는 그의 명성으로 들어본적은 있지만
하지만 소설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화자처럼 굴던 사람이 보르헤스에게 마지막 꼬리부분을 남기고
꼬리를 부탁하면서 조금 의심이 들긴 했지만
화자인 동시에 유일한 목격자인 포겔슈타인.
또 보르헤스의 의문처럼
살인사건을 주제로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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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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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의 칼을 문 불멸의 오랑우탄에 끌려서, 추리소설이 그냥 마냥 좋아서 나도 모르게 신청해버린 조그마한 책은 읽기 시작하자 나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많은 노력으로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은 한줄로 표현이 가능하다. "아는만큼 보인다." 더이상의 수식어가 필요가 없다.
어느 책이든 그러하지만, 소설의 경우에 나는 책의 표지며 안의 쪽날개까지 샅샅이 뒤지고 시작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보르헤스의 비밀스러운 서재에서 벌어지는 세 사람의 어이없고 황당한 그러나 치밀한 추리! . 책을 읽기 전에 알고 시작해야 할게 있다면 이 책은 대개의 추리소설이 그러하듯 이 소설의 큰 기둥이 되어주는 사건은 밀실살인을 다뤘다. 그리고 그 살인 사건에 대한 포겔슈타인의 독백(?)이고, 마지막 마무리는 보르헤스의 글이다. (인칭 설정의 잘못으로 인해, 포겔슈타인에 대한 나의 감정이 녹아들지 않아서인지 시작 부분의 읽기에 애를 먹었다는 어이없는 사실이 안구에 습기를 안겨준다.)
그 살인사건의 범인을 쫓기위해 쿠에르보는 과학적인 추론을 하고, 보르헤스와 포겔슈타인은 문학적으로 쫓아간다. 포겔슈타인은 번번히 틀린 증거를 들이대면서 쿠에르보의 수사에 애를 먹인다. 차례를 보는 순간 내용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범죄, X, O, W, M, ◇, 꼬리,,, 이 차례의 양 끝을 제외한 XOWM◇는 살해당한 로트코프 씨의 마지막 죽은 자세이다. 이것까지 알고 들어가면 읽기가 편해지고 재미있어질지 모르겠다.
초반의 지루했던 사설들을 벗어나면서 시작된 본격적인 내용들은 살인 사건이라는 주제를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유쾌하다. 그 유쾌함에 동참할 수 없었던 '과학적인' 사고방식의 쿠에르보를 제외하고 말이다. 유쾌함에 동참하게 되는 순간 책의 감상을 써준 뒷 페이지의 두명의 작가의 감상문에 무한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책의 유쾌함 속에서 언급되는 여러 작가들과 작품들은 이런 류의 문학에 대한 얇고 좁은 지식에 한계를 안겨주기는 하지만 말이다.
보르헤스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책 가장 뒤에서 출판사가 알려주는 지식이 전부이고, 소설속에서 나오는 여러 작가들과 작품들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내가 이정도의 재미를 느꼈다면 보르헤스가 누구인지를 알고, 언급되는 작품에 대한 지식이 있던 사람들이 이 책을 접했다면 얼마나 큰 재미를 느꼈을까를 생각해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배가 아프기도 하다.
베리시무의 유쾌한 글 속에서 불멸의 오랑우탄을 불러냈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그 이상의 것도 불러낼 만큼 한계를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추리소설이 가진 긴장감과 재미, 그리고 반전은 언제나 나를 소설로 불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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