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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소설을 하루키의 아류라고 평가 절하하는 이들도 있는 것처럼 이 소설 [미란] 은 예전 [은어낚시통신] 보다는 조금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私소설의 성격이 강하고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묘사에 치중한다. 그런데, 그 묘사가 너무 문장 하나하나에 매달리다보니 때론 부자연스럽고 무엇보다 그것들이 구슬로 엮어져 이야기를 얽어나가는 목걸이보다는 그냥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게다가 그 묘사의 치중이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까지 이어져 소설에 나타나는 사실적 배경 묘사 -- 실제 지명이 등장하거나 실제의 노래 제목등을 배경묘사에 쓰는 것 -- 에 비해 대화는 너무나도 작위적이고 사변적인 냄새가 난다. 부부나 연인들의 대화가 생활 냄새가 나는 대화가 아니라 철학토론이나 오페라의 아리아 같은 것이다.
작가의 글에서 윤대녕이 밝힌 것처럼 이 소설 [미란]은 남북관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데. 그 모티프를 연애소설의 형식을 차용해 표현한 것이 어정쩡하게 돼서 가끔은 연애소설이었다가, 가끔은 정치연설이었다가, 가끔은 사회평론이 되는 Hybrid 가 되어버렸다. (역시 장편소설에서 일관된 주제로 긴 호흡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긴장을 잃지 않고, 무엇보다 마지막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윤대녕의 탁월성은 중/단편에서 빛을 발휘하지만....)
이 소설은 마지막이 너무나도 약하고 흐지부지 덮어버려서 화가 날 정도였다. 전체적으로 소설의 기조를 "화해" 쪽으로 몰고 가다가 막판에 냉소로 대충 덮어버리면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나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극적 반전을 노리는 추리 소설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마치 놀림을 받은 느낌이었다.
========================================================================== 사족 1. 하루키의 소설에 보면 비틀즈의 곡이 잘 나오는 것처럼 윤대녕(뿐 아니라 배수아, 은희경 등의 '그 부류들의 작가')의 소설에도 팝송들이 잘 등장한다. 팝송뿐 아니라 구체적인 음식점의 이름, 재즈 가수들, 소설 곳곳에 포진한 이런 배경적 장치들. 이것이 요즘 트렌드 소설의 유행이다.
윤대녕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은 이런 부수적 장치로 다 먹고 살려는 -- 소설의 스토리는 행방불명되고 -불량한 소설가들도 가끔 있다. 가요가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건 아마 그 작가들이 30대 중,후반의 나이여서 한국에 가요보다는 팝송이 더 영향력이 강했던 10 대 시절을 보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은희경은 Save the last dance for me 를 소설 제목으로까지 썼으니 말이다.
사족 2.<현대문학> 에서 나온 <2002년 현장 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을([미란] 을 마친 후에) 읽었다. 심사위원들의 선정 후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이 점점 '건축물' 이나 '인공물'이 되어간다는 아쉬움도 공감을 얻었다. 문학이란 감동을 주는 인간적인 활동이기에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감정의 고양이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일 것이다. 웃기거나 울리는 문학이 아니라 심성이 꼬여있는 문학은 독자를 긴장시키거나 유혹하지 못하고 단지 불편하거나 불쾌하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내가 윤대녕의 소설에 실망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내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재치와 생생한 묘사가 반짝이는 물고기 같은 문장들이 있는 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 好가 나이가 들어가서도 지속되기는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그건 갓 잡은 생선도 오래되면 비늘이 빛을 잃고 저절로 썩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굳이 윤대녕의 소설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이제 "현대인의 고독을 도시적 감성에 담아 쿨(cool)하게 그려낸 소설" 들에서는 따뜻함을 느끼기 힘들게 된 것이다. 그런 소설들은 내게 잠시동안 寒氣를 잊게 할 수는 있지 몰라도, 그 약효가 떨어지면 더욱 추워지게 되고, 모르핀에 중독되듯이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게 만든다. 결국, 나는 소설에서 온기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의 비늘이 빤짝이는 물고기는 더 이상 나에게 유효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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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아련한 느낌이 들게하는 표지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윤대녕 작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선입견 때문에, 처음부터 편향적인 스탠스로 접근한 작품이기도 하다. 하루키의 아류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몽환적인데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미징이 편향적고 또 전형적이라는게 내가 윤대녕 작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인 선입견의 대강의 얼개다. 그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윤대녕 작가의 매력이자 또 단점이기도 하지 싶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읽으면 그 기대를 늘 일정수준 이상 만족시킨다는 것이 장점이랄 수 있는 매력이요, 뭔가 확연히 다른 캐릭터를 기대했다면 결국 제 자리를 맴도는 인물의 전형성에 못내 수긍하고 말아버려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니까.
표지를 보면 두 여인의 얼굴이 약간의 각도 차이를 두고 겹쳐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미란이 사람의 이름이라고 할 진댄, 이 표지만 보아도 미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두명 등장할거란 예상이 가능하다. 눈을 지극히 감고 차분히 생각에 잠겨있는 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과 고개를 약간 쳐들고 무언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탈색인지 염색인지 모르겠지만 금발 머리를 뒤로 동여맨 듯한 여인.. 누가 김미란이고 누가 오미란인지는 작품 속에서도 구체적인 묘사가 없어 모르겠지만, 읽어가며 나름대로의 상상 속에서 형상화된 그녀들의 이미지와 매칭하면서 아무래도 검은 머리 쪽이 김미란이요, 노란 금발이 오미란 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순하고 뭔가 지고지순하면서도 어두움이 깔린 성격의 오미란과 도도하고 당당하면서 다소 현실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 김미란의 성격만 보면 반대의 적용이 어쩌면 더 설득력있을 수도 있겠으나 난 어쩐지 전자 쪽이다. 누가 어느쪽이면 어떤가. 그게 중요한 건 아닌걸..
이야기는 애초 작가로부터 예상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젊은 날 방황에 이끌린 제주도 여행 중 한 작은 호텔 파라다이스의 바에서 한 여인을 만나고, 1980년대 대학시절에나 던질 수 있는 현학적 닭살 멘트로 그녀를 꼬셔 제주도에서 작은 추억을 만든다. 여인은 열정에 이끌려 그에게 금새 자신을 허락하지만 결국 짧은 사랑 후 떠나가고, 그에게는 그녀와의 추억이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이 정도면 모든 남자의 로망이라고 해도 좋을 듯. 남자들이 과거의 사랑을 아름답고 애절하게 기억하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증상이지 싶다. 하긴 혼자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커피나 술 한잔을 들고 그런 애절한 기억을 떠올리는 호사조차 없는 인생은 맛이 쫌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들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인상만 쓰고 있어도 주변의 여인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대시를 하게 만드는 치명적 매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 성연우(이름도 어쩐지 연예인스럽다)는 게다가 그 많은 젊은날의 방황에도 불구 사법고시를 당당히 합격해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만나게 된 여인이 김미란. 그녀는 그에게 호감을 보이면서도 쉽게 접근을 허용하거나 먼저 들이대는 가벼운 행실을 보이지 않는, 절제가 몸에 배인 여인이다. 어쩌면 그를 끌어당긴건 단순히 '미란'이라는 이름이 가진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김미란이라는 여인이 보여준 팜므파탈(밀땅의 고수) 기질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은 몇 번의 우연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결심하는데, 그때 김미란은 왜 자신과 결혼하느냐고 그에게 묻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경우는 허영심 때문이겠지. 혼자 살 줄 알았는데 바야흐로 사치의 시작이야. 삶은 백화점 같은거야.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좀처럼 빈손으로 나오기가 어렵지. 알다시피 또 세상은 파트너 없이 버틸 수 없게 만들어져 있어. 계속 살아갈 의지가 있다면 담당 파트너가 필요하단 말이지..」
이 알쏭달쏭하기만 할 뿐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대답에 무언가 납득한 듯한 김미란도, 결혼을 코앞에 둔 서른 즈음의 나이면서도 여전히 1980년대 대학가에서나 통할 듯한 구닥다리 멘트를 용감하게 날리는 그나, 비슷한 시기, 즉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경험한 내게는 어쩐지 친해지기 어려운 이질적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중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이후 스스로와 서로로 인해 무척 고단해질거란 예상도 들었다. 이런 멘트들이 던져지고 납득되는 건 삶이 그림처럼 온전히 객관화가 이루어져 자신은 거기서 쏙- 빠져나왔다는 안도가 저변에 깔려야만 가능한 것이다.
만일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생활의 한가운데서 세상과 시간의 거친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내야하는 존재라는 자각이 있었다면, 이런 대사는 나올 수 없다. 말하는 사람도 상대방을 봐가면서 적당한 타협을 자신의 멘트를 재단질 내지는 가지치기를 하게 마련이므로. 그런 관점에서 보면 두 사람은 아직 삶을 연극으로, 세상을 그림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내게 더 호소력울 주었던 건 그들의 말이 아닌 그녀와의 결혼에 대해 어떤 지인이 그에게 던진 한 마디다.
「사람이란 무릇 서로 보살핌의 대상이다. 지극한 관심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지. 그런데 그 여인에게는 뭔가 중요한 것이 결핍되어 있어. 그것이 그녀가 상냥하긴 하지만 그다지 친절하거나 다정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지..」
나도 읽으면서 김미란이란 인물에게 비슷한 느낌이 들었기에 나중에 어떤 반전이라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었다. 특히 음주운전으로 인사사고를 낸 자신의 남편을 변호해달라며 변호사인 그를 다짜고짜 찾아온 여선생의 의미심장한 등장과 그 남편이 사고 당시 어떤 묘령의 여인을 태우고 있었다는 설정, 그리고 나중에 그 남편과 김미란이 자신을 만나기 전 오랜 연인관계였다는 사실을 성연우가 알게되면서 무언가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물꼬가 여기서 터지는게 아닐까 싶어 은근히 설레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뭐람. 잔뜩 복선을 깔아놓고는 '무슨 일 있어..?'싶게 얼렁뚱당 넘어가다니. (어쩌면 내가 '사랑과 전쟁' 같은 막장드라마의 영향을 너무 받은 건지도 모르겠다만)
누군가 하나라도 꿈 속을 걸어온 사람이 섞여든 결혼생활은 다 그렇듯, 둘 사이는 아이를 낳고도 계속 삐걱거린다. 김미란이 꿈 속을 걸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꿈 속을 걷는 그의 모습에 매력은 느낀 건 틀림없었으리라. 그리고 꿈 속을 고집스레 계속 걸어가면서도 현실에서 먹을 욕 역시 참을 수 없는 연우 같은 남자는 항상 같은 잔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식이다.
「당신은 웬일인지 약속을 지키기에 급급한 채무자처럼 살아왔어요. 매사 모면하고 견뎌내는 식으로 말예요. 그런 당신은 불행하게도 스스로에게는 단 한번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상당히 고상하게 표현되었을 뿐, '가정에 관심은 없고, 딴 생각만 하면서 스스로 가장으로서의 의무는 욕먹기 싫어 마지못해 해내는 당신은 진짜 최악이야. 나와 당신의 아이는 그런 당신의 무관심 속에서 비참함을 느껴..'라는 말과 이 말이 무엇이 다를까. 어쩐지 이 말을 들으니 남의 일 같이 않아 가슴 한 켠이 무엇에 찔린 듯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리뷰가 상당히 엉뚱하게 흘러버린 느낌이다. 다시 작품 본연에 근접한 오미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그녀는 연우에게 첫사랑의 좋은 기억으로 남은 여인이며, 이후 그가 여인을 바라보는데 있어 바로미터(Barometer)가 된 존재다. 그러나, 이후에 결혼 이후 나이가 들어 만난(그들은 두 번 만난다. 한번은 결혼 직후, 한 번은 수년 후 다시 연우가 찾아나서면서) 오미란은 그가 예전에 알던, 마음 속에 간직된 그녀와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성연우는 끊임없이 그녀의 현재 안에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내고 부풀린다. 그건 이미 오미란 자체가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서 마음대로 각색된 첫 사랑 베아트리체가 대상화(Verge-genstän Dlichung)되어 투영된 스크린일 뿐이다.
책을 덮으며, 자신 안에서 미화된 과거에 얽매여 사는 그(성연우)의 인생에 약간의 연민이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든 이유의 일부엔 나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심리기재의 소유자라는 자기진단이 자리잡고 있다.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비슷한 류의 문화컨텐츠(작년 즈음에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도 이 부류가 아닐까 싶다)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걸 보면, 경중은 있을지언정, 누구나 이런 부분을 알러지나 비염처럼 많은 이들이 마음 안에 지니고 사는 모양이니까. 무엇이든 알고 인정하면, 결국 즐길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약이건, 독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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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소설같은 소설이 읽고 싶었다. 출간 되어진지도 이미 오래 되어서 찾아 읽어야 할 그런 소설...그래서 제목도 다소 소설적 느낌이 풍기는 미란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윤대녕이란 작가의 글은 늘 힘에 겨웠던 것도 사실인데 첫 페이지를 읽어 보는 순간 읽고 싶어졌다... 처음이다. 그의 소설을 이렇게 단숨에 읽어 본 것은...
미란이란 제목의 소설은 정말 소설스러운 책이었다. 소설 속에서 일어 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는 그래서 사랑에 대한 힘들어 함도 소설이니깐 그럴거야 라고 위로 해 볼 수 있었고... 소설 속의 미란과 연우는 참 소설스럽다..왜 이렇게 자신을 힘들게 하는 걸까.. 그냥 사랑하냐고 물어 보면 되지 않을까.. 혹은 나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그들의 힘들어 하는 사랑의 밀고당김이 너무 소설적이다 싶어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계속 나오고 있었지만..
어느 시점 부터인가는 사랑의 모습만이 이야기 되어지고 있지는 않았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여러가지 가지들의 상황들 그리고 관계들에 대해서 군더더기 없이 액기스만 뽑아 내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엔 굉장히 통속적이다는 느낌이 들어 이거..윤대녕 소설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미란이란 인물의 모습들에서 연우란 인물의 모습을 통해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인생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작가도 말 한 것처럼 돌아보면 그 어떤 타인도 항상 나의 일부였다 는 말이 공감되어졌다..미란이 사랑을 확인 하고 싶어 하는 순간마다 내 마음 속으로 요동 치게 한 이유도 아마 미란과 닮은 나의 어떤 점이 그렇게 하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미란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소설 속의 미란을 재촉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소름이 돋기도 했다.
미란은 윤대녕의 소설 중 처음으로 어렵지 않게 읽은 책으로 기억 할 것 같다. 재미라는 점 보다 글을 직설적인 표현법으로 풀어내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미란이를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내 삶의 흐름을 어떻게 흘러 보내야 할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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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대녕의 작품을 읽고 난 후엔 항상 서글프다. 작품 속 그네들의 부유하고 있는 삶에서 오는 고독감과 고단함이 책을 덮고 난 후에도 내 마음 한 자락을 잡고서는 놔주질 않는다. 하나같이 그들은 관계맺기에 서투르고 번번이 거절당하고 자신을 사회에 적응시키는데 늘 힘에 부쳐하곤 한다. 마치 현대인에게 이끼처럼 끼어 있는 사회/현실부적응증 환자들같다. 어느 순간 가여워지기조차 하는 그네들에게서 어딘지 모를 낯익음, 익숙함이 느껴지는 것은. '또 다른 나'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안에. 마치 거울속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 보듯. 윤대녕의 작품을 내내 읽어온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이전 작품에서와는 달리 '미란'의 인물들은 사람들과의 관계맺기에 부대껴하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늘 그래왔듯이 사람들과의 소통이 힘에 부친 이들이 있다. 우선 그의 계모를 죽이고 도망자의 삶을 살아가는 오미란. 평생 딸에게 용서받지 못하고 그의 주위를 맴돌며 살아가게 되는 오미란의 아버지. 상식과 객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를 어쩌지 못하고 결국 음독 자살을 택하는 김미란의 어머니.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하고 소년인채 살아가고 있는 성연우의 삼촌. 이들의 관계맺기는 어쩐지 극과 극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우뚝허니 들어가 있던지, 아니면 자살이나 도피같은 방법으로 관계맺기를 근본적으로 끝낸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성연우의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현실이라는 바닥에 두발을 탄탄히 딛고 서있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매우 유연하고 자연스럽다. 처음보는 타인-며느리감으로 데려온 김미란-을 대할 때에나 아들에게 김미란에 대한 부모로서의 걱정스러움을 드러낼 때에도 그들은 큰소리를 내거나 전혀 허둥대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연우와 김미란은 어떠한가. 배우자로서 그가 선택한 미란은 결국 거울 속에 비친 그였을 것이다. 결혼은 또 다른 나와의 결합을 뜻하므로. 인간은 완전성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인간이 완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배우자를 결정할 때에는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채워넣을 수 있는 무엇을 갖고 있는 사람을 선택하게 된다. 일종의 생존본능처럼. 오미란을 떠나온 성연우는 김미란과 결혼을 함으로써 현실세계에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아내 미란을 가끔을 숨막히게 느끼면서도 결국 그녀에게 기대는 삶을 택한 것이다. 어쨌거나 다행스런 일이다. 늘 방황하고 돌아왔다가는 곧 신발끈을 조이고 또 다시 떠나갈 준비만을 하던 그가, 부재하는 여인들만을 그리워하던 그가 결국 '미란'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아침에는 사무실에 나간다. 물론 끝내 그의 아내가된 미란과는 결국 1년여의 별거, 재결합, 가끔 가벼운 외도라는 불협화음을 내기도 하지만...... 결국 그는 살아가고 있다. 미란의 남편으로서, 준이의 아버지로서, 누구의 아들로서, 사회의 일원인 변호사로서, 그것만으로도 대견치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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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씨에 대해 가지는 느낌은 좀 어렵다, 였다. 분명 여성 작가 이지만 여성 작가가 가지기 힘든 무거움이 윤대녕씨에겐 깔려 있었고, 그 깊이의 이해 능력 부족에 윤대녕 씨의 소설보다는 남성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게 좋았다. 윤대녕씨의 '남쪽 계단을 보다'.'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 이 2개의 작품으로 윤대녕씨는 과히 친밀하기 어려운 작가로 내게 인식되었다.
우연히 윤대녕씨의 약력을 살펴보니 등단이 90년도다.겨우 10년이라는 점이 날 놀라게 한다. 1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작다거나 그런 의미보다 난 윤대녕씨를 아주 오래전부터 문학계에서 자리잡은 한때를 장악한 그런 작가로 생각된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윤대녕씨의 선입견을 깬 것은, 어렵다거나 지루하다는 관념을 께트린 것은 사슴벌레 여자 이였고, 최근에 미란을 읽게 되었다.
작가는 책 표지에 이야기 한다.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은 두 미란의 등장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수 있는 불특정 다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으며, 그 어떤 타인도 나의 일부라는 점. 우리는 자신에게 조차 낯선 존재일 동시에 엉뚱한 타인과 동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
꽤 강한 메세지이다. 이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이 글을 쉽게 쓰여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주제를 어렵지 않게 풀어나가려 애쓰는 노력과 평범하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는 소재를 통해 메세지를 전해주고 싶어한 것 같다. 이젠 윤대녕씨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완전히 다 이해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윤대녕씨의 신간을 기다릴 만큼은 된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앞으로 잃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지마. 우린 엄연히 타인이고 어려운 선택 끝에 서로 긴밀히 협조하기 위해 만난거야. 그러니 어떤 순간에 간신히 얻어낸 가슴 떨리는 영상을 굳이 캐물어서 날려버리는 것은 하지 않았으면 해. 그건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신들이 잠들어 있는 방의 촛불을 하나씩 꺼버리는 일이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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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작품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다. 물론 이 독특한 향기를 구성하는 여행, 술, 담배, 음악 등은 다른 이들로부터 비판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항시 구성되는 중산층 유부남의 방황 또한 자주 도마위에 오르내리곤 한다. 이 소설도 이런 잣대를 가지고 보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개인적으로 윤대녕의 작품들은 나왔다는 소리만 들어도 금방 서점으로 달려가는 열성 독자라고 자부한다. 이 소설을 제외한 가장 최근작인 『사슴벌레 여자』와 그 이전의 한 두편의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솔직히 이제는 나도 커서 윤대녕을 떠나야 할 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럼에도 『사슴벌레 여자』는 꾸역꾸역 읽었다.
『미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읽을까 말까를 고민하다, 그간의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 읽어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책 표지의 안쪽에 적힌 그의 출생년도를 보면서 이제는 40대의 관록이 묻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왜일까?
결론적으로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윤대녕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은 보류하기로 했다. 『미란』은 나로 하여금 윤대녕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나이에 걸맞는 이야기였다. [인상깊은구절] "여자에 대해 무지하다니 한 가지만 알려주죠. 연우씨가 보기엔 세상의 많은 여자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곧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단 하나예요. 그러니 그 중에서 고르려 하지 말아요. 거꾸로 연우씨가 그들에게 선택될 수도 있어요. 앞으로 만약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고맙게 여기란 뜻이에요. 상대나 자신 둘 다에게 말예요." |
| 윤대녕의 <미란>을 어제 지하철을 타며 돌아다니다가 다 읽었다. 작가가 말하듯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소설로 재구성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일어나지만 소설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인생은 조금 색다르다. 요시유키가 <코칭?코칭!>에서 이야기의 힘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소설에서도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도 한번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소설가는 가장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편에 있지 않으면 안되는가 보다. 그의 소설에는 사랑했지만, 이뤄지지 않은 사랑과 사랑이라고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 평생의 반려자로 함께 살게 된 사랑이 등장한다. 둘의 이름은 우연히도 같다. 그리고 이뤄지지 않은 사랑은 질병 속에서 결국 일찍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그저 이어간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순탄하게 이어진다. 그것이 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인간의 삶이다. 결국,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인생을 그려내지 않았지만, 인생이란 어차피 한번 왔다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우쳐준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일장춘몽'이니, '공수래공수거'니 하는 말은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것을 이야기를 통해 웅변하고 있었다. 모두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만, 거기는 잠시 사랑이라는 경험이 끼여들기도 하고, 자식을 얻는 기쁨을 얻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의 이상한 관계를 목격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진행을 어떻게 바꾸어 놓지는 못하는 것이다. 나의 삶 자체는 그것대로의 리듬을 타고 흘러가는 것이다. 손가락 사이에 햇빛이 세어나가듯이 아무런 감각도 없는 사이에 지나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지나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윤리라는 틀을 벗어났을 때,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렸을 때 받게 되는 고통은 자기 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전가된다는 점을 은연중에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이 두 명의 미란을 꿈꾸는 이 시대의 남자들에게 주는 일침이 아닐까 한다. 가장 행복한 남자는 자신이 사랑한 바로 그 여자를 반려자로 둔 남자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아내의 존재도 어쩌면 남편의 삶에 공기과 같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중요한 것이어서 잊고 사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을 깨닫는 자들에게 복 있을진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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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종종 내게 그런다. 소설따위에서 뭘 얻겠다고 매일 잡고 있느냐고. 그때마다 난 대답한다. 소설 하나가 세상을 바꿔 놀 만큼의 힘을 분명 가지지는 못할 거라고. 그러나 소설을 보면 지금의 내 삶과, 다른 이들의 삶이 보인다고. 현재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이 소설이라고.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내버리는 무의식 속에서 놓친 것을 찾아내고 싶을 때, 소설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 답이 있더라고.
그리고, 바로 지금의 시대를 가장 잘 느끼게 해주는 작가가 있다면, 바로 윤대녕님이라고 생각한다. 님의 소설을 보면, 현대의 삶이 보인다. 무엇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 없이 그저 읽는 이에게 지금을 보여준다. 딱 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네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해주는 예민함이 있다. 전작 사슴벌레에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불확실한 우리네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 작품 역시 그와 연결된 듯한 인상을 뿌리치지 못하게 한다. 주어지는 틀 속에서 흘러가는 인생, 그 속에서 부침하다 스러져가는, 아니 상실해 가는 소중한 것들, 그런 유전이 정말 인생의 전말일까 하는 고민들. 인생은 어디까지 진지해질 수 있고, 어디까지 그냥 덮어질 수 있는 것일까. 깊은 강, 겉으로는 조용히 흘러가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속 깊은 곳에서 휩쓸려가는 거센 물살과 구르는 돌들이 내는 상처의 아우성들, 그 모든 것을 덮고 흐르는 물줄기를 순리라고 하는 인생관들의 진중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윤대녕님의 소설을 대할 때마다 당혹스러움을 느끼곤 했다. 도무지 독자에 대해서 친절하지 못한 분 쯤으로. 예고없이 들이닥쳐 자신의 할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놓고,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당황하도록 내버려 둔 채 빠져나가 버린다고나 할까. 사실, 이 작품에서도 난 성연우도, 오미란도, 김미란도, 연우의 아버지도, 장모도 다 낯설다. 왜 연우가 오미란에 대해 그토록 긴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작가는 독자에게 그런 의구심을 해소할 변명따위를 늘어놓지 않음으로써 읽는 내내 갈증을 느끼게 하곤 한단 말이다. 내가 소설을 이해하는 코드가 작가와는 사뭇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지만, 독자를 좀 더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인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인 동시에 엉뚱한 타인과 동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나 역시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때가 되었을 때, 많이 낯설어 있는 또다른 나의 그림자를 만나곤 할 때가 있었다. 그렇게 만난 나에게조차 낯선 존재, 결국엔 나이면서. 이 소설을 그렇게 이해하면 될까. 윤대녕님의 소설은 늘 내게 숙제를 안겨준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몇일 동안은 머리가 개운하지 못하다. [인상깊은구절] 언젠가,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이겠지만, 심각한 위기의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나와 네 어미도 그랬다. 완전히 지쳤다고 느껴지는 때가 올 거다. 그땐 세상의 모든 양들이 침묵하고 나무도 한결같이 등을 돌리고 서 있을 거다. 안타깝구나. 그땐 이미 이 아비가 도울 수 없을 때일 테니까. 부디 잘 살기 바란다. 너한테도 단점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걸 알게 될 때마다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거라.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에게도 고개 숙이거라. 너는 지금부터 많은 짐을 짊어진 사람이다. 모쪼록 경배하거라. 너를 찾아오는 범죄자조차 성의껏 변호해야 하듯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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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윤대녕의 이름을 많이 듣게 되어서 책을 찾아보았다.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은 긴 호흡을 갖고 읽고싶어하는 성격탓이라 일부러 장편소설을 찾아들었다.
미란은 주인공인 연우가 만나는 두 여자의 똑같은 이름이다. 두 미란을 만나면서 연우는 삶을 건너가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그들이 만나는 시점이 20대 청춘인데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서 읽어지지않고 40이 훌쩍 넘은 지금의 내나이에 맞게 읽고 있으며 그게 전혀 어색하지않았다. 혹시 작가의 나이가 비슷하니 작가의 심정이 그대로 반영되는 건 아닌가 느껴졌다. 두 명의 미란을 만나는 정열적인 사건들조차도 잘 정리되고, 제법 차가움을 느끼게 하여, 냉동창고같지는 않더라도 냉장고안에서 읽는 듯한 서늘함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내 나이탓인가 작가의 나이 탓인가!
삶에서 만나는 타인들이 결국 내 안에 들어있는 어떤 존재를 마주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게 '화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묘사하고싶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하며 내마음대로 정의한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풀어내보려고 시도했는데 어쩐지 조금 균형이 안맞는 시소놀이를 하고 있는 듯한 불안함이 드러난다. 서둘러 마무리지은 듯한 결말 부위도 내내 아쉬운 감이 있다.
주인공 연우의 심리묘사는 뛰어나지만 상대 등장인물들을 표현하는 대화는 매우 어색하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현실적으로 그런 대화를 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을까싶게 작위적이어서 쉽게 동의하지못하게 만든다. 그래도 대충 이해가 되는 것은 나도 이제 그렇게 띄엄띄엄만 말해도 알아들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서인가보다.
미란이라는 또하나의 이름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 폐허가 된 유적지의 이름이기도 하답니다. 살아가는 일이란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