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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은 시집들로 통하는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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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가는 원래 산문으로 작업하는 사람이기에 산문집이라고 해 봤자 그가 쓴 소설들의 부스러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지만 시인의 경우는 좀 다르다. 시인이 펴낸 한 권의 산문집은 그가 펴낸 몇 권의 시집들에 값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적어도 독자들에게는 말이다. 이런 사정은 시인이 지은 집(시집)이 소설가들이 지은 집(소설집)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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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가는 원래 산문으로 작업하는 사람이기에 산문집이라고 해 봤자 그가 쓴 소설들의 부스러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지만 시인의 경우는 좀 다르다. 시인이 펴낸 한 권의 산문집은 그가 펴낸 몇 권의 시집들에 값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적어도 독자들에게는 말이다. 이런 사정은 시인이 지은 집(시집)이 소설가들이 지은 집(소설집)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다. 문학이라는 같은 업계에 종사하고 있지만, 시인은 벌써 그 이름에서부터 소설가와는 다르다. 또한 문학평론가나 극작가 심지어는 수필가하고도 다르다. 모두 집[] 한 채씩 자기 이름 뒤에 마련하고 있는 이들 글쟁이들과는 달리 시인은 그저 시인일 뿐이다. 그래서 작고한 조병화 시인은 허허 웃으며 제자 박남철 시인에게 말했던 것이다. 예야, 南喆아, 詩人에게는 집이 없지 그냥 사람 , 詩人이지 뭐. (박남철의 시 詩人의 집」에서)

 

따라서 집이 없는 시인에게서 태어난 시들 역시 풍찬노숙의 처지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 시들의 운명이 가여워서 몇 년에 한 번씩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겨우 마련해 주는 허름한 집 한 채가 바로 시집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이라는 것이 말이 집이지, 온전한 집이 아니다. 지붕이 휑하니 뚫려 있어서 집안에 누워서도 구름과 별이 다 보이고, 벽은 여기저기 갈라져서 그 틈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스며들며, 창문은 왜 그리 많은지 집안에서도 바깥의 온갖 풍경들이 다 눈에 들어온다. 쉽게 말하자면, 시집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물들과 이미지와 상징들과 이야기들이 마구 한데 뒤섞여 있어서 집으로서의 온전한 체계를 갖춘 한 채의 독립적인 집이라고 부르기가 참 어렵다는 말이다. 그 집에 사는 가족들(소설)을 모두 아우르는 넓은 지붕(주제)과 확고하게 구획된 튼튼한 벽(서사)으로 지어져 있기에 자기 세계가 뚜렷하고 자족적인 소설집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시인의 산문집이 소중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경제학 용어를 빌려 비유하자면, 소설가의 산문집이 대개 소설집에 대하여 대체재(그것도 대부분의 경우 열등한)인 반면, 시인의 산문집이란 시집에 대하여 보완재(그것도 많은 경우 대등하거나 우월한)로서 존재한다. 시인의 산문집은 자신이 펴낸 시집들의 세계에 대해, 문학평론가들이 시집 말미에 꼼꼼하게 덧붙인 장문의 해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현란한 비유와 난해한 상징과 겹겹의 이미지로 감싸여 있어서 평범한 독자들로서는 쉽사리 그 속을 들여다보기 어려운 시집의 내밀하고 비밀스런 세계가 그 시집을 펴낸 시인이 쓴 산문집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환하게 열리게 되는 것이다.

 

2.

 

그런 이유로 나는 시집들을 읽는 만큼이나 시인이 펴낸 산문집들도 즐겨 읽는다. 내가 박형준의 산문집 『아름다움에 허기지다』를 구입해 읽게 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그가 펴낸 네 권의 시집들을 출간할 때마다 빠짐없이 챙기며 읽어온 애독자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시 세계는 이거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지난 해 시인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소월시문학상까지 수상했으니 이제 박형준은 시인으로서는 가히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그 동안 지은 네 채의 집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나는 그 가계를 파악하기가 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가장 최근에 펴낸 산문집에 내가 큰 기대를 건 것은 당연한 일. 더군다나 책 제목도 참 근사하게 『아름다움에 허기지다』이니, 이 책을 읽으면 박형준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한 내 허기도 어느 정도 채워지겠구나 싶었다.

 

그런 나의 기대는 책머리에 그가 쓴 서문을 읽어나가는 동안 보기 좋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제1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시인들의 시나 시집에 대한 비평 형식의 산문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제목에 보기 좋게 낚였구나 생각하면서도, 이왕 시작한 것이니 읽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 실망감에 입맛을 다시며 본문을 읽기 시작한 내 마른 입 속에는 그러나 오래지 않아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막막하고 쓸쓸하기만 했던 과거의 추억들과 그 음울한 추억들의 배경이 되고 있는 가족사에 주로 바쳐진 제1부의 소박한 산문들뿐만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비평문들도 딱딱하지 않고 그런대로 제법 맛깔스러웠기 때문이다.

 

오규원, 이성복, 최하림, 김기택 등 이름난 시인들을 인터뷰하고 쓴 본격적인 시인론(2)이시영, 문태준, 나희덕 등 시인들의 시집에 쓴 발문이나 시 해설(3)에도 그들 시인들과 함께 나누었던 자잘한 에피소드들과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추억들을 곳곳에 배치해 놓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추억들은 시인이 이 책을 출간하기 위하여 개고하는 과정에서 덧붙인 것도 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런 삽화들에 힘입어 2부와 3부의 글들은 비평문으로 읽히는 동시에 다른 시인들의 시와 시집을 매개로 해서 시인 자신의 삶과 시에 대해 에둘러 말하고 있는 산문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다만 한 계간지에 1년간 기고한 계간평들을 모은 제4부의 글들만이 좀 이질적인데, 그건 개인적인 추억들을 전혀 배제한 채 다른 시인들의 시와 시집들에 대한 분석과 비평만으로 온전히 글을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4부의 글들을 펼쳐나가는 논리의 바탕이 되고 있는 시론과 시인론 역시 박형준 시인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오래 궁구한 바의 산물이기에, 이 글들 역시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는 글들이라 하겠다.

 

3.

 

어느 문학강연회에서 시를 왜 쓰냐고 누가 묻기에 이렇게 되물은 적이 있다. 밥은 왜 먹느냐고. 그러자 그는 허기져서그렇다고 하였다. “나는 아름다움에 허기져서 시를 써요.” 내가 말해놓고도 그 말이 그럴싸하고 멋지게 생각되어 뒤풀이자리에서는 분위기에 한껏 취했지만, 집에 돌아와 술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점점 멋쩍어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4, ‘시인이라는 것’)

 

『아름다움에 허기지다』에 소개된 이 일화는 이 책의 표제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박형준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로 여겨진다. 짐작하건대, 그로서는 분명 진심을 토로한 것이었겠으나, 그게 너무 드러내놓고 말한 것이 아닌가 싶어 멋쩍어진 것이리라. 또한 자신의 시들이 실제로는 그런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기에 부끄러워한 것이겠다. 그의 시들 역시 이런 내성적인 기질과 겸손한 품성의 소산일 텐데, 그런 탓으로 주로 소멸하는 것들에 바쳐진 그의 많은 시편들은 어둡고 헐겁고 뭔가 모자라 보인다. 스스로도 이걸 잘 알고 있었던지, 그는 자신을 골방의 시인으로 부르거나 또는 어머니의 말을 빌려 방안퉁소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쓴 시들을 두고는, ‘바퀴벌레를 닮은 시라거나 기껏해야 유년시절 아버지가 만들어주곤 했던 맛없는 밀가루떡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를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그에게는 가장 정직한 행위이고 위안이며 미래를 예견케 하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가 멋쩍음과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산문집에 『아름다움에 허기지다』라고 결국 이름붙이게 된 것도 이로써 설명이 되겠다.

 

그렇다면 그가 늘 허기를 느끼는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 목록을 제대로 작성하려면 그가 그 동안 펴낸 네 권의 시집들을 꼼꼼히 읽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되겠으나, 이 산문집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그의 시론과 시인론을 통해서도 대충 짐작해낼 수 있다.

 

시인은 미궁을 향해 나아가는 자이다. 시인을 견자(見者)’라고 일컫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호기심은 맹목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그 속에 비밀이 숨겨 있기 때문이다. 비밀을 풀기 위해서, 미궁을 빠져나가는 열쇠를 발견하기 위해서 시인은 관찰한다. 많은 시인들이 저주받은 인생을 살다가 간 이유도 거기에 있다. 첨단의 미와 실천을 동시에 꿈꾸었던 김수영(金洙暎)은 술에 취한 채 버스에 치여 세상을 떠났고 천상의 시인 천상병(千祥炳)은 평생 하늘병()을 앓다가 지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갔다. 시는 그들의 고통스런 삶의 무늬들이다. 우리는 그 무늬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조개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진주를 보고 찬탄하는 이치와 같다. (26, ‘시인이라는 것’)

 

시는 세계라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에만 있지 않다. 세계는 발견되기 위해서, 그 안에 설렘을 가득 품고 있는 존재의 영역이기도 하다. 새로움은 무엇을 해석해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숨기고 있는 설렘을 건드렸을 때 그 끌어당기는 힘과 맞서는 데서 생긴다. 그런데 말장난 같긴 하지만 고독이 없는 설렘이 있는가. (32, ‘뒤란의 빛-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보들레르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독창성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나. 두보(杜甫)가 남을 놀라게 할 만한 표현이 아니면 죽어도 쓰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다짐들은, 우선 시가 표현능력임을 일러준다. 그러나 시인들이 독창성을 추구하는 것은 세계의 괴로움에 대한 절실함과 간절함에서 나온 것이지 그저 말장난이 아님은 물론이다. 간절함이 없는 시는 상징의 정수인 예감을 얻지 못하고 의미의 세계에 복속되고 만다. 반면, 빼어난 시는 빽빽한 숲에서도 자신만의 향기와 모습을 간직한 나무처럼 빛이 난다. (346, ‘상징이 되기 위한 몸짓들’)

 

, 거칠게 요약하자면 시인은 이 세계를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찬 미궁으로 여기는 저주받은 존재이고, 그런 시인이 오직 절실함과 간절함으로 그 세계와 그 세계 속의 사물들로부터 발견해낸(해석해낸 것이 아니라) 비밀스런 무늬와 빛나는 예감이 바로 시라는 말이겠다. 그러니 그런 시를 통해서 박형준 시인이 드러내 보이는 아름다움에는 빛보다는 그늘이 더 많고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많은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그늘이 많은 시의 무늬에는 고통스런 삶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미궁을 빠져나가는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눈물 어린 시의 예감에서는 상처받은 영혼의 호흡이 느껴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세계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고작 별식으로 먹는 무미한 떡 한 조각에 불과하며 기껏해야 잡티 섞인 보석에 지나지 않을 시가 요즘 같이 말 많고 소란스럽기 그지 없는 산문의 시대에 오히려 더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시인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말한다. 너무나 사소한 존재여서 세상에 난무하는 온갖 말 속에서 그들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들리지 않음, 이 들끓는 침묵에의 헌신이 세상의 소란을 가라앉힌다. (6, 책머리에)

 

이렇듯 들끓는 침묵으로서의 시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에 항상 허기질 수밖에 없는 시인의 운명에 대한 글을 시집이 아니라 산문집에 담을 수밖에 없음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시인이란 집이 없는 존재이고 몇 년에 한 번씩 겨우 마련해주는 시집들조차도 헐거운 지붕에 사방으로 온통 창문들이 나있는 갈라진 벽뿐이니 어쩔 수 없다. 시인 박형준의 시집들에서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의 산문집 『아름다움에 허기지다』를 대문으로 삼아 그의 시집들에게로 다시 들어가보는 수밖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대문에 걸려 있는 문패처럼 이 산문집이 온전히 그의 삶과 추억들로만 채워졌다면 그의 시 세계에 대한 내 허기가 더 많이 채워질 수 있었으리라는 사실.

c*****t 2010.04.12.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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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허기진 사람들에겐 부족한 허기진 아름다움... <아름다움에 허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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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시집을 구입한 것은 일년쯤 되었을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시를 읽은 것은 (그러니까 누군가의 시집을 찬찬히 읽은 것은) 언제쯤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시인을 꿈꾸었다. 고등학교 시절 김지하의 시집 『애린』을 읽고 또 신동엽의 ‘산문시2’를 읽고 난 후 난 시인을 꿈꾸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문학회에 가입을 한 것도, 매일매일 받던 용돈을 아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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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시집을 구입한 것은 일년쯤 되었을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시를 읽은 것은 (그러니까 누군가의 시집을 찬찬히 읽은 것은) 언제쯤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시인을 꿈꾸었다. 고등학교 시절 김지하의 시집 『애린』을 읽고 또 신동엽의 ‘산문시2’를 읽고 난 후 난 시인을 꿈꾸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문학회에 가입을 한 것도, 매일매일 받던 용돈을 아끼고 아껴 시집을 산 것도 그 꿈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황지우 시의 그 실험성에 기대어 침묵이라는 제목으로 빈 백지의 시를 썼고, 황동규의 시를 읽으며 낮술을 마셨다. 중독에 가까운 알콜 섭취의 기억은 김영승의 시 ‘반성’ 을 읽으며 합리화 시켰고, 박노해와 백무산 그리고 이산하의 시를 읽으며 가슴의 끓는 피에 기름을 붓기도 하였다. 장정일의 시 ‘프로이트식 치료를 받은 여교사’를 들먹이며 여자를 꼬시거나 그의 시 ‘낙인’을 읽으며 아메리카와 자본주의에 대한 야릇한 적개심을 은유하는 기술을 익혔다.

 

  이성복의 시를 읽고 아내와 4박 5일의 남해금산 여행을 다녀왔으며, 오규원의 시에 나오는 화살표를 따라 우유팩을 땄다. 박남철의 꼬장에 가까운 시를 발견했을 때는 흥분에 겨워 잠을 설쳤고, 기형도의 시에 쏟아지는 찬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대학생활을 해야 했다. 시를 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엄혹한 시대의 부름에 합당하다는 판단에 집단 창작이라는 형태로 시를 쓰기도 하였고, 그렇게 씌어진 시를 낭송하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학교 뒷산에 후배를 끌고 올라가 시를 낭송하게 하고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낭만적 추태를 부리기도 했고, 여관을 잡아놓고 함께 시를 쓰다 홀짝홀짝 마신 술에 그만 쓰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길고 긴 세월이 흐르고 내가 마지막으로 흠모하였던 것은 이시영의 짧아진 시였다. 소소한 자연의 풍광에 빗대어 인생을 관조하는 잠언과 같아진 그의 시를 읽으면서 폭풍같은 이십대 말의 나를 다스렸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기도하였던 한 여인의 병실을 방문하면서 이시영의 시집을 들고 가기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 시란 삶에서 나오는데, 삶이 누락되면 ‘골방의 시인’이 되어버린다. 부지런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가난과 신산(辛酸),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직장이야말로 시가 샘솟는 자리이다. 시란 고상한 것이 아니라 밥에 얽매여 있는 샐러리맨의 고뇌와 내면이 될 수도 있으며, 점심 무렵 홀로 골목이나 고궁을 거닐면서 사물들과 자신만의 화법으로 나누는 대화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저런 이유로 시를 쓰겠다는 꿈을 접은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어떤 부채처럼 시를 읽지 않는 나의 삶을 반성하고는 한다. 시를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시를 읽지 않는 것까지 용서되는 것은 아니라고 되뇌이고는 한다. 그 변명을 온통 나의 바빠진 삶으로 돌렸는데, 박형준의 글에 보이는 위와 같은 부분을 읽다보니 그것은 정말 변명에 불과한 것이구나, 혼잣말 하게도 된다.

 

  “... 어떤 흐릿한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것에 죽어라고 매달려서 피를 돌게 하고 살을 붙이고 형상을 만드는 것.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고 늦은 밤 창가에 떠오르는, 삶의 깊숙한 곳에서 샘솟는 구체적 형상을 만들어보는 것. 그러다보면 시는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중얼거리는 음악의 형상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하고. 그럴 때 골방의 시인이 바라보는 창은 ‘아름다움에 허기진’ 사람이 처한 시적 현실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골방의 시인’이라며 자책하던 시인이 또한 스스로를 향해 ‘아름다움에 허기진’ 이라는 표현을 쓰며 비호하는 순간, 나의 시에서 멀어진 심경 또한 변명거리를 찾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를 향해 범람하는 모든 시들이 우리들의 삶으로부터 자꾸 스스로를 멀리 떨어뜨리는데, ‘삶에 허기진’ 사람들을 향해 ‘아름다움에 허기진’ 시를 들이미는 시인들로 가득한데, 어떻게 생활인인 내가 시에 밀착할 수 있었겠느냐고 되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불만스러운 것은 스스로를 아름다움에 허기진 사람으로 표현한 시인이(아마도 동시에 대학에서 문학을 하겠다는 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이는 작가가) 한 권의 책을 선보이는 데 있어서는 그다지 정밀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꽤 여러 해 동안 작가가 발표한 시 이외의 글들을 (대부분은 시에 대한 짧거나 긴 서평이나 평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간히 스스로를 되짚는 산문들이 섞여 있는) 산문집이라는 이름으로 두서없이 묶은 것으로 보이는 책은 어떤 형식적인 일관성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시가 아닌 글은 모두 산문이니 산문집이라고 말한다면 할 수 없겠지만, 아름다움에 허기진 시인이 한 권의 책을 묶으면서 그 책 전체의 통일성과 완결성이 가지는 아름다움에 이토록 무관심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07.02.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