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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나는 내가 거의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는 것을 알았다. 물론 서로 쳐다보면 무안하고 또 괜한 오해를 살까봐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서로를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서로를 주시하지 않는다면 서로를 존중하기 어렵다. 보지 않기에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사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상대이기에 서로 무례하게 되고, 따뜻하게 말을 건내기도 힘들어진다. 문득 지나는 사람들을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양보와 존중이 쉬워지는 것 같다. 사랑이라는 것은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외면은 그 뜻이 얼굴을 피하여 보지 않음이니까. 왜 서로를 보려하지 않을까? 미국 생활을 하며 흑인들이나 히스패닉들을 잘 보지 않았는다는걸 안다. 나에게는 백인들만이 보였고, 그래서 무얼하든 그들 백인은 고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는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놀랐었다. 나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있는 대상은 눈치를 보고 그 행동이나 얼굴에 나타난 감정등에 관심을 갖지만, 나를 좌우할 수 없는 상대는 주시하지 않고 지나치게 된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시나 거절이 아닌 아예 보지 않는 것. 자신의 고려나 생각의 대상으로 떠오르지 않게 되는 것. 사실 이것이 가장 나를 힘들게 하던 미국 생활의 일면임에도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다 이제 고국에 돌아와서야 그 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사회의 고급 옷과 섹시함, 튀는 문화의 원인에는, 사실은 자신을 보아달라는 아우성이 포함되어 있는지 모른다. 아무도 나를 보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눈을 끌고 싶은 욕구. 더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수록 더 나를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하는 사람들만이 늘어감에야 이런 일들을 이해해 줄 수 없으랴.. 친절이란 사실 상대를 인간으로, [보이는] 인간으로 여기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못 보는 이유에는 또 한편으로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피부색이 그러하듯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거부감. 다양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에 더욱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상대를 좀비로 혹은 꼴통이라는 인간성이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 우리 사회는 서로의 얼굴을 기억치 않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는것일까. 나는 의견을 가지며, 있는 존재로 취급해 주기를 원하는 인간이다. 내가 오늘 스쳐갈 수많은 사람들도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기 사람 있거든요!] 그것이 지나간 촛불의 의미였을까. 어쨌든 이제부터 나는 볼 것이다. 모든 한사람 한사람을, 마음을 두어, 무표정하지 않은 얼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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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소설을 읽을 때면 늘 새로운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깊은 감정의 골이 느껴지는데 그렇다고 나로서는 100% 공감될 수 없는 과거 그들의 삶의 흔적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 작품에서는 단지 흑인문제를 넘어 인간으로서 삶을 개척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고, 비겁하게 자꾸만 움츠러들어 자기만의 안위를 취하고자하는 과정에서 오는 비인간화를 고발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는 꿈같은 사건들이 주인공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고교 졸업연설로 인연이 닿아 지방유지들의 단체 모임에서 연설 초대를 받고 갔으나 끔찍한 권투시합의 노리개가 되는 흑인 청년들. (하지만 여기서부터 주인공의 성격은 잘 나타난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자기 딸을 취하는 흑인 아버지. 정말 비굴하게 느껴지는 대학 이사장. 페인트 공장에서의 사건. (여기에서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었나 싶었다.) 흑인 활동단체인 형제애단에서의 활동 등의 굵직한 일들이 한 사람으로서 거쳐야 할 인생이라고 하기엔 너무 벅찰만큼 고통스러웠다. 그 와중에서도 주인공의 의식 상태는, 뭐랄까..못나 보였다. 속으로는 자신 이외의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그들과 함께 한다.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하는 그의 모습에서 온전히 그를 탓하는 것도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따뜻한 인물인 메리 아주머니는 주인공의 부모보다 더 따뜻한 존재였고, 고향 남부만큼이나 간절하게 그려졌다. 가난의 상징인 양배추 스프. 나에게도 그녀의 마음 씀씀이는 소설 속에서 안신처가 되어주었다.
꿈에 취해, 꼭 몽환적 분위기에서 주인공이 헤매고 있을 때, 세상이 잔인하게 한 인간을 농락하고 있을 때 그런 세상을 인간적으로 살기는 참 어렵겠다 싶다. 가난한 남부 흑인의 혈통의 조건에서 꿋꿋하게 일어서기보다 호시탐탐 온갖 기회를 포착하기만을 살피는 그는 소설이 끝날 즈음에서야,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고서야 깨닫는다.
제목만 보고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렸다.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시사는 비슷하지만 여전히 다른 내용이다. 하지만 여타의 흑인소설과도 또 다른 느낌을 주는, 후반부에서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나.. 사유하는 힘을 가진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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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두 부류가 있다. 보이는 인간과 보이지 않는 인간.
보이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미디어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름을 들으면 얼굴을 떠올리게 되고 얼굴을 보면 이름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그런 명사들이 첫번째다. 다음으로 한 사회에서 통계적으로 평균의 삶을 누리는 보통사람들이 그러하다. 반대로 보이지 않는 인간은 세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고국을 떠나 낯선 이국땅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경우, 평균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극빈계층의 사람들, 지배계급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아웃사이더의 경우가 그러하다. 특히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면서 중심부로의 이동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 누구나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된다.
랠프 엘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은 소재로만 보면 흑인소설이자 환상사실주의적 색채가 강한 폭로소설이다. 인종간의 갈등만이 아니라 같은 동족간의 이념투쟁이나 갈등의 모습을 통해 흑인의 정체성과 인간의 조건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인간성을 위한 투쟁과 투쟁의 허무함까지 엿볼 수 있다. 저자는 노신의 아큐와 비슷한 감상적 기질을 가진 주인공 '나'를 전면에 내세우며,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철학적 주제들을 미국사회의 인종문제와 한 개인의 정체성 문제로 변주한다.
주인공은 고등학교 졸업식 연설을 하기 위해 초청돼 온 자리에서 집단난투시합에 몰리고, 백인들의 광란적인 사디스트적 파티의 놀림감이 된다. 고대로마의 검투사 경기처럼 비겁하게 조성된 무대를 몸으로 버티며 백인 입맛에 맞는 졸업연설을 행한 뒤 교육감으로부터 주립흑인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증서를 얻게 된다. 대학 3학년말 주인공은 일주일간 노턴 이사의 운전사로 일하게 되는데 이 때 노턴을 노예지구로 데리고 간 행위로 인해 학장 블레드소우 박사와 갈등하게 되고 결국 학교를 자퇴하게 된다. 블레드소우 박사는 같은 흑인신분으로 출세한 사람이지만 막상 자기의 이익을 위해선 동족인 흑인들에게 매우 냉혹할 수 있는 이중인격자다. 그는 강자(백인)에게 약하고 약자(흑인)에게 강한 그런 권력지향형 인간으로, 이 책에 나온 표현을 사용한다면, 백인들에게 빌붙기 위해 흑인을 배신하는 흑인 반역자다. 「난 현재의 내 지위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면 이 지방 흑인들을 내일 아침까지 한 명도 남김없이 죄다 나무에 매달아버릴 수도 있어.」(193쪽) 젊을 때 그토록 다시 만나고자 했던 노턴은 소설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겨우 조우하게 되지만 길을 잃은 노턴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결국 주인공은 노턴에게 그저 스쳐가는 행인에 불과했을 뿐이지만, 과거 노턴은 주인공에게 일종의 희망이었다. 주인공은 노턴에게 자신의 위치를 상실한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지만 영문을 모르는 노턴은 그저 황급히 피할 뿐이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없이 늙어간다. 주인공은 학장의 일자리 추천장의 내용을 보고 블레드소우 박사의 위선적인 모습을 알게 되고 자신의처지에 대한 비탄과 더불어 박사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된다. 공장에서 몸을 다치고 공장부속병원을 퇴원한 뒤 메리 아줌마를 만나 그 댁에서 잠시 하숙하게 된다. 강제퇴거장면을 보고 개입한 뒤 할렘지역에서 활동하는 브라더 잭의 눈에 들게 되고, 탁월한 연설능력으로 인해 곧 형제애단의 대변인으로 육성된다. 주인공은 소속단체에서 제2의 부커 T. 워싱턴가 될 실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단체 내부의 부조리로 말미암아 좌절하게 된다. 주인공의 행동력이 가장 빛을 발할 때가 형제애단에서 활동할 때였지만 그의 정체성을 승화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그는 결국 지하로 은둔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왔는지, 그의 최후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래도 주인공이 아무런 정체성의 고민없이 살아간 노턴보다는 보다 치열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한 사회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눌 수 있다. 보통 중심부는 주변부를 신경쓰지 않는다. 주변부는 중심부의 테두리는 볼 수 있어도 그 중심부의 핵은 결코 보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인간이란 한마디로 인간성을 박탈당한 사람이다. 조선시대 양반에게 있어서 천민노비가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고, 일제치하에서는 불량선인이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그저 교환가능한 물품에 지나지 않거나 아니면 죽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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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 하는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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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내가 이책을 읽게된 이유는 "뿌리"를 읽고나서 일것이다. 보다 심리적이고, 치밀한 흑인작가의 글을 읽고싶어서 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도입부를 읽으면서 느끼게 된것은 얼마나 번역이라는게 중요한게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개정판은 표지만 바뀌었는지 번역의 내용도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전판은 번역가의 내공이 부족한건지 아니면 국어능력이 부족한지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부디 이책을 읽으시려고 하는 독자가 있다면 원서를 어렵더라도 보라고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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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른 책처럼 단권을 두 권으로 분할 출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약 400페이지이고 26줄, 27자입니다. 다른 출판사가 이런 경우 채택하는 30줄 30자였다면 500여 페이지가 되었겠죠. 나누어진 탓에 감상이 방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 2권을 안 봐도 된다는 이득도 있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읽던 것은 다 본다는 강박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뒷부분을 내리 보았을 테니까요. 1권의 주요 줄거리는 주인공(이름이 나왔었는지 안 나왔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이 자신을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어릴 때 장학금을 받고 흑인대학에 진학한 것, 대학의 이사 한 명을 안내하다 위기에 빠뜨린 것, 퇴학당하고 학장의 소개서를 들고 돌아다니다 물먹는 것 등이 나옵니다. 마지막 7번째 소개자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하였고, 호의를 받아 소개장을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엔 '이 친구는 문제가 있습니다'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소개로 페인트 회사에 취직을 합니다. 그리고 겪는 몇 가지 일들. 왜 7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7이라면 14% 쯤 됩니다. 정규분포에서 2SD 이상 벗어난 영역이죠. 다른 사람과 다른 성향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서양에선 7이 갖는 의미가 다수 있습니다. 아무튼 6보다는 더 다양성을 강조할 수 있고, 8보다는 작은 수입니다. 주인공이 사건들에 휩쓸리는 것을 보면 큰 흐름을 관조하는 입장이 아니라 모른 채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 점이 제가 2권을 읽지 않게 하는 이유입니다. 1950년대 흑인의 인권 및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영어를 생각한다면 훌륭한 작품일 수 있겠으나 2010년대 한국어를 사용하는 저에게는 안 읽어도 되는 그저 그런 책입니다. 100617/10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