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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2차 대전 독일이 저지른 악행이 담겨있는 장소다. 이곳을 표현한 소설, 영화 등도 많이 있지만 굳이 하나를 추천한다면 "쥐"라는 만화를 올리고 싶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보고 적잖는 충격을 받은 나는 그에 관련한 책이나 영상을 더 찾아보게 된다. 그 틈에서 쥐라는 만화를 보게 되는데, 의인화된 만화식 얼굴과는 달리 너무나도 짜릿한 느낌을 줄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가 되어 있었다. 다름아닌 작가의 아버지 실화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영화는 폴란드계 유대인인 주인공이 나치 정권에서 탄압을 받고 결국 아우슈비츠로 들어가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살아난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재에 아버지를 인터뷰하는 아들의 모습도 사이 사이 그려내면서 마치 노인이 젊은적 이야기 해주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훌륭한 디자인이다. 만화는 무조건 유대인을 피해자라고 그려내지 않는 점에 흥미를 준다. 아버지는 유대인으로 갖은 고생을 했음에도 그 자신도 인종차별적 인식을 지니고 있다. 덕분에 아버지의 흑인 등에 대한 차별 의식을 보여줌으로서 무엇이 나쁜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관점도 부여한다. 나치의 폭력적 행동도 인종적인 차별 의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기적인 일화가 주는 숙연한 분위기도 깊게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일조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은 그 사람이 옳든 그르든 흥미로운 소재다. 여기서 흥미롭게 봐야하는 점은.. "과연 우리는 이런 점에서 완벽한지".. 하는 근본적 의문이다. 국내에서 일하는 동남아사람들을 차별하고 같은 민족인 조선족도 낮게 본다. 거기다 최근 들어서는 지역 감정 등을 통해 전라도에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인터넷 카페 등도 등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울타리 하나 하나를 누군가 선동하고 더 높게 울타리를 올리는 순간, 과거 나치가 행하던 차별적 폭력성도 합법이라는 탈을 쓰고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아니. 벌써 등장한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이 책을 꺼내서 읽어봐야 겠다. 현재의 분위기가 얼마나 안타까운지 그리고 얼마나 공통점이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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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쥐를 보게 되는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흔히 쥐에 대해 상상하는 이미지란, 징그럽고 끔찍한 것들이지만 막상 내가 목격했던 쥐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쥐를 목격한 곳은 특이하게도 각기 다른 오피스텔 정원 언저리였다. 쥐라기 보다 새앙쥐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아기 주먹만한 작은 몸뚱이에 회색빛을 띈 새앙쥐는, 갑자기 길을 잃은 듯 이리 저리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흠칫 놀라 다시 저쪽으로 뛰어가고, 또 멈칫거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이쪽으로 오기를 반복했다. 그런 쥐를 보고 있자니, 마치 햄스터를 구경하는 것처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추운 겨울에 갈 곳을 잃은 새앙쥐가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이상한 걸까..
그래서 쥐가 주인공인 이 책을 보게 되었을 때, 쉽사리 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힘없는 새앙쥐들을 한데 몰아 원하는 방식으로 잔인하게 죽여버리는 고양이의 이야기. 바로 유태인 대 학살의 생존자 이야기를 그린 두 권짜리 만화 '쥐'이다.
이 책은 마치 고전 같은 그래픽 노블이다. 만화로서는 최초로 퓨리처상(92년)과 구겐하임상, 전미 도서평가 협회 상을 수상했던 역작이기도 하다.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은 유태인 대 학살의 생존자인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매주 아버지의 집을 방문해 그가 어떻게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가 살아온 과정을 묻고 그것을 그대로 만화로 옮긴다. 대신에 학살을 당한 유태인들은 쥐의 모습으로, 나치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기타 나라의 사람들은 그와 어울리는 동물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그것은 정말 당시 쥐처럼 취급당해야 했던 유태인의 삶을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주는 만화적 장치였다.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갔으며, 독일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어떻게 숨어다녔고, 마침내 수용소에 끌려 들어가서는 어떤 생활을 했는지... 만화는 지극히 담담한 관점으로 그려내고 있다. 나는 작가가 아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음을 만화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독한 구두쇠였고,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행동들을 했다. 성냥 한개피, 물 한방울을 아꼈으며 그 누구도, 심지어 함께 사는 여자조차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만화를 통해 평생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행동과 그의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이해해 나가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만화 첫머리에 나왔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작가가 친구들과 놀다가 싸우고 집에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렸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너가 친구라고 부르는 아이들을 모두 모아 한 방에 몰아넣고, 1주일만 굶긴다면 친구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게 될거다." 사실, 그토록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일지언정 직접 겪지 않으면 생생하게 느낄 수 없다. 만화를 읽으면서도 아, 정말 너무해.. 심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내 일처럼 아프지는 않다. 뭐, 만화보다 한층 생생한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감정은 그 때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한번쯤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 잔혹한 역사가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아버지처럼 돈과 잔머리, 그리고 운으로 지옥 속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잔인한 학살의 소용돌이에 있던 기억은 완전히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 이상으로 가스실 목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남은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고, 그 상처는 그의 자식들에게, 후손들에게도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역사에 대한 보다 접근하기 쉬운 만화책이라는 방법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어떠한 인간도 짐승같이 취급당하며 살게 되는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현재에도 어떤 이는 고양이가 되고 어떤 이는 쥐가 되는 일들은 끊임 없이 반복되고 있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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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실에서도 2차대전은 질긴 인연을 맺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책의 내용이 담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저지른 커다란 과오 중 가장 심각하고 씻을 수 없는 과오로 유태인에 대한 그들의 학살로 기억하고 있다. 이 책은 2차대전 당시의 유태인에 대한 독일의 만행을 다루고 있다. 서구적 가치관과 우리의 가치관의 차이일 지도 몰라도, 그 서술에 있어서는 너무도 담백하기에 오히려 섬뜻하다. 같은 피해자인 우리의 입장에서, 일본의 만행을 다루는 문학적 서술이 담백하기보다는 비분강개한 서술로 흐르는 경우가 많아, 역사적 사실이 오히려 반감되는 경우를 볼 때가 많다. 사회적 논의 또한 사실성보다는 감정성을 띄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독일인을 고양이로, 유태인을 쥐로 표현하는 표현의 적실성, 학습만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만화의 위력, 결코 인위적으로 화해하지 않는 혹은 화해할 수 있는 세대간의 골 등 이 책은 사실을 사실로 그려내는 힘이 있기에 그 값어치가 배가 되는 것 같다. 우리도 비슷한 역사를 가졌는데, 우리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지는 못하는 걸까하는 궁금증이 책을 덮으면서도 뇌리에 가득차 있다. 만화를 좋아하면서도 조금은 값어치가 없다는 인식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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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에 의한 아우슈비츠에서의 유태인 학살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상식이 되어 있다. 물론 그 상식이 이제는 진부해서 그다지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식으로 전 세계인의 의식속에 인간의 존엄과 교훈의 차원에서 더욱 각인되고 기억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정도로 망각과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중에 있다. 망각과의 싸움과 상식으로의 각인은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각각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대표적으로 '쉰들러 리스트'가 있을 것이고, 음악에서는 Henryk Gorecki가 Symphony No. 3로 유대인 학살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미술에서는 재일조선인 서경식씨가 유태인 화가 Felix Nussbaum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아우슈비츠 생존자 쁘리모 레비와 그의 문학을 회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만화라는 장르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아버지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회고작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게다가 월트 디즈니가 심어준 쥐와 고양이라는 유머러스한 적대관계를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일방적 적대관계로 전환하여 묘사함으로서 더더욱 주목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부록에 들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천사, 해설등은 작품 자체의 분위기와는 달리 너무 호들갑스럽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유태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나 나찌의 악랄함을 여기서 이야기하고싶지는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깊고 세밀히 표현한 이야기들은 굳이 내가 반복하지 않아도 이미 많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지 이 작품이 가지는 두가지 축, 생존자인 아버지의 이야기와 아버지와 작가인 아들과의 갈등, 그 중 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에 주목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쟁과 일방적 억압과 공포가 만든 하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대물림이 되어 고통이 되어야만 하는 트라우마, 작가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다른 집 아버지들이 날마다 한밤중 잠을 자다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자기애가 강한 나머지 자신의 것에 과도하게 집착을 하고 자기 외에는 다른 가족들마저 믿지 못해 생기는 갈등은 다름 아닌,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의 본능이 불러 일으킨 정신적 트라우마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역사적으로 변방의 위치에서 한반도와 왜구의 시달림과 최근에는 전체 도민의 10분의 일이 학살당한 4.3을 겪은 내가 있는 곳 제주를 떠올렸다. 제주 현지민들에 대한 외지인들의 부담감, 불편함. 거의 모든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의심과 텃세를 보이는 이들.. 그것은 단지 바람많고 척박한 땅에서 힘겹기만 한 자연환경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인위적인, 그리고 강압에 의해 당할 수 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 등등에서 참전하고 돌아온 미국이나 한국의 병사들이 정신적으로 겪는 트라우마는 자세히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얼마전 심리치료를 하시는 분께 들은 기억도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일종의 제국주의 파시즘이라는 폭력에 의한 상해라 이해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러나 이들에게는 해외파병의 댓가로 주어지는 좀 더 많은 액수의 월급말고는 어느 누구도 그런 상해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또다른 모습의 제국주의 파시즘과 이들에 의해 조장되는 이념적 갈등의 폭력이다.
아쉬운 것은 이 작품에서도 저자는 그런 트라우마를 단지 개인의 경험이 가져다주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지쳐버린 상황에서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아버지 개인의 문제로만 묘사된다. 개인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의 미국사회를 살아왔기에 그랬던 것일까? 그것이 아직도 지속되는 파시즘이 가져다 준 폭력에 의한 후유증이라 왜 말하지 않는 것일까? 기회가 된다면 내가 저자에게 한번쯤 문제제기를 해 보고 싶은 대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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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철저히 개인적인 기록이 어떤 저널리즘보다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역사책을 봐도 알 수 없고, 어떤 역사책의 내용보다 와닿는 것, 나와 나의 가족의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사실 관계와 평가가 정리되고 기록되어 글로 전하는 역사 이전에, 누군가가 살아 숨쉬며 겪어온 인생이다. 어릴적부터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등 집안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는 그 어떤 책이나 신문 기사의 이야기보다 생생하고 인상 깊었다. <쥐> 역시 철저히 개인적인 기록이고 만화책이다. 그러나 그 어떤 저널리즘보다 효과적으로 홀로코스트를 폭로했고 1992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쥐>는 홀로코스트 소재에,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을 무조건 선하고 피해자로만 그리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블라덱은 섬뜩할만큼 괴팍한 노인이다. 인종차별주의자에 강박적이고 고집불통이고, 비유태인인 며느리를 볼 때마다 놀라며 그렇게 계처와 오래 살아도 의심하며 죽은 전처만 그리워 한다. 여러가지 지병에 매일 약을 한웅큼씩 먹고, 오직 자신만 믿는다(굳이 더 믿자면 아들 정도). 그런 블라덱을 보면 스치는 모습들이 있다. 큰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면서 인성이 변한 사람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일제와 전쟁 등 험난한 현대사의 산증인인 꼬장꼬장한 노인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래서 변해버린 블라덱의 모습에서 은근한 익숙함과 현실성을 느낀다. 한편 그런 블라덱을 보며 하는 계처 말라의 말도 되새겨봄직하다. "나도 이웃들도 홀로코스트를 겪었지만 모두 당신 같지는 않아요." 백 사람의 유대인에게 백 가지의 홀로코스트가 있다, <쥐>를 읽으며 새삼스럽게 홀로코스트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고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유대인과 유대문화에 대해 평소 의문스러웠던 점도 풀리고 조금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권으로 되어 있는 <쥐>는 전형적인 서양만화의 그림체와 구성을 보이고 있다. 작가 아트 슈피겔만(이하 아트)은 그의 초기작 시절 어머니의 자살과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소재로 자조 섞인 블랙 코미디 만화를 그린 적이 있다. 그러나 2세의 입장에서 좀더 쉽게 과거를 객관화할 수 있었던 것도 있고 표현면에서 충분히 허용될 수 있는 각색이었다고 생각한 작가와 달리 그 만화를 우연히 읽게 된 아버지 블리덱 슈피겔만은 대노한다.
사연인즉, 어머니는 홀로코스트 후유증으로 생긴 만성우울증과 신경과민에 오래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한 것이었고, 나치에 의해 큰형도 죽었다. 아버지의 말년, 아트는 녹음기를 들고다니며 장장 8년에 거쳐 아버지의 이야기를 수집한다. 아버지는 책이 완성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쥐>는 그런 과정으로 탄생한 철저한 개인사이자, 아들이 그린 아버지의 인생이다. 하지만 작가는 어떤 감정이나 주관도 개입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표현하려 애쓴다. <쥐>는 1930년대 중반에서 1944년까지 블라덱과 그 일가가 겪은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
쥐는 유대인을 상징한다. 나치는 고양이, 유대인은 쥐라는 고양이와 쥐 구도를 기본으로 폴란드인은 돼지 등 민족마다 각기 다른 동물로 그려진다. 책을 다 읽고나면 톰과 제리의 제리나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와는 또다른 인상 깊은 쥐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머릿 속에 남는다. 신기한 것은 이런 동물적 형상화와 만화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무척 리얼리즘적인 작품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구현되는 수용소의 구조라든가 세세한 에피소드들은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치밀하고 대단할 수 있는지 새삼 감탄하게 만든다.
<쥐>는 작품의 정체성 자체는 나치하 유태인 피해자의 홀로코스트 경험을 다룬 전형적인 홀로코스트물이지만, 뭔가 기존 홀로코스트 소재로 한 책과 영화와는 묘하게 느낌이 다른 책이다. 한편 2권 끝엔 조엘 겔릭이 쓴 <쥐>의 작품해설이 실려 있다. 본문 중에 만화의 등장인물인 아트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쥐 가면을 쓴 작가 아트가 등장해 직접 이 책과 관련된 뒷 이야기를 언급하는 부분도 있지만 작품해설에 작가의 작품 작업들과 <쥐> 제작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고, <쥐>에 대한 비평도 담겨 있어서 책을 읽고나서 <쥐>를 좀더 풍부하게 감상하고 아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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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역사와 문화적 진실을 소녀의 눈으로 소개하고 있는 <페르세 폴리스>(새만화책, 2005년)를 읽다가 <쥐>(아름드리미디어, 2007년)를 알게 되었다. 단색의 만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진실을 알린다는 공통분모가 이들을 같은 부류로 묶을 수 있었으리라. <페르세 폴리스>가 마르잔 사트라피가 살아온 과정을 소개하는 하나의 논픽션이라면, <쥐>는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관한 진실이다. 두 만화의 또 다른 공통분모 중 하나는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역사적 진실이기에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이는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글논그림밭, 2002년)에서도 엿볼 수 있다. 모두 만화로 그려진 것이지만, 글만으로 전달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모두 약자의 이야기이다. 강자의 힘에 짓눌려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진실을 밝힌다. <쥐>는 두 권의 책으로 나와 있다. 1권은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가 수용소에 잡혀 들어가기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2권은 수용소에서의 생활과 종전까지를 다룬다. 그러나 <쥐>는 이중의 전개방법을 시도하여 종전 이후의 삶까지를 그려내고 있다. 아트 슈피겔만과 아버지의 현재 모습을 동시에 그려내 종전 이후의 삶은 어떠했는지를 함께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종전 이후의 삶이 순탄했다면, 그래서 과거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면 그러한 서술방식은 굳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인 아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아버지는 이후 유태인 생존자인 말라와 재혼하지만 광적인 모습을 종종 보이곤 했다. 저자에게 아픔이 많았을 것이다. 이는 부모 세대의 고통인 동시에 다음 세대까지 물려진 정신적 고통이다. 전쟁은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전쟁으로 인한 학살의 참상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책에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저자의 아버지가 어떻게 그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았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혹자는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돈과 꼼수로 살아남은 것 아니냐고. 실제로 아버지는 돈과 인맥으로 많은 어려움을 지나왔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나치의 눈에 띄지 않게 숨는 과정에서도 돈이 있었기에 다른 많은 유태인들보다는 쉽게 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수용소에 갇혀서도 운이 좋아 몇 달간은 편하게 지낼 수도 있었다. 그가 살아남은 과정이 운이라고 치부해도 좋다. 우리는 한 인간이 그렇게 모질게 살아남은 과정으로 인해 학살의 참상을 지켜볼 수 있다. 그의 곁에 있던 수많은 이들은 돈과 인맥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으니까. 거래와 배신의 현장들, 나치와 그 일당은 그럴 수 있었다고 해도 그에 동조하여 유태인을 잡아들이고 혐오했던 일반 시민들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부분들도 있다. <쥐>를 통해 유태인 학살의 이면에 있었던 삶의 현장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동안 영화나 책을 통해 학살의 아픔들을 많이 지켜봐왔지만, 이 책은 또 다른 시선으로 유태인 학살을 생각게 한다. by 꽃다지, 2009년 2월 8일 |
| 난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전쟁 자체보다는 전쟁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난을 이겨내는 이야기 중에서도 전쟁에 얽힌 이야기만큼 극단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쥐>가 제일 극단적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캐릭터의 얼굴이 쥐와 고양이로 설정된 탓에 이야기는 더 암울하고 동시에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서로 다른 인간의 얼굴보다도 비슷한 생김새의 쥐들의 얼굴이 현실을 보다 더 현실적으로 직시하게 만든다. 만화라는 장르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린 예술작품으로서 <쥐>는 내게 언젠가는 도전하고 싶은 목표점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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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에 대해 다룬 여러가지 작품들이 있지만 (최근에 개봉한 영화 난징난징, 스필버그의 쉰들러리스트, 사자와 맞선 소녀... 등등) 기억에 남는것은 마치 판화를 보는 듯한 그림체와 실화를 바탕으로한 회고형식의 드라마에 있다.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그 일련의 사실들은, 죽음, 겪어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힘든 무작위적인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고양이와 쥐로 상징되는 그 설정. 그리고 움츠러든 쥐와 총을 든 고양이의 이미지는 너무나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를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은' 동화가 이다지도 사실적으로 나에게 충격을 준다,
사소한것에 대한 디테일, 그리고 그 아버지가 지금까지 겪어오는 후유증.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도 고통이다' 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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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1,2 - 아트 슈피겔만 저/권희섭,권희종 역/아름드리 미디어
1. 아버지에게 맺혀 있는 피의 역사 2. 여기서 나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며칠전, 유태인을 상대로 온갖 인체실험을 실시했던 나치전범이 오래전 사망했다는 외신보도를 보았다. 살아있는 유태인을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장기를 적출하고, 사지를 절단하고. 심장에 온갖 독극물을 주사한채 사망하는 시간을 기록하던 한 의사, 아리베르트 하임. 역사의 심판을 피한 채 다른 나라로 도망했다가 은둔의 삶을 살다가 오래전 죽었다는 보도.
쥐는 유태인이, 폴란드인이, 어떻게 독일인에게 억압당했는지를 보여주는 만화다.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아버지를 둔 아트 슈피겔만은 아버지와 융합할 수 없는 세대간의 골로 서걱거리는 관계를 지속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전쟁에 휘말렸던 아버지의 기억을 전해듣고 이것을 만화로 기록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어머니는 아트 슈피겔만이 20살때 자살을 했다고 하니.. 세대의 역사가 다음 세대에 남겼던 처참함은 상상 이상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구겐하임상과 퓰리쳐상을 수상한 이 만화는 나치는 고양이로, 유태인들은 쥐로 묘사하면서 벗어날 수 없는 억압의 관계를 설정한다. 실제로 있었던 참혹한 역사보다는 순화되어 있는 듯 하지만, 곱씹으며 읽다보면, 전쟁의 광기가 한 세대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때 유태인들을 죽이며, 억압하며 이용했던 자들은 자신들이 옳다 믿으며 그것이 치욕이 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공감무능력자 = 싸이코패스.
생각이 자신에게로만 갇히면, 다른 이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또 다른 나치가, 또 다른 유태인이, 여기저기에 있는데, 그걸 깨닫지 못할뿐. 돌아보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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