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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트 슈피겔만의 『쥐』1편을 완독한 이래 오늘은 2편을 완독했다. 각권이 150여 쪽의 비교적 짧은 작품이나 지문과 대사가 많아서 시간은 많이 걸렸다. 2권에서 느낀 마음을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위기에서 벗어나는 지혜가 평소의 생활에서는 장애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저자의 부친인 블라덱은 철저한 절약정신과 유비무환의 대비 자세가 생활화 된 인물이다. 빵이나 계란 등 먹거리가 생기면 다음을 대비해서 아꼈으며, 그렇게 아낀 물건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때로는 나치의 감시병에게 뇌물을 주거나 동료들에게 선심을 써서 더 편한 환경을 만들거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문제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계속되는 시대에도 그런 생활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족이나 이웃과 갈등으로 이어졌다. 전처인 아냐가 자살을 했고, 재혼한 후처와 갖가지 충돌을 하기도 했다. 저자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은 블라덱의 그런 생활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둘째, 세 번째 읽는 작품임에도 감동이 느껴졌다. 책을 읽는 내내 몰입하였으며 아우슈비츠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블라덱과 아냐 부부가 상봉하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찡했다. 수용소의 갖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자기집에 돌아왔다가, 집을 무단 점거하고 있던 폴란드 사람에게 맞아죽는 장면에서는 먹먹하기도 했다. 그 힘든 환경을 이기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렇게 죽을 수가 있단 말인가? 과장이나 비약이 없이 사실 그대로 전달한 이 작품이 이렇게 감동을 주는 것은 저자의 능력과 함께 진지한 자세로 집필하려고 노력한 저자의 정성 때문일 것이다. 셋째, 약자가 강자가 되었을 때 더 야비한 사람이 되는 것을 느꼈다. 블라덱이 저자 부부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갈 때 흑인이 차를 세우자 그는 그냥 가자고 한다. ‘검둥이는 믿을 수 없고 모두 도둑놈’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치 치하에서 인종 차별을 받은 바 있는 유대인이 다른 인종을 차별하다니…….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저지르고 있는 만행도 있다. 그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행한 처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어찌 이스라엘만 그러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게 갖은 학대와 멸시를 받았던 것이 우리 민족이다. 그런 우리가 좀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동남아에 가서 졸부 행각을 벌이거나, 먹고 살기 위해 이 땅에 들어온 조선족이나 동남아인에게 행하는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강자에게 그런 멸시를 받으면서 배운 것이 강자가 되었을 때 거들먹거리는 방법이었을까 넷째, 책장을 덮으면서 씁쓸함도 함께 느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미국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 난민과 아랍인들에게 행하는 모습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못지않게 비인도적이다. 2차 대전 때 그런 고통을 당했다고 해서 강대국이 되었을 때 어떤 일을 저질러도 되는 것은 아니다. 『안네의 일기』를 읽으면서 이 책을 1~2차 읽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동정과 함께 유대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잔인한 민족이니 히틀러가 그렇게까지 기를 쓰며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도 이 책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이 읽히지 않았나 싶다. 그들이 이 책을 통해 진정한 교훈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 작품을 누구에게 권할까 중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권의 리뷰를 그대로 옮긴다. “만화로서는 드물게 풀리처상을 수상할 만큼 작품성과 기록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고통을 당하기도 했던 우리 민족으로서는 동병상련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인상이 좀 어둡고, 처음 얼마 동안은 지루할지 모르지만, 30쪽만 넘어가면 책의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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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슈피겔만의 MAUS에서 쥐와 고양이라는 전통적인 피해-가해의 비유(톰과 제리가 코미디로 뒤집어왔던)는 충격적으로 부활한다. 이 명료한 비유를 통해, 작가는 기타 매체들이 '역사적 배경의 나열'로 처리했던 유대와 나치의 관계를 깔끔하게 처리한다. (이 관계는, 결말부에서 아버지 블라덱의 인종차별로서 역전되며 아이러니를 더한다.) 포식, 가해의 관계 속에서 인간성은 처참하게 허물어진다. 그 생존자와, 생존자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아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여러분들은, 홀로코스트의 잔해에서 자유로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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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을 받은 만화답다. 후기에 보면 작품 한컷 한컷에도 정말 많은 노력과 고생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림을 너무 못 그려서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는데 초기작을 보니 그림을 정말 잘그리는 작가가 날것의 이미지를 내기 위해 거친 붓선의 느낌을 주었더라.
더이상 갈 곳이 없는 최고의 만화. 쥐에게 바치는 찬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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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 십년 전 쯤 우연한 기회에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만화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1권을 사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집을 아무리 찾아도 두번째 권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새로 2권을 구입해서 보게 되었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1권은 지질도 예전거라 좋지 않고 그랬었는데 이번에 새로 발간된 책인지 두번째 권은 지질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훨씬 좋았다.
1권에서 유대계 미국인 슈피겔만 가족의 어두운 과거들을 우리는 보게 된다. 슈피겔만의 어머니 안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천우신조로 살아 남았지만, 살아 남은 자의 삶의 무게를 이지기 못하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아티의 아버지 역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아들과 여러 면에서 지속적인 충돌로 인해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다.
나치에 의해서 죽음에 이르는 인종차별을 받았던 아티의 아버지 블라덱은 미국에서 흑인들에 대해 심각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아티는 슈피겔만 가족사의 어두운 과거에 날카로운 펜으로 묘사를 하기 시작한다.
1권에서는 폴란드에서 평범한 가정의 청년으로 성장한 블라덱이 아티의 어머니 안나 질버베르크가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지내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유대인인 아티의 가정은 파멸을 맞게 된다. 나치의 해결책을 피해 살던 아티 가족은 결국 수용소로 끌려 들어 가게 되고, 다시 아우슈비츠로 이동하게 되면서 끝을 맺는다.
2권에서는 블라덱이 어떤 식으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살아 남게 되는지를 그리고 있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치열한 투쟁과 그리고 평생 씻지 못할 경험을 가진 부모와 그 밑에서 평범한 중산층 자녀로 자란 아티 슈피겔만의 고뇌와 갈등을 작가는 쥐와 고양이, 돼지 혹은 고래 등의 희화화된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나치와 유대인의 관계에서 표현된 고양이와 쥐의 관계는, 아버지 블라덱과 그의 그늘에서 평생 자라온 아티와의 관계에도 대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들먹이지 않아도, 생존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가에 대해서는 익히 상상이 갔다.
전쟁이 끝난지 어언 60년이 지났건만서도,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영화나 책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중에 슈피겔만의 <쥐>는 만화를 그 통로로 잡은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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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덱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아내와 헤어진다. 다행히 바로 죽음의 가스실로 보내지지는 않았다. 건강을 잘 지킨 덕분이다. 블라덱은 수용소에서 감독에게 뇌물을 먹이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처신한다. 그렇지만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죽어 나갔다. 가스실에 가는 사람들은 샤워하러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샤워실에 들어가면 문이 닫히고 조명이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가스가 새어 들어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가려고 발버둥친 문 바로 옆에 시체가 가장 많이 쌓였다. 엄청난 시체더미였는데 제일 위에 힘 센 사람이 있고 노약자나 아이들은 아래에 깔렸다. 벽을 기어오르다 손가락이 부러지고 거기다 팔이 탈구되어서 몸의 길이만큼 늘어난 것도 있었다. 시체는 갈쿠리로 집어져 승강기에 실어지고 소각로까지 끌어올려졌다. 소각로마다 두 셋씩 집어넣어 소각했다. 아우슈비츠에 갇힌 사람들 대부분은 죽었지만 블라덱은 살아남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강한 의지와 능란한 처세술 덕분이다. 이를테면 수용소 감독에게 영어를 가르쳐 먹을거리를 얻는 것은 물론 가죽으로 된 진짜 신발, 몸에 딱 맞는 옷도 얻는다. 어떤 경우에도 블라덱은 먹을거리를 다 먹지 않고 만약을 대비해 늘 남겨 두었다가 위급할 때 활용했다. 그런가 하면 공장에 제화공이 필요하자 함석장이에서 제화공으로 변신한다. 게슈타포의 장화를 고쳐 주어 신임을 얻은 뒤에 필요한 것을 얻는다. 이렇게 능란한 처세로 살아남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덕을 봤다. 특히 아우슈비츠에서 처음 만난 목사는 낙담하고 있는 블라덱에게 당신은 살아나갈 것이라며 희망을 준다. 블라덱은 목사의 말을 믿고 생의 의욕을 되찾는다. 그러고는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너무 약해서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아내를 만난다. 마침내 소스노비에츠에 이르렀는데, 유태인은 별로 없었지. 거기에 날 아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래서 누군가가 아냐를 찾아왔지. - 블라덱 : 헉. - 아냐 : 브, 블라덱! 그 순간 우리 주의의 모두가 우리와 함께 울었단다. (136쪽) 블라덱과 아내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래서 작가는 1948년에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부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뒤 3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러나 1968년 5월에 어머니가 자살한다. 어머니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자살함으로써 아들은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남편 블라덱 또한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과 죄책감 들을 안고 살아간다. 아우슈비츠의 상처이다. 블라덱은 항상 어떤 형태로는 돈을 절약하고 건강을 보존하는 동작이 습관이 되었다. 아우슈비츠의 경험이 그를 건강 유지와 절약에 몰두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들과의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니 이렇게 아우슈비츠의 상처는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우슈비츠의 상처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상처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작가는 아버지가 말한 친구의 의미를 상기한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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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2의 해설을 읽고 쥐 1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쥐 2의 마지막에 나오는 해설을 읽어보면 작가가 이 만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모습이 잘 들어나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구성에 익숙해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만행에 억압받던 아빠 쥐의 좀 융통성 없는 모습과 아빠 쥐가 억압을 받던 과정을 오버래핑하는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좀 혼란스러웠다.
아버지는 독일의 억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좀 과할 정도의 절약정신이 몸에 베어버렸다. 시종일관 아버지의 오버하는 행동에 짜증이 났지만, 아버지가 수용소에서 겪은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만화를 통해서도 그 어려운 과정을 실감나게 적어낸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해설이나 머릿글에 있는 추천문처럼 엄청난 감동을 전했주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작품성으로 보았을 때 쉰들러리스트 정도의 영화에 버금갈 수는 있다는 생각은 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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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나치에 의한 잔혹한 역사에 관한 이야기도 많고, 책도 많고, 영화도 많습니다. 이 책도 그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숨어다니다가 수용소에 갖혔던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그걸 만화로 옮기는 아들의 이야기. 이 둘의 이야기입니다. 만화인 이 책은 화려한 묘사나 잔혹한 그림이 아닌 간략하게 그린 동물의 모습입니다. 게다가 어딘가 슬픔이나 잔혹한 현실에 대한 분노보다는 지나간 이야기를 들려줄 뿐입니다. 담담한 이야기를 통해서 오히려 현실감을 높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양이인 나치 앞에서 약할 수 밖에 없는 유태인 쥐, 그리고 그와 연관되면서도 같은 시대를 공유하는 폴란드인 돼지. 그런 동물로의 표현은 그 아래 조용히 깔려있는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위험성이나 유태인들의 슬픔이나 그런 것이 아닌 동물들로 표현되지만, 그들의 있었던 이야기로 보는 게 지면에 갇혀있으면서 기억에 남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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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현실적이라서 슬픈 이야기다. 살아남는 것은 계획하는 자도, 준비하는 자도, 행동하는 자도 아닌 운이 좋은 자일 뿐이었다. 모든 것은 단지 운이었고 모든 결과와 과정은 불확실한 느낌에 기반한다. 많은 인종말살정책이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존재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근래에 일어난 나치 독일의 유태인 말살정책과, 집시 말살정책을 기억한다. 가장 계획적이고, 철저하며 광기어리게 진행되었다고 믿는 이 정책은 수많은 슬픔을 낳고 아직도 독일의 원죄로 남아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수많은 유태인은 증언한다. 이렇다고. 저렇다고. 그렇다고.
그리고 이 책은 증언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이랬었다고. 나는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나는 이렇게 살아갔다고. 누구는 이렇게 죽었고. 누구는 이렇게 살았다고. 너무나도 조용히, 담담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말한다. 다만 골목길에서 한번 멈칫했을 뿐인데 살아남았다. 단지 나이가 조금 더 어리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어떤 이유도 절대적이지 않는 그 혼돈의 도가니에서 사람은 대체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모든 기억은 Shoah가 되어버렸다.
단지 사실만 말할 뿐이고. 그는 그 때 자신이 느꼈던 절망감을, 기대감을 말한다. 살아남아서 기쁘다고.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그리고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그는 말한다.
"그리고 다시는 보지 못했다."
이런 냉혹한 동물같은 세계를 살아남은 그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말해줘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절망같은 그 나락에서 과연 사람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결국 우리는 이런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은 보지 못했다."
그래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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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민족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해 온 국민으로서 외국인이나 타 국가의 얼굴색이 다른 이들을 배타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전쟁과 같은 극한의 상황이라면 더할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이념에 따른 타자를 평생을 같이 살아온 ‘이웃’임에도 고발하거나 직접 죽여야 했던 과거사가 있는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그 고통을 동감하는가?
아우슈비츠’로 떠올리는 유태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광기어린 파시즘과 민족주의가 어떤 결말을 가져오는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지금도 세계의 변방에서는 총성과 학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중심의 세계와 막후에서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유태인들에 의해 그네들의 이스라엘 지배를 합리화 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일부의 지적은 별도로 하고서라도 그 규모와 위악성이 오히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전쟁과 식민지배 시대의 학살사건들을 가려버리지 않는가 경계도 해야한다.
수용소 생활과 가스실에 대한 묘사가 과거 유태인 학살에 대한 이미지의 전부이고 이는 대중매체와 미디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컸다. 영화와 책이 대중적으로 전하지 못하는 부분의 전달을 시도하는 만화, <쥐>는 작가의 아버지가 경험했던 전쟁과 수용소생활을 작가의 현실 속에서 그리는 ‘액자식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주관적 가족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효과뿐 아니라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뇌와 현실의 ‘지독한 인간’인 아버지가 그의 과거를 통해서 내면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해를 돕는다.
당시의 유태인을 향한 광기의 근본을 따지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라해도 히틀러의 정치기반이 ‘증오’로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600만의 인원이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인류사의 커다란 비극임이 틀림없다. 이를 받아들이는 오늘의 독일은 당시의 미친 짓에 동의했다는 사실만가지고도 커다란 부끄러움과 용서받지 못할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역사현장과 사료의 보존과 후세에 이어지는 끊임없는 교육으로 다시는 비슷한 일이나 생각이라도 가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래전 방영되었던 <여명의 눈동자>를 기억나게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의 제품과 자동차는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면서 결국 영토와 과거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핏대를 세우며 으르렁 거린다. 그네와 다른 점은 그들의 대부분은 ‘무관심’하지만 우리의 대부분은 ‘오버’한다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이며 약자인 입장으로서 한국을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 부분이다. 예컨대 평상시 일본의 악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일상어, ‘일본 놈들’은 자기위안의 내뱉음에 불과하며 상처 치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좀 더 세밀하고 이성적인 관찰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노력, 그리고 과거사의 면밀한 분석이야 말로 후세로서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위한 자기발전의 한걸음이 되지 않을까.
<쥐>는 그저 ‘아우슈비츠’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엄정한 학살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가 현실을 살아가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당시의 야만이 얼마만큼 지독했는지를 상세하게 그리고 있지는 않는다. 우화된 유대인, 독일인, 폴란드인의 등장은 어쩌면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물캐릭터의 만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동물농장>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당시의 국가적 성향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전쟁을 통해 몸에 익어버린 불안과 공포. 지극히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히스테릭한 감정과 행동을 보이는 아버지.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아버지의 구술과 자료를 바탕으로 그려지는 전쟁과 학살속의 ‘가족’과 ‘이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된다는 당시의 현실이 너무 생경하게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