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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많이 듣고, 영화로도 보아서 내게 익숙한 주제였다. 그래서 안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 낱낱의 참상과 비극을. 내가 안다고 생각한 건 그저 막연히 참혹하고, 잔인하고,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이었다. 쉰들러 리스트 같은 유대인 학살 관련 영화를 볼 때면 항상 충격적이고, 가슴 아프고, 슬펐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잔혹한 풍경에 한동안 숙연해지곤 했다. 그런데 이 책 <소녀의 눈동자>를 읽으면서 영화로 볼 때와는 다른 차원의 아픔이 전해왔다. 영화의 영상에서 시청각적으로 충격적인 압도 감을 짧은 시간 강하게 느꼈다면, 글에서는 그들의 내밀한 고통과 번뇌가 내 가슴을 야금야금 저미는 느낌이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샤나는 감수성 예민한 소녀의 시각으로 때론 담담하게, 때론 냉소적으로, 때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눈 앞에 펼쳐지는 참상을 풀어놓는다. 하나 둘 가족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폭행을 당하고 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처참한 현실을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들려준다. 그 고통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묵묵히 복종하고 견디어 내는 일 뿐. 저항도 분노도 헛된 만용일 뿐이다. 살아야 한다. 살아 남는 것 만이 생존의 이유이다. 샤나는 의아해 한다. 도대체 이런 고통 속에 굳이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대체 신은 존재하는 것인지. 이렇게 분노와 회의로 가득 찬 어린 소녀의 옆에는 다행히 마음을 다독이고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할머니가 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가 어떡하든 살아 남아서 역사의 증인이 될 것을 당부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되니까. 또다시 그런 비극적인 참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니까. 그래야 수많은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또다시 역사는 되풀이 되려 한다. 아리안 족의 우수성에 집착하는 신나치주의가 고개를 들고 유대인들에게 다시 만행을 저지른다. 그 신나치주의자 단체의 한 가운데 힐러리가 있다.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힐러리는 샤나의 영혼과 교감하여 유대인의 참상을 몸소 체험한다.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 육체의 눈을 뜨면서 동시에 세상에 대한 마음의 눈도 새로이 뜬다. 이제 힐러리가 샤나의 뒤를 이어 역사적 증인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비극적인 역사의 되풀이를 막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힘을 보태리라. 이는 다분히 예견된 결말이었고, 가해자가 피해자의 입장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개과천선 한다는 설정은 다분히 작위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교훈적인 소재에 역지사지의 경험을 버무려 매끄럽게 마무리한 점은 너무 산뜻해서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작가의 시도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와 닿아서 그런가 보다. 완벽에의 충동에 대한 거부감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귓가에 울리는 듯 생생하게 전해오는 주인공 내면의 절규와 인간과 신에 대한 철학적 성찰들이 주는 숙연함이 감동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탄탄한 구성력은 이야기의 흡인력을 높여주는 요소로 나무랄 데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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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속 소녀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다. 흑백사진 위로 금발의 소녀가 나를 쳐다보며 뭔가 물어온다. 당신은 아느냐고? 1939와 “기억하라 ,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소녀의 눈동자>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량학살)를 다룬 책이다. 홀로코스트는 영화로, 안네의 일기로 이미 접한 바 있지만 한 소녀의 눈으로 지켜 본 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나치의 행각들은 너무 생생해서, 유대인들의 고통이 너무 깊어서... 때로는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 싶을 만큼 그들의 아픔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책을 읽는 내내 떨쳐버릴 수 없었던 생각은 어쩌면 그렇게 끔찍하게 사람이 사람을 학대할 수 있는지 나치의 잔인함에 놀랐고, 생존을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유대인의 인간정신에 놀랐다. 인간의 잔혹함과 그를 이겨내는 위대한 인간정신! 그 양면을 다 보여주는 책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쓴 것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는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고자 함이다. 신나치주의의 부활은 또 다른 희생을 예견한다. 무서운 것은 전쟁을 경험하지 세대들이다. 자칫 전체주의의 묘한 중독에 빠져서 인간이 하지 말아야 일들도 서슴치 않는 그들에게 수많은 희생자들의 죽음을 바로 알려 줄 필요가 있다. 유대민족의 수난사, 1939년 시작된 나치의 유대인 격리, 학살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나치가 아리아인의 순수혈통을 자랑하고 유대인의 존재를 거부했던 것처럼 우리도 단일민족이란 혈통주의에 빠져서 함께 해야 할 우리의 이웃을 배척하고 있지는 않는지, 일제 수탈이란 힘든 시기를 넘긴 민족으로서 타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연장선에서 우리가, 우리 아이가 알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간 정신은 위대하기도 하지만 무척 약하기도 하다. 얼마 전에 읽은 “파도”라는 책이 생각난다. 현 미국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일어났던 신나치주의의 부활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교묘하게 역동적으로 이루어졌다. 교사의 의도로 시작된 실험은 어느 순간 교사의 손을 벗어나 역사실험은 걷잡을 수 없는 거센 파도마냥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집단의 이기를 공포스럽게 학교와 학생을 위협하던 실험이었다. 개인의 의사는 무시되고 전체의 의견, 국가의 이익만 중시되는 전체주의가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다니 불가능해. 책에서나 가능하지라고 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도 방심하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소녀의 눈동자로 돌아오면 나치당의 히틀러가 불안에 떠는 국민을 선동하여 정권을 잡고, 일당 독재 체제의 강력한 통제 국가를 수립하여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맹목적으로 강요하는 인종주의를 내세우며 유대인을 대량 학살할 때 다수 독일인을 침묵하게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이 책은 아닌 줄 알면서도 침묵하는 다수에게 침묵하지 말라고 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으라 한다. 누군가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의 부활을 꿈꾸며 망각의 늪에서 언제 다시 살아날지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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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82페이지, 22줄, 28자.
시점이 둘입니다. 미국의 힐러리 버크와 폴란드의 샤나 샤이에비취. 힐러리는 신나치주의자이고 샤나는 2차 세계대전 때의 유대인 수용자입니다. 힐러리는 브래드와 함께 시몬이라는 유대인 소년을 납치 폭행한 뒤 달아나다 오토바이 사고로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샤나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야기는 불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결국 샤나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힐러러가 엄마와 화해하는 것이 병행됩니다. 원제는 '내가 깨어나기 전에 죽는다면?'인데 브래드가 유대인 병원에 불을 지름으로써 힐러리도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때 엄마-옛날 어렸을 때 자신을 방치하고 사흘이나 집을 비우기도 했던 그 엄마-가 불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피신하지 않고 병상에 누워있는 힐러리 곁을 지키는 것으로 엄마의 (현재에서의) 진심을 알게 됩니다.
본문에서 할머니란 표현이 뒤섞여 사용되기 때문에 친할머니(또는 외할머니?)와 샤나의 현신이 헷갈리기도 합니다.
120210-120210/120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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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것을 뺏겼지만,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은 우리가 내주지 않는 한,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
절대 그들이 뺏어갈 수 없다.
줄거리 。。。。。。。
우리나라로 치면 ‘전사모(전두환을 사랑하는 모임)’쯤 될까? 독일에도 비슷한 단체가 있다. ‘신 나치주의(Neo-Nazism)’가 그것이다. 히틀러의 나치정권을 찬양하고, 그 신조를 오늘날에 다시 되살리려는 시대착오적 집단. 유럽이나 미국 쪽에서는 실제로 유대인들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린치, 방화를 비롯한 각종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니, 어지간히 정신에 문제가 있는 놈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힐러리는 바로 그런 신 나치주의 집단에 얼마 전 가입한 소녀다. 사실 뭐 투철한 계급의식이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에 들어간 건 아니었다. 어머니에 대한 반항감으로 인해 밖으로만 돌다가, 브래드라는 역시 약간 불량기 있는 철없는 남자를 만나 빠졌고, 그로 인해 가입하게 된 것이다. 오토바이 뒤에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데서 자유를 느끼고, 브래드와 함께 일탈행위를 하는데서 기쁨을 얻게 된 힐러리. 어느날 일어난 오토바이 사고는 힐러리를 의식불명의 상태로 이끈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하게 된 힐러리. 자신의 의식은 분명히 있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의식이 깨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힐러리는 알 수 없는 꿈에 계속 빠져든다. 꿈 속에서 힐러리는 샤나라는 이름의 폴란드 계 유대인 소녀로 변한다. 시대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샤나와 그의 가족은 갖은 고통과 핍박을 받게 되고, 자신이 이유 없이 증오하던 유대인이 된 힐러리는 이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는다.
감상평 。。。。。。。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을 배경으로 한 유대인들의 고통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전에 읽었던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이라는 책과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점은 주인공의 성별쯤?
물론 두 책에서 좀 더 다른 점도 있었다. 『운명』에서 주인공은 고통이라는 상황 자체가 가져다주는 정화(淨化)라는 주제를 심도 있게 살피고 있는 반면, 『소녀의 눈동자』의 주인공에게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고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말 그대로 불필요한 것에 불과하다.(p. 260) 이 책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부여하는 근거 없는 폭력과 강제를 통해, 반어적으로 인간의 숭고한 가치를 강조하는 듯 하다.
이런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저자는 샤나의 경험을 매우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만약 내가 『운명』을 읽지 않고 이 책을 봤다면 이 책의 이런 부분에 높은 점수를 주었겠지만, 사실 상황에 대한 묘사만 보자면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운명』이 좀 더 깊은 사색과 고민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책에 담긴 실감나는 묘사는 나치의 반인륜적인 만행을 널리 알리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이 책의 구성이다. 저자는 힐러리와 샤나라는 두 인물의 교차를 통해 무엇인가 효과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둘 사이의 유사점이란 소녀라는 점만 빼면 거의 없다. 물론 힐러리가 유대인 소년 하나를 괴롭히고, 꿈 속의 샤나가 유대인이 되었다는 점도 유사점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단지 그것뿐, 내용상의 연결점은 별로 없다. 힐러리와 샤나의 상황 역시 매우 다르다. 힐러리의 문제는 어머니와의 의사소통의 부재이고, 샤나의 문제는 나치에 의한 이유 없는 고난이다. 굳이 이런 구성을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하나, 책의 곳곳에 적어 둔 성경 구절들은 내용 전개에 그다지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굳이 그런 식의 인용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각 구절들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들이미는 것은 구성상 좋은 방법은 아닌 듯 싶다.
주제나 묘사는 좋지만, 구성이 아쉬운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