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유명한 카프카의 <변신>을 이제야 완독하다니... 스스로에게 내린 부담에 감사한다. 처음엔 정말 우울했고 다음엔 슬펐고 지금은 과연 '존재한다'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회의중이다. 박환덕의 평을 인용하자면, "카프카는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쓰고 있다" "카프카의 과제는 어떻게 해서 이 사회에 소속할 것인가에 있다. 사회에 소속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법>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법이란 때로는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나, 단지 도덕이나 법률만에 한하지 않고, 도리어 <사회>에서 통용되는 생활 방법의 여러가지 약속이나 생활의 체계를 가리킨다. 이 법에 복종하지 않으면 절대로 사회에 소속될 수 없다. 아니, 소속이 허락되지 않을 뿐더러, 죄인으로서 <개처럼> 세계로부터 추방된다." 그레고르는 분명 살아있었으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감은 그가 직업을 갖고 일을 하고 돈을 벌어올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벌레가 아니라 동물로 변하거나, 단지 앓아 누웠다고만 해서 달랐을까? 집에 치매걸린 부모가 있다고 해보자. 전과 달리 '변신'했을뿐 그는 여전히 살아있으며 나의 부모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때때로 내 얼굴까지 몰라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해대고 변으로 방을 장식하는 지경이라면, 과연 부모를 '벌레'로 여기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카프카는 돈을 버는 데 있어서의 존재를 많이 생각한다. 거기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조금 다른 성격이지만 일단은 공감을 하기로 한다. 이 작품에서는 시종일관 생계를 이어나갈 생각으로 가득하다.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도 마찬가지이고 가족들도 모두 그 걱정 뿐이다. 그리고 그 걱정이 어느정도 해소되자 안정을 찾는다. 어린딸 그레테를 보며 노부부는 새로운 그레고리(돈을 벌어다줄 사람)를 보는 듯 흐뭇해한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존재란 '사회에 속한다'를 의미하며, 사회에 속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일원으로 열심히 직업활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더이상 돈을 벌 수 없는 그레고르는 존재가치가 없다. 오히려 건전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벌레'같은 존재인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면 자신을 벌레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지 평범하게 살아온 나로선 상상하기 어렵다. 어쩌면 '개미'같이 일만 한다고 생각하다가 더 나쁜 벌레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슬퍼진 것은 직업을 떠나서, 생물적인 존재와 이성적인 (혹은 감성적인) 존재의 구별이었다. 사실 너무 진부한 문제다. 식물인간을 죽이냐 살리냐는 아직도 해답이 없으니까. 조심스럽고 냉정하게 말하건대 남은 가족의 안녕을 위해 그가 적당히 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생길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직업(돈을 버는 행위)을 중시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인다. 현대 작가들이 직업 외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것에 비해서...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생활의 70%이상을 차지하는 직업을 제쳐두고 다른 데서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로 여겨진다. 도무지 무슨 수단으로 돈을 벌어서 이토록 소비하는지 알 수 없는 요즘 주인공들에 비해 카프카의 등장인물들은 슬플만큼 구체적이다. 난 오히려 염상섭이 생각난다. 가난하고 가난해서 작품내에 정확한 금액이 나오곤 했던..(부자집 아들 김동인은 물가에 전혀 둔감했다)개처럼>사회>법>거기에>거기에>변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