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지난 문학상 수상작품집들이 좀 싸다. 그래서 싼맛에 사봤다. 그렇지만, 공지영이기 때문에 한번 골라본 의도도 없지 않다. 내가 그의 작품으로 읽어본 것이라곤, 유명한 '무소...'랑 '인간에 대한 예의(단편집)'이다. 다른 자리에서 한두개 단편을 읽어봤을 것도 같긴 하지만, 역시나 유명하다는 '고등어'나 '착한여자'는 안봤다. 기회가 없었던게 아니라 안봤다는데 방점을 찍는다. 그의 작품들에서 생각이 나는 인물은, 이상하게도 '무소...'의 선우라는 인물이다. 주인공 3인방은 대강의 성격만 떠오르고, 이름은 깜깜한데 반해, 주 화자의 남자친구였던 선우라는 인간상만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여성을 가장 잘 배려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인물이면서도, 결과적으로(본질적으로???) 여성과 남성이라는 경계를 넘어서지는 못하는, 넘지 못하는 상황에 사로잡혀버리는 인물 말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지금까지도 연애를 하는데 있어 겪게 되는 다양한 어려움이 인격화되어 기억되는 하나의 상징과 같은 캐릭터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작품들을 왜 피했는가? 공지영 하면 떠오르는 작가는 최영미다. 그래, 잔치 끝난 서른을 읖조렸던 시인. 당시의 불만은, 잔치가 뭔지 맛도 멋도 소리도 몰랐던 나에게 그따위 선언을 고집스럽게 던지려는 그 태도가 싫었던 거였다. 거기에 선우로 상징되는 것 같은 남녀간의 극복불가한 단절을 선명하게 제시한 것도 거슬렸고 말이다. 그들의 문제의식이 싫었거나 틀렸다는 얘기라기 보다는, 그 직설이 불편했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피한 이유는, '독백'으로 점철되버리는 그들의 문체에 대한 염증때문이었다. 한국 작가의 소설에 대한 평을 쓸때, 특히 젊은 작가의 작품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야기가 '사소설' 형식에 대한 거부감이다. 굳이 베스트 셀러인 신경숙이나 은희경 같은 이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공지영이나 최영미(그가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에서부터 반복되는 독백체가 진저리가 났다. 공교롭게도 다 여성이긴 하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니다. 작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류의 소설도 싫었고,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 (박상우던가?) 같은 것도 싫다. 아마 이 작가들은 남자일꺼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공지영과 최영미를 같이 논하는 이유는, 그들 작품에 들어가있는 어느정도의 공통된 정서때문만은 아니다. 전부는 물론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공지영의 작품과 같은 소설의 독백부분을 문장문장 끊어서 새로운 줄로 옮겨놓고, 적당히 엔터키를 치면, 최영미의 시가 된다. 글자 몇개 제거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최영미의 시를 문장 끝머리마다 삭제키를 누르고, 주어나 수식어들 몇개만 덧붙이면 아주 짧은 단편이 될 것도 같다. 형식의 파괴라는 식의 긍정적 실험이라고 받아들일 문제는 아니다. 가끔씩 한두번의 시도로 이러한 글쓰기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겠으나, 그렇게 점철되는 작품들, 그리고 시대적 흐름들은 정말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 내가 성석제에 대해서 열광을 하고, 문장 구성은 부족해 보이지만 그래도 언어를 새롭게 발굴하려는 김소진을 높이 평가하고(그래서 그의 부재가 더 안타깝다. 더 숙성될 수 있는 작가였는데 말이다... ), 박완서나 최인훈, 현기영 등의 작품에서 안정감과 오히려 실험성을 발견하는 이유도 그들의 어쩌면 고전적인 스타일이 오히려 도약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문체의 문제만은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하지만 여전히 만연하고 있는 사소설류의 작품들은 스타일에만 치중한 나머지 구조가 정말로 억지로 짜마춰진 것 같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래알 씹는 느낌으로 읽히게 된다. 거기에 최악인건... 뭐 대단한 시대정신을 반영한답시고 운동권 이야기를 데카당트하게 풀어놓는 작품들, 혹은 아웃사이더의 일탈을 새로운 것인양 내세우는 것이다. 무라카미 류의 아류라고도 하기 민망할 정도의 작품들이 쌔고 쌨다.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김별아, 은미희, 채대일의 작품은 이런식에서의 최악의 작품들이다. 세상에 일국의 소설가 협회에서 수상하는 상의 최종심사에 이따위가 올라 있다니! 한창훈이나 김경해의 작품은 나름대로 탄탄한 사소설이라 하겠다. 별로 맘에는 안들지만. 백민석은... 그래도 실험성을 좀 인정할만했다. 공선옥은... 탄탄한 사실주의 소설을 이어가는 것 같아서, 가장 진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정도의 평을 내릴 수 있겠다. 문제는 이 두 작품 모두 재미는 별로 없다. 심사평에서 마지막에 올라간 두 작품이 공지영과 하성란의 작품이었다고 하는데, 하성란의 작품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소설 적인게 한계다. 말하여 지지 않는 것, 보여지지 않은 것의 미학이라는 평이 덧붙여져 있고, 인정될만 하긴 하지만, 주제를 내세우기 위해 보여지는 스타일이 사소설적이라는 건, 역시 한계다. 가장 짜증나던 문장을 하나 소개하자면, 채대일의 작품에 나온 이런 표현이다. "뜻하지 않는 잠언적 문구들이 가을 끝자락에 묻어 오는 바람을 따라 두서없이 떠오르자, 소름이 게구멍 주위의 모래톱처럼 솟아올랐다." 제기랄! 이 문장을 보고 떠올랐던 장면들을 열거해보면, 최근에 본 미스터 초밥왕에서 심사위원들이 맛난 초밥을 먹고 짓던 경이로운 표정들 - 전형적인 것!, 이누야샤에서 주인공이 칼을 들고 '바람의 상처!'를 외치는 장면, 불의 검에서 기억을 잃은 남자주인공을 생각하면서 여자주인공이 짓던 그렁그렁한 눈물표정, 몬스터에서의 덴마의 긴장과 놀람의 표정, 요한의 냉소적인 웃음 등등등... 물론 맛갈스러운 묘사가 동반된 감정표현이 유용하고 필요할 때도 있지만, 세상에 과거의 쓰린 추억이 떠올라 끼치는 소름을 표현할때 게구멍 주위의 모래톱이 뭐더라... 하는 생각을 유도할 정도로 오버할 필요가 있나? 이게 비디오 세대 문학의 특성인가? 최인훈의 소설, 특히 최근에 읽은 구보씨 이야기를 보면 대화를 통해서 각 인물들의 심리흐름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게 하는 면에서 감탄이 든다. 극본이나 시나리오와는 다른 소설속 대화의 강점이란 말이다. 사소설의 독백이 짜증나는 이유는, 그런식의 글쓰기가 읽는 이의 상상력을 너무나도 옭아매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주인공이 슬프거나 기쁘다는데, 마치 어느어느 것처럼 기쁘고 슬픈지 1일칭의 시점에서 '나는 어떠하다'라고 선언해 버리고 마니, 감정이입도 방해가 되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도 어려워진다. 그러다보니 짜증이 나게 되고, 언급한대로 주제의식이나 플롯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이런 지지리 궁상!'이라는 생각만 들게 된다. 이야기의 기본 틀만 고민하고, 그 전개를 위한 살붙이기를 문체로만 커버하려는 소설은 정말 이제 그만 나왔음 좋겠다. 그/런/데... 문제는 공지영이었다. 부활무렵과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예전의 작품들에 대한 기억이 가물해서 그런지, 상당히 괜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조건 주인공의 생각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그게 내가 싫어하는 사소설적인 것은 아니니깐. 앞으로의 그의 작품을 기대해볼만 하겠다. |
| 한국의 소설가들이 주는 문학상라서 그런지 내용들이 너무 좋았다. 어떤 책은 책 값이 아까운 생각도 드는데 '부활 무렵'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공지영 님의 작품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편집도 출판사에서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 엿보였다. 27회를 맞는다는 '한국소설문학상'이 연륜을 느끼게 했다. 공지영 작가의 특유 문체가 읽는 재미를 주고, 읽다보니 어느새 점심을 놓쳐버린... 모처럼만에 독서의 재미에 빠지게 한 책이었다. <부활 무렵="">은 가진자들에 대한 서민들의 심리를 다루고 있는데, 파출부로 나가는 주인집 여자와 주인공과의 거짓 화해를 통해 우리의 거짓된 일상의 하루를 고발하고 있다. 특히 가진자들의 허위성이 가차없이 드러나는 작품이다.부활> |
| 여러 작가의 단편집을 읽는다는것은 즐거운것 같아요.짧지만 그래서 한권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담을수 있어 좋거든요.그리고 작가마다 개성적인 글로 읽는동안 심심하지 않게 하는것 같습니다. 부활무렵 가난이 죄많은 사람으로 만드네요. 사람의 실수를 약점으로 이용해 종교적으로 이용하려는 주인여자와 목사님의 행태를 보면서 올바르게 사는게 참 힘들구나..하고 느꼈습니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정말 엽기에 가까운 단편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나는것을 보니 제발 이제 고만하시지..하고 싶더군요. 먼곳에서 온사람 산사람과 바다사람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졌지만 그래도 그들은 계속 사랑을 할거예요. 저 푸른 초원위에 행복을 꿈꿔왔던 가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픈 아이로 인해 그 꿈이 깨어지고 사라진 아이로 인해 산산조각 났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웃고 있네요. 첫사랑 첫사랑의 상처가 너무 지독하네요. 젊어서 아름답지만 젊어서 슬픈 젊어서 괴로운 시절입니다. 정처 없는 이 발길 자신이 오래도록 살던 곳이 사라진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수몰로 인해 고향을 잃을 아니 그것보다 자신의 거처를 잃어버린 노부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쏴합니다. 믿거나말거나박물지 둘 솔직히 이 단편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지 제목도 아리송하고...둘다 자신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인가?? 때론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읽는 재미를 빼앗아가네요. 새벽이 온다. 예전에 읽었던 단편인데, 지금 다시 읽어도 열이 받긴해요. 아마도 제가 경민의 아내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너무 세상은 불공평하는 생각이 들어요. 1999년, 카사블랑카 추억은 아름답기만 한것은 아닌가 봅니다. 엇갈린 운명 그리고 한방관자의 이야기. 내 무덤 속으로 너무나 강렬한 욕망은 때론 천박함으로 포장되어버립니다. 자신에게 좀더 솔직하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지 모르는데 말이지요. 그래서인지 무덤속으로 들어감이 무척 답답하고 힘들군요. |
| 대상을 받은 공지영의 소설과, 그와 경합을 벌였다는 또 하나의 소설을 우선 읽어보았고, 역시 공지영의 소설이 좀더 리얼하게 와닿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소설은 기층민들의 현재 상황, 즉 왜 그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책임을 주로 외부의 탓으로 돌리고, 부유층에 대해서는 그들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다루지 않는 한계가 있다고 느껴졌지만 소설 자체를 다루는 솜씨는 갈수록 흥미로워지는 것 같았다. 청승이 줄고 풍자의 날이 더 예리해졌달까. 남의 생기를 빨아먹어가며 목숨에의 집착을 보이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정말 섬뜩하리만치 끈적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 판타지의 형식을 빈 우화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말로 그런 할머니가 있는 것만 같은 섬뜩함이 절절히 느껴졌달까. 표제작보다도 오히려 그녀의 두 번째 단편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가 더욱 생생하고 좋았다.할머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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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곤혹스럽다고나 해야할지. 참 모르겠다. 어떤 소설이 과연 잘 쓴 것이고, 어떤 글이 잘 못 쓴 것인지의 경계 말이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읽어서 가슴에 와 닿았다면 그것으로 그 작품이 내게는 잘 된 작품이라고 마음 정하기로... 여기서 평론가의 평은 끼워넣지 않기로 했다. 다른 독자의 감동도 끼워넣지 않기로 했다. 그네들도 각기 다른 기준을 가졌을 지도 모를 것이므로. 그러나 이건 인정하기로 했다. 아무리 개인적 취향이 다를 지언정 대다수에게 같은 감동 같은 공감을 일으키는 작품이 있을 터, 그것을 가늠할 잣대는 분명 있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역사가 켜켜이 쌓여도 여전히 꼭대기에 머물러 읽혀지고 있는 책이 확실히 있으므로.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품집이기에, 게다가 27 년이란 역사를 가진 문학상이기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구입을 했었다.
한국소설의 현주소를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잘 모르겠다. 여기에 추천된 작품들이 얼마 만큼의 완성도를 가졌는지, 또 얼마 만큼의 재량을 아낌없이 발휘했는지 말이다. 너무도 외람되게도 난 조금 실망했다. 뭐랄까, 치열함이 느껴지지 않았다랄까, 그냥 시간에 쫓겨서 허겁지겁 원고지를 메우고, 개인적인 감상에 문학이란 옷을 입힌 것 같은 가벼움이 떠돌고, 너무도 얇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답답하게 다가오고, 영혼을 깊이 들여다보는 통찰이 느껴지지 않았단 말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갈증, 한국에도 정말 세계적인 작가가 나왔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목마르게 했다. 무언가 소설가들이 진정한 소설을 잉태하고 출산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마음껏 고민할 수 있도록 압박하는 외적인 요건을 없애 주고, 충분히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할 수 있도록 풍부한 경제력을 주고... 그런 양지 바른 바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
그렇다고 여기에 실린 모든 글에서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기대한 만큼이 아니라는 것 뿐이다. 솔직히 나는 공지영님의 '부활 무렵'보다는 약간 애매한 억지의 구석이 있지만 하성란님의 '저 푸른 초원 위에'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먼 곳에서 온 사람'의 한창훈님의 소설을 신선하게 보았다. 자연이 인간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합일되어 있는 충만함이랄까, 여지껏 그런 감동을 준 소설은 보지 못한 듯 싶다. 마음 속에 담고 있는 풍경을 이렇다하게 마땅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의 갑갑함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탁월한 표현력도 존경스러웠다. 공선옥님의 '정처없는 이 발길'도 좋았다. 김동인님의 소설을 보는 듯한 감회를 맛보게 해 주었다. 은미희님의 '새벽이 온다'도 인생의 질곡을 하룻밤의 불면으로 잘 표현해 준 작품이다.
다음 해를 기대해 본다. 열심히 살아내고, 끝까지 희망을 담고 사는 우리네 모습들이 소설가의 손길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기를... [인상깊은구절] 두 번째 봉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서 올라갔어요. 역시 큰 산은 달랐어요. 낮은 야산이나 집 뒤에 있는 숲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어요. 없어져 버린 길이 소나무 숲에서 다시 나오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 깊은 계곡이 있기도 했어요. 계곡의 바위를 껴안고 있는 이끼도 짙고 두터웠고 나무도 훨씬 크고 약초의 종류도 못 보던 것들이었어요. 구석구석에 피어 있는 파랗고 노란 꽃들. 처음 들어 보는 새소리. 그 사이를 잔잔히 흐르는 바람. 바람따라 떠도는 푸른 빛깔의 이내. 계곡에서 피어올랐다가 그 나뭇가지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고 떠있는 물안개들. 난 가슴이 벅찼어요. 진짜 산의 모습을 본 거예요. 좋아하는 대상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아주 기쁜 일이예요. 피곤했지만 아주 즐거운 길이었죠. |
| 수상작과 수상작가 대표작에 대해서만 개인적인 감상을 몇마디 적어보련다. 수상작인 <부활무렵>은 부유한 집 파출부를 하는 자매, 그 중 동생이 주인집의 핸드백을 훔치면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이래저래 애달픈 서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부활무렵'이므로 핸드백을 훔친 동생에게 주인은 '부활'의 기회를 주지만 그것은 가진자의 허세적인 종교적 관용일뿐, 자매에 대한 무시와 강압에 지나지 않는다. 평론에서 말하듯 '거짓화해'를 하는 것 뿐이다. 곤혹스러운 거짓화해의 의식(부활간증)을 마친 주인공은 알에서 힘겹게 나오려는 병아리를 보며 '조그맣고 약해도 한번 살게만 해준다면'좋다는 어쩌면 약자이기때문에 더 억척스러운 삶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을, '부활의지'를 보여준다.(주인집에 대해 고마워하거나 그러는건 아니다;;) '부활'과 서민자매라는 소재를 통해 여러가지 부조리와 애환을 무리없이 그리고 있다. 그러나 치밀한 서사와 묘사대신 작가가 많이 개입된것 같은 진술위주의 전개방식, 약간은 평면적이고 상투적인 주제와 인물및 설정은 뭔가 밀도가 낮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은 단점이 느껴졌지만 나는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더 재밌게 읽었다. 오히려 더 진부한 면도 있었지만 기괴한 상황과 섬뜩함이 흥미진진했다. 결말부가 평이하긴 했지만. 단점이라고 말한 부분도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 있는 개인적 감상이었다.할머니는>부활무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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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죽는 거보담 조그맣게 약한 게 나은 거야."
"한번 살게만 해주면 어떻게든 사는 거거든. 한번 살게만 해준다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말을 얼마나 많이 할까? 아니면 이런 말을 않고 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들을 할까?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지영의 '부활 무렵'을 읽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읽은 지가 좀 지난 지금 조차 섬득함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납량물 드라마를 한편 정도 본 느낌이었다. 이책의 글들이 나에게는 다 괜찮았던 것 같다. 단편 소설들을 묶어 놓은 책들은 중간중간 맘에 안 드는 내용들이 있어서 책을 읽다 손 놓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나와 책 읽기 스타일이 비슷한 분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일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엄마 병아리가 힘든가봐. 이렇게 조그만 게... 엄마 불쌍해." 딸이 소리쳤다. "괜찮아, 죽는 거보담 조그맣게 약한 게 나은 거야." 부드럽게 딸을 안심시키면서 순례는 끌리듯 베란다로 한걸음 걸어나갔다. 별은 없고 신도시의 휘황한 불빛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순례는 그 불빛과 마주선 채로 혼자 중얼거렸다. "한번 살게만 해주면 어떻게든 사는 거거든. 한번 살게만 해준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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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참 고단한 노릇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었고, 살아있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닌 것처럼,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조차 사치일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사람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사람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역시 고단한 사람 중의 하나이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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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가장 재미도 있고 짜임새도 있어 눈에 띄는 작품은 공지영의 대표작이라는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이다. 아주 특이한 분위기의 소설로 악의 화신인 할머니에 의하여 몰락해 가는 한 가정을 그리고 있는데 화자가 고등학생인 그 손녀라는 것도 특이하고 젊어서 새끼 낳은 어미 고양이를 잡아 먹었다는 할머니가 그 화신처럼 주술적인 분위기로 강한 악이 약한 선을 이기는 모습은 도저히 뿌리 뽑히지 않는 우리 사회의 그늘을 보는 듯 하여 섬뜩한 느낌도 준다. 글 끝에 코리아닷컴의 메일 주소를 넣어 손녀가 인터넷의 어느 게시판에 올린 글이 바로 이 소설이라는 여운을 남긴 것도 유쾌하였다.
수상작인 공지영의 소설과 경쟁작인 하성란의 소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공지영의 '부활 무렵'은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초기 계몽 소설 수준을 못 벗어난 분위기의 소설. 잘 모르는 세계를 선입견과 유치한 상상력으로 만들었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 줄거리와 동화같은 결론. 하성란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두 소설을 비교해 읽으면서 거의 같은 수준으로 하향평준화 된 두 소설 가운데 공지영이 선택 되고 하성란이 선택되지 못 한 이유는 심사평처럼 완성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완성도가 무엇을 뜻하는 얘기인가 하고 한동안 생각을 했는데 하성란이 못 해낸 것은 결론을 제대로 못 맺고 하다 만 얘기 같은 느낌을 풍긴다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누나라고 말하는 여자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했다는 것이 그리하여 아들이 없어진 부분이 좀 석연찮게 처리되어 마무리를 제대로 못 한 것이 완성도를 떨어뜨린 것이다. 소설의 완성도라는 것이 이 정도 선에서 논의 되는 것이 한국 소설이 현재 서 있는 자리라니.
수상을 하지 못 한 다른 후보작들을 보면서 한국 소설의 다양한 얼굴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한창훈의 '먼 곳에서 온 사람'이 형식에서 신선했고, 백민석의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둘'은 주인공의 가상현실 체험을 통해 우울한 우리의 현실을 읽어내는 발상이 특이했다. 김별아가 연민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채대일이 바라는 희망들, 이렇게 다양한 작품들을 한꺼번에 읽는 즐거움이 아마도 이런 작품집의 값어치가 아닌가 한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불길함을 느끼고 있다. 이 집에 들어서는 어떤 것들도 그 생명을 내놓기 전에는 이 집을 빠져 나가지 못 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큰외삼촌과 막내외숙모 그리고 여동생과 나.....우리들의 현존 자체가 할머니의 죽음을 가로막고 있다. 어른들과는 달리 우리가 할머니에게 호의적이지 않다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래층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 소리는 죽지도 않는 할머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를 따라 죽지도 살지도 못 하는 자기 자신들의 처지를 슬프고 처량하게 들렸다. |
| 수상작인 부활무렵보다 오히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가 더 눈길을 끈다. 공지영은 흔히 페미니즘 계열 소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착한 여자 등..-을 주로 쓰거나 386세대의 운동 뒷담을 늘어놓는 작가로 인식되곤 한다. 386 얘기는 그렇다치더라도, 공지영의 소위 여성 소설을 오히려 페미니즘을 공부했다는 나로서는 전혀 좋아할 수 없었는데.. (공지영의 여성 문제 의식이 약했다기보다는 좀 늘어지는 구성이나 문장이 소설적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지나친 감정 과잉으로, 왠지 떼 쓰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사실 문제의식이라는 것도 치열함이 덜하긴 했다) 이 소설을 읽고 공지영의 새로운 면모를 다시 보게 되었다면 과장일까. 매우 인상적인 '단편'이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한 단면을 생선 뱃가죽을 들어내듯 거침 없이 들어내 보여준, 단편이 가져야 할 묘미를 제대로 갖춘 작품이라고 감히 평가하는 바이다.(약간 군더더기 같은 설명을 삭제하고 그림 그리듯 그냥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고 썼다면 더 극적이었을 것 같지만.. ) 제목처럼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할머니라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퀴퀴한 할머니를 떠올리면 안된다. 이 할머니는 괴기스러우면서 동시에 섹시하다. 그리고 대단히 사악하기도 하다. 재벌회장들은 일년에 한 번 젊은 남자의 피를 수혈받는다고 하던데,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인간형이다. 자기보다 약한 자를 짓밟고 일어나 생을 쟁취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어미 고양이를 삶아 먹는 일화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된다. 공지영. 매너리즘 탈출인가...할머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