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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에 꽂히면 몰아치는 병이 또 도졌습니다. 볼쇼이의 바야데르 영상을 보고 나서 개인적인 바야데르 사이클을 시작하고 말았어요. 바로 앞의 포스트에선 자하로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고 적었습니다만, 볼쇼이 영상을 보고 나니 예전 라 스칼라에서 볼레와 공연했던 영상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복습 좀 했습니다. 전엔 뭐가 이렇게 번쩍거린담, 그러고 별 생각 없이 봤었는데, HD 화질의 최신 영상 보고 나니 오래된 디비디 화질이 구리긴 구리더라고요. 라 스칼라는 로열, 함부르크와 함께 마카로바 버전 바야데르를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발레단이지요. 사실 국립의 바야데르 공연 소식을 들었을 때 유비씨가 망령들의 왕국에서 끝맺는 러시아 버전을 올리고 있으니 기왕이면 복원 버전이길 소망했는데 말이죠. 발레단마다 또 공연을 올릴 때마다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확연히 다른 버전 두 가지를 나란히 보니 나름 비교하는 재미가 있더군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무대세트와 의상은 일단 볼쇼이 쪽이 뛰어납니다. 제 블로그까지 검색해서 들어오시는 분들은 작품에 대해선 이미 잘 아실 듯해서 지난번 포스트에선 생략했는데, 그래도 혹시 더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 참조하시고요. ![]() 로열도 그렇고 라 스칼라 버전도 사원이 붕괴되는 결말로 이야기는 늘어났지만 망령들의 왕국에서 끝나는 버전에 비해 공연 시간은 짧아졌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볼쇼이 영상이나 파리오페라 영상이 두 시간 반 정도 되는 데 비해 이 버전은 두 시간을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당연히 빠진 장면들이 많고 흐름도 더 빠릅니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노예들의 춤이나, 결혼하게 된 감자티의 앞날을 축원하는 니키야의 춤, 그리고 결혼식 장면이 망령들의 왕국 다음으로 배치되면서 결혼피로연이 된 왕실 잔치에서도 몇 가지 디베르티스망이 생략되었습니다. 춤 위주로 발레를 보시는 분들은 좀 서운한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네요. 무대와 의상이 볼쇼이 쪽이 낫다고 했지만 군무도 볼쇼이 앞에 명함을 내밀 수준은 아닙니다. 영상 속 볼쇼이의 군무도 볼쇼이라는 이름을 생각한다면 썩 훌륭한 편은 아니고, 이사벨 게렝이 주역을 맡았던 오래된 영상물이나 최신 실황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오렐리 듀퐁의 영상에서 볼 수 있는 파리오페라의 군무 역시 백조의 그것보다는 실망스럽죠. 물론 라 스칼라도 역량 있는 발레단이고 좋은 레퍼토리들이 많지만 군무는 좀 지루합니다. 각잡힌 칼군무는 뭐니뭐니해도 역시 마린스키가 갑이지요. 바야데르의 군무는 32명의 무용수가 한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극악의 난이도를 지녔음에도 백조나 지젤만큼 사랑받는 장면은 아니어서 발레단 입장에선 무용수들과 관객들의 작품을 대하는 온도차가 아쉬울 법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3대 발레블랑이라는 세 작품의 군무를 비교해보면 바야데르가 가장 스케일은 크지만 가장 덜 매력적인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그 온도차를 줄이긴 어려울 것 같아요. 제가 자주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의 긴 에필로그나 다름없는 지젤의 2막은 스토리텔링이 없는 대신 알브레히트의 목숨을 노리는 서슬 퍼런 미르타와 윌리들이 그를 구하려는 지젤과 대립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내죠. 백조는 그런 긴장감은 없지만 2막의 아다지오나 4막의 군무가 다른 분위기를 내는 것처럼 오데트의 감정선에 맞춰 군무가 움직이는 일체감이 있고요. 반면 바야데르의 군무는 스케일은 큰데 감정은 고요하지요. 군무가 빼어나지 않다면 지루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시각적 스펙터클을 추구하는 작품이니 바야데르는 왕실을 배경으로 하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도 유독 번쩍거리는 편인데요, 영상을 복습하다 보니 예전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던 재미있는 요소를 발견했어요. 라 스칼라 버전의 의상 컨셉은 왕관인지, 니키야의 왕관 사랑으로는 부족했는지 망령들까지 일제히 왕관을 쓰고 나오더라고요? 볼쇼이 버전에서 불만스러웠던 감자티도 여기선 원 없이 왕관을 쓰고 나옵니다. 심지어 3막의 결혼식 장면에선 티아라로 머리를 고정시켰는데 그 위에다 왕관을 하나 더 쓰고 나와요. 인도의 무희가 아니라 왕관의 무희, 아니 인도의 왕관이라고 부제를 붙여도 될 뻔했습니다. 사원이 붕괴되는 마지막 장면은 유비씨 백조와 ABT 백조의 결말을 반씩 섞은 듯한데, 위에서 복원된 결말을 실연으로 보고 싶다고 쓰긴 했지만 바야데르의 결말은 망령들의 왕국에서 끝나건 사원이 무너지며 끝나건 둘 다 2%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우선 솔로르가 마약에 취해 환각 상태에서 니키야와 재회하는 전자의 결말은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죠. (실제로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를 싹둑 잘라내고 공연해온 것이긴 합니다만.) 또 후자는 '천국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의 결말이 많은 백조와 흐름도 유사하고 납득할 만한 결말이긴 하지만 그 때문에 결혼식이라는 주제가 두 장면에 걸쳐 나오면서 발레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미는 무대인 결혼식이 갖는 힘을 소진시키고요. 내키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는 솔로르에게 잔치가 아무리 화려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니키야의 망령이 출몰하는 결혼식 분위기가 음울한 것도 당연하지만 시각적 임팩트는 확실히 떨어지니까요. 솔로르가 현실의 정혼자인 감자티와 영혼이 되어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니키야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은 라 실피드에서 제임스가 실피드와 에피 둘과 함께 추던 파드트루아를 떠올리게 하고, 또 아를의 여인에서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여인의 존재를 느끼며 2인무를 3인무처럼 추어야 했던 비베트도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국립은 가을에 프티옹의 트리플빌을 올리네요. 본문의 사진은 영상에서 캡처한 것들이라 조금씩 다 흔들렸습니다. 왕관이 잘 보이게 캡처하려고 했는데 포스팅하면서 보니 그냥 왕관인가 보다, 싶은 정도군요. 1막 파드되 영상 붙이고요, 요즘 유튜브 단속이 느슨한지 디비디 영상이 통째로 올라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절판 영상 못 구해서 눈물 흘린 분들 혹시 많이 계실까봐 금맥 두 개 공유해드립니다. 유튜브에서 발견한 전막 영상인데 이건 링크만 걸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