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행복한 책읽기)를 읽다. 대단한 흥미, 그리고 흥분과 함께. 출판사 <행복한 책읽기>는 우리시대의 인물읽기 기획의 첫번째 인물로 '장정일'을 선택했는데, 독자 사로잡기로 보나 풍부한 이야기 거리로 보나 확실하고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를 읽고 떠오르는 5가지 느낌. 1.글 못 쓰면 죽어야 됩니더. 장정일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유일한 선택이다. 좀 배운치들은 소설 쓰다 힘 떨어지면 어디 '문창과' 교수로도 가고 그럴 수 있지만, 장정일에게는 그런 선택이 없다. 장정일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문화적 호사가 아니라, '생업'이다. 장정일은 일체의 잡문 청탁을 거절한다. 어떤 여성잡지에도 주간지에도 글을 쓰지 않는다. 쓰고 싶은 글만을 쓰고 살기 위해서, 장정일은 돈을 아낀다. 장정일은 신용카드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지갑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옷은 항상 티셔츠에 몇년된 골덴 바지 차림이며, 머리는 노모가 바리깡으로 직접 깍아준다.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읽고 싶은 책을 사고, 듣고 싶은 jazz cd를 사고, 그림을 산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가 생각난다. 작가로 살기 위해서는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그래야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다. 2. 내겐 너무 멋진 '강금실' 난 강금실이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후 '강금실'이라는 존재를 처음 알았다. 이쁘고 세련된 여자 정치인은 처음이었다. 아직도 법대에 가면 예쁜 여자애들이 별로 없는데, 57년생이 저 정도의 미모를 가졌다면 학교 다닐 때 정말 튀었겠다고 생각했다.그것도 서울대 법대에서...공부 잘하는 애들은 '못생겼다'는 선입견을 산산히 부수는 존재였으리라...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를 읽으면서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음란성 여부로 장정일이 기소 되었을 때, 자청해서 변호를 맡은 변호사가 바로 '강금실' 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에 실려 있는, 강금실이 직접 쓴 변론기 <장정일을 위한 변론>을 읽으면서 나는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고-우리 사회 호칭의 복잡한 권위적 구조,성기를 공개적으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은폐성을 생각해 보라-,가능한 한 육체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놓여 원하고 충족하고 사랑하며,서로가 타인의 육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아마도 이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며, 삶에 지친 몸을 달래는 모든 사람이 밤마다 혼자 잠들면서 꿈꾸는 사회일 것이다. 앞선 사람인 작가로서 그와 같은 꿈에 도전한 장정일을 위하여, 이 사회의 모든 장정일을 위하여 나는 변론하고 싶다.' (강금실의 변론문 중에서) 난 이 부분을 몇차례 계속해서 읽으면서 떨림을 느꼈다. 사물의 본질을 보는 깨어 있는 시각 뿐 아니라, 문장 자체가 너무도 아름답다. 우리나라 판검사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버거운 명문이다. 3. 전찬일- 뭐락고요?명문대 석사라고요?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에는 강금실, 구광본, 남재일, 신철하, 임형욱, 전찬일의 글들이 묶여 있다. 이 중, 전찬일의 영화평론을 읽으면서, 난 너무도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을 발견했다. '겨우 한 살 차이의 동세대인데다 소위 명문대학교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독문학도였건만, 난 한때 '신드롬'까지 일으켰다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질 않았다.(p161) 도데체 무슨 말인지... 명문대에서 석사학위를 딴 사람은 다 장정일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얘긴가? 독문학도랑 장정일에 대한 관심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또 '소위 명문대'는 어디일까? 서울대면 '소위'를 붙이지 않았을테고, 어디를 나왔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걸까? 독문과 대학원 나오고 이렇게 광파는 사람은 첨 봤다.(나도 독문과 나온 입장에서 한마디.독문과 대학원 들어가기 진짜 널널하다.) 도데체 왜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는지, 물어 보고 싶다. 전찬일의 글은 회사 선배 한명을 생각나게 한다.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항상 자기가 '서울대' 나왔다는 얘기를 한다. 아무 말도 안 시켰는데 불쑥, "내가 다시 태어나면 서울대는 안 갈꺼야." "서울대 나왔다고 회사 생활에 도움되는 거 아무것도 없어." 누가 물어 봤냐고요? 4. 요리사와 단식가 VS 301,302 영화 301,302의 원작이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인지 몰랐었다. 시까지 영화화가 되는 장정일은 정말 영화적이다. 301,302를 비디오로 봐야 겠다. 5. 멋진 시나리오, 보트하우스. 이 책에는 시나리오 <보트하우스>의 전문이 실려있다. 장정일이 자신의 소설 <보트하우스>가 영화화 될 것을 대비하여 직접 쓴 시나리오이다. 참 잘 짜여진, compact 한 시나리오다. 장정일의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전혜성의 <마요네즈>를 생각했다. 소설 속의 대사가 아까워서, 아님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서 영화 속에 대사를 그대로 집어 넣었다.김혜자의 속사포같은 대사처리가 없었으면 영화는 고무줄 같이 늘어 났을 것이다. 화면 전환도 빠르고, 군더더기 대사도 없고,영화를 위한 소품 선정까지 섬세하다. 소설과 시나리오를 같이 읽는 색다른 재미를 느꼈다. |
| 김승옥은 자신의 소설에서 말한다.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잘 아는 체 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무진기행 中) 장정일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장정일은 '무척 불행한' 사람이다. 대중들은 '거짓말 사건'으로 감옥까지 다녀온 외설작가로 그를 기억한다. 장정일은 타인에 의해 규정되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한다. 한 사람의 인격이 이벤트화 하고 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사회적으로 '잘 아는 존재'가 돼버린다. 마치 마광수 선생이 문학평론가이자 교수,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다 지워지고 오로지 '즐거운 사라'의 저자로만 기억되듯이, 나도 그 과정을 밟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외설죄로 감옥에 갔다왔다'라는 사회적 이벤트로 인격이 정리되었다. 사람들은 '장정일은 그런 사람이 아닌가'라는 식으로 잘 알고 있는 듯이 생각한다. 내 속의 다양한 면체는 더 이상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장정일을 안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쉽게 답이나오지 않는다. 내가 '장정일을 안다'고 말했을 때, 안다는 뜻은 바로 '장정일이란 작가에게 가지는 다양한 편견 중의 하나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그렇기에 장정일에 대해 말하는 지금도 내 용렬한 생각을 쉽게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문학에 눈을 뜨지 못했던 수험생 시절, 나는 장정일과 처음 만났다. 당시 '거짓말 사건'이 터지며 각종 매스컴에서 이슈화되었던 장정일과 그의 소설은 문학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삼류였다. 파격적인 성 묘사로 가득 채워진 소설 앞에서 난 얼굴을 붉히며 불쾌한 감정을 가눌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후 다시 만난 장정일은 나에게 더 이상 예전의 장정일이 아니었다. 장정일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가득 찬 제도권의 바깥에서 손짓하며 다가오는 은밀한 유혹이자 제도권 안을 향한 깨어있는 비판의 칼날이 되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가속도로 찌그러져 가는 세계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장정일의 작품들은 내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언제나 새로운 갈증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필화를 입은 장정일은 그 이후 너무나 잠잠했다. 한참을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허덕이고있던 나에게 장정일은 드디어 그 찡그린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장정일의 화두 혹은 코드』를 읽는 동안, 지칠 줄 모르는 힘으로 여기저기서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인간장정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책에 실린 단상 「아무 뜻도 없어요」는 장정일만의 색깔을 지니고 있는 산문이다. 장정일은 컴퓨터, 감옥, 택시, 행복 등 신변잡기적 관심사부터 표절, 원고청탁, 시집 등의 작가적 고민, 그리고 10대 매매춘, 양심적 집총 거부, 시민운동, 언론 세무조사와 관련된 이문열 발언, 미당의 상징적 죽음, 교육 등 민감한 사회 문제들까지 그의 쌍끌이 그물에서 건져 올린 갖가지 화두를 향해 거침없이 삿대질해댄다. '안 보이는 곳을 쳐야 한다. 보이는 곳을 치는 글은 하수다. 급소란 대개 안보이는 곳에 숨어있는 법이다.'라고 말하는 장정일의 시선은 언제나 문제의 본질을 깊숙이 꿰뚫어 보려한다. 그는 아직도 '박정희'라는 유령의 상징적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일침한다. '어떤 미친놈들이 박정희기념관을 짓자고 하든 말든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도 정신을 바로 차려서, [다카키마사오기념관]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박정희를 둘러싼 가짜 논쟁들이 해소된다.' 별세한 지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되는 미당의 문학과 삶에 대해서도 간단하면서 명쾌한 답을 내린다. '내 생각에 서정주의 친일 이력과 역대 독재 정권에 대한 추파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소위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고귀한 신분에 맞는 높은 도덕성'이라는 기준을 적용할 때, 그의 허물에 사형 선고를 내릴 만하다.' 이렇듯 오만하고 거침이 없는 그의 글은 정직하기에 극단에까지 치우치는 때가 많다. 그래서 때로는 즉흥적이고, 무책임해 보이는 발언도 서슴치 않지만, 장정일이 내뱉는 말에 조심스레 감추어진 비수는 정확하게 상대의 허를 찌른다. 독자는 바로 그런 점에서 장정일의 글을 읽으며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읽다보면, 장정일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한 토막 나온다.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1987)은 재미있는 시집이다. 미국 팝송에 사로잡힌 세대의 재치·유머가 극적 구성 속에 넘쳐흐른다. 김병조 세대의 개그 코미디와 그의 시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그가 이인성·박인홍이 그것을 뛰어넘듯이, 그것을 뛰어넘어 역사와삶의 깊이에 이를 수 있을까? 그의 세대를 뭐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사이키델릭 세대? 그가 섹스 과잉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아마 성공하는 순간에 무너지기 쉬울 것이다.' 김현은 지금까지 장정일의 행로를 예언하였고, 예언은 '거짓말 사건'과 함께 현실이 되었다. 장정일은 지금 조용히 은신 중(?)이다. 끓어오르는 자신의 피가 식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러나, 피는 식지 않을 것이다. 장정일은 영원한 장정일이기에... 누구도 예언하지 않은 앞으로 장정일의 행로가 더욱 궁금해진다. |
| 이 책, 재미있다. 책 자체가 재미있는 것인지, 장정일이라는 작가가 재미있는 건지, 아니면 장정일이라는 작가가 쓴 글이 재미있는 것인지, 그 작가의 글에 대한 글이나 그 작가에 대한 글이 재미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부 다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책 읽기의 재미를 느꼈음에도, 책을 읽는 중간중간 이 책을 보는 것 자체가 후회스러워졌다. 왜냐면, 장정일이라는 작가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읽다보면, 그를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 그것이 정확한 것이 아닐지라도 일종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생길지 모른다. 나는 장정일이 낸 시집이나 소설 한 권을 제대로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 선입견과 편견이 좀더 조금일 때 그의 작품을 읽어볼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세상의 모든 책과 모든 영화를 볼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좋은 책, 좋은 영화도 골라 보기가 쉽지 않다.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영화라고 찍어둔다 해도 시간이나 기회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좋은 책, 좋은 영화를 골라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래서 보통 서평이나 영화평 등을 많이 찾는데, 이런 게 자칫하면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이 되어 작품 읽기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 작품을 온전히 보기 전에 얼마만큼 간접적인 정보를 갖느냐는 문제는 정말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책 뒷부분부터 장정일 작품을 약간 제공하고 있다. 일종의 번들이라 할까나? 시, 소설, 시나리오가 있는데 다 볼만한 작품들이다. 게다가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들을 보면 장정일이라는 작가를 이해하게끔 하는 그런 작품들로 선정된 것 같다. (원래 장정일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작품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리뷰는 장정일의 작품을 읽기 전에 쓴 것입니다. 그의 시집을 읽고 난 지금, 그의 시들의 마력과 매력을 알게 되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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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시 한 편 읽은 기억이 있고, “독서일기”를 듬성듬성 통독한 적이 있을 따름이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긴 했지만, 그건 순전히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아담이 눈뜰 때”나 “너희가 재즈를 아느냐”, “너에게 나를 보낸다”, “거짓말”도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보진 못했다. 그런 내가 장정일의 글이 실려있고, 장정일에 대한 글들이 실려있는 책을 사게 된 것은 그저 일시적인 충동에서였다. 이 인간은 어떤 글을 쓰는 작자일까. 책을 반 정도 읽은 지금은, 대체로 호감이 간다?
장정일에 대해 여러 지인들의 글도 실려있고, 이제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묶인 시와 소설들에서 보이는 장정일의 모습은 그는 글쟁이다 하는 것이다. 장정일의 글은 다른 누구의 글보다도 그의 삶과 밀착되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투고라는 형식의 글에 대해 호감을 내비치듯, 글은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지 청탁을 받아 쓰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정일은 그런 의미에서는 진정한 글의 장인일지도 모른다.
장정일 하면 포르노작가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에게, 삶의 진정성에 의문을 가진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취미 루소 이후 서양에서 활약했던 지식인들의 위선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추적한 [지식인들]이라는 제하의 두 권짜리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나면 마르크스나 브레히트, 사르트르와 같은 지적 거장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순에 가신다. 저자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 책의 얄미운 요지는 생생히 기억한다. “지식인들은 보편적인 인간은 사랑하지만 구체적인 인간은 사랑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식인들은 수천 년 전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동원되었던 노예의 인권이나 아무런 혈연도 없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기아에 대해서는 게거품을 물지만 현재 자신의 주위에 살아있는 부모나 형제, 배우자, 자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평생을 괴롭히는 이중인격자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이익과 선을 생각하는 지성인과 달리 지식인은 저 자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는 무리라는 80년대식의 의식화를 상기하면서 “당신이 방금 말하신 그 지식인은 지성인을 잘못 말하신 것이겠지요?”라고 말장난을 뇌까리며 덮은 그 책의 요지를 취미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떠올리는 까닭은 복잡하지 않다. 내가 보기에 무취미한 인간이 이런저런 취미를 가진 인간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바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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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나마 장정일을 읽지 않으면 유행에서 뒤쳐진다는 느낌을 받던 때가 있었다.(여담이지만 박민규는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북에는 김정일, 남에는 장정일이라고 썼다) 그가 선구자나 시대를 잘못타고 태어난 천재라서가 아니고(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그냥 모두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나 홀로 그에 대한 정보가 전무할 때 느끼는 소외감. 내가 장정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가, 천재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비범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비범은 이외수가 갖고 있는 비범과는 또 다르다. 내가 읽은 그의 작품은 <보트하우스>를 비롯해 몇 작품 안 되지만(안타깝게도 나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지 못했다) 그가 쓴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세상에 대한 강렬한 외침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장정일은 책 제목 그대로 화두, 혹은 코드다. 도저히 종잡을 수도 없는데 무언가 이끌리는. 누군가는 미디어의 포장술이라고 간단하게 선을 그을 수 있겠지만 책에 실린 그의 일상을 볼 때 미디어의 탓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판을 깨려고 끊임없이 애쓰고 애쓰다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다.
문득 대학 1학년 때 창착론 수업을 듣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교수님은 우리에게 사고의 폭을 확장하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예를 들었다. 수십 년간 창작에 매달리다보니 아무래도 많이 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책을 읽고 있으면 ‘바로 이런 작품을 쓰려고 했는데‘하며 통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였다. 자신이 문학이 갖고있는 한계를 깨려고 할 때 다른 사람이 이미 다 깨놓았을지도 모른다며, 우리를 재촉하셨다.
훗날 나 역시 장정일을 바라보며 그렇게 시샘하게 될까. 다시 한 번 내가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시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인상깊은구절] 행복 버스를 타면 행복이 보인다.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이 장사진을 친 버스정류소 앞에 정차한 콩나물시루같이 복잡한 버스 속에서, 숱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단 하나 남은 좌석을 차지하고 앉았는데, 그 좌석 옆에 오늘치 스포츠 신문 한 부가 딱 꽂혀 있을 때! 아, 몸이 떨리도록 행복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의 비의마저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서 내가 늘 이용하는 시내 한복판의 정류장보다 훨씬 앞 정거장에서 막차를 타고 제일 뒷 좌석에 앉았던 날이었다. 이윽고 버스는 막차를 타기 위해 승객이 복다글거리는 예의 그 정류장에 정차를 했는데, 바늘 하나 꽃을 틈 없이 꾸역꾸역 버스에 올라탄 승객들의 그 환한 얼굴이라니!: “막차를 탄 사람은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
| 장정일에게 문학은 그런 것이다 생존 자체. 멋대가리 없게 들리지만 사실은 진짜 멋있다. 장정일의 작품은 단편과 시 몇 편 읽은 게 전부다 문학인 장정일보다는 인간 장정일에게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사는 대신 그를 샀다.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를. 장정일은 학력도 열라 구리고 얼굴도 못생겼다 그런데 글은 잘 쓴다 모더니즘 냄새가 나면서도 구식 냄새가 난다. 여기서 후자는 말하자면 인간의 냄새다 그가 이 책에서 늘어놓은 단상들은 하나같이 인간적이다. 인간으로서 고민해야 할 것을 질척질척하게 늘어놓는다. 문장은 메말라 있지만 그 문장 안에 숨어 있는 정서는 진물 그대로다 남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읽었다. 내 식대로 읽은 것도 같은데 아무려면! 나는 일개 평범한 독자일 뿐이다. 어쨌든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장정일에 관해서 쓴 꼭지도 무척 좋았다 법공부만 한 사람치고 무척 감수성이 예민한 것 같은 강금실은 장정일을 동자승 같다고 표현했다. 진짜 멋진 표현이다. 그 말 듣고 장정일 사진을 다시 보니 진짜 동자승 같다. 이제는 텔레비전 엠씨도 하고 시사지에 정기적으로 기고도 하니 생계에 별 걱정없을 테지만 이 책이 기획되던 때만 해도 그는 한탕을 기대하기엔 뭔가 의심스러운 전업작가에 불과했다. 그래서 돈을 극도로 아낀다는 그의 캐릭터가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잘나가는 소설가 축에 끼고 활동반경도 넓어져서 오히려 바쁜 나날을 한탄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을 법하므로 나로선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다. 소설가는 가난해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를 신봉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가 자꾸 변방에서 제도권 안으로 어려움없이 안착하는 것 같아서다 괜한 시기심이 아닌 게 그가 극도로 가난했을 때 지은 시는 아름다운데 그의 요즘 글들은 별로 맛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은 기름기 없는 장정일의 모습과 일상, 그리고 사유를 볼수 있는 괜찮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