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군주론이란 책을 세권이나 구입하였으나 끝까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래전에 구입한 글방에서 출간한 것은 문체가 너무 딱딱하여 중간에 포기하고, 우사에서 출판한 것을 구입하였습니다. 문장이 상당히 매끄럽고 주석이 많아 이해가 편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출판해서인지 글씨가 넘 작고 조밀하게 편집되어 읽기가 힘이들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인터넷 서점과 네이버에서 추천하고 출판사 또한 평이하게 번역하였다 하여 새김에서 출판한 책을 구입하였는데 왠걸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아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되어 결국 얼마 읽지도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역사서 특히 르네상스시대에 관한 책을 좋아하고, 또 마키아벨리에 관심이 많아 또다시 여기저기 뒤지다 이 책을 다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먼저 읽기 편하게 편집이 되었고, 문장 연결이 나름대로 매끄러웠습니다. 간혹 이게 적절한 표현일까 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나은듯합니다. 군주론을 읽고자 한다면 이 책을 택하여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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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통치권자는 어떠한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 정치란 시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모하여 왔기 때문에, 500년 전의 인물에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어 보인다. 그럼에도 “군주론” 이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할 수 밖에 없다. 군주의 자질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논하고만 있다면 이 책은 그야말로 무익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요즘 사회에 회자될 가치조차 없다. 하지만 이 책의 유용성은 거기에 있지 않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성악설 인가 아니면 성선설 인가? 끝없이 논쟁이 되고 있는 이 두 이론은 잠시 차치하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천성적으로 악하든, 아니면 천성적으로 선하든 끊임없이 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인간은 악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궁극적인 해답일 수는 없겠지만, 인류가 버릴 수 없는 양대 체제라고 생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다수 이기적인 인간에게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며 모든 것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경제가 유지될 수 없으며, 자신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정치체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사회화된 인간은 어렸을 적 도덕에서 배운 내용들이 옳은 내용이지 삶의 정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배워나간다. 결국 “이기적인 존재”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전제 없이 인간의 욕구를 수렴한다는 정치란 있을 수가 없다. 군주론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미움을 느낄 때는 꼭 상대편에게 해를 가하기 마련이다.” “위대한 사람들에게도 새로이 은전을 베풀면 지난날에 피해 입은 것을 잊게 된다고 믿는 것은 자기 자만이다” “자기를 학대하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되면 그 은혜에 대해서 강렬한 의리를 느낀다.” “남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인간이란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는 나머지 스스로 속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결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본성을 이와 같이 열거한다는 것은 도덕론자들에게는 거북할 수 있겠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이 책에서 중요시하는 군주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잔인함” 이요.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은 “증오와 멸시” 라고 지적하고 있다. 잔인함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며, 증오와 멸시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풍부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지만, 내용은 수긍할 수 있어도 역시 가슴에는 와 닿지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공감할 만 하더라도 이러한 욕구들을 수렴할 만한 정치적인 방법은 절대로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공감되는 부분은 안정적인 정치를 구축하기 위해서 인간의 본성을 분석하였다는 점. 그리고 운명에 대처하는 군주의 자세를 언급한 다음의 한 문장으로 압축하고 싶다. “운명의 여신은 자신에 대하여 지혜롭게 대비하지 않은 곳에서 위세를 보이며, 자기를 제어하기 위한 성벽이나 도랑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격노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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