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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루시드가 모든 이에게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두 철학자를 접한 모든 이들은 각자 저마다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루시드의 상(像)을 만들어 갈 것이다. 책의 저자 김태호 씨도 그 자신의 두 철학자의 상을 이 책을 통해 이야기 했다. 나는 그의 눈을 통해 두 철학자의 삶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루시드가 주장한 과학적 주장은 현대과학을 잣대로 바라보았을 때 틀린 내용일지언정, 과학적인 사고방법 그 자체는 현대 과학의 토대라고 불릴 만 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은 소리로 보인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은 인류의 이상과 부합하는 것이며, 그러한 인간상을 추구하는 것이 현대의 인간이 추구해야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은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상식과 경험에 의한 과학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상식과 경험이라는 인간의 의식 역시 일종의 사고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선입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인간은 상식과 경험을 통한 선입견 없는 과학적 사고는 가능한 것인가? 이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 본론에서는 책의 주요내용을 요약정리 하고, 결론에 나의 문제의식에 대해 서술하며 서평을 마치겠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꽃을 피운 합리적인 자연관을 집대성한 철학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따로 떨어져 있는 질서란 없으며, 이 세계에 대한 경험을 쌓다 보면 그 뒤에 숨어 있는 질서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사상을 이해하려면 그의 철학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바로 ‘원인’이다. 원인은 질료인, 형상인, 운동인, 목적인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나무책상이 있다면 나무는 질료인이고, 책상의 모양은 형상인이며, 목수의 손놀림은 운동인, 학생의 공부하려는 마음이 목적인 인 것이다. 질료인을 하나의 원인으로 삼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경험을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그의 물질이론에서 잘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원소설을 플라톤의 기하학적 도형이 아닌 우리가 날마다 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 물, 불, 공기, 흙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이 4원소가 가진 본연의 냉, 온, 건, 습이라는 성질을 이용해 변화하는 자연현상을 설명했다. 예를 들어 불을 지펴 물을 데우면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것은 물이 뜨겁고 습한 공기로 바뀌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테르라는 제5원소를 덧붙여 우주를 설명했다. 우주는 한가운데 가장 무거운 원소인 흙이 뭉쳐있고, 그 위를 가벼운 순으로 물, 공기, 불이 차례로 달의 천구까지 덮고 있고, 달의 천구 위는 에테르로 이루어진 천체들이 수정과 같은 천구에 붙박여 있다. 이 천구가 우주의 중심을 따라 회전하면, 우리 눈에 천체가 하늘을 따라 움직이듯 보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구가 움직이는 이유를 그 밖의 다른 천구가 회전력을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달의 천구 가장 바깥에는 스스로 회전력을 부여하는 원동자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꼭 필요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우주구조론은 행성의 역행운동을 깔끔히 설명하지 못한다. 행성과 행성사이 마다 반대방향으로 도는 천구를 상정해야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이다. 운동은 자연스런 운동과 강제된 운동이 있다. 자연스런 운동이란 지구상의 물체를 구성하는 원소가 제자리를 향해 가는 것이다. 지상계의 원소들의 움직임은 위에서 아래로 직선을 이룬다. 이에 비해 천상계의 원소 에테르는 생성, 소멸, 변화하지 않는 속성 때문에 시작도 끝도 없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있는 원운동을 한다. 이러한 논리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돌은 아래로 떨어지고 불꽃은 위로 타오르고, 하늘의 별은 원운동을 하는 까닭을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강제된 운동은 인위적인 힘을 주어 일어나는 운동이다. 강제된 운동은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다시 자연스런 운동을 하게 된다.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제된 운동이 바로 자연스런 운동으로 변하지 않는 이유는 공기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론은 공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주고 동시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는 앞뒤가 안 맞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자연관을 갖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서 그 자리에 알맞도록 스스로의 텔로스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간다고 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사다리를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의 사다리는 이런 철학적인 물음에 답할 뿐만 아니라 꼼꼼하고도 폭넓은 관찰기록까지 보유하고 있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랄 만큼 치밀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등 자연철학은 다양한 사상이 꽃을 피우는 헬레니즘 시대에는 풍성했지만, 이윽고 자연철학의 암흑기 로마제국이 등장한다. 특히 혼란기의 로마제국은 기독교 이외의 자연철학 등 을 이교도의 철학으로서 박해했다. 그러다 차츰 철학을 무작정 배척하기보다는 잘 길들여서 ‘신학의 시녀’로 삼기 시작했다. 그리스 자연철학은 수도원의 담 안에 갇혀서나마나 익힐 수 는 있을지언정 진정한 학문의 발전은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이븐루시드는 후대에 이슬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의 주해자로서 그 책에 주석을 달며 자신의 사상을 같이 실은 철학자로 유명하다. 이슬람 철학자 이븐루시드가 태어난 곳은 코르도바였다. 그곳은 이베리아반도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다. 고도로 발달한 이슬람의 교육제도 덕분에, 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이븐루시드는 신학, 법학, 자연철학 등을 골고루 공부할 수 있었다. 특히, 이븐루시드는 의술을 공부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했다. 이는 왜 이븐루시드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논리학자나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자연과학자로서 존경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븐루시드는 주해작업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차이를 드러내고, 나아가 기존의 무슬림 주해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덧칠한 플라톤주의의 색깔을 벗겨내고자 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따랐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원동자를 향해 나아가려는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구조론의 한계를 꼬집으며, 새롭게 주전원체계와 가상 개념들을 도입하여 관측결과와 일치하도록 자신의 주장을 폈다. 이에 이븐루시드는 지구중심설을 들어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새로운 이론을 고안해내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원소이론, 천문학, 물리학 등 모두 어우러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잘 짜인 자연철학 체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슬람사회는 이븐루시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같은 자연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 이유는 이슬람이 오늘날의 스페인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갖게 될 만큼 강성했을 당시 이슬람 세계는 종교적 관용의 폭이 상당히 넓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의 풍성한 성과들은 곧 무슬림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슬람의 지도자들조차도 쿠란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이방의 문화를 열심히 탐구했다. 그리하여 이슬람 과학은 천문학, 의학, 수학 등의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 했다. 그러나 후에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세력들이 점차 무슬림도시국가들을 점령하면서 무슬림의 관용은 사라졌다. 결국 이븐루시드와 같은 이단적 사상가들이 설자리는 점차 좁아졌다. 관용은 원래 세상의 중심에 설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1942년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국가가 멸망하면서 오백년 동안 쌓아온 이슬람의 문화의 유산은 모두 기독교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사라져버린 줄만 알았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유럽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유럽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몰랐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원문을 접하고는 경학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 합리주의 책들의 주석에서 주해자 이븐루시드를 발견한 것이다. 곧 이븐루시드를 따르는 학풍이 생겼고 이들을 아베로스주의라 불렀다. 이런 아베로스주의 때문에 기독교세력은 스콜라 학파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밖 에 없었고 그 후 16세기 과학혁명까지 철학과 신앙은 교묘한 균형을 이뤘다.
이 책은 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그 사상을 주해자 이븐루시드로부터 다시 유럽에 영향이 미치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해준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루시드일까? 초자연적인 신의 힘을 이유로 삼지 않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시도는 굉장했다. 과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공식이나 법칙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고, 거기에 자신의 합리적 추론을 더해, 이세상과 우주에 대해 놀랄 만큼 그럴듯한 이론을 만들어 냈던 아리스토텔레스, 그런 그의 자연관을 더욱 합리주의적으로 다듬은 이븐루시드 그들을 책으로써 만나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선입견 없는 상식과 경험은 가능한 것인가?
근대의 역사는 신의 몰락과 이성의 출현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루시드의 덕목이 중세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근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의 이성의 빛이 전 세계에 빛을 비추면서 동시에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두 차례에 걸친 유래 없던 세계대전과 식민주의, 인종주의와 같은 야만이 세계를 뒤엎고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인간의 경험과 상식이 만들어낸 과학은 이런 야만에 봉사했다. 핵무기 개발과, 인간 생체실험은 근대의 과학에 의해 행해진 것들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말이다. 인간이 이성 경험 상식 이라고 믿는 것들은 대부분 자기중심적인 사고로부터 도출된다. 예를 들어, 나는 여자이고 인간이다. 내가 보기에 남자들은 대부분 다혈질 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동물은 인간에 비해 저등하다.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결과인가? ‘여자 인간’ 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상대적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백인이 흑인을 비하하고, 한국 사람이 동남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것 역시 그들의 입장에서는 ‘경험과 상식’에서 도출한 결론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특정한 범주에 속하는 이에게만 해당될 뿐이고, 그 범주의 외부인에게는 이것은 비합리적인 판단들이다.
3.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루시드의 상식과 경험의 충실한 자세를 현대 과학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경험과 상식에 충실한 자세가 항상 어떤 선입견을 전제한 것은 아닌지 여겨야 한다. 과학자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한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 역시 사고에 정체성이 개입되고 이는 선입견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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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 & 이븐 루시드 : 자연철학의 조각그림 맞추기 ● 김태호
바로 그 철학자(the Philosopher)와 바로 그 주해자(the Commentator)의 이야기.
나는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난것도 반가웠지만 이븐 루시드라는 인물을 알게 된 점이 흥미로웠다. 합리적 자연관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방대한 저작에 주석을 달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을 합리주의적으로 다듬어 후대에 전한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생각이 앞선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 시기의 가장 새로운 사고방식 중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은, 자연현상을 설명할 때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원인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다. …… 신화적 자연관으로는 이미 일어난 개별적인 사건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예측할 수 없다. …… 이런 것을 예측하려면 지진에 대한 보편적인 학설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보편적 학설을 세우려면 '신의 분노'와 같은 우연적인 요인이 아니라,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요인을 찾아내야 했다.-(p.31)
-"자연을 탐구하는사람은 우리가 감각으로 받아들이는현상 그 자체가 아닌 그 너머에 있는 추상적인 법칙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 오늘날의 과학자들도 간직하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감각과 경험의 역할을 지나치게 낮춰 잡기는 했지만, 경험을 종합하여 추상적인 법칙을 이끌어내는 이성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는 오늘날 과학자들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p.54)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탐구하려면 부지런히 손발을 놀려야 한다는 점을 일깨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경험과 상식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경험과 상식에 충실할 것, 그것은 오늘날에도 과학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남아있다.-(p.92)
-요컨대 철학자로서의 이븐 루시드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던 이슬람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으로 재편하고자 했으며, 이것이 전지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믿음과도 양립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븐 루시드가 뒷날 유럽에서 존경을 받게 된 까닭은 그가 구체적인 과학적 연구 성과를 많이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그의 합리주의적 철학 때문이었다.-(p.134)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 루시드의 학설이 비록 완전치 못한 것이었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그들이 이뤄놓은 것 위에서 한발을 더 내딛을 수 있었다.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 루시드의 자연 철학의 내용을 비판했던 사람들도, 자연철학을 탐구하는 이들의 태도는 그대로 물려받았다.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해도 자연법칙만큼은 어길 수 없다"는 신념, 그것이야말로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날까지도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p.160)
책을 읽은 후 그 철학자는 잘 알려져있는데 그에 비해 왜 그 주해자는 낯설기만 할까?란 의문이 남았다. 철학, 과학, 의학에 재능이 있고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가 그린 [아베로에스에 대한 아퀴나스의 승리]에 등장하는 인물이며 중세유럽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이 유럽의 지성계를 지배할 정도였다는데 말이다.
공! 감! 구! 절!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알게 되었다고 해서, 어제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쓸모가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과학기술 문명은 하루아침에 이룩된 것이 아니라 수천 년동안의 시행착오와 개선을 딛고 세워진 것이다. 앞 세대가 남긴 유산의 허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개선하기는 쉬워 보이지만, 그 허점투성이 유산이 없었다면 뒤 세대가 빈손으로 새것을 만들어내기란 훨씬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이 점은 중세 유럽의 철학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뉴턴은 이런 깨달음을 "내가 옛사람들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거인의 어때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라는 경구로 표현했다.-(p.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