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상징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 어떤 사람 하나는 종이를 먹으며 배고픔을 견디었다고 했다 만에 하나 그가 예술에 매혹되어 있었다면 그가 죽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시집의 종이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서서히 미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자신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을 것이다 - 「상징은 배고프다」
삼풍백화점 사고에 휘말렸다가 간신히 살아나온 사람이 있다. 그는 종이를 먹으며 배고픔을 견뎠다고 말했다. 배고픔은 본능이다. 그는 본능처럼 종이를 뜯어먹었고, 살아서 밝은 세상을 보았다. 시인은 그 무엇보다 질긴 생명력을 말하기 위해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만에 하나”라고 시인은 단서를 달고 있다. 그리고는 “그가 예술에 매혹되어 있었다면/ 그가 죽었을 것이다”라는 진술이 곧바로 덧붙는다. 어째서 그런가? “그는 끝까지 시집의 종이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가 그 이유이다. 시에 대한 매혹이 본능보다 더 강렬하다는 것일까? 과연 그가 그랬을지는 사실 모른다. 시인은 또한 가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판단은 읽는 사람이 해야 한다. 당신이 만약 예술에 매혹된 사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시집을 뜯어 먹으며 목숨을 보전하겠는가? 아니면, 죽을지언정 시집을 고이 간직하겠는가
시인은 물론 그가 시집을 뜯어먹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뜯어먹기는커녕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서서히 미라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미라는 죽은 사람을 방부 처리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말라서 썩지 않는 존재이다. 죽은 존재 모두가 미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갖추어져야 미라가 된다. 방부제 처리를 하든지, 그에 걸맞은 환경을 만들어야 죽은 사람은 미라가 될 수 있다. 그는 어떻게 미라가 된 것일까? 우선 시집의 종이를 먹지 않았다. 곡기를 아예 끊었다는 말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그는 시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김질했다. 종이가 아니라 의미를 되새김질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종이는 물질이자 먹을 양식이다. 구체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의미는 추상이다. 요컨대 그는 구체적인 것을 버리고 추상적인 것을 선택함으로써 미라가 됐다는 말이 된다.
미라는 죽었지만 죽은 존재가 아니다. 몸은 죽었지만 정신은 상징으로서 영원히 살아 있다. 미라는 피라미드에 보존된다. 피라미드는 하늘을 찌를 듯한 모양을 한 채 사막도시 한 가운데 우람하게 서 있다. 아무나 미라가 될 수 없고, 피라미드에 잠들 수도 없다. 피라미드는 하늘과 땅을 잇는 상징이다. 그리고 그 상징의 중심에 미라가 있다. 요컨대 미라는 죽은 몸을 보존함으로써 새로운 정신으로 부활한다. 미라는 죽은 존재에 의미를 덧붙인다. 물론 그 의미는 하늘과 이어져 있다. 살아서 하늘이었던 존재는 이렇게 죽어서도 하늘이 된다. 절대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미라는 저세상을 지배하는 근거를 마련한다. 저세상에서도 이 세상에서처럼 세세손손 권력을 휘두르려는 욕망이 미라와 피라미드에는 스며들어 있다. 상징이란 이리 보면 권력에 봉사하는 언어의 조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자신 하나의 상징물이” 된 이 미라는 지금도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언어가 조작하는 추상에 들떠 있다. 사물이 죽은 자리에서 언어가 탄생한다. ‘개’라는 언어는 ‘개’라는 사물의 죽음 위에 서 있다. 시어는 사물이 죽은 자리에서 생성된 이 언어를 최첨단의 기술로 갈고 닦은 매체를 가리킨다. 시집 한 권에 서린 그 엄청난 정신을 들여다보라. 일상 언어를 넘은 자리에서 시 언어가 뻗어 나온다. 제대로 된 시어 하나를 얻기 위해 시인은 목숨을 걸고 언어 너머의 사물과 마주한다. 죽을 상황에 처해서도 절대로 시가 쓰인 종이를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상징이 되어 새로운 시 세계를 열려고 한다. 죽음 대신 시를 선택한 이 미라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든다. 그 속에 미라를 넣어 하늘을 상징하는 의미로 숭배를 한다.
시인은 ‘상징은 배고프다’는 시 제목으로 이런 상황을 그리고 있다. 상징은 배가 고플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미라는 끊임없이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느라 하루가 다르게 말라간다. 삼풍백화점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종이’라는 구체적인 것을 먹었지만, 피라미드에 갇힌 미라는 저 멀리에 있는 의미만 씹으며 추상적인 것을 힘들게 붙잡고 있다. 그 자신 하나의 상징물이 되어 사람들 앞에 나선 이 미라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좋을까? 미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미를 먹었는데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죽어서도 죽지 않은 미라는 그 속에 지독한 욕망을 끌어안고 있다. 미라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상징물이다. 사람들은 미라를 보며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려고 혈안이 되었다.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면 미라밖에 더 되는가?
종이를 먹은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얻었지만,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생명을 잃은 대신 상징을 얻지 않았느냐고? 영원히 살아남아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생명을 얻지 않았느냐고? 배고픈 상징 하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무리 씹어대도 배 하나 불릴 수 없는 상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라는 저승이 어울린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걸쳐 이도저도 아닌 상징을 움켜쥐고 권력이나 탐하는 미라는 사람들의 삶을 좀먹는 곰팡이와 다르지 않다. 시인은 배고픈 상징 너머에서 종이를 먹으며 배고픔을 견디는 생명을 발견한다. 그는 의미에 연연하지 않는다. 상징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그는 살기 위해 종이를 먹고 그예 삶을 쟁취한다. 스스로 미라가 되고 상징이 되는 지독한 욕망에 빠져들지 않는다. 최종천은 무엇보다 이러한 존재에 어울리는 시를 쓰려고 하는 것이다.
2. 언어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반짝이는 것은 사람으로 치자면 말을 하는 것일까 이 그늘 아래서라면 나는 입을 다물고 나무들이 읽어주는 경전을 들어보리라 해마다 수천권의 책이 출판되고 영화와 연극이 공연되는 대명천지에 지금은 헤어진 그녀도 나더러 주둥이 하나로 먹고살 생각을 하라고 이제 노동을 그만하라고 넌지시 충고하는 눈부신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기에 나무들은 부는 바람에 춤을 추는구나 일을 하는구나 일을 하는구나, 땅을 깊고 넓게 일구고 있구나. 말이야말로 기술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최소한 신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 맨 처음 입을 열어 핑계를 댄 아담 정도는 되어야 말을 하는 것이다. 나의 말을 훔쳐간 한 권의 시집을 지금 누군가가 읽고 있으리라 내가 생산한 의미를 누군가가 써먹고 있을 것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나무가 쓴 경전을 읽어본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 자체이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로 실존하고 있다 나무의 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물의 말을 듣기 위한 방법이다 노동은 본래 그런 침묵의 언어였다 나는 인권 대신 물권(物權)을 주장하리라 사물이 나에게 증여한 이 언어로 - 「침묵의 언어」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걸 보며 시인은 나무들이 내뱉는 말을 보고 듣는다. 생김새가 모두 다른 나뭇잎이다. 같은 듯 다른 나뭇잎들이 저마다 말을 해대면 나무는 온몸으로 그 말들을 표현하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은 움직임으로 나무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한다. 햇빛과 바람이 어울려 만들어낸 그늘 아래서 시인은 “나무들이 읽어주는 경전”을 듣는다. 경전은 나무들이 나뭇잎들로 쓴 책이다.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로 이 경전을 썼을까? 얼마나 많은 햇빛이 나뭇잎을 물들였으며, 얼마나 많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을까? 시인은 그 모든 생명들이 이룩한 경전을 그늘 아래서 듣는다. 대명천지에 출판되고 공연되는 책이나 영화나 연극에서는 쉬이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인간이 만든 문명에서는 느끼기 힘든 기운을 나무는 제 몸으로 온전히 드러낸다.
문명은 “눈부신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계”를 낳았다. 지식과 문화를 이끄는 게 말이다. 말이 없는 문명을 상상해 보라. 오죽하면 지금은 헤어진 그녀가 시인더러 주둥이 하나로 먹고살 생각을 하라고 했겠는가. 주둥이로 먹고살라는 말에는 이제 노동은 그만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노동을 하지 않고 사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춤을 추는 나무들을 보며 시인은 “일을 하는구나 일을 하는구나,”라고 중얼댄다. 바람은 부는 행위로 일을 하고, 나무는 춤을 추는 행위로 일을 한다. 바람은 불고, 나무는 춤을 춘다. 바람은 나무를 위해 불지 않고, 나무는 바람을 위해 춤을 추지 않는다. 바람이 부니 나무는 춤을 추는 것이다. 그게 나무에게는 일이고, 바람에게도 일이다. “땅을/ 깊고 넓게 일구는” 일 또한 나무에게는 바람을 맞으며 춤을 추는 것만큼이나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동은 그러니까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기가 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지식과 문화 자체가 노동이 일구어낸 산물이다. 시인은 “말이야말로 기술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은 기법이나 요령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의 언어처럼 사물과 아주 가까이 있는 언어를 가리킨다. 바벨탑이 아닌 언어로 그는 신에게 변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무가 나뭇잎들로 속삭이는 언어를 들으려면 우리는 바벨탑 이전에 아담이 쓴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사물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것이고, 나뭇잎이 흔들리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 상황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일 능력도 없지만, 그렇게 할 생각도 없다. 스스로를 자연 위에 세운 종족이 아닌가.
시인은 “나의 말을 훔쳐간 한 권의 시집을” 말하고 있다. 시집에는 당연히 “나의 말”이 담겨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 말을 시집에 빼앗겼다고 이야기하는 점이다. “내가 생산한 의미”는 시집이 시인에게 빼앗아간 말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사물이 들려주는 말을 그냥 내뱉는 존재가 아니다. 한 권의 시집이 훔쳐간 말에는 이미 시인이 생산한 의미가 깊이깊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 그 시집을 누군가 읽으며 써먹고 있다. 의미는 언제나 또 다른 의미를 낳는다. 하나로 확정된 의미는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인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의미의 책을 한 권의 시집에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오로지 그 시집을 읽는 이들의 몫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나무가 쓴 경전을 읽는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나무는 사방으로 말을 쏟아낸다.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의미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 자체이다”라는 진술을 시인은 무엇보다 앞세운다. 이 말은 곧바로 “나무의 언어는 나무로 실존하고 있다”는 구절로 이어진다. 나무는 언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를 산다. 나무의 언어가 따로 있고, 나무의 실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무에게 언어는 곧 실존이다. 시인은 “나무의 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라는 진술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아담은 최초의 언어로 사물에 이름을 부여했다. 그가 ‘나무’라고 부르면 그 사물은 나무가 되었다. 언어와 사물이 따로 분리되지 않은 이 세계는 지금은 신화로 남아 있다. 그 신화로 다가가려면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써야 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인간의 언어는 사물의 말을 듣기 위한 방법이다”. 사물의 말로 신화가 만들어진다. 인간은 신화에 깃든 사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쓰는 인간의 언어가 노동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땅이 숨긴 언어를 들으려면 땅과 더불어 땀을 흘려야 한다. 땅은 땀을 흘리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제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시인은 “노동은 본래 그런 침묵의 언어였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노동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노동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달리 말하면 침묵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물로 들어가는 길을 힘껏 열어젖힌다. 노동이 없으면 침묵의 언어가 있을 수 없고, 침묵의 언어가 없으면 사물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인간은 깨우칠 수 없다. 지식산업과 문화에 물든 사람들은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 노동은 지식산업과 문화가 발달할수록 더욱 더 필요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은 인간과 사물을 이어주는 언어라는 시인의 이 선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노동과 단절된 언어는 사물로 들어가는 길을 열지 못한다. ‘이데아’를 안다고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시인은 그래서 “인권 대신 물권(物權)”을 주장한다. 물권은 말 그대로 사물의 권리를 의미한다. 인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물권 속에 인권이 있다. 인권은 물권의 하위 개념인 것이다. 돌려 말하면 물권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하나로 묶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사물을 잇는 이 근원에 시인은 노동이라는 침묵의 언어로 다가선다. “사물이 나에게 증여한 이 언어로” 시인은 시 쓰기라는 노동을 한다. 사물은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시인에게 언어를 증여한다. 그 자체가 목적인 이 언어로 시인은 시를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를 읽는다. 시를 쓰고 읽는 일이 증여로 이어져 있는 것을 시인은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
언어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반짝이는 것은 사람으로 치자면 말을 하는 것일까 이 그늘 아래서라면 나는 입을 다물고 나무들이 읽어주는 경전을 들어보리라 해마다 수천권의 책이 출판되고 영화와 연극이 공연되는 대명천지에 지금은 헤어진 그녀도 나더러 주둥이 하나로 먹고살 생각을 하라고 이제 노동을 그만하라고 넌지시 충고하는 눈부신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기에 나무들은 부는 바람에 춤을 추는구나 일을 하는구나 일을 하는구나, 땅을 깊고 넓게 일구고 있구나. 말이야말로 기술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최소한 신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 맨 처음 입을 열어 핑계를 댄 아담 정도는 되어야 말을 하는 것이다. 나의 말을 훔쳐간 한 권의 시집을 지금 누군가가 읽고 있으리라 내가 생산한 의미를 누군가가 써먹고 있을 것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나무가 쓴 경전을 읽어본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 자체이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로 실존하고 있다 나무의 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물의 말을 듣기 위한 방법이다 노동은 본래 그런 침묵의 언어였다 나는 인권 대신 물권(物權)을 주장하리라 사물이 나에게 증여한 이 언어로 - 최종천, 「침묵의 언어」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걸 보며 시인은 나무들이 내뱉는 말을 보고 듣는다. 생김새가 모두 다른 나뭇잎이다. 같은 듯 다른 나뭇잎들이 저마다 말을 해대면 나무는 온몸으로 그 말들을 표현하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은 움직임으로 나무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한다. 햇빛과 바람이 어울려 만들어낸 그늘 아래서 시인은 “나무들이 읽어주는 경전”을 듣는다. 경전은 나무들이 나뭇잎들로 쓴 책이다.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로 이 경전을 썼을까? 얼마나 많은 햇빛이 나뭇잎을 물들였으며, 얼마나 많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을까? 시인은 그 모든 생명들이 이룩한 경전을 그늘 아래서 듣는다. 대명천지에 출판되고 공연되는 책이나 영화나 연극에서는 쉬이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인간이 만든 문명에서는 느끼기 힘든 기운을 나무는 제 몸으로 온전히 드러낸다.
문명은 “눈부신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계”를 낳았다. 지식과 문화를 이끄는 게 말이다. 말이 없는 문명을 상상해 보라. 오죽하면 지금은 헤어진 그녀가 시인더러 주둥이 하나로 먹고살 생각을 하라고 했겠는가. 주둥이로 먹고살라는 말에는 이제 노동은 그만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노동을 하지 않고 사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춤을 추는 나무들을 보며 시인은 “일을 하는구나 일을 하는구나,”라고 중얼댄다. 바람은 부는 행위로 일을 하고, 나무는 춤을 추는 행위로 일을 한다. 바람은 불고, 나무는 춤을 춘다. 바람은 나무를 위해 불지 않고, 나무는 바람을 위해 춤을 추지 않는다. 바람이 부니 나무는 춤을 추는 것이다. 그게 나무에게는 일이고, 바람에게도 일이다. “땅을/ 깊고 넓게 일구는” 일 또한 나무에게는 바람을 맞으며 춤을 추는 것만큼이나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동은 그러니까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기가 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지식과 문화 자체가 노동이 일구어낸 산물이다. 시인은 “말이야말로 기술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은 기법이나 요령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의 언어처럼 사물과 아주 가까이 있는 언어를 가리킨다. 바벨탑이 아닌 언어로 그는 신에게 변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무가 나뭇잎들로 속삭이는 언어를 들으려면 우리는 바벨탑 이전에 아담이 쓴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사물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것이고, 나뭇잎이 흔들리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 상황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일 능력도 없지만, 그렇게 할 생각도 없다. 스스로를 자연 위에 세운 종족이 아닌가.
시인은 “나의 말을 훔쳐간 한 권의 시집을” 말하고 있다. 시집에는 당연히 “나의 말”이 담겨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 말을 시집에 빼앗겼다고 이야기하는 점이다. “내가 생산한 의미”는 시집이 시인에게 빼앗아간 말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사물이 들려주는 말을 그냥 내뱉는 존재가 아니다. 한 권의 시집이 훔쳐간 말에는 이미 시인이 생산한 의미가 깊이깊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 그 시집을 누군가 읽으며 써먹고 있다. 의미는 언제나 또 다른 의미를 낳는다. 하나로 확정된 의미는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인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의미의 책을 한 권의 시집에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오로지 그 시집을 읽는 이들의 몫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나무가 쓴 경전을 읽는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나무는 사방으로 말을 쏟아낸다.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의미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 자체이다”라는 진술을 시인은 무엇보다 앞세운다. 이 말은 곧바로 “나무의 언어는 나무로 실존하고 있다”는 구절로 이어진다. 나무는 언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를 산다. 나무의 언어가 따로 있고, 나무의 실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무에게 언어는 곧 실존이다. 시인은 “나무의 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라는 진술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아담은 최초의 언어로 사물에 이름을 부여했다. 그가 ‘나무’라고 부르면 그 사물은 나무가 되었다. 언어와 사물이 따로 분리되지 않은 이 세계는 지금은 신화로 남아 있다. 그 신화로 다가가려면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써야 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인간의 언어는 사물의 말을 듣기 위한 방법이다”. 사물의 말로 신화가 만들어진다. 인간은 신화에 깃든 사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쓰는 인간의 언어가 노동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땅이 숨긴 언어를 들으려면 땅과 더불어 땀을 흘려야 한다. 땅은 땀을 흘리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제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시인은 “노동은 본래 그런 침묵의 언어였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노동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노동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달리 말하면 침묵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물로 들어가는 길을 힘껏 열어젖힌다. 노동이 없으면 침묵의 언어가 있을 수 없고, 침묵의 언어가 없으면 사물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인간은 깨우칠 수 없다. 지식산업과 문화에 물든 사람들은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 노동은 지식산업과 문화가 발달할수록 더욱 더 필요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은 인간과 사물을 이어주는 언어라는 시인의 이 선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노동과 단절된 언어는 사물로 들어가는 길을 열지 못한다. ‘이데아’를 안다고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시인은 그래서 “인권 대신 물권(物權)”을 주장한다. 물권은 말 그대로 사물의 권리를 의미한다. 인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물권 속에 인권이 있다. 인권은 물권의 하위 개념인 것이다. 돌려 말하면 물권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하나로 묶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사물을 잇는 이 근원에 시인은 노동이라는 침묵의 언어로 다가선다. “사물이 나에게 증여한 이 언어로” 시인은 시 쓰기라는 노동을 한다. 사물은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시인에게 언어를 증여한다. 그 자체가 목적인 이 언어로 시인은 시를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를 읽는다. 시를 쓰고 읽는 일이 증여로 이어져 있는 것을 시인은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
처음에 최종천의 시집을 접했을 때, 마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성적이고, 하지만 읽어갈수록 행간에서는 그의 펜 아래에서는 쇠도 녹일 힘이 있어 보인다.
* 시 순서를 그렇게 의미가 강한 시부터 자리를 잡게 한 것이
덜 최종천다운 이 시가 내겐 좋았다.
<찌그러진 밥통>
파란 택시기사가 아무렴! 잘한다, 잘해.
<이성민을 만나다> 가운데에서. (...)
여자들(!)아, 저 구절에 동의하십니까? 그런 노력을 하는 이성민도 안쓰럽고,
<당신은 얼마나 불행하기에> 가운데에서. (...)
<화곡역 청소부의 한달 월급에 대하여> 난 이 시에 대해 노코멘트다! 올해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겠다는
- <정년제> 9째줄
|
|
눈에 보이는 것을 진리라 믿기에, 현재를 넘쳐 흐르는 풍요로움의 시대라 정의하는데 우리는 주저하지 않는다. IMF 이후 경제가 많이 어려워졌다고는 하나, 과거와 같은 절대 빈곤의 시대와 오늘날을 견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거리 곳곳에 넘쳐나는 노숙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가정이 해체되는 요즘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시대가 강조하는 화려함은 일상적인 우리의 추악함(!)을 감추기 위한 기만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몇몇 글을 읽을 때마다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낀다. 글과 부합하지 않는, 소위 ‘평균’이라 일컬어지는 영역에 해당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생각할까 싶은 생각도 든다. 사회의 모순과 가열차게 싸우는 투사의 모습을 한 글들만이 존재하길 바란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책이 말해줬으면 싶은 적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노동의 가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다시금 주목하길 바라는 시인의 모습은 낯설게 다가왔다. 문득 오늘날과 같이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는 이들이 많은 시대에도 일하는 사람이 없어 기기 가동을 중단하는 공장이 많다는 소리가 떠올랐다. 시대는 변했고, 사람들도 시간의 흐름을 타고 변하긴 했다. 하지만 노동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하단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음을 난 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시로부터 상징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웠다. 오히려 너무도 사실적인 시어들은 투박하게까지 느껴졌다. 쇠붙이 연장을 들고는 볼트를 조이고 푸는 사람들. 잘려나간 손가락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목장갑의 허전함. 이런 모습으로부터 정겨움을 느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외려 삭막하다면 삭막했지… 하지만 삭막함은 시인에게 현대인의 정서였다. 63만원의 월급을 받기 위해 밤낮으로 일해야 하는 화곡역 청소부와 셀 엄두조차도 나지 않는 돈더미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게 오늘날의 현실임을 잘 알면서도, 생존이 시급한 사람에게 문화와 예술을 부르짖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가 까지는 생각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어이없는가. 가난의 타인의 것이라 철저히 외면하면서도 자신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며 세상을 원망하는, 그런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에 대해 시인은 거침없이 노래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상징이 아니다. 현실을 도외시한 체 외면만을 빤지르르하게 꾸며댄다 하여 세상이 변화하진 않는다. 오히려 상징에 목을 멘 삶에게 주어지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삼풍백화점이 붕괴했을 때 생존을 위해 종이를 먹어야만 했던 사람에겐 그 종이는 생존의 도구일 뿐, 시집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는지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단순하면서도 때론 위험하기도 한 연장을 들고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역시 자신의 허름한 모습은 부끄러움이 아닌 생존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이렇듯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남에게 보이기 위한 치장이 아닌 살아가기 위한 밥그릇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