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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우아한 세계>. 최근 흥행의 보증수표라 불리는 송강호 주연이라 고민하지 않고 선택한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다소 어이없는 영화였습니다. 송강호의 연기도 제대로 살지 못했고, 감독의 의도가 모호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조폭으로 살아온 '특별한 남자의 평범한 소망'은 '평범한 시민의 특별한 욕망'인 로또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송강호의 한 마디가 가슴을 쳤습니다. 아내가 이혼하자며 처가로 가버려 어렵게 마련한 아내와의 술자리에서.'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인우가 폭력장면에서 '보지 마'를 외치며 '소동'을 피워 제대로 영화를 감상하지 못하고 나왔는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우리 친구 00이 전남대 병원 중환자실에서 아홉 개의 링겔에 묶여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생 녀석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문자였습니다. 영화의 비현실에서 현실로 미처 건너오지 못했는데, 친구의 상황은 저를 더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친구도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나보고 어쩌란 밀이야.'
그런데 오늘 독서를 마친 책에서는 인류 전체가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멸망한다고,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다윈의 대답 :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에 대한 독후감은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믿고 싶은 현실에 직면하면서 시작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콜린 텃지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가설의 함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설 1)신석기혁명 이전에 이미 농사가 정착되었다.
(가설 2)즉 구석기인들은 '취미로'라도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가설 3)농사의 시작은 인간이 다른 종을 멸종시킬 수 있었던 기반이자 결과였다.
(함의 1)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멸종의 시나리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함의 2)이 멸종을 멈추기 위해서는 20시간 동안 자고, 2시간 털 고르고 단지 2시간만 사냥했던 사자의 게으름을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즉 현재 인간생존의 가장 기초적인 바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농업이 인간 이외의 수많은 종을 멸종시키고 있고, 결국은 인간까지 멸절시킬 테니 현재 인간이 행하고 있는 행위의 의미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농사가 인간 종을 멸망시킬까요? 저자는 그것을 '고약한 악순환'이라고 명명합니다. 농사는 채집이나 수렵과는 달리 식량이 늘어나도록 환경을 제어 할 수 있습니다. 즉 농사를 많이 지을수록 인구가 증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일단 인구가 증가하면 인간은 그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더 많은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수렵, 채집하는 사냥꾼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의 두 배만큼 일해 일시적으로 식량을 더 얻을 수는 있지만, 사냥꾼의 먹이 종이 사라지면 곧 곤경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농사는 바로 '자연스럽게' 얻었던 식량대신 '인위적으로' 얻을 수 있는 식량을 공급해 주었던 것이지요.
저자가 또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석기혁명에 대한 '환상'입니다. 신석기인들이 농사의 장점과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그 기술이 전 세계에 신속하게 전해졌고 이로 인해 수천 년간 지속되었던 남성 수렵/여성 채집의 삶이 돌연 위험하고 불안정하게 느껴지기 시작해 이러한 삶의 방식을 포기했다는 것이 환상의 전모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환상을 하나하나 반박합니다.
농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녹록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초기 농경인들에게는 발과 무릎에 관절염이 생기고 허리에 변형이 오는 독특한 형태의 질병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는 수확된 곡식을 가루로 으깨는 안장 식 맷돌 작업에서 기인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는데, 농사가 결코 쉬운 생존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러면 왜 신석기인들은 쉬운 수렵-채집 생활을 포기했을까요?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원하거나 곡물의 장점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낙원에서 쫓겨났을 때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인류가 농사를 지었다는 명백한 고고학적 기록은 약 1만 년 전 중동에서 찾을 수 있는 때, 이때는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시기로 바다물이 늘어 해수면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 수렵-채집을 했던 인간은 초원이 물에 잠기자 고지대로 이동해야 했고, 생존을 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거기에 더해 먹여 살려야 할 인구 또한 증가했던 것이죠. 그래서 저자는 '경작농의 삶'은 '저주'나 마찬가지였다고 결론내립니다.
인간이 신석기혁명 이전에 농사를 시작했고 그 결과 수많은 종을 멸절시켰다는 저자의 주장과 근거의 함의는 무엇일까요? 아마 이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이 우리가 먹고 살기위해서 수많은 생명을 죽인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해 다른 종을 희생시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존 이상의 것을 위해 불필요한 살상을 한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행위에 진지한 성찰을 할 기회를 갖자.'
이성부의 <벼>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이 넓디넓은 사랑' '벼가 떠나가'는 것이 인간에게는 추수의 기쁨이겠지만 벼에게는 대량학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여유를 부릴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저자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태학의 기본이라 할 '농사'가 바로 생태를 위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래, 인간이 자연을 보호한다는 게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해야겠지만,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오만은 버리자. 그것이 생태학적 상상력의 시작이다.'
2007학년도 이화여대 수시 2문제에 이런 예화가 제시되었습니다. 밀렵꾼들 탓에 코끼리 개체수가 줄어들자 인간은 코끼리 보호구역을 만들고 보호합니다. 그런데 코끼리 개체수가 늘어나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코끼리가 그 지역의 식물들을 모조리 파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를 염려한 사람들이 다시 코끼리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 쏴 죽입니다. 코끼리와 그들의 먹이 사이의 균형이 잡히게 되면 코끼리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오버'요 기우였음이
드러납니다.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그 지역에 혹독한 가뭄이 들어 최소한 일만 마리의 코끼리들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코끼리들이 파괴한 삼림은 얼룩말이나 영양 같은 다른 동물들의 새로운 서식처가 되었다고 하네요.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는데 근본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의 직무유기나 방관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비전의 완전성이 아니라 일관성입니다. 그리고 인간 자신을, 인간의 행동을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앞 책에서 피터 싱어가 인간의 진보를 위해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더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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