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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대답』3권은 ‘남자 일과 여자 일은 따로 있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전의 주제보다는 더 흥미롭게 현실적인 주제인 것 같습니다. 저자인 킹즐리 브라운의 문제제기는 이렇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명백한 차이는 생물학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자연선택을 따르는 유전적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저자는 그렇다고 답하고 그 대척점에 페미니스트들을 놓습니다. 저자가 정리하는 남성과 여성의 기질적 성향이 차이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남성은 경쟁적인 경향을 보이고 여성은 더 협력적이다. 남성은 주도권 위계에서 최상위에 오르려 하는 반면 여성은 덜 계급화 된 사회관계를 견고히 하려고 한다. 남성은 자신의 추구에 있어서 외골수적인 반면 여성은 더욱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성차의 원인으로 사회적-문화적 영향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진화에 더 큰 무게를 둡니다. 인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남녀의 성차를 생물학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남성 중심적인 사고이며, 오도된 사회화 및 교육의 결과인데, 그것을 선천적-근본적인 것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여성에 대한 착취적 사회구조를 고착화하려는 불순한 의도다’라는 페미니스트들의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이 정도 수준이라면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번역한 강호정 교수는 ‘사회적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성차는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그 원인은 사회적인 것인지 아니면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독자의 몫’이라며 한 발 물러섭니다.1) 그러나 그 논의 자체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에 또 다시 한국식 개발독재가 주요인으로 등장합니다. 해방 후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사회는 여성의 지위에 관한 논의들이 급격하게 변화해 왔으니 이에 대한 ‘과학적이고 건설적인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의 차이에 관한 문제가 군대에 갔다 왔는지의 여부, 애를 낳을 수 있는지 없는지와 같은 저급한 인터넷 댓글 수준’에 그치거나 한국사회를 남성 중심의 사회라고 규정하고 ‘여성 우대정책이 시급히 필요한 사회라고 못박아버리’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물론 그 극단적 치우침은 압축성장 및 이식된 근대화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성차에 대한 논의가 중요하다고 가정하고 킹즐리 브라운의 주장과 그가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소개한 페미니스트들의 반론을 정리해 봅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의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인간 본성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무한정으로 가변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개개인의 자율성과 존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남녀의 차이는 ‘통계적’이지 ‘일반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2) 최근 30여 년간의 생물학 ․ 심리학 ․ 인류학의 성과는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적 관점, 그러니까 동물의 행동은 생물학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행위는 생물학과 관련이 없다는 생각을 뒤흔듭니다. 인간도 동물인데,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며 건방을 떨었던 것이죠. 저자는 ‘유리 천장(glass ceiling)'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합니다. 유리 천장이란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회사 내의 보이지 않은 장벽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사회학적인 것임을 전제합니다. 저자는 당연히 이러한 논의에 반대하죠. 이 책의 말미에 저자는 이 용어가 적절치 않다며 ’거미줄 천장(gossamer ceiling)'이라는 비유를 제안합니다. 이 비유는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회학적’으로 교묘하게 은폐된 것이 아니라 여성들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점과 그 차별 장벽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헤치고 나갈 수 있다는 점을 함의합니다. 즉 여성들이 고위직으로 올라가지 않는 것은 생물학적 진화에 따른 성향에 근거한 선택이라는 것이죠.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추적하는 가장 생물학적이고 근본적이 방법은 생식 전략의 차이에 따른 ‘성 선택(sexual selection)’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성은 자신의 환경 적응 경쟁력을 상대방 성에게 제시하기 때문에 이를 다루기 위한 진화 메커니즘에서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이 성 선택의 의미입니다. 성 선택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3) 남성은 원래 배우자가 임신했다 하더라고 다른 여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 이 논의는 생물학적인 것이지 윤리적인 것이 아니니까 남성의 외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라며 흥분하실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 생식의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성은 생식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반면 여성은 임신 기간 중에는 다시 임신할 수 없으므로 남성처럼 생식의 기회가 적습니다. 따라서 한 아이에게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생식 성공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즉 남성과 여성의 생식 전략은 다른데, 전자는 교미에, 후자는 양육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성 선택의 논리는 사회적 성공에 대한 남녀간의 편차를 새로운 시각으로 설명해 줍니다. 인간사회에서 남성의 생식 성공을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가 사회적 지위와 자원에의 접근성인데, 이를 위해 남성은 경쟁적으로 사회적 성공을 추구한다는 것이죠. 반면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도 생식의 가능성이 제한되어 있기에 남성보다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자가 주장하는 남녀의 차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공격성’인데 이때 공격성은 ‘남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뿐만 아니라 ’단정적임‘, ’경쟁성‘, ’성취 지향성‘, ’주도권 추구성‘과 같은 특성도 포함’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제시하는 차이는 ‘외골수적인 성격’입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훨씬 외골수적이라고 합니다. 이는 로렌스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던 발언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서머스는 여성이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발언을 해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대학 총장직에서 사임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진화생물학의 연구 결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하는 시각이 달랐던 것이죠. 예를 들면 한 대학에서의 과학 영재인 남학생과 여학생은 선택하는 과목이 다르다고 합니다. 남학생들은 수학과 과학을 자신의 전공 분야로 선택하는 경향이 훨씬 많고 여학생들은 남학생들보다 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수학이나 과학 분야에서 최고수준에 오르는 남성이 여성보다 많게 되는 것입니다.4) 또 남성은 여성들보다 훨씬 더 규칙 지향적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남자아이들의 놀이 행위 중 약 65%가 공식적인 시합임에 비해 여자아이들의 경우에는 35%에 그쳤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하네요. 이는 여자아이들은 경쟁보다는 협력을 좋아하고 남자아이들은 협력보다는 경쟁을 좋아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더 위험부담을 기꺼이 수용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남성들이 지위 ․ 자원 ․ 배우자를 차지하기 위해 위험 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면 장래의 생식 성공의 관점에서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5) 그래서 남성들이 육체적으로 위험한 행동에 훨씬 더 많이 참여한다고 합니다. 1971년에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모든 나라의 조사 연령층 모두에서 남자아이의 사망률이 여자아이에 비해 높았고 평균적으로 남자아이의 사고 사망률이 여자아이의 두 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성이 어느 곳에서나 더 많은 양육 행위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감정이입을 잘한다는 점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사람-지향적인 반면 남성은 물건-지향적이라고 저자는 결론 내립니다. 이러한 성차에 대한 생물학적 근거에 대한 논의는 너무 전문적이라 요약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게 출발한 남성과 여성의 생명은 이후 성호르몬의 영향에 따라 성차가 나타난다는 사실만 밝혀둡니다. 이제 사회적 환경에서 성차가 드러나는 경우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저자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만약 각각의 문화권에서 남녀간의 차이가 동일하게 발견된다면 그 차이의 원인은 사회학적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이라는 것이죠. 저자가 주목한 사회는 페미니즘적 이념을 바탕으로 시작된 ‘키부츠 운동’입니다. 키부츠 운동의 전제는 남녀의 성차를 강요하는 사회적 구조 - 불평등한 성 역할과 여성의 가사노동의 의무 - 를 제거하면 남녀간의 성차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키부츠에서는 여성을 집안일에서 해방시키고 정치활동에도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참여토록 했습니다. 양육은 집단 사회화를 지향하는 어린이집에서 맡았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치적 권력은 남성들이 차지하기 시작했고 여성들의 참여를 꺼렸습니다. 남성은 육체노동에, 여성은 서비스 부문에 주로 종사했습니다. 심지어 엄마들은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키우는 것에 점점 더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원형으로의 회귀’는 오히려 바깥 현실보다 더 큰 형편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키부츠의 실험 결과로 확인된 것은 성 역할이라는 것이 단순한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근원을 갖고 있다는 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키부츠의 구성원들은 성적평등이라는 정신을 부정해서 전통적인 성 역할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더 많은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기에 다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저자는 남녀의 성차는 생물학적인 진화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남성은 단정적인 성격, 경쟁성, 주도성, 억압에 반발해서 저항하는 성격을 주로 보이고, 여성은 양육성, 따뜻함을 제공하는 것,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주려는 정성 등의 성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성공의 잣대인 승진율의 차이도 생물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여성의 승진율이 낮은 것은 사회적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기 - 이 동기는 물론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로 얻어진 여성의 성격 및 성향에 기인한 것입니다 - 의 차이에서 유래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남성적 성격과 성향을 보이면 유사하게 승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저자의 결론에 무조건 동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자는 ‘동기의 차이’를 생물학적인 근거에서만 찾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적 진실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 직장인이 전근을 권유받았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승진을 위해서는 기꺼이 전근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성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여성의 생물학적 성향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여성이 전근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남편과 가족의 압력, 가족을 희생하면서까지 일을 한다는 사회적 편견 등의 사회적 요인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공한 인생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시각이 다르다는 주장은 강경한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종종 반박됩니다. 가사나 양육을 통해 여성이 자기완성에 도달한다는 주장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의 ‘강요된 선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앞에서 제시된 키부츠의 실험에서 반박된 바 있습니다. 평등한 조건에서도 남성은 주로 사회적 활동에, 여성은 주로 가사 활동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성은 일을 가정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고 남성은 가정을 일에 맞추려고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오해를 받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성의 ‘계속적인 보살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성의 사회적 성공만큼 여성의 가사나 양육을 평가해준다면 이런 오해를 받지 않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까지 인간 사회는 여성의 양육이나 가사 노동을 무시했거나, 아니면 더 교묘하게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말로는 양육이나 가사노동이 위대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제대로 평가 해주지 않았고, 그러면서 남성은 가사나 양육 활동에서 가짜 ‘면죄부’를 받았던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인간 본성에 대한 생물학적인 견해에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그러한 관점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역할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반면 사회화 관념은 ‘인간 자율성과 존엄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념과 일치’하기에 별 의심 없이 수용됩니다. 그래서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투덜댑니다. 왜 생물학자들만 성차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하냐는 것이죠. 사회학자들의 주장은 변변한 근거도 없이 수용되는데 말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주장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평등’은 사회-경제적 차원에서의 ‘평등’일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는 뜻은 아닐텐데도 그러한 관념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저자는 마초나 극우적 인종주의자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생물학적 성차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각자의 ‘인생 성공’과 ‘자기완성’을 해나가자는 것입니다. 저자의 주장은 타당하기는 하지만 현실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사회적 역학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곧 사회적 ‘차별’을 없앨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출발점인 것은 맞습니다. 다만 사실이 이러니까 현실도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주장입니다. 진실은 언제가 통한다는 신념만을 믿고 그 주장만을 반복하는 것은 현실에 발 딛고 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직무유기에 해당합니다. ‘악성 마초증후군에 시달리는 남성을 대항하는 무기로 저자의 주장을 허리춤에 차고, ‘여성성’이 더 이상 ‘남성성’의 대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정받는 사회를 위해, 그리고 ‘여성가족부’가 자체 해산할 그런 사회를 위해 ‘사회적-현실적’ 행동에 나서라’는 외침이 제가 이 책의 행간에서 발견한 ‘다윈의 대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