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낙 오래전부터 회자되어서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든 '무서운 얘기' 하나.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고 암매장을 했다.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엄마를 찾으며 보채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아들은 며칠이 가도록 엄마를 찾지 않았다. 그게 궁금해진 그가 이유를 묻자 아들이 대답했다. "엄마? 아빠 등에 업혀 있잖아" 이제 이 유명한 이야기의 설정 몇 가지를 바꾸어 보자. 1) 아들은 아빠가 엄마를 죽인 걸 알고 있다. 2) 아들은 아빠의 등에 업혀 있는 것이 실제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원혼임을 알고 있다. 3) 아빠는 자신의 등에 아내의 원혼이 들러붙어 있는 것을 알지만 애써 부정하고 있다. 4) 어느날 아들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아빠, 엄마가 등 뒤에 귀신이 되어 달라붙어 있는 걸 계속 모른 척 하는거 힘들지 않아?'라고 묻는다. 이 몇가지 설정의 변화가, '원작'에 나오는 아들에 비해 훨씬 더 '잔인하고 섬뜩한' 아들을 만들어주었으리라 믿는다. 자, 조금 번거롭지만 이번엔 이 '섬뜩한 아들'의 캐릭터에 대한 몇가지 설정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보기로 하자. 나이는 삼십대 후반으로, 성별은 여성으로, 국적은 프랑스로, 직업은 작가로. 내 말대로 하셨는지? 자, 그럼 사인이라도 한 장 부탁해 보시길 바란다.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는 그 여인이 바로 <적의 화장법>을 쓴 그 유명한 '아멜리 노통'이니까. 아멜리 노통은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속 아들이 아빠의 등 뒤에 달라붙은 엄마의 원혼을 보듯, 아멜리 노통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바로 옆에 '늘' 데리고 다니는 '적(敵)'을 본다.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불행히도 당신은 이 적의 존재를 모른다. 당신이 어딜 가든, 당신의 바로 곁에서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당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당신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제롬 앙귀스트'도 그랬다. 공항대합실에서 '텍스토르 텍셀'이 불쑥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는. "비행기 이륙시간이 이런 식으로 지연되는 건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비행기가 연착되고 있는 공항대합실에서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넬 때 이보다 더 무난하고 평범한 질문은 없으리라. 그러나 이 평범한 질문은 '제롬 앙귀스트'의 운명을 바꾼다. 질문을 한 사람이 다른 이였다면 평범하기 그지 없었을 이 질문이 '텍스토르 텍셀'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텍스토르 텍셀'이야말로 평생 '제롬 앙귀스트'를 쫓아다닌 '적'이기 때문이다. 평생 자신을 쫓아다닌 적을 왜 제롬 앙귀스트는 못 알아보았을까? 이 질문은 어렵지 않다. 이 소설의 제목이 바로 답이 되어준다. 그렇다. '적'은 곱게 '화장(花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알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텍스토르 텍셀'은 이 가공할 '화장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화장법이란 보편적 질서의 학문이자 이 세상을 결정하는 지고의 도덕률이라오." --114p 정의도 거창하지만, 참 무서운 위력이 아니던가. 바로 곁의 '적'을 '적'인 줄 모르게 하는 화장법이라니! 그러나 그 위력보다 더욱 무서운 비밀이 있음을 아멜리 노통은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우려섞인 목소리로, 걱정하는 목소리로 일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설정을 바꾸어 '섬뜩해진 아들'처럼 비웃음과 냉소를 얼굴 가득 띄우고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봐, 당신의 적이 보이지 않지? 당연해. 그건 내가 앞서 말했다시피 그가 곱게 화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거기에는 재미있는 비밀이 하나 더 있어. 한 번 들어볼테야? 자자, 놀라지 마. 그 적은 자기 스스로는 화장을 하지 못 해. 그 적을 매일매일 곱게 화장시키고 있는 건 말이지, 다름아닌 바로 당신이라구. 아니라고 말하는거야? 저런저런! 내 눈에는 보이는 걸. 지금도 당신은 당신의 적을 정성껏 곱게 화장시키고 있잖아. 그 적은 그런 당신을 빤히 쳐다보면서 비웃고 있고. 호호호! 오늘따라 당신의 적은 화장이 곱게 잘 먹는데?" 당신의 눈에는 당신의 적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당신은, 당신의 적이 하고 있는 화장이 망가질까봐 그의 볼에 분가루를 정성껏 펴 바르고 있는데도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멜리 노통이 그런 당신을 본다면, 당신이 해주는 화장을 즐기며 당신을 비웃고 있는 당신의 적도 볼 것이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그녀와 당신의 적은 싸늘한 웃음을 교환하리라. 아멜리 노통은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충분히 심술궂다. 나처럼 붙임성 좋은 사람으로 하여금 '오늘 날씨 참 좋네요. 그렇죠?'하며 말을 걸어오는 이를 '혹시 이 사람이?'하며 의심하게 만들 정도기에 감히 해 보는 말이다. operion이 너무 실없는 놈이라구?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비웃지는 말자. 지금도 당신의 바로 옆에서 그런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당신의 적이 불쑥 말을 걸 핑계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아멜리 노통에 의하면 그건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의 대사는 대략 이 정도 되겠지. "하하, operion이란 친구 참 실없는 친구네. 소설 한 권 읽고 왠 호들갑을 이렇게....그나저나 요즘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던가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아주 위험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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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적의 화장법을 읽은건 고3 때였다. 한참 공부해야 할 그 해 여름방학에 난 아멜리 노통의 책을 읽고 있었다; 가장 처음 읽은 책이 바로 이 적의 화장법이다. 한참 공부에 부패해가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후로도 아멜리 노통이 쓴 몇 권의 책을 더 읽어보았지만 역시 처음에 읽었기 때문인지 이 책은 유난히 내 머리속에 더 각인되었다.
당시 진로를 고민하던 나는, 친불론자(?)인 홍세화님의 책에서 보인 프랑스의 장점들과 노통의 책에서 받았던 문학적 충격;의 압박에 못 이겨 (게다가 정신분석학을 공부하셨던 윤리 선생님의 영향도 있었다;;)다소 오버스럽게도 생전 생각지 못한 불어를 전공하겠다는 엄청난 결심을 하고 말았다. 결국 2학기 수시는 모조리 불어과, 불문과로 접수했고 그 중 가장 가고 싶었던 한 대학은 면접까지 갔으나 막판에 불합격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다행이다^^;) 다행히 수능 이후 내 선택이 얼마나 감정적이었는가를 깨달았고 남은 2학기 수시 면접은 모두 불참; 아까운 수시 접수비용을 모두 허비하고 말았다.
물론 내 뼈아픈 과거가 전적으로 아멜리 노통 때문은 아니었지만 여기에 아멜리 노통이 약간 기여를 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매일매일이 단조롭고 긴장상태의 연속이었던 그때의 나에게 이 책의 반전, 반전과 심리적 묘사의 탁월성은 다른 어떤 고전보다도 유쾌, 상쾌, 통쾌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훨씬 자유롭고 편한 대학생활을 누리고 있는 지금 이 책을 읽었더라면 똑같은 감상을 느낄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단언한다. 어쩌면 한번 읽고 말 말초적 문학;이라고 무시해 버렸을 지도 모를일이다. 책이든 영화든 공연이든 감상이란 언제나 개개인 생활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할 테니까.
잡설이 길어졌지만^^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내용도 어렵지 않고 분량도 길지 않으니 한번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어쩌면 나처럼 아멜리 노통의 매력에 푹 빠져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몇 권의 책을 더 읽은 지금의 나는 노통 특유의 문체에 조금 질린 상태이다. 늘 그랬듯이^^) [인상깊은구절] 뭐라 설명할 수 없을 그 자살행위를 목격한 증인들은 자세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벽에다가 머리를 처박을 때마다 그 남자는 똑같은 고함소리로 자신의 동작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외치던 소리는 이런 것이었다. "자유! 자유! 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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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 이 갖는 기본적인 사고는 랭보의 "나는 타자다 " 와 사르트르의 " 타자는 곧 지옥이다. " 라고들 한다. 얼마전에 읽은 '오후 4시 '는 정확하게 타자는 지옥이라는 그녀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전원생활을 누리기 위해 은퇴하고 이사온 곳에서 마주한 끔찍한 이웃과의 이야기는 형식에 변주만 있을뿐 '적의 화장법'과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서른이 훌쩍 넘으면서 나에게 묘한 변화가 생겼다. 그토록 좋아하던 밀란쿤데라 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번역소설 난독증이다. 어느순간 번역소설을 이해하는 전두엽 한부분이 딱딱하게 굳어버린것처럼 글자만 읽을뿐이지 내용을 탐닉할 수 없었다. 그래도 동양권의 무라카미 하루키나 위화는 어느정도 가능하지만 영미,불란서권 소설들을 바라보는 내심정은 마치 아름다운 미녀를 앞에 두고 더 이상 발기하지 않는 남근을 내려다 보는 기분이었었다. 아마도 내가 아멜리 노통의 책을 들추어 본것은 온갖 수식어 들이 따라붙는 꽤나 유명세를 타는 프랑스 소설가라고 하는데 이 책속에서 혹시나 잃어버린 감각을 뒤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때문이었다. 회춘을 하겠다고 어린 여자아이를품에 안는 추악한 늙은이 처럼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참패다. 충분히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알고, 독자로부터 어떤 감상을 끌어내고 싶어하는지도 알겠는데 소설을 그냥 알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별의미가 없다. 그럼 뭐하러 소설을 읽는가 좀더 쓸만한 논픽션을 읽지.
나는 나이들면서 무척 현명해 지는줄 착각하면서 정작 융통성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아집 투성이의 연장자라든가 과거를 돌이켜 볼 줄 모르는 나이든 사람들을 보면 화가치밀어 올라 공연스레 나이든 사람들을 싸잡아 원래 그렇다고 흉을 보게된다.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로맨스라고 나는 나이들어서 현명해지고 남은 나이들어서 고집만 늘어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지나가던 개도 웃을 노릇이다.
이런 나의 태도가 겁이 나서 잃어버리는 감각들에 미련을 갖고 있는것 같다. 트랜드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연히 젊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말이다. 하지마 이미 지나버린 세월의 감각을 억지스럽게 되찾아서 무얼 하겠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어리석은 욕심일 뿐이다.
아멜리 노통의 '오후 4시 '' 적의 화장법' 은 대단히 선명한 이미지의 책이다. 그리고 한 10년쯤 내가 밀란쿤데라에 빠져있던 시절에 봤더라면 훨씬 좋았을것이다. [인상깊은구절] 남자는 포마드를 잔뜩 바른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매끈하게 가다듬었다. 예술의 규칙 안에서 희생자와 맞닥뜨리기 위해서는 우선 그럴듯하게 보여야만 하는 법 |
| 크리스마스 이브를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반납을 하고, 하루종일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형과 형수에게 반납 했던 크리스마스를 그래도 빛나게 해준 건 '적의 화장법'이었다. 일단, 가장 크게 눈에 띄는 부분은 작은 책과 큰 글자! 이것이야 말로 내 스타일!~^o^d 하지만, 그래서 아쉬웠다고 할까... 책을 집어들고 난 다음부터 마지막페이지를 넘기기전까지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이 소설은 제롬 앙귀스트와 텍스토르 텍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공항 대기실에서 시간을 때우던 제롬 앙귀스트. 그런 제롬에게 끊임없이 대화를 요구하는 '네덜란드인' 텍스토르 텍셀. 옮긴이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의 정신상태는 '황당함-역겨움-섬뜩함-충격'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끊임없이 네덜란드인임을 말하며 대화를 요구하고 그럴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텍셀에게서 어의없음과 황당함을 느꼈고, 이후, 텍셀의 이야기에서 역겨움(정말 읽다보면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을. 그리고 섬뜩함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서 나누었던 대화에서 가진 의문점들을 정해진 각본처럼 정리하는 텍셀에게서 충격 그 자체를 맛보게 되었다. 텍스토르 텍셀.. 그는 누구일까....... "난 텍셀이오.텍스토르 텍셀.네덜란드인이오" |
| 아밀리 노통이라는 귀여운 불란서여인의 말잔치에 초대를 받은것은 지난 토요일 서울에 다녀오는 고속버스 안에서였다.약150 페이지 남짓되는 이 빨간 작은 책의 제목이 날 이끈것은 잠시 열어본 페이지안의 타자에 대한 정의 때문이였다. 내가 요즘 타자라는 용어를 들어볼 수있는곳은 온통 오리엔탈과 탈식민주의 라는 다소 무거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안에서 였는데 이 귀여운 여인의 타자에 대한 정의는 랭보의 선언 "나는 타자다,"혹은 "타자는 곧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통찰을 쫒아간다. 하지만 그 기괴하고도 촌살적인 그녀의 잔치를 향유하다 보면 결국에 이르는 것은 신랄한 인간 정신에 대한 조소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비애를 느꼈다. 한 인간안에 존재하는 중심부와 주변부 그리고 주변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짜맞추어가듯 파멸해 가는 마지막의 중심부 그리고 돌아서서는 씁쓸한 미소, 텍스트상의 주변부의 이름도 그래서 텍스트로 텍셀이라 이름 지워진것이 아닌가 싶다. 조지 오웰의 1984 의 마지막 장면이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맞서 떠올랐다. 존재하지 않는 대형이라는 거대한 지배자(여론은 공산주의를 가장 잘 읽어내린 소설이라 하지만)에 굴복하는 주인공과 자신의 또다른 자신인 타자에 의해 살인을 당하는 적의 화장법의 주인공의 모습이 인간의 정신과 이성의 세계의 불완전성를 대변한다는 맥락에서는 그의미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두 기이한 발상에의 전개라 한 번 잡은 이책을 단숨에 읽어내렸지만 그 여운은 꽤 오래 지속되고있다. 그런 의미에서 몇자 적어 보았는데 그녀의 잔치에 스스로를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자리잡은 악마적인 자아가 어느날 타인의 모습을 하고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래서 한껏 그를 조롱하고 그의 악랄한 행동을 비판하고 어이없어 했다면? 하지만 결국 그가 나이고, 내가 그였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악마적 자아를 묵인하고 망각한다. 그럼으로 해서 자신의 의로운 면들만 기억하고 내보이며, 악한 모습은 남들 앞에 꺼내놓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깨닫지 못한 채 그 악마적 자아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날 내가 허술해진 틈을 타 그 악마적 자아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한번 말을 시작한 그는 내가 자신의 존재를 깨달을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내가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잊고 있던 나의 한 부분에 내 모든 악랄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가볍던 내 자아는 한꺼번에 커다랗게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큰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아멜리 노통의 저작에 관한 인터뷰에서 어느날 불현듯 “자유! 자유!”하는 외침이 자신의 안에서 들렸고 그것이 이 작품의 시발이 되었다고 한다. 자유… 자유… 진정한 자유란 자신의 악한 모습으로부터, 그리고 그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커다란 죄를 지은 사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악한 죄를 짓는 사람, 그러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경우 기분은 매우 불쾌하지만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나로부터 숨을 수가 없다. 더 이상 숨을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이 내 앞에 너무나 적나라하게 나의 악한 자아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심정은 마지막 앙귀스트의 모습에서 읽을 수가 있다. 확률이 50%인 내기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싸울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아득한 절망과 공포. 텍스토르의 머리를 벽에다 찧으면 그가 가진 마음은 단지 그 악마를 향한 증오심과 죄책감으로부터의 회피가 아니었다. 그 악마가 자신임을 깨달은 고통에 (그는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 무거운 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바로 죽음의 벼랑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우리는 때론 며칠씩 고통스러울 정도로 꽤나 큰 죄를 짓기도 하고, 사소한 죄들을 수시로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의 망각의 상자 속에 담겨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때때로 그 망각의 상자가 열리는 순간에도 우리는 애써 그것을 다시 닫으려 하거나 일부분만 들추어볼 뿐, 정면으로 그것을 상대하려 하지 않는다. 죄책감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알기에 그것을 굳이 내 머리 위에 올려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없는 것으로 해버릴 수는 없다. 분명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 나로부터 파생된 나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망각 속에서 자유 아닌 자유를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루며 내가 죄책감으로부터 탈피했을 때 그것은 진정한 자유이다. 죽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인가, 망각이라는 위선의 자유 속에서 안일하게 살아갈 것인가? 이 모두는 우리의 “자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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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아멜리 노통"을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그럼 이 책 읽어 보셨어요? 한 지체로부터 건네 받은 "적의 화장법" ... 내 작은 사고의 틀을 깨트려 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온 몸에 전율을 느끼며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레 넘겨갔습니다. 거기에는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제롬 앙귀스트의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의 거친 숨소리였습니다. 목사의 독서는 지극히 편격 적입니다. 신앙에 관계되었거나 교회나 성경에 관계된 서적에 제한적이다 보니 마음도 그만큼 비좁아 지는 거 같습니다. 나름대로는 성경 밖의 책들을 읽거나 시집이라든지 문학에 관한 서적들을 기웃 거지만 말 그대로 기웃거림에 그칠 정도입니다.
내겐 낮선 아멜리 노통... 제목도 낯설고 이름도 낯섭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이질감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프랑스를 방문하였을 때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말이 통하지 않아서 허덕였던 일들... 프랑스인들의 자만심.... 그런 것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가 봅니다. 버린다고 버렸지만 무의식중에 나오곤 합니다. 영화를 보더라도 프랑스 영화면 가능하면 보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봐서 아직은 내 마음이 너무 비좁다는 것으로 표현할 수밖엔 없습니다. "아멜리 노통의 매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으리라. 프랑스적 정신과 벨기에적 유머, 일본적인 예의(그녀는 일본에서 태어났음) 의 절묘한 혼합..."(p164) 여인 특유의 경험으로 그녀는 자신의 글 쓰는 과정을 입덧이라(p160) 표현하였습니다. 남성으로서는 입덧의 개념만 이해할 뿐이지 아마도 신앙인들의 십자가를 지는 행위로 이해하면 될까?
"열두 살 때부터 내 안에는 창조적임과 동시에 파괴적인 엄청난 적이 탄생했다. 그 적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디오니소스적이고 비도덕적인 무언가가 아닐까? 결국 글 쓰기라는 것도 보기엔 바로 그 적과의 결투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의 무기는 곧 나의 문체가 되는 셈이다. 그저 삶을 포기하느니 나는 이런 창조적인 대결에 나의 삶을 걸길 원하는 것이다. 아니면 잘 못 이루는 밤 동안에 자살의 욕구에 시달렸을 것이다." (p165) 신앙의 위대한 스승 사도 바울 역시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바울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장 25절) 사람은 누구나 또 다른 자신과의 싸움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참된 나와 거짓된 나와의 싸움에서 언제나 합리적인 것과 안목적인 외부의 내가 승리를 하게 됩니다.
보이는 자신, 그것은 참일 수 있지만 거짓일수 있습니다. 역시 보이지 않는 자신도 참과 거짓의 소용돌이 속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보이는 내가 무엇을 하자고 하면 보이지 않는 참 나는 그것을 하지 말자고 합니다. 보이는 나는 하고 싶지 않으나 보이지 않는 나는 양심에 가책을 주어 그것을 하도록 불안케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따라옴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나 제롬 앙귀스트, 보이지 않는 나 텍시 토르텍셀. 보이는 행복의 열매 이사벨... 이들은 책의 주인공들이지만 내 안에서 이렇게 결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언제나 제롬은 신앙적이었고 반듯한 예절과 품위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텍시는 불안하였고 나의 옛 모습이 거울 되어 내 작은 삶을 옭아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사벨은 여전히 무지개와 같은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잡을 듯 잡히지 않는 비 현실 속에서의 꿈과 이상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넓이는 끝이 없기도 하거니와 좁기로 말하면 세상에서 가장 비좁음일 것입니다. 목사의 마음은 더욱 그러합니다. 혹이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다른 목사님들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비좁기에 세상의 추위를 쉽게 느끼기도 하고 더위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화장법(Cosmetigue)이란 단순히 미용이라는 의미의 장을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의미의 보편적 질서, 즉 코스모스(Cosmos)를 환기함과 동시에 그 다의적 차원에서 일종의 "가면" 즉 위장을 암시하기도 한다" (pp159-160) "화장법에 의거한 당신의 운명과 의당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내가 당신을 구워삶기라도 하려는 것으로 생각하는군요, 자, 보세요, 나는 죄인입니다. 모든 죄인이 다 죄책감을 가지는 건 아니지만 일단 그걸 갖게 되면 오로지 그것밖에는 생각할 수 없답니다. 죄인이 처벌을 향해 가는 것은 강물이 바다로, 피해자가 복수로 진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롬 앙귀스트, 만약 당신이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미완의 인간으로 남는 것이고 자신이 선택된 바를 책임지지 않는 것이며, 타고난 운명을 맞이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p115)
제롬과 텍시의 긴 이야기 결국은 자신과의 대화였으며 그것은 나와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을 연결해 주었습니다. 잊어버리는 나의 참된 모습.... 아니 잊어버리고 싶은 나의 잘못된 모습들... 그래서 나는 목사라는 사회적 인격으로 포장하였고 지성이라는 또 다른 두터운 옷으로 포장하였습니다. 결국 내 꿈을 죽인 것도 내 자신임을 깨달았습니다. 도통의 깊은 늪 속에서 허덕일 무렵 무릎을 치며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참 내가 자유를 느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적의 화장법은 이렇게 내 안에 있는 적들을 물리쳐 주었습니다. "1999년 3월 24일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의 이륙을 기다리던 승객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광경을 목도했다. 이륙 시간이 특별한 설명도 없이 세 번씩이나 거듭 연기되자, 승객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로비의 한쪽 구석으로 가 수 차례에 걸쳐 무작정 벽에다 머리통을 들이받은 것이었다. 그는 어딘지 예사롭지 않은 난폭성을 보이며 잔뜩 흥분해 있었는지라 감히 누구도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죽음이 닥칠 때까지 계속했다." (p155) 내 안에 있는 나... 그대에게 자유를 주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상깊은구절] 열두 살 때부터 내 안에는 창조적임과 동시에 파괴적인 엄청난 적이 탄생했다. 그 적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디오니소스적이고 비도덕적인 무언가가 아닐까? 결국 글 쓰기라는 것도 보기엔 바로 그 적과의 결투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의 무기는 곧 나의 문체가 되는 셈이다. 그저 삶을 포기하느니 나는 이런 창조적인 대결에 나의 삶을 걸길 원하는 것이다. 아니면 잘 못 이루는 밤 동안에 자살의 욕구에 시달렸을 것이다. |
|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어떤 말을 들려줄 수 있을까? 우리가 서평을 찾는 이유는 이 소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데에 있다. 만약 다른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이 소설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들었다면, 이러한 서평보다는 그 사람들의 말에 따라 책을 선택하거나 혹은 그러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이유는 전자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는데 따르는 필연적인, 혜택의 그림자일 것이다. 이때 서평을 올리는 독자들의 반응은 제각기 다르다. 사실 가장 객관적인 서평은 출판사 리뷰나 책 소개란의 내용들일 것이다. 그런데도 독자들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더 추구하는 것은 가장 객관적인 내용들은 오히려 선택에 있어서 확신을 주지 못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리뷰란에서 조차도, 책의 광고를 위해 더러 과장되는 일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는 같은 독자들의 서평을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아니 신뢰라기보다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더 짙게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몹시도 망설여진다. 서평은 결코 감상문이 아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주어도 안 된다. 물론 논설문 같은 지식을 얻기 위한 책에 대한 서평은 가장 중요한 핵심들만을 뽑아내는 것이 주요 사항이겠지만, 소설과 같이 문학적 쾌감을 위한 책의 서평에서는 결코 모든 것을 다 알려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의 느낌이 어떻다, 좋은 책이다, 작가의 역량이 돋보인다' 이런 식의 말들은 선택에 있어서 우격다짐 식의 강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다음과 같은 조건사항을 엄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께 강한 호기심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 호기심의 제재가 되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것이어도 좋고, 책의 내용이어도 좋지만, 분명한 통일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이 호기심을 위해 모든 핵심적인 사항들은 교묘하게 감추어야 한다. 처음 책을 자신의 손으로 열어 볼 때의 모든 쾌감을 저하시켜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러면서도, 책의 서곡을 분명하게 암시해야만 한다. 우선 객관적이 정보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저자인 아멜리 노통에 대한 정보는 내가 구태여 설명하는 것보다는 출판사 리뷰를 택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권하고 싶다. 마찬가지로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에 대한 부분들도 내게는 그것을 자세히 묘사해야하는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녀는 브뤼셀 자유대학에서 라틴 철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이다. 철학을 전공한 그녀가 정신분석을 외면했으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때문에 라틴철학과 정신분석의 기본적인 입장에 대한 견해들이 소설에 등장한다고 우선 고백한다. 이런 분야에 대한 조예가 깊을수록 소설 속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라틴 철학을 알면 알수록 대화 그 자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정신분석을 알면 알수록 작품 전체를 이해하기가 쉬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한 요건인 것은 아니다. 원주에서 이미 상세히 주석을 달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쉬운 이해를 위한 주석이기에 그 근본 내용까지는 피부에 와 닿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들이 고안되었는데, 이 장치를 아멜리 노통은 적의 화장법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내가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두 번째 요건을 어기게 되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려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아멜리 노통은 여류 작가다. 여류 작가의 눈에 비치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어 줄 존재로서 남성이 등장한다. 물론 나는 그녀의 그 구현화하는 방법에 있어서 찬사를 보낸다.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바라본다고 해도 전혀 어긋나는 점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에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그녀의 감탄할 만한 직관과, 논리적 판단, 거부감 없는 정직성이 드러나 있다고 밖에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여러분이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의 주관적인 견해들이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소설을 써 본 적이 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사실상 주제로만 본다면, 놀라울 만큼 그녀의 소설과 비슷한 아니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고 해도 무난할 정도였다.(당시 본인은 아멜리를 알지 못했다.) 나는 소재를 찾는데 있어서는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못했지만, 문제는 그것을 풀어 가는 방식에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정신분석의 편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부족한 지적 교양에 한 숨을 쉴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러한 감탄과 경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엔 다소 비판적인 시각에서 본 것인데, 사실 '적의 화장법'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독창적인 소재는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 소설에 유행하고 있는 '엽기'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기도 하지만-이런 것들은 수박 겉 핥기에 지나지 않는다. '외현' 만을 바라보지 말라고 나는 강하게 경고한다, 난 근본적으로 이 소설의 최고의 가치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 있다고 역설하고 싶다. 물론 나는 이 모든 것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할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남길 수 있는 주관적 견해는, 이 모든 신비로운 경험은 얻으려고 하는 자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적의 화장법의 이유를 알게 된다면, 적이 내부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적마저 자신의 내부로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
| 알고 싶지 않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리고. 소심하고 비겁한 마음에서 야기된. 자신의 일부분의 타자화. 그리고. 그 "타자"는 "나"의 "적"이된다. 내가 아니었으면 하는. 그런 내가. 사람마다. 없지는 않다. 그것을 어떻게 어떤식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 못본 척 하느냐. 어찌되었든. 그것은. 개인 취향 문제다. 나는 자신의 적으로 돌렸고. 다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믿으려하지 않았고. 결국은. 끔찍한.자살이 되었다. 뜨끔했다. 내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을.맞이하게 된 것을.정신적인 것으로 대체하여 생각을 하면. 이것은 그닥 비현실적인 일은 아니다. 내가 없애버리고 싶어했던. 내 자신의 어떤 부분 때문에.내 자신 전체가 고스란히.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게다. 섬뜩한. 나와. 또 다른 나와의 대화. 또 다른 나의 화장법. 그것은 나를 조여오지만. 단지 비난하면서. 역겨워하면서. 피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완벽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사람들아.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나를 적으로 만들 것인가? |
| 이 소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수 있겠네요..소설을 얼마간 읽어가다가 책 뒤의 역자의 말을 읽으면서 대충 대화를 나누는 두 인물이 한 사람일것으로 짐작은 했었습니다.왠지 그런 소재의 영화나 소설을 많이 봐온것으로 생각됩니다(일종의 데자부?)..굳이 말하자면 역자의 말처럼 윌리엄 윌슨이나 영화에서 흔히 봐오던 싸이코(그야말로 정신분열)를 다룬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역시 영화로 만들면 참 흥미롭겠단 생각이 들더군요..단 두 사람이 필요한 영화?아니 그렇지는 않겠죠.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아마 실루엣이나 뒷 모습으로 처리해야 됐을것이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결국 이 둘은 둘이 아닌 하나니까요. 첨에 이 소설에 대한 소개를 볼때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는 평을 해 놓아서 과연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고 그렇고 그런 철학적인 내용인가(흔히 불가에서도 말하는 모든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싶기도 했는데 그런건 아니더군요. 물론 적은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평보다는 우리에게는 양심이라는것이 존재하며 인간의 삶이란 바로 양심과 비양심의 투쟁이다,라고 말하는것이 이 책에 대한 올바른 평이 될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이 책은 마치 물엿같아서 끊어지지 않고 사실 끊기지도 않아 단숨에 읽어버렸다고 말씀하셨는데 저 역시 하룻사이에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그럴정도로 재밌고 기발하고..어느새 아멜리 노통의 팬이 되버렸습니다.소설 첫 부분 공항에서 책을 읽고있는 한 남자(짜증이 잔뜩 나있고 프랑스사람답게 시니컬한)에게 네덜란드출신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주절거리며 말을 붙입니다.곧 상상이 갑니다.여자에게 추근거리는 남자가 악마같이 싫은 존재이듯 결항된 비행기때문에 책좀 읽어보고자 하는 남자에게도 말붙이는 남자는 지옥이겠죠.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속에서 말 붙인 남자는 자기가 한 여자를 강간했고 살해했다고 하는데.. 그런 엽기적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거기에 듣는 사람은 반응을 보이고.. 이렇게 대화가 이어집니다. 책을 읽어보세요. 그리고 느껴보세요. 처음에는 기발하고 재기넘친다고 감탄하다가 이 책은 죄의식과 양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새록새록 생겨날 것입니다. 모처럼 재밌고 메시지있는 책을 읽은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