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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 죽을 권리도 있지 않겠는가 라는 사람들도 있다. 안락사에 대한 문제 때문에 한동안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긴 하지만. 더이상 삶을 영위할 수 없어 죽고 싶다는 말에 그 사람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는게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 유럽의 스위스에서는 안락사가 합법이라고 한다. 어느 소설에서도 스스로 선택한 죽음에 스위스로 향하는 내용을 보았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살아지지 않겠는가. 병들어 혹은 어쩔수 없는 사고로 죽는 경우는 인정해도 인위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혐오스럽다고 해도 그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많은 살인이 저질러지고 있다. 우리가 읽는 추리소설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찾아 움직이는 형사 혹은 탐정들의 활약과 인간의 심리에 대한 것이 아니던가. 그러고보면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자신의 마음속의 선을 내보이고 혹은 가장하고 악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선과 악의 차이, 한 순간에 결정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이 책을 알게 된건 아주 최근이었다. 이웃분의 블로그에서 이 책의 표지를 발견하고 '북유럽 소설의 걸작'이라는 표현에 이 책이 궁금했다. 작가를 알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이 책을 선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수작이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 하는 작품이었다. 또한 '내일 쓰인 소설'이라지 않는가. 그만큼 파격적인 내용을 다루었고 획기적인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티코 가브리엘 글라스라는 이름을 가진 의사. 그는 진료 시간이 끝나면 발길 닫는대로 산책을 하는 게 일과다. 매일의 산책중에 여러 사람들을 보지만 특히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레고리우스라는 목사다. 그는 그레고리우스 목사가 혐오스러웠다. 만날때마다 피하고 싶을만큼. 산책중에 만는 그레고리우스 목사는 심장이 시원찮았다는 하소연을 했다. 그의 아내 또한 어딘가 아픈듯 했다. 얼마전에 방문했다가 무슨 말을 할듯말듯 했으니 조만간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글라스에게 그레고리우스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다시 찾아왔다. 목사인 남편이 혐오스럽다며 남편의 몸에 살이 닿는 것도 싫다고 했다. 의사를 존경했다는 그레고리우스 부인은 사실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부인과에 병이 있어 남편에게 각방을 쓸 것을 말해달라고까지 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의사들은 그런 일은 할수 없겠다고 말하지만, 글라스 역시 목사가 혐오스러웠기에 그러겠다고 수락했다. 여기에서 목사 부인은 '남편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해달라는 말을 했다. 잠자리를 할 수 있는 권리,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할 수 있는 권리. 그럼 잠자리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소설이 쓰인 그때와 지금의 시대는 다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때부터 글라스는 목사를 죽이는 꿈을 꾸었다. 목사에게 젊고 예쁜 부인은 맞지 않는 것 같았고, 부인이 살기 위해서는 목사가 죽었으면 했다.
닥터 글라스는 왜 그레고리우스를 죽이려고 했을까. 자신의 권태스러운 일상에서 무언가를 찾고 싶었던 것일까. 권태로운 일상에서의 탈피가 꼭 살인이어야만 했을까. 자신이 죽일 이유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목사 부인인 헬가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살인을 꿈꾼다? 헬가가 젊고 예뻐서? 젊고 예쁜 헬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방해꾼을 없애고 싶었을까. 예순이 다 되어가는 그레고리우스에게 이제 서른살 즈음되는 헬가의 사랑을 위해? 물론 닥터 글라스가 헬가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려울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일기체 형식의 소설은 닥터 글라스의 일상과 생각들이 자세히 담겨져 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환자들을 진료하고 진료했던 환자들의 일상에서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들이었다. 혹은 열일곱 살 때 사랑했던 어느 소녀의 이야기까지 담담하게 혹은 강렬하게 자신의 감정들을 표현했다. 혹은 누가 볼까봐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며 쓰기도 했다.
인생이여, 난 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111페이지)
윌리엄 샌섬이 쇠데르베리의 소설을 가리켜 '내일 쓰인 소설'이라고 했던 이유.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제의 한가운데 있는 안락사와 낙태 문제를 거론했던 쇠데르베리의 소설을 읽을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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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동트기 직전에는 언제나 공기에 떨림이 있다. _30쪽 무더운 여름, 글라스는 스톡홀름 시내를 산책하다 그레고리우스 목사가 걸어오는 것을 본다. 목사의 외모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자신의 환자이기에 인사를 건넬 수밖에.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를 한 사람의 머리를 지팡이로 때렸다는 쇼펜하우어의 일화를 떠올린다. 그레고리우스가 어찌나 싫었던지 글라스는 의지의 힘으로 그를 죽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리란 생각을 한다. 며칠 후 목사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헬가가 찾아와 남편이 혐오스럽다고 고백한다. ‘남편의 권리이자 자신의 의무’인 부부관계가 너무도 끔찍하다고 말이다. 그들이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도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글라스를 존경하는 계기가 된 일화도, 이는 의사를 움직여 목사에게 금욕을 권고하게 한다. 서른셋의 남자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기쁨에 마음을 쓰게 된다. 글라스는 욕망을 자제하는 타입이다. 어려서부터 포부가 대단했으며, 스물셋에 의학 학위를 따자 열의를 잃어버린다. 또래보다 일렀던 사회적 성취는 감정적인 면에서는 미숙했다. 다른 성인남성들이 욕망을 토로할 때, 막연한 꿈과 욕망이 있었을 뿐이다. 천성적인 낭만주의자라 할 수 있는 그는, ‘사랑의 꿈’을 믿었고 박제돼버린 스물셋의 첫 키스를 오랫동안 간직한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아름다움을 알기에, 가질 수 없는 여인에게만 끌린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남성의 돈과 명성보다는, 사랑을 쉽게 얻는 남성에게 질투한다. 헬가의 남자인 클라스 레케를 보면서 말이다. 글라스가 느끼는 청춘에의 결핍- 자신이 정상에서 벗어난 느낌을 떠올리게 하는 레케의 이상적인 외모와 ‘잠이 들었던’ 헬가를 깨운 그의 순수한 매력… 그러나 이 감정은 그리 날카롭지 않다. 도리어 자신의 권고를 무시하고 아내에게 의무를 이행할 것을 강제한 목사에 대한 혐오, 이를 끝낼 어떤 행위를 꿈꾸게 된다. 글라스는 사실 단호하고 차가운 인물이다. 임신과 출산이 초래할 고통과 불안을 알면서도, 의사의 ‘의무’를 내세워 환자들을 돌려보낸다. 자신을 사모하는 메르텐스 양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해 별다른 반응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마르켈과 비르크와 대화는 나누지만 마음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여름 밤의 일기가 중요하다. 행복과 구원을 상징하는 ‘등불’을 외치며 깨어난 그 밤, 내면의 목소리들이 벌이는 수많은 대화들. 아주 일품이다. 무의식, 꿈은 강처럼 흘러갔지만 글라스는 그 꿈자락을 기억하고 있었고 외면하지 않았다. 시곗바늘이 없는 아름다운 회중시계 안에 이 모든 일을 끝낼 무언가를 넣었다는 사실은, 글라스의 사랑과 인생-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움, 명예와 지위- 두려움조차 불사할 수 있는 강렬한 빛. 아니, 희미한 가짜일까? 어떤 거름망도 없이, 그의 기록은 내면에서 나타났다 사그라들고 발전되는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담고 있다.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리(낙태, 안락사)와 도덕과 살인에 관한 이슈들은 지금도 불같은 논의를 일으킬 것이다. 1905년에 이런 글을 쓰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이 작품의 진가는 여름에서 가을, 겨울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글라스의 내면 묘사에 있다. 기존의 도덕 체계를 혐오하며 홀로 살아가는 이 남성은 어쩌면, 1905년 그 당시보다도 현대에 더 어울릴 법한 인물이다. 소설의 마무리까지… “내일 쓰인 소설”이라는 윌리엄 샌섬의 표현이 어울린다. 꿈과 현실이 하나가 되는 순간- 우리는 기쁨을 느낄 것인가, 두려움을 느낄 것인가? (별점 4.5/5.0)
-책을 펼치면 마주하는 이미지들에서 제발츠의 『아우스터리츠』와 브르통의 『나자』를 떠올렸다. 「번역노트」를 보니 이 작가들에 대한 오마주인 동시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라 한다. 스톡홀름의 이미지들을 위해… -「번역노트」에 대한 중역에 대한 이야기도 읽어볼 만 하다.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과 함께 읽었다. 아마도 글라스 내면의 ‘흐름’이 라벨의 흐르는 음표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추천은 스웨덴 국민 밴드 Kent의 노래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도 잘 어울린다. 기본적인 생존의 차원을 넘어선 정신문명은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예술과 문학, 음악도 모두 그곳에서 흘러나온다. (...) 효과적이든 아니든 장식용으로 또는 즐거움을 위해 제작된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모두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온다. (...) 그 근원의 이름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향한 꿈이다. _27,29쪽 추가) 리뷰 하나 더: http://blog.yes24.com/document/84077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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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없이 배회하며 스치는 바람처럼 머리 속은 온갖 상념들로 채워졌다 비워졌다를 반복하지만, 그것을 온전하게 기록하기는 어렵다. 그 스치는 생각 한 자락에서 단어 하나만 건져내도 뭔가 대단한 정신적인 걸 이룬 것 같은 건, 백일몽은 그야말로 꿈처럼 스르륵 기억과 흔적들로부터 완전하게 떠나가기 때문이다. 얄마르 쇠데르베리는 이렇게 머리속을 드나드는 떠돌이 생각들을 너무나도 실감나게 닥터 글라스의 일기장에 잘 포착하였다. 독자는 스스로를 잊고 글라스의 머리속 상념을 따라 이리저리 시대의 벽을 넘어 현재 내게도 유효할 번뇌와 사색속을 거닌다. 얄마르 쇠데르베리는 19세기 스웨덴 작가이다. 북유럽 고전문학은 어쩐지 좀 생소한듯 한데, 고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깔끔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고, 작품속에서 작가가 사고하는 방식과 독자에게 질문하는 내용 때문이기도 하다. 죄와벌을 상기시키는 어두운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있지만 작가의 독백이 심각하다기 보다는 유머러스하게 다가왔다. 본문에 언급된 스톡홀름 시의 거리와 예술작품들을 담은 작은 흑백 사진들을 삽화처럼 싣고 있어서 읽는 내내 배경에 대한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마음에 들었던 건 작품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두서없이 스치는 머리속의 생각들을 점점이 이어서 충격적인 방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글의 형식이었다. 글라스의 일기는 6월 12일에 시작해서 뜨거운 여름을 다 보내고 깊은 가을 속, 더 깊고 어두운 겨울의 초입으로 들어가기 전 10월 7일에서 끝난다. 일기는 독신으로 혼자사는 글라스의 똑같이 되풀이되는 매일의 일과지만, 그 똑같은 의사의 일상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것들,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가 하는 행동들은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안과 겉이 다른 사람이라면 위선적이고 사악한 사람들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글라스의 일기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한 사람의 내면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의사로서 지역 사회의 존경을 받고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일구고 있지만, 그의 머리속은 이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적 관습과 규범에 저항한다. 때문에 그의 일기장은 투덜투덜,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말들, 다르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던 행동들, 극복하지 못한 좌절과 상처들로 채워진다. 순간처럼 짧았던 사랑의 비극적 종말. 그것 때문이었을까. 그가 목사 부인에게 품는 감정은 지금 낯설다. 정신적 사랑만으로도 충만했던 낭만주의 시대의 사랑과도 다르다. 그는 목사부인이 그녀의 남편인 늙은 목사에게서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부간에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생각은 19세기에도 유효했을까. 동의하지 않는 섹스는 폭력이 동반할 수밖에 었으므로, 성폭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뭐 이런 개념도 아니다. 젊은 아내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 친구에게 성적 욕망을 품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고는, 그 죄책감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늙은 목사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사랑과 나이의 편차에서 생기는 성적 욕망과 애정의 조건을 외도로 채운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인생인가. 그런데 그것과는 별도로 글라스는 그레고리우스 목사를 싫어한다. 그가 목사를 싫어하는 피상적 이유는 그의 외모다. 그의 백일몽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젊고 예쁜 부인과 함께 사는 것이 부인에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그의 외모에 대한 집착적 혐오로 바뀌는 것 같다. 소설의 초반, 검진을 끝내고 산책을 나갔다가 매일 만나는 지겨운 늙은 목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마주치지 않기 위해 다리 난간에 기대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목사가 그를 알아채고 옆에 다가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젊고 예쁜 아내를 괴롭힐 것이 뻔한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목사에게 인사를 건넨다. 못생겼다. 아내가 젊고 예쁘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이 둘은 죽이고 싶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젊은 아내가 찾아와서 자신이 외도중이라 목사와 섹스를 하기 싫은데, 자꾸 섹스를 하려고 해서 미치겠다는 말을 듣자, 그를 죽이고 싶은 피상적인 욕망을 더욱 구체화시키기 시작한다. 물론 백일몽 속의 일이다. 막연한 상상을 구체화한 상상으로 디테일을 구현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그에 대한 혐오심을 심적으로 조절하는 수단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 예전에 남편이랑 싸우던 날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차가 주차된 걸 보자, 영화 <봄날은 가다>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그 반짝반짝 윤나는 남편의 차를 스윽 긁고 가는 상상을 하자, 약간의 죄책감이 증오감을 희석시켜주었었다. 의사는 그레고리우스와 싸운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악감정도 없으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근거없는 분노를 희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코믹하게 느껴졌던 그 때문이었다. 누구나 상상 속에서는 살인도 하고,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야기의 전개와는 별도로 의사의 일기를 통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논란이 될만한 생각이 다루어진다. 안락사와 낙태 등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모두 의사의 머리속에만 있다. 그의 환자들이 울며 불며 선생님 살려주세요 라고 늘어질 때 사실은 죽여달라는 소리다. 뱃속의 아기를 죽여달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에게는 의사로서의 사명과 임무, 책임 등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도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선택일 뿐 속으로는 수없이 논쟁한다. 의사로서 주어진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의무, 그리고 한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결정. 뱃속의 아이를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는 고객들과 의사로서 뱃속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무감, 이러한 상반적 상황은 . 하지만 그는 준비된 똑같은 멘트로 그런 부탁들을 거절하고, 일기장에 그 일에 대해 혼자서 논쟁한다. 그리고 후에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고객들을 보면서 또다시 깊은 상념에 빠져들어간다. 그런데 그리고리우스 부인에게만은 예외다. 그의 글 속에서 드러난 그의 신중한 성격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가 늙고 추한 목사와 엮여, 밤마다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섹스를 해야 하는 일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는 실제로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남자에게 느낀 관능적 사랑에 대한 종교적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청춘이 선물한 푸르른 사랑을 저버리고 늙은 목사에게 아무렇게나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회개하듯 바쳤다. 그레고리우스가 생각하기에 그 잘못된 선택의 근원은 아무 죄도 없는 인간에게 죄책감을 심어준 종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을 '더렵'히고 마음을 '더럽'히게 될 지 모른다는 우스꽝스러운 죄책감은 탐욕스런 늙은 목사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걸로 '용서'되는 건가. 의사 글라스가 모순적인 관습과 규율 때문에 비롯된 한 여자의 불행한 인생을 바로잡고 싶어한 것은 그녀를 향한 정신적인 사랑인 것 같지만, 일기장에는 그렇게 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닥터 글라스 자신의 불행한 과거와 엮여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풋풋한 첫사랑을 잃었다는 공통점, 그가 이제껏 혼자인 이유일 지도 모를 상실 저편에서 목사 부인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위안을 얻으려는 갈망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목사가 죽는다고 해서 그 여자를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그 부럽도록 잘생긴 레케와 목사 부인을 위해 남몰래 살인을 계획한다. 사랑하지만, 자신과는 말고 그녀가 원하는 남자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런 헌신적인 사랑인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닌 것도 같고. 애초에 목사 부인에 대한 어떤 연정도 있지 않은 것도 같다. 뒤편 설명에 최근 읽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와 문체 면에서는 비슷한데도 없지만 알 수 없는, 일 길이 없는 인간의 심리 라는 측면에서 공감한다. 하지만 또 알 것 같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사의 회전>과 다르다. 사랑은 반드시 육체적이어야 하느냐라는 진부한 질문을 던질 게 아니라, 의사가 왜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그레고리우스를 죽이고 싶어했는지, 의사가 젊은 목사 부인을 위해서 했던 행동은 (당연히 잘못된 거지만)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거 같다. 애초에 왜 사랑은 죄책감을 동반해야 했을까. 때로 그 동반으로 인해 '그리고'로 이어지는 숙명적 불행은 수많은 불행을 낳은 '그리고'를 설명한다. 놀랍다. 19세기에 이런 소설이 나왔었다는 사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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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글라스를 두고 많은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이 남자의 모습과 그가 행한 일을 읽다 보니, 나는 이 남자가 무척 외로워 보였다. 자기에게 실재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다가, 마치 자기가 무슨 구원자처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자기 관점에서 그을 수 있는 선을 선뜻 지우기도 하는 이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 봐, 당신은 당신에게 찾아온 환자의 병을 치료해주기만 하면 된다오.’
온갖 망상에 시달리다 부리는 오지랖이 아닐까 하면서도, 이 남자의 사고가 마냥 틀렸다고 볼 수가 없어서, 그를 향한 이해와 불이해 사이에서 한참 혼란스러웠다. 내가 보통이라고 여겼던 생각들에 다른 양상을 보인 그의 행동에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닥터 글라스는 일찍이 자기 길을 찾고 성공한 남자다. 그만큼 마음이 빨리 시들기도 했다. 하루가 끝날 무렵 근처를 산책하는 게 유일한 낙이기도 하다. 뭔가 무료해 보이기도 하는 삶이다. 또래의 남자들이 갖는 욕망을 그는 자제할 줄도 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이루지 못할 사랑에 매력을 느끼는 남자다. 그가 혐오했던 그레고리우스 목사의 아내 헬가에게 사랑을 느끼는 그다. 스물셋의 첫키스를 아직도 기억하며 품고 사는 그에게 목사의 아내 헬가가 찾아온다. 남편과의 부부 관계가 끔찍하다며 토로한다. 헬가에게 또 다른 사랑이 있음을 듣는다. 그 순간 그의 사랑이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알아챈다. 헬가를 위해, 그의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늠한다. 어떻게 헬가를 도울 수 있는지 고민한다. 그리고 행동에 옮긴다.
그녀는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녀는 나를 보고 부끄러워한 적도 없고 그녀를 창백하게 만든 사람도 내가 아니다. 그녀가 마음의 번민을 안고 한밤중에 내게 보내는 편지를 부치러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생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229페이지)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 이야기는 단순할 수도 복잡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를 돕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짓을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건 닥터 글라스의 성격이다. 그는 냉정한 남자다. 임신과 출산이 불러올 불행에 대해 알고 있지만, 의사가 지켜야 할 행동을 고수한다. 그런 목적으로 찾아온 여자들을 차갑게 돌려보낸다. 상대가 자기를 좋아하는 건 관심도 없다. 오직 그의 마음이 향하는 감정만 중요한 남자다. 그런 그가 병을 치료하는 것도 아닌, 상담처럼 들려온 문제로 고민한다. 환자 이상의 감정을 품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대상이 헬가이든 목사이든. 헬가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이고, 목사는 그가 혐오하는 인물이다. 대조적으로 다가온 두 사람을 향해 그가 취할 행동은 투명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행했을 뿐이다.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그러면 그의 사랑도 계속될 터이니...
그의 진심을 알 수 있는 건 그가 기록하는 일기뿐이다. 낙태하러 왔다가 되돌려 보낸 여자들의 모습에서 느낀 감정은 그의 일기에서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가 의사로의 도덕 운운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은 달라졌다. 낙태나 안락사, 살인과 죽을 권리가 있다는 있다고 생각한다.
죽을 권리가 투표할 권리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절대적인 인권임이 인정되는 날이 올 것이며 또 와야만 한다. 그날이 오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살할 권리를 갖게 될 것이다. 그 선택은 ‘범죄자’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102페이지)
이 소설은 닥터 글라스의 모습에서 오랜 시간 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이슈를 다시 꺼낸다. 지금도 언급되면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오는 낙태와 안락사, 죽음에 관한 문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낸다. 아이러니한 건, 이 소설이 쓰인 게 100년도 넘는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말대로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을 이미 오래전에 썼다. 그때 이미 누군가는 이 문제를 고민했던 것일까. 닥터 글라스가 자기만 볼 수 있는 일기로 썼다는 점도 그 분위기에 동조한다.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소란스러워질 세상의 모습을 예상했던 듯하다. 이 일기를 어딘가에 숨겨둘 닥터 글라스의 모습에서 그 불안을 엿보기도 했다. 결국은 항상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답을 선명하게 들을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본다. 죽음으로 이룰 수 있는 행복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음을 화두에 두고 언급되는 그 도덕의 기준이 누구인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여전히, 한 마디로 결론 내릴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이 소설로 죽음과 행복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계기가 될 듯하다.
닥터 글라스가 외로워 보인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그가 혼자서 고민하고 적었을 일기의 내용으로 보면, 내가 느낀 그의 외로움과는 별개로 그는 시대를 앞선 고민으로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다. 매번 인생이 그를 스쳐 지나가는데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그의 마음마저 이해가 되려고 한다. 그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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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 번 쓴 『닥터 글라스』 리뷰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링크한 켄트의 노래다. 마지막 장면의 글라스에게 보내는 내 위로라고 할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은 ‘글라스는 사실 단호하고 차가운 인물이다.’ 이럴 때 스스로의 독서가 충분치 못했다고 느끼는데 그 이유는 재독, 삼독해도 하고싶은 표현이 두루뭉실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글라스는 ‘어떤 면에서는’ 단호하고 차가운 인물이 맞다. 의사의 의무를 들어 낙태 수술을 요청하는 여성들을 돌려보내는 장면은 진짜 의무를 중시해서라기보다는 번거로운 일이 생기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느낌이다. 현재의 생활에 큰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더한 물욕이나 명예욕도 없으므로. 그렇다면 왜 헬가에게만은 달랐던 걸까? 헬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위’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순전한 사랑이었나? 아니면 목사에 대한 혐오가 먼저였을까? 번역 노트에서도 이 얘기가 나오는데 리뷰에서도 썼듯이 글라스는 천성적인 낭만주의자이다. 스물 셋에 의학 학위를 따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결국 달성한 것이 심리적 배경이 된다. ‘정상적인 길’(글라스의 표현)을 걸었던 사람과 그 길을 좀 더 일찍 걷게 된 영재의 차이는 관심사와 행위에서 드러나는데, 소년의 욕구와 성인의 욕구가 같을 수는 없는 법. 성인들이 신체적 욕망과 그 해소를 얘기할 때, 소년은 막연한 사랑을 ‘꿈꾼다’. 그 꿈은 연인이 될 뻔한 여성의 사망으로 지속된다. 첫 키스와 말랑이는 심장박동을 남긴, 축제의 연인. 여기서 주인공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썸녀가 익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짐에도 흔들리지 않고 학위를 따내는 것이다. 이쯤에서 「롤리타」의 험버트 험버트가 떠오르지만 그와 다른 것은, 적어도 글라스는 여기서 밝혀진 바로는 성인 여성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글라스는 스물 셋에 첫 키스를 하는데 만약 험버트처럼 유년 시절의 경험이었다면...? 어쨌든 글라스가 학위를 딴 이후, 어떤 일에도 열의를 잃어버리는 것을 보면 그 죽음의 여파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늦된 연애감정의 싹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데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의사는 자신의 외모를 비관하고 있어 헬가의 남자인 클라스 레케를 보고도 좀 방향이 다른 질투를 한다. 헬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도 부럽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청춘을 누린 레케를 질투한다. 자신과 달리 사회·신체적 발달에 따른 감정의 변화를 겪어 온 레케를 말이다. 글라스가 느낀 성인으로서의 욕구는 뒤늦게 발현되나,손쉬운 해소는 거부감이 들어 순결을 지키고 있다. 레케처럼 이상적인 외모를 가졌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그 점이 글라스의 감정이 향하는 방향이다. 그렇다고 글라스가 연애경험이 없다는데 열등감을 느끼는가?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의 사회적 지위는 여성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며, 호감을 표시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호감을 표현해 온 메르텐스 양의 외모나 조건은 그가 생각해온 이상형에 가깝지만 친구 마르켈이 관심을 표하자, 의사는 뒤로 빠진다. 여기서 헬가에 대한 감정은 배제되었다. 글라스는 연애에 안달난 이가 아니다. 그는 선택적 솔로의 길을 걷는 천성적인 낭만주의자다. 사랑의 꿈을 꾸고 그 감정을 숭배하는 이 말이다. 헬가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글라스는 왜 헬가를 사랑하게 되는가?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3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남편에게 지속적인 강간(글라스의 표현)을 당한다는 것이, 그에게 기사도를 일깨운 걸까? 소설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글라스에게 혐오를 주는 인상을 가진 목사와 마주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헬가를 만나기 전에 이미 그레고리우스는 글라스의 혐오 대상이었다. 이 점이 살해 동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낙태를 청하는 환자들도 거절했던 글라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범죄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헬가에게도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도 헬가를 좋아했다. 그러나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길러진 탓에, 남자의 유혹을 받은 자신이 막연하지만 뭔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냉랭해진 여자의 태도에 남자가 용서를 청해도 거부했다.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그를 찾아갔지만 관계는 그로 끝나 버렸고 결국 이후로 신앙에 더 매달리게 된다. 이 때 가족이 오래 전부터 알던 그레고리우스 목사가 부모를 통해 젊고 아름다운 헬가에게 청혼한 것이다. 승낙에는 목사의 권위와 권력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헬가 또한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역겨운 걸 어떡하나. 사랑과 친애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종교가 너무도 옳기에 모든 것을 의무화시키는 30살 차이의 남편과의 잠자리가 말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 자신의 욕망을 죄라고 생각했던 어리숙한 여인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헬가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표현은 성인으로서의 욕망을 깨달은 글라스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글라스는 그녀에게 이혼하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목사는 예배 중 성경 말씀을 통해 신앙심이 깊은 그녀에게 벌을 줄 거라고, 결국 이혼도 해주지 않을거라고 헬가가 답한다. 목사는 신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며 아내에게 잠자리를 강요해왔다. 젊은 아내는 그게 싫지만 응해야 하고, 이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헬가의 정신이 죽어가는 것이다. 글라스는 목사에게 아내의 건강이 염려되니 관계를 삼가라 하지만 들을 리 없다. 목사의 나이와 건강을 들먹이며 복상사 얘기를 꺼내고 나서야 헬가는 6주 휴가를 얻는다. 이쯤되면 독자도 목사가 역겨워진다. 글라스의 감정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을 통해 증폭된다. 공상과 망상 속에서 감정의 해일에 휩쓸리는 의사는 욕망을 반영하는 묘한 꿈들을 꾼다. 그녀가 보고 싶어 목사가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털어놓을 데 없는 목소리들은 도덕을 논했다가, 완벽한 범죄를 꿈꾸었다가, 두려워했다가, 괴로워한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짐작이라도 했던 걸까? 글라스가 준비해두었던 죽음의 숨결은 적절한 장소에서 멋지게 임무를 완수한다.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장애물을 치워버리면 장밋빛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사랑에 광명이 비칠 줄 알았더니... 사랑이라는 감정은 한 다리, 두 다리를 거쳐도 퇴색되지 않는 줄 알았더랬다. 그래서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100년도 전에 출간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작품이다.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논쟁이 되는 주제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동시에 사랑에 대한 심상들을 제시한다. 후속권들도 준비중인 것으로 아는데 꼭 출간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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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의사인 여주인공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의 생명은 세상의 모든 가치보다 우선이 되어야한다는.. 그만큼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생명이 다하는 싯점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른다. 세상에 태어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과 싯점이 문제가 된다. 나이가 들어 몸이 쇠락해져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생의 순리라고 한다면 그 순리에 어긋나게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없듯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나 요즘 죽음에 대한 나의 권리.. 라는 것에 대한 관심이 보여지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의사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심정을 일기로 써 내려간다. 1905년에 출간된 소설이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은 지금도 이슈화 되고 있는 낙태, 안락사, 정당한 살인등이다. 닥터 글라스는 이러한 것들을 옹오하며 합리화하려는 시선을 보여준다. 결국 그것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문제인데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을 쫒는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도덕이라고 하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러한, 어렵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하게 되는 것들을 홀로 자신의 방 창가에 있는 책상에 앉아 매일 저녁 일기를 쓰는 형식으로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한다.
윌리엄 샌섬은 이 소설을 "내일 쓰인 소설"이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관점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원하지 않았던 임신으로 괴로워하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여인들.. 닥터 글라스는 처음에는 그러한 여인들에게 의사로서의 의무, 생명의 존엄성등을 이야기하며 그녀들 돌려보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위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돌려보낸 여인이 기형아를 낳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을때는 웬지 자신이 그녀에게 죄를 지은 느낌마저 든다. 자신의 아내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그레고리 목사, 웬지 닥터 글라스의 눈에도 그는 역겨운 존재로 비춰진다. 그의 외모 , 성품 모두가.. 그의 부인인 헬렌의 괴로움을 십분 이해하는 그는 헬렌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자 그를 죽이는 것을 상상한다. 기존의 관념들을 비웃지만 불안함을 안고 사는 불안정한 인물인 닥터 글라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합리화 시키고는 싶지만 그것들 또한 완전체임을 믿을 수 없기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레고리 목사의 죽음.. 사인은 심장마비였고 장례식까지 일사천리로 치뤄진다. 하지만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닥터 글라스 뿐이다. 헬렌에게도 좋은 일이었고 자신이 그렇게 혐오했던 이가 사라져셔 어찌보면 홀가분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듯하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도덕과 규범 더 나아가 법이라는 장치로 사고나 행동을 통제하지만 생각하는 인간은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가능성과 또 다른 가치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은 끝이지 않는 듯 하다. 닥터 글라스라고 하는 한 가정의의 번민과도 같은 내면의 이야기지만 그의 고뇌속에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많는 주제들에 대한 논지들이 들어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심리 소설의 형식을 띤 사회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 책은 구성이 매우 특이했다. 닥터 글라스의 행적에 따라 그가 지나가는 지역, 장소등의 사진. 그림들이 함께 등장하고 고뇌하는 장면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예술작품이나 사물들의 모습이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여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시각적인 것을 함께 보며 읽어보기는 처음인 듯 했다. 북유럽 작품은 주로 추리 소설 위주로 읽었었는데 또 다른 매력의 북유럽 소설을 만난 유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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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글라스> 도입부. 소설에는 글라스 병원 지도와 각종 장소와 건물, 명화들이 등장한다. 취향저격!
처음 정발된 작가의 소설이 너무 재밌고 너무 슬프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면 어떻게 맘을 잡아야 될까? <닥터 글라스>는 이 세가지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스웨덴의 유명한 심리 소설이다. 알마르 쇠데르베리는 '생각하는 만드는 동시에 완벽한 소설'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는 성공했다. 수전 손택이 왜 '화끈한 북유럽 문학의 걸작'이라고 칭찬했는지 알 것 같다. 화끈하게 재밌고 화끈하게 슬픈 소설이다. 스톡홀름의 젊고 명석하고 매력적이기까지 한 의사 글라스는 현대인의 질병인 불안증을 앓고 있다. 어릴 때 아버지한테 심하게 맞고 자란 글라스는 과대망상과 정신분열증, 결벽증, 신체접촉 기피증도 있다. 비극의 시작은 그에게 이런 증상들을 완화할 면역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글라스를 둘러싼 스톡홀름의 자연환경은 평화 그 자체인데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상념과 공상의 전쟁터이다. 이런 글라스에게 어느날 쉰일곱살 목사와 죽지 못해 사는 나이 어린 그레고리우스 부인이 찾아오고, 그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짝이 있는 여자만 골라서 흠모하는 글라스에게 그녀는 최적화된 여성이다. 게다가 아름답고 똑똑하기까지 하다. 그녀의 남편은 아기를 만들기 위해 밤마다 그짓을 하며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X목사의 전형이다. 그녀는 글라스에게 남편 몰래 사귀는 남자가 있다고 고백한뒤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글라스는 검진을 받으러 온 남편한테 심장 상태가 안좋으니 각방을 쓰라고 겁을 준다. 그리고 6주간 부인 없이 혼자서 휴양을 하고 오라고 권한다. 이런 류의 목사가 자기 건강에 대한 겁은 많아서 곧바로 휴양을 간다.
목사가 떠난 뒤 글라스의 머릿속은 온통 그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로 가득해지고, 꿈속에서 그의 심장을 떼네는 수술도 태연히 벌인다. 동시에 그레고리우스 부인을 향한 짝사랑도 뜨거워진다. 신체적 접촉은 없고 오직 머릿속으로만;;;
스포일러와 후반부 반전 때문에 내용은 더 이상 쓸 수 없지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글라스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가 '아이가 기형으로 태어나면 물에 던진다'라는 세네카를 옹호하고, 섹스와 신생아와 출산을 혐오하고, 범죄자도 자살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뒤에는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 고독과 좌절의 과거가 놓여 있다. 그의 유일한 추억은 20대 초에 삼촌 별장에서 만난 여자와의 만남이었다. 그녀와의 뜨거운 키스와 춤... 글라스는 그날 이후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수영을 하다가 익사했기 때문이다. 이후에 글라스가 심리적으로 의지하는 유일한 대상은 하늘에 뜬 달뿐이다. 하나의 달이 아니라 수십개의 달이다. 달은 접촉하지 않아도 되고, 고통도 주지 않고, 날 배반하지도 않으니까. 그레고리우스 부인이 글라스에게는 달 같은 존재이다.
글라스가 꿈이 아닌 현실에서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은 순전히 그녀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가 위하는 사람은 글라스가 아니라 다른 남자이다. 그 남자는 그레고리우스 부인을 행복하게 해줄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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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묵직한 소설을 읽었습니다. 111년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소설답게 소설이 가지고 있는 힘을 느낄 수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그 이야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행복하였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 초반의 엄청난 몰입감에 비하여, 거사가 너무나도 순식간에 끝나면서 약간은 허탈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것이 그런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일이 닥치기 전에는 설레이고, 긴장하고, 걱정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아무 느낌없는 ..... 이 소설의 화자 닥터 글라스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좋은 학교 친구도 있었고, 사랑하는 여자도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입니다. 홀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누군가에 전해주듯이 일기장에 적지만, 그의 일기장을 보거나 말을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어처구니없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그의 범죄는 그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다는 그의 숨은 욕망에서 나온 것은 아닐 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닥터 글라스는 그레고리우스 목사의 아내 헬가를 좋아하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못합니다. 그는 목사가 그녀와 결혼하기 전부터 좋아하지않았지만 그녀가 그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더욱 증오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남자, 그와는 다른 종류인 잘생긴 용모의 클라스 레케를 사랑합니다. 아무리 그녀가 사랑하는 잘난 남자라도 그녀를 위해 선사하지 못하는, 그녀의 자유를 자신은 구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자신이 그보다 더욱 그녀를 위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는 그녀의 남편을 해치웁니다. 아마도, 저에게는 그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닥터 글라스가 그녀의 남편을 죽이는 일까지는 하지 않았으리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녀의 남편의 죽은 후, 그의 행위는 여전히 아무도 관심이 없고, 그가 도와주었다고 생각한 그녀의 사랑도 자신이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고 (클라스 레케는 다른 여자와 결혼할 예정이고),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관심없고, 그도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이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일상이 흘러갑니다. (그의 표현애 따르면 인생은 그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무리수를 두었지만 변함없는 그의 일상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이여, 난 널 이해하지 못하겠다."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알지 못 할 것 같기도 한 닥터 글라스의 마음 속을 나름 헤아리면서 글을 적었습니다. 제 자신도 삶을 살아오면서 인생의 의미를 안다고 할 수 없기에 인생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닥터 글라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시간이 난다면 좀 더 느린 호흡으로 이 책을 읽어 보면 닥터 글라스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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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책이지만 출간된 지는 시간의 흐름이 있는 책이다. 지금 문학계에 북유럽권의 문학이 인기가 있는 가운데 스웨덴의 작가 얄마르 쇠데르베리는 이 작품으로 당시 대단한 이슈를 낳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제의 흐름이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문제, 임신, 낙태, 살인, 안락사 ... .이 모든 것이 들어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직업이 의사다. 이름은 글라스- 그가 자신의 내면의 일기를 통해서 써 내려간 글을 통해 독자들은 그가 생각하고 지향하는 그 어떤 문제라든가 일상생활에서 오는 갖가지의 여러 가지 일들을 접하게 된다.
그는 직업이 의사지만 때때로 환자의 면담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일들에 동조를 하지 않는, 쉽게 말하면 마음속으로는 당신들의 처지와 경우를 생각해 당연히 그렇게 해주어야만 하지만 난 의사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되는 순간 선서한 그 말에 따르는 의무에 충실할 책임이 있는 바, 당신들의 뜻에 따라 해 줄수가 없다. 그러니 돌아가라-
이쯤 되면 아주 성실한 의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 흐름을 보면 의도치 않게 덜컥 임신을 한 여성이 낙태를 원해도 해주지 않는 자신의 심리상태 속에서 번민을 하게 되는 의사로 그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찾아온 한 여인의 말을 들어 줄수 밖에 없는 사정에 처한다.
여인의 이름은 헬가 그레고리우스- 마을에서 존경받는 목사의 아내다. 평소 목사에 대한 인상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던 차에 그녀가 전한 부부간의 성생활에 대한 괴로움, 더군다나 그녀는 이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단다.
의사는 갈등한다. 의사 된 입장에서 그녀의 말을 들은 이상 분명 나이 차가 많은 목사의 정열적인 부부생활은 오히려 부인이 괴로울 정도이고 평소 자신이 생각 해 온 목사를 생각하니 그 목사에 대한 감정이 떠오르게 된다.
닥터 글라스는 결코 유쾌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다.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는 지금의 보통 사람들이 나누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사랑 형태와는 다른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자신의 상상에 그칠 뿐 평소 행동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인에게조차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유일하게 빠진 여인은 바로 목사의 부인이요, 그 부인이 좋아하는 남자에 대한 질투 비슷한 감정을 지니게 되면서 일기를 통해 목사를 죽일 방법을 생각하게 되는데...
살인을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망설임이 닥터 글라스는 자신의 내면의 두 형태로 싸움을 벌인다. 전혀 상관이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내면 1과 내면 2가 서로 의견을 벌이면서 그려내는 내면의 심리 상태는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인간의 솔직한 양면성의 이면과 자신이 아니더라도 먼 훗날 안락사가 허용될 것이란 예언까지를 읽고 있노라면 지금도 중대한 문제인 주제를 작가는 벌써 그리고 있었단 사실이 놀랍게 다가온다.
인간의 출생과 기형, 임신, 낙태, 살인, 안락사에 이르는 닥터 글라스의 생각을 통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삶의 주체는 누구이며, 살인을 계획하는 과정이 독자들로 하여금 옳다 그르다를 떠나 인간이 한 인간에게 느끼는 삶의 고통과 비애를 같이 공감하게 하는 여건을 보여주기에 이 소설은 일기를 통한 심리적 갈등이 잘 그려진 책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가 꿈꾸는 사랑엔 한계가 있는 것일까?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그의 마음을 그녀가 언제 알게 될른지.....
여전히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닥터 글라스의 외로움이 한층 가깝게 느껴지는 책이다.
***** 이 리뷰는 출판사나 작가와 전혀 상관없는 몽실서평단에서 지원받아 읽고 내맘대로 적은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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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행복의 유일한 정의는 각 개인이 찾아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 무엇의 총합이란 거야. 그러니 우리가 행복을 찾기 바란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겠지. 그런 의미에서라면 자명하지. 그런데 자네의 대답으르 들으니 모든 철학은 궤변에서 나오고 궤변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이 벌써 몇 번째 떠오르는지 모르겠군. 행복에 대해 어떤 천한 관념 대신 종교를 끌어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필생의 업’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는데, 양쪽 다 이렇든 저렇든 자신들이 행복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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