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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에게 손수 지은 밥을 먹이는 일은 감동적이다. 맛이 있든 없든 음식을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과정 과정이 한 사람을 위해 닿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 어느 시절에 그런 감동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릇에 음식을 담아내는 순간까지 온 정성을 다 들였던 시간이다.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하루가 전부라면 어떤 음식을 누구와 먹고 싶을까. 시인 김태형의 에세이 『하루 맑음』을 읽다가 든 질문이다. 시인이 제목에 부여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인생이란 날씨와 같아서 예측할 수가 없다. 그만큼 하루 맑음이란 삶은 많지 않다.
온통 흐림과 비로 기억되는 삶에도 그것들을 달래주는 음식이 있었다. 도시락 반찬으로 김치밖에 싸 올 수 없었던 시절의 추억, 술에 취해 동해안으로 달려가 최고의 오징어회를 먹었던 날들, 존경하는 선배가 새벽에 삼겹살을 먹는다고 했을 때 그대로 따라 해 보고 싶었던 누군가의 열정이 문장 속에서 그 맛을 불러온다. 다가올 명절 때문인지 나는 엄마의 음식이 자꾸만 그립다. 직접 만든 조청에 찍어 먹던 가래떡, 과즐이라 부르던 한과, 라면 봉지에 싸 주셨던 설탕 뿌린 누룽지까지 촌스러운 음식들이 먹고 싶다. 인스턴트에 길들여진 나의 위장은 이처럼 신선한 충격이 필요하다. 음식 만드는 것을 즐기는 시인은 자주 가족들에게 자신의 요리를 선보인다. 김치를 먹지 못하는 아이에게 잘게 썰은 김치를 볶아 만든 오므라이스를 해주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레시피로 음식을 만든다. 파스타는 반드시 9분만 삶아야 하고 가을에는 수제 맥주를 꿈꾸고 안주로 먹을 피클을 담을 예쁜 유리병을 주문한다. 사실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건 무척 귀찮은 일이다.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장을 보고 손질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고 심지어 아무도 먹지 않는 음식을 처리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니까. 시인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즐거움과 감사를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음식을 만드는 그 시간이 좋다. 여러 음식재료가 모여서 과연 어떤 맛을 낼지 궁금해하는 그 시간이 좋다. 양파를 도마 위에서 칼로 써는 느낌마저 좋아졌다. 큼지막하게 썰지, 얇게 썰지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는 시간이 행복하다. 또 다른 기쁨이 있다면 음식을 먹을 때 온갖 맛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꼬투리를 잘라내서 다진 마늘이, 적당한 길리로 썰어 넣은 부추가, 채에 고른 고춧가루의 가느다란 입자들이 하나하나 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180쪽) 시인의 레시피를 읽다 보면 아름다운 주방을 상상하게 된다. 문을 열면 예쁜 그릇이 가득할 것 같은 수납장, 넓고 세련된 식탁, 번쩍 빛을 내며 줄을 선 칼들, 깊고 튼튼한 냄비들 같은 이미지 말이다. 어쩌면 그런 주방은 이미지로만 존재할지도 모르다. 고단한 삶의 부스러기가 남아 있는 주방, 식구들의 손때로 모서리가 더러워진 식탁, 이가 나갔지만 차마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그릇들. 결코 알 수 없는 사막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보며 마시는 와인의 맛과 진짜 인도의 삶이라 할 있는 짜이의 맛을 나는 상상한다. 그리고 시인의 삶을 맛볼 수 있는 시인이 대접하는 짜이 한 잔을 상상한다. ‘짜이는 짜이를 끓이는 발 그곳의 맛을 낼 뿐이다. 그러니 내가 만든 짜이에는 내가 사는 곳의 맛이 배어 있다. 내가 살아가는 맛이다. 바로 내 삶의 향이다. 어쩌다 손님이 올 때면 나는 꼭 짜이 한 잔을 대접한다. 다른 그 무엇이 아닌 바로 내 삶을 내놓고 있었다.’ (114쪽) 자신의 삶을 제대로 요리하는 삶은 얼마나 될까. 그런 삶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가는 것일까. 내 삶을 내놓을 수 있는 음식은 무엇일까. 시인이 차려낸 글이라는 음식의 맛을 보며 오늘 하루가 맑음이라 해서 내일도 맑음이라 자신할 수 없는 삶을 사는 나와 다르지 않은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