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은 타자기 글씨로 시작하는 첫 페이지. ‘불안 속의 영혼들에게’
왠지 나한테 하는 소리 같지 않나? 왜인지 모르지만, 나는 늘 불안했다. 아무리 장밋빛 미래를 상상해도, 가슴 한 편에서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사랑하는 순간에도, 잠을 자려고 눕는 순간에도 늘 무엇인지 모를 불안이 나의 청춘을 눌러왔다. 왜 그런지 물어도 답을 얻지 못한 채 나이만 들어가던 중 불안한 영혼들에게 바치는 책이라니! 이거 횡재한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첫 페이지를 연다. 제목이 현대예술이라는 점을 까마득하게 잊고.
이 책을 다 읽은 것은 몇 해 전이지만, 읽고 이해하는 것과 써서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의 언어로, 이 책에 대해 적어낸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다시 읽고, 같이 읽고, 책 속에 언급된 다른 책들을 읽고, 몇 번을 반복해 읽은 후에서야 비로서 이제야 무언가 한 마디 끄적일 수 있을 것 같다.
책에서 위안을 받는 경험은 흔치 않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첫장에서부터, 그리고 서문에서부터 위안을 받기 시작했다.
‘모든 시대가 자기 시대의 이해를 어려워한다.’ - 젠장, 그래서 현대가 어려운건가? 현대인들의 생각을 이해한다는게, 타인을 이해한다는 게 어려운건가? 그래서, 세상이 망할것 같은 불안을 느끼는건가 ‘누군가는 수동적 삶의 무의미와 덧없음을 거부한다. 이때 그는 세계의 포괄적 의미를 찾고자 한다. 혼란과 동요가 그러한 영혼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 맞아.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내 주위, 나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몇 십년 동안 흔들렸었다. ‘20세기의 새로운 언어학이나 분석철학이 현대를 설명하기보다는 현대가 오히려 새로운 학문들을 해명한다. 현대예술은 언어학이나 기호학과 병존한다.’ - 뭔가 새로운 설명이다. 왠지 동의하게 되고 말 것 같은 설명. ‘형이상학적 이해없는 예술 감상은 스스로를 답보 상태에 가져다 놓는다. 이것은 심미적 즐거움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단지 누군가가 자신의 심미적 즐거움의 근거를 알기 원하고, 정돈되고 차원높은 심미적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할때의 얘기다.’ - 바로, 이거였다. 내가 예술사를 공부하고 싶은 건. ‘현대의 세계관이 과거의 세계관보다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다.’ - 이것은 비단, 세계관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는 타인보다, 타인은 나보다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다. 그냥, 그 자리에, 각자의 자리에 있는 개개인이다. ‘필연성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오만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 나에게 이젠 그 자유를 선택할 용기만 필요할 뿐이다.
본문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 형성된 과정과 회화, 문학, 건축등 다양한 분야에서 현대예술에 어떻게 이 사고방식들이 스며있는지를 차례대로 설명해준다. 이 책이 다른 예술사와 다른 점은 예술사라는 정보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부제(형이상학적 해명)처럼 나의 모든 면을 형이상학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는데 있다. 아마도 내가 예술관련 전공자가 아니기에 내가 이 책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러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바닥까지 나의 양심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결국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마음을 비우는 경험을 했다.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이해하고야 말겠어 라는 다짐들의 허무맹랑함을 마침내 나는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교육에 의해 나에게 주입되었던 생각이었건, 내가 타고난 기질이 그러하건, 그 모든 것이 근거없는 희망이고,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러한 나의 인식 변화가 흔히 우리가 말하는 ‘목표상실’, 혹은 ‘자포자기’, ‘포기’와는 결코 다르다는 점이다. 실재하지 않는 많은 것을 내려 놓음으로서 나의 어깨는 가벼워졌고, 자유로와졌다. 그리고, 오히려 강인해지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사고방식이 바뀐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권의 책과 그로 인한 수많은 생각들이 결국 나를 그리 만들었다. 나를 인도했다, 현대로.
내 비록 전공자는 아니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일반인도 예술사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이 책의 위대함이라고 본다. 기존에 내가 알던 철학책에서 나열되는 어려운 단어들을 이리도 쉽게, 외국어가 아닌 한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드문 것 같다. 일반인들에게도 예술사와 철학을 넘나들 수 있는 안목을 주는 책이니, 이 책은 일반인들에게 눈을 뜨게 해 주는 큰 선물이다.
이 책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이유는 예술사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첫 시도라는 점, 그리고 본문의 내용이 탁월하다는 점 뿐만은 아니다. 책을 읽다 보면, 문장 자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이 울린다. 간단히 나열된 단어들에서 발견되는 미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위에서 예를 든 서문의 문장처럼.
현존의 이해라는 절박한 요구에 의해 현대예술을 먼저 집필한다고 밝혔다. 그랬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시대를. 이 모든 궁금함을 위해 현대를 먼저 출간해 준 저자에 감사드린다. 현대라는 세계관을 만나고 나서, 혼란스럽기만하던 것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냥 복잡한거야, 어려운거야 라고 여겨지던 현대물리를 현대과학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시작했다. 이제 이 평화가 유지될 것인지, 계속 흔들릴 것인지는 오롯이 내 선택의 문제다. |
|
읽고 난 다음 서평을 쓰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에 대한 소개 대신 무조건 '읽어라'라고 하는 편이 낫고, 몇 문장의 인용은 도리오 책에 대한 누(累)가 되어 인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서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글이란 서문 일부의 인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어학, 인류학, 기호학 등의 연구에 매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통찰에 준해 현대의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현대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들 역시도 현대의 한 현상일 따름이다. 이 책은 이러한 성취의 이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탐구의 탐구이며, 설명의 설명이다. 독특하고 때때로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낯선 현대 예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포괄적으로 설명된다. 궁극적인 도전에 의해서만 현대예술과 그 예술가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20세기의 새로운 언어학이나 분석철학이 현대를 설명하기보다는 현대가 오히려 새로운 학문들을 해명한다. 현대의 저변을 형성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고찰만이 언어학이나 기호학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현대예술은 언어학이나 기호학과 병존한다. 모두가 현대의 형이상학 위에 기초한다. 모든 것은 물결 위의 포말이다. 하상엔 굴곡진 형이상학이 있다. 현대에 시도된 다채로운 예술적 성취들은 당혹과 분노, 경멸과 외면의 대상이기도 했다. 현대예술은 감상자들을 소외시키며 발생했다. 사람들은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이익에보다는 손해와 결여와 책임에 훨씬 민감하다. 과거는 금의 시대이고 현대는 타락한 시대이다. 현대는 그러나 모든 시대가 그렇듯이 가치중립적이다. 다른 어떤 시대, 다른 어떤 생활 양식이 현대에 비해 더 많은 가치와 미덕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현대에 이르러 더 많은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한 만큼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공평한 인식이 현대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이다. 혐오는 때때로 몰이해와 무지가 동기이다. 파라켈수스가 말한 바 "지식이 사랑을 부른다" 현대예술은 야유와 냉소를 동반한다. 진정한 예술은 감상적 위안을 거부한다. 깊이와 진실은 언제나 자기 부정을 전제하듯이 현대의 유의미한 성취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에서 출발한다. 전현대성에 젖은 시대착오적 센티멘탈리스트들이 현대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은 그러므로 이들의 자기부정의 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기만족과 자기위안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다. (8쪽 - 10쪽) 아마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경험하게 되는 바, 어렵고 난해하게 여겨지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대예술을 알게 되고, 철학 전반에 대해서, 나 자신과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이있는 공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서의 놀라움을 전해준다. 고작 책 한 권인데... 하지만 어떤 책 한 권은 어떤 이에게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바로 이 책,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처럼.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실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특히 서사문학에서의 사례들 - 리처드 브라우티건, 움베르토 에코, 존 파울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널드 바셀미, 저지 코진스키, 마르케스 등에 이르는 문학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한국어로 씌여진 바 최고의 책이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 일독을 권한다. 아마 책을 펼치는 순간, 덮지 못할 것이며, 자연스럽게 두 세 번 읽게 되겠지만.
책의 속 표지에 적힌 문구. '불안 속의 영혼들에게'. ... 어쩌면 이 책만큼 절망에 빠진 현대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될만한 책이 또 어디 있을까. |
|
어느 시대나 문명도 다른 시대와 문명이 비해 모자라거나 우월하지 않다. 우리의 편견을 과감히 깨뜨리고 모든 것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었다(우리는 하나의 행성을 떠맡았음으로)라는 점을 급진적으로 혹은 과격하게 독자를 일깨워주는 저자의 기량이 자극적이다. 많은 이들이 생존률이 낮은 병에 걸리면 현대 의학을 제공하는 병원을 찾는다. 어떤 이들은 반면에 같은 병에 걸린다고 할지언정 의학과는 관련이 없는 치료법들을 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적같이, 해명할 수 없는 어떠한 연유로 인해 그들은 종종 치유되고 있다. 그렇다면 실증적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과학을 기반으로 제공하는 현대 의학과, 의심쩍고 미신쩍은 민간 치료법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같이 날카로운 통찰로 경험적인 지식에 세뇌되어 있는 현대인들을 일깨워주는 저자의 일침이 통렬하기 그지없다. |
|
사람들은 보통 중세라는 시대를 떠올리면 야만과 무지와 광신으로 가득 한 시대로 치부하기 일쑤다. 그러나 중세라는 그 실상을 면밀하게 살펴 본 이후로는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탓하며 중세인들이 추구하고 육박한 실재와 유명론에 대해 크나큰 감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라는 한 문명과 한 시대를 지지하는 이들이 종종 비아냥거리는 것을 듣게 된다. 중세는 시멘트도 쓰지 못한 미개한 시대였다고.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로마는 골조가 없이 낮은 건물이나 짓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였음을. 결국 이 책은 어느 한 시대나 문명이 다른 시대와 문명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모자라다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함을 명쾌하고 통렬하게 증명한 역작이다. |
|
때로는 나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소리와 부딪히는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곤혹스러워하는 나 자신을 보곤 한다. 그 불편함 혹은 나의 이중생활의 근거가 무엇인지 헤매다 만난 작가의 작품들. 그 안에서야 비로서 나는 안도의 숨을 쉴 틈을 얻는다.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작가의 모든 책들을 섭렵하며 점점 더 내면의 자유를 얻었다. 작가의 신작, 근대예술이 나왔다는 소식은 나에게 또 어떤 선물을 줄 것인지 기대부터하게 만든다. 그리고, 작가는 내가 김칫국을 마신게 아니였다는 것을 이 책으로 다시 한 번 증명하였다. 근대예술은 두 권으로 된 방대한 양이지만, 우선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로 구성된 1권에 대해서부터라도 감상을 적지 않을 수가 없다. 나에게는 르네상스인적인 요소가, 매너리스트인의 요소가, 또 바로크인의 요소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또 현대인의 요소까지도. 나는 기하학을 좋아한다. 그 완벽함에 매료되어 있었고, 소실점에서 황홀감을 느끼곤 했다. 먼 발치에서 사라지는 길의 끝이나, 일렬로 세워져 있는 잘 정돈된 정원에서 안정감을 느꼈었다. 그게 좋았다. 편안했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엉크러진 방에서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완벽하게 정돈된 방에서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 모순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책은 내가 왜 이런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되는 책이기도 하다. 책의 설명에 의하면, 나는 인간지성이 세계를 알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그 불가능성, 불확실성에 대해서, 신념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바닥까지 솔직하게 생각하면 후자가 맞는데, 왜 나의 머리는 전자에서 멈추고자 할까, 왜 나의 가슴은 후자가 맞다고 계속 읊어대는 것일까. 오랜 내면의 고민은 책에서 답을 찾는다. 그동안 몰랐던, 익숙하지 않았던,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좀처럼 보여지지 않았던 후기 고딕 예술들, 마니에리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뭉크와 같은 현대의 작품들을 보고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세익스피어의 글이 길기만하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횡설수설이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 글들을 사랑한다. 편안함을 느끼고, 이해를 하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딱딱 각진 기하학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마니에리즘 시대의 마니에리즘적인 작품들은 바로 우리 시대, 현대의 작품과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저자의 설명에 머리가 끄덕여진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건 아니건, 이건 전적으로 독자들의 목이다. 우리 선택에는 자유가 있다. 다만, 그의 설명으로 복잡한 철학이, 어려운 예술이, 심지어는 내 삶까지도 많은 부분이 설명된다면, 나는 그의 주장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된다. 예술이 도덕과 정보의 짐을 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예술은 본래 자기가 짊어질 이유가 없었던 짐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비단 예술만이 그러한게 아니였다. 나 스스로가 나에게 부과하였던 짐이 있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완벽이 아니라면, 그에 가깝도록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의 죄책감. 노력을 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좌절은 둘째 치고, 결과가 없다면 노력도 무의미한 것인가라는 의문들. 무능하고 게을러서라는 자책까지. 내가 나에게 혹은 사회가 우리에게 부과한 것들이 사실은 근거가 없다는, 부당하다라는 것을 예술가들이 먼저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자유를 얻는다. 치유받는다. “예술은 그것이 본래 자기가 짊어질 이유가 없었던 짐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이론과 관측기록의 불일치는 단순히 과학적 오류나 무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그랬다. 세상 뭐 그리 복잡하게 사냐며 타박 받았던 나도, 이제는 가벼워졌고, 자유로와졌다. 근대 예술을 설명하는 가운데 깨알같이 숨어있는 21세기, 우리의 모습들. 신념에 강압받지 않는 자유로운 모습들이 반갑다. 근대와 현대의 대비를 통해 더욱 생생해지는 나의 모습, 지금 21세기의 모습들이 사랑스럽다. 자유우리의 습관, 교육이 문제였다. 고딕적이란는 말에는 야만성이 포함되어 있고, 매너리즘이 형식적이라는 말에는 왠지 게으르거나 무식한 혹은 실력이 부족한이라는 느낌이 남아 있고,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포기’에는 부정적인 뉘앙스만 있다는 듯 배워왔다. 이것이 근대이념의 교육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쁘거나 부정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마니에리즘에 대한 부당한 시선을 거두면서, 나는 나를 치유하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현대가 보다 현대로와지는 것, 현대시대를 살며 나에게 남겨진 근대습성을 벗어내는 것, 이렇게 함으로서 나는 현대의 (알 수 없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 같다. 환각주의, 제국주의, 매너리즘 등등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선입견, 그리하여 나의 사고의 확장을 막아버렸던 선입견들을 배제하려고 노력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저자의 설명이 보다 쉽게 와 닿는다. 내 인식의 폭이 넓어지고, 몰랐던 지식을 새로 알게 됨과 동시에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 아닐까 싶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하더라도 ‘현대’는 낯설었다. 현대물리, 현대음악, 현대문학, 현대그림, 현대철학 모든 것이 다른 세계의 일 같았다. 하지만, 저자의 글들을 통해서 후기고딕양식, 마니에리즘에 편안함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서 현대가 낯설지 않은 나의 옷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저자 덕에 버려져있고, 잊혀져 있었던, 그리고 부당하게 욕을 먹은 이름들이 다시금 생명력을 부여받아 살아났다. 더불어, 우리가 우리 시대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하게 되었다. 우리는 현대라고 불리우는 2014년을 살아간다. 현대, 그러면 이 순간, 2014년, 그리고 곧 다가올 2015년을 살기만하면 나는 곧 현대인이 될까? 현대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작가는 그의 저작들에서 줄기차게 세계관에 대해 언급한다. 이 시대의 세계관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사는 것이 현대인이라고. 그냥 사는 것이 현대인이 아니라. 그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때로는 현대인, 때로는 비현대인으로 살고 있다. 근대예술에 나오는 르네상스인도, 매너리스트도, 바로크인의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는 나를 본다. 그리고 책을 다 읽었을때엔, 내가 조금은 더 현대에 나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이유였다는 것도. 이 책의 제목 앞에 ‘현대인의 시각으로 바라 본’ 이라는 문구가 들어간다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렇다. 이 책, 근대예술은 ‘현대인’이라는 시각에서 본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예술을 비판한다는 것이 아니다. 현대와 근대의 균형잡힌 시선으로, 근대예술에 근대라는 세계관에 우리가 무비판적이고 무한대로 근거없이 쏟아 부었던 애정을 객관화시키게 해 준다. ‘근대예술’을 읽으면서 만나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재미이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근대예술. 근대예술을 통해 현대를 더욱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는 아이러니. 작가의 의도는 아니였겠지만, 근대 예술 책을 통해, 나는 현대를, 나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근대보다는. (덧붙임) 1. 긴 설명이 부담스럽다면, 편하게 그림을 보고, 그림 옆의 설명을 읽는 즐거움도 큰 책이다. 우리 귀에 익숙한 화가들의 작품에 대해 신변잡기, 가쉽거리가 아닌 이토록 풍부한 생각거리를 주는 설명이 있는 책을 본 적이 없다. 또한, 미술관의 그림이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화보는 이 책이 예술사라는 책 이외에 도록으로서의 가치도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림이 살아 있다. 그림이 가지는 아우라가 책 속에서 느껴진다. 엄선된 그림들만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된다. 2. 내가 다시 유럽의 미술관 투어를 하게 된다면, 나는 어떤 가이드북보다 이 책을 들고, 미술관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설명하는 화가의 작품 세계를 느껴보고 싶다. 이 책을 읽기전에 만나는 작품들과 읽은 후에 만나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동에 질적인 차이가 예상된다. 3. 곳곳에 요약되어 있는 서양예술사. 단 몇 마디로 서양예술의 각종 양식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간결하고 단순한 설명, 쓸데없이 증가하지 않는 단어들은 가히 촌철살인이 아닐 수 없다. 서양예술사를 단기간에 독파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
|
예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이 무엇인지? 이책 저책마다 먼가를 얘기하는데 복잡해서 정리가 안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거 같다. 제1원인, 의미, 대상으로서 세계에 대한 획득의 불가능에 대한 인식 거기서 오는 개념이나 재현으로서의 그림이나 서사의 포기한다. 모더니즘은 부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바라봄 속에서의 견고함을 스스로의 원리로 삼아 가언적 세계를 만든다, 그러기에 분석철학이나 언어학으로만 이야기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재현을 보여주나 지워질것을 전제한 재현으로 유희와 조롱을 위한 재현으로 지워진 세계를 말한다. 근대와 현대를 나누는 기준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 한다. 개념이나 의미를 가진 세계는 근대의 영역이고 현대는 실존이 먼저와서 세계를 만든다는 세계의 무의미성을 가지고 나눈다.
|
|
|
조중걸 교수는 현대예술부터 시작하여 반대로 선사시대까지 여정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고있다. 부제그대로 전에 나온 현대예술의 연장인듯 싶다. 혹시나해서 현대예술 머리말을 보니 맞는거 같다. 역시 머리말은 중요하다란 생각이 든다.
각 예술사 별로 정의 / 예술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있어 개념 정리하기에도 순서대로 보지 않아도 좋다.
근대예술을 읽기전 현대예술을 먼저 읽고 들어가면 더욱 더 저자의 의도가 쉽게 느껴질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사시대까지 여정이 무사히 끝나길 바라고있다
어여 나오세요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