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0%
  • 리뷰 총점8 10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8.0
리뷰 총점 종이책
니르바나님과 하느님으로 동일한 불교와 기독교
"니르바나님과 하느님으로 동일한 불교와 기독교" 내용보기
석가를 붓다(Buddha 부처)라고 하는 것은 곧 영원한 생명인 얼나(法我)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예수도 얼나(靈我)를 깨달은 붓다(Buddha)이다. 석가와 예수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는 둘이 아닌 한 생명이다(20쪽). 석가붓다는 사람의 삶을 고난(苦難)이라고 했는데, 이를 뒤집으면 사람의 삶이란 생각이라는 말이다. 석가와 예수는 다른 일은 한 것이 없다. 오직 절대인
"니르바나님과 하느님으로 동일한 불교와 기독교" 내용보기
석가를 붓다(Buddha 부처)라고 하는 것은 곧 영원한 생명인 얼나(法我)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예수도 얼나(靈我)를 깨달은 붓다(Buddha)이다. 석가와 예수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는 둘이 아닌 한 생명이다(20쪽). 석가붓다는 사람의 삶을 고난(苦難)이라고 했는데, 이를 뒤집으면 사람의 삶이란 생각이라는 말이다. 석가와 예수는 다른 일은 한 것이 없다. 오직 절대인 니르바나님(하느님)을 생각한 사람들이다(27쪽).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내 말을 듣고 또 내게 보내신 이(얼나)를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죽음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의 몸나에서 영생의 얼나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이는 예수 자신이 멸망의 몸나에서 영생의 얼나로 솟났기에 이 사실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예수는 자신의 몸뚱이가 멸망의 생명으로 참나가 아니라 거짓나인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을 분명히 알지 못한 뒷 사람들은 거짓 생명이라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고 죽어야만 하는 거짓 생명인 몸나를 다시 살리고자 안간 힘을 썼다. 그것이 이른바 육체부활설이다. 그 바람은 가상하나 모자라는 생각이다(31쪽). 한편, 불교에 열세한 위치에 있던 브라만교는 많은 수의 수드라계급의 비쉬누 시바신을 받아들여 힌두교를 만들어 세력을 일으키게 되었다. 석가붓다의 가르침인 얼나(法)의 깨달음에 비하면 우상신상 앞에 제물을 바치며 기복(祈福)하는 제사종교는 어려울 것이 없다. 정신적인 학문과 사색 없이 몸의 수고만으로 기복적인 신앙생활은 가능하다. 그리하여 진리의 종교인 불교는 쇠퇴하고 제사의 종교인 힌두교는 번창하게 되었다.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불교도들이 힌두교에 대항하는 신불교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이 때가 BC 1세기경의 대승불교운동이다. 대승불교운동은 재가(在家) 불교도들이 앞장선 것으로 전해진다(38쪽). 불교가 힌두세력에 맞서기 위한 운동이었지만 사실은 불교가 힌두교화한 것이다. 다르마(얼나)의 깨달음을 이루자는 진리불교를 버리고 석가붓다의 불상 앞에 예배드리는 힌두교와 다름없는 제사불교가 된 것이다. 석가붓다는 신앙을 가르친 적이 없다. 그 때 대부분의 인도사람들은 문맹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다신(多神)을 본받아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가공(架空)의 많은 보살신을 등장시켰다(38쪽).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불교의 요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기독교사상의 요체라고 했지만 그것은 좀 생각해 볼 일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41쪽). 그러나 관세음보살도 보현보살이나 문수보살과 마찬가지로 가공의 보살이지 실재한 보살이 아니다. 이것은 힌두교의 여러 신들처럼 사람이 생각으로 만들어낸 관념의 소산일 뿐이다. 그러나 니르바나님(하느님)은 맘으로 인식하는 것이지 사람의 관념이 만든 것이 아니다. 뭇별을 담은 허공은 생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니르바나님(하느님)은 영원 무한한 허공인 것이다. 니르바나님은 마음으로 경험해 인식함으로 체득(體得)한다고 말하는 것이다(61쪽). 힌두교의 다신(多神)은 상상을 초월한다. 힌두교도들에게는 무려 3억 3천이나 되는 여러 신(神)들이 있다. 힌두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마하트마 간디는 어릴 때 힌두교 사원의 글루(Glu 선생)로부터 1천에 이르는 신명(神名)을 외우라는 숙제를 받고 어쩔 줄 몰랐다는 것이다(62쪽). 로마에 50만의 신들이 있다고 해서 놀랐는데 인도는 그보다 어마어마하게 신들이 많다니. 석가와 예수는 똑같이 명상 기도만 했지 의식(儀式)의 예배를 드린 적이 없다. 이것은 제사 의식에서 명상 기도의 예배로 승격(up grade)시킨 것이다. 그런데 불교와 기독교는 오히려 명상 기도의 예배에서 제사 예배로 후퇴하고 말았다(78쪽). 예수가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이다"(마태 10장 36절) 라고 한 것은 가족 사랑에 빠져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잊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140쪽). 그런데 석가붓다가 가르쳐 준 니르바나님은 저버린 채 석가붓다에게만 예배를 올리고 예수가 가르쳐 준 하느님 아버지는 멀리하고 예수님께만 예배를 올린다. 이것을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르키니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석가와 예수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적인 절대의 나라를 기리켜 준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손가락에서 눈을 떼고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찾아 올라가면 니르바나님ㆍ하느님이 계신다(173쪽). 영원한 생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나의 안녕과 축복을 바라고 비울 뿐이다. 이른바 기복(祈福)신앙이 전부이다. 엄격히 말하면 영원한 생명을 모르는 채 기복신앙에만 매달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신자 숫자만 채우는 거품신앙에 지나지 않는다(295쪽).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 유대교의 일이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다(296쪽). 유치한 여호와 신관에서 깨우나지도 못한 채 예수를 신격화하는 인태신관의 기독교도 문제이지만 참 하느님인 니르바나님까지 버리고 불상에 예배만 하고 있는 불교도 문제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기독교는 예수의 하느님 아버지 신앙을 회복해야 하고 불교는 석가의 니르바나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314쪽). 영원한 생명인 성령을 받는 것이 깨닫는 것이다. 깨달으면 한꺼번에 되 될 줄 알아도 그렇지 않다. 석가붓다도 단번에 모든 것을 다 안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돈오(頓悟) 뒤에도 점수(漸修)를 해야 한다. 돈오도 한 번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순간 순간 계속 자각해야 한다. 끝끝내 자각하고 자각하여 마침내는 땅위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다석어록)(325쪽). 점(占)치는 것을 나는 미워한다. 불교에서 신통하여 능력을 나타낸다거나 기독교에서 성령의 권능을 얻는다는 것을 나는 미워한다. 그러나 미신도 미신인 줄 모르고 정말로 믿으면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자기를 속이지 않고 무엇이든지 참으로 하면 가짜에도 참이 나올 수 있다(다석어록)(364쪽). 이 책을 읽으면서 학교에서 배운 상식이 무너졌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보다 더 좋은 줄 알았던 나는 이 글을 보고 솔직히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른 말들도 많이 나를 놀라게 했다.
7*****0 2002.01.31.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