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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정민 선생님의 책 『일침 一針』 에서도 나왔던 문구인 '차고술금'. 옛일에서 빌려와 지금을 말하자는 것이 의도였다고 저자가 밝힌 것처럼 이 책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몇백년의 시간차가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회 구석구석 병통은 있었고, 문제를 일으키는 못된 인간들이 곳곳에 있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구의 말이 아님에도 깊이 공감되고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이 책 가득 쏟아져 나온다.
올바른 소리를 하기도 힘들고 듣기도 힘든 시대를 살면서 옛사람들의 말과 글의 기록 속에서 힘이 되고 지혜가 되는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네 글자가 모두 좋은 이야기이지만 그 중에 마음에 와닿는 하나를 소개해 본다.
117-118쪽> 공이불명 公而不明 - 공정함만 따지고 현명함이 없다면
공평하고 공정하려면 밝은 판단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분별이 사라져 뒤죽박죽이 된다. 공정함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주는 데 있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어리석은 사람은 쓰지 않는 데서 성취된다. 반대로 현명한 판단력을 갖추고도 공정함을 잃으면 사사로움이 개재되어 능력을 알고도 쓰지 않고 어리석은 줄 알면서 내치지 못한다. 하나는 난감하고 하나는 곤란하다. 기윤의 《아법집》에도 <공이불명>이란 항목이 실려 있어 살펴보니 시 한 수를 소개한 후 이런 설명을 달았다.
공정하면 마땅히 현명함이 생겨나야 하건만, 어이해 도리어 현명치 못한 데로 돌아가고 말았던가? 이는 바로 스스로 자신이 공정하다 믿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 혐의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꼼꼼하게 점검하지 않아서일 뿐이다. 公當生明, 何以反歸不明. 正綠自是其公, 心無所愧炸, 無所嫌疑. 故不詳悉檢點耳.
나는 떳떳하다. 아무 사심이 없다. 이 같은 확신이 자신의 행동에 당당함을 심어준 것까지는 좋은데, 자칫 점검의 내실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쉽다. 공정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현명치 못한 행동, 실상을 잘 알면서도 한쪽만 치우쳐 편드는 목소리가 늘 너무 높아 걱정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공정하기도 힘든데 현명하기까지 하려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추스르고 단련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공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명함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정함이 상황을 올바로 판단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고, 사사로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서 실현되려면 현명함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명하도라도 공정함을 잃게 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서로간에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기 쉽고 그러니 설득과 협상이 중요해졌다. 인간관계에서도 이익을 좇는 경우가 많아 인간미나 정을 느끼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함이나 현명함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싶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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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고술금(借古述今)'을 필두로 하여 굴비 엮듯 줄줄 꿰어지는 사자성어들의 향연이다. 신문연재글 성격이 강해서 정보를 찾아보니 정민 교수가 조선일보에 7년째 연재하고 있는 '세설신어'에 실린 글을 엮은 칼럼집이다. 『일침』과『조심』에 이은 세 번째 엮음집이다.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전체를 아우르는 사자성어는 아마도 '차고술금(옛일에서 빌려와 지금을 말한다.)'이다. 옛날이 꼭 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묵직한 말씀의 힘은 시간을 뛰어넘는다. 인간은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가 아니고 한번도 변한 적이 없으므로 그때 유효한 말은 지금도 위력적이라는 정민 교수의 말은 얼마 전에 읽기를 끝낸 손철주의 책에서 새겨뒀던 문장과도 일치한다. 차고술금, 온고지신, 이고지금, 법고창신..비슷해서 그 미묘한 차이를 크게 구분할 필요를 못 느끼는 이 사자성어들 가운데 연암 박지원이 중점을 뒀다는 '법고창신'을 들어 설명한다.
새것은 위태롭고 옛것은 희미하다. 연암 박지원이 지적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찬찬히 뜯어보라. 그는 희미하되 묵은 것의 믿음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결론은 명백하다. "하늘과 땅은 비록 오래되었으나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낳고 해와 달은 비록 오래되었으나 그 빛은 날마다 새롭다." 과거는 천지와 일월처럼 상존하면서 현재를 비춘다. 그리하여 옛것은 답을 찾아 가는 길이 된다. 옛것에서 얻은 앎이 함의되지 못하는 것은 옛것의 결함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자의 결핍일 뿐이다. (『사람 보는 눈』154쪽)
7년째 매주 네 글자 제목의 글을 써야 하니 모든 생각을 네 글자로 붙들려 드는 버릇이 생겼다는 정민 선생의 글이 엄살은 아니겠다 싶다. 책 한권에서 소개한 100개의 사자성어 중 낯익은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아마도 정민 교수의 앞선 책에서 말하던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책을 읽고 메모하던 습관의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정도 되는 것이 이런 형태로 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100개의 사자성어에 담겨있는 100가지의 짧은 이야기들이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한다. 나의 가족을 돌아보게 하고 더 나아가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품게 한다. 과거에 대한 부질없는 후회나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두려움보다는 단단하게 딛고 선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를 설득한다.
사자성어 중 어떤 것이 마음에 강하게 와 닿는 지는 개인차도 크고 개인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 따라서도 크게 좌우된다. 그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자극하는 글이 따로 있는 법이다. 정민 교수가 소개한 100개의 사자성어 중 메모해 두고 오래도록 마음에 새길만한 것으로 '이백과포(以帛裹布)'를 우선 꼽아 보았다. 정조 임금 당시 우리의 조복이 여름에는 모시를 쓰는데 비단으로 안감을 대서 겹옷으로 만들었다 한다. 모시로 옷을 지어놓고 안에다 비단을 대는 것은 겉은 소박한 체하고 속으로는 사치를 부린 것으로 겉다르고 속다른 행동이라 예가 아니라 해서 정조가 이를 금지시켰다 한다. 이 사자성어를 소개하며 박목월 선생의 어린시절 일화를 소개했는데 그것이 참 따끔했다. 추운 겨울에 내의도 안 입은 채 광목옷을 입고 10리 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니는 아들이 안쓰러워 어머니는 아버지의 헌 명주옷을 뜯어 아들의 바지저고리 안감을 대줬다고 한다. 뻣뻣한 광목이 겨울 추위에 살을 쓸어댈 것이니 춥고 쓰리기도 한 이중고였을테니 덧댄 안감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했을까. 하지만 우연히 손자의 바지 안감을 본 할아버지한테 불려가서 어머니는 큰 꾸중을 들었고 손자는 다시는 그 옷을 입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리 귀한 자식이라도 차고 맵게 키우라는 대쪽같은 가르침이었다. 자식이 곧고 바르게 자라길 바라는 부모로서 가슴 깊이 새겨둘 글이다.
대쪽 같은 성정으로 귀감이 될만한 사람은 능히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정붕 청송부사와 영의정 성희안의 고사를 담은 '백재고잠(栢在高岑)'을 하나 더 보태본다. 두 사람은 젊어서부터 친교가 있었고 성희안의 추천으로 왕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으며 청송부사 또한 성희안의 추천으로 제수된 것이었으니 성희안은 안부 편지 말미에 친밀한 마음에 그 고장의 산물인 잣과 꿀을 부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붕은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 속에 있습니다. 태수가 어찌 이를 얻겠습니까?' 하며 꼿꼿한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성정을 아는 성희안 또한 깨끗하게 사과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교류가 두고두고 회자됐다고 하니 두 사람의 인품이 주거니 받거니 보기에 흡족하다.
사람들이 갈수록 왜소해지고 야비해져서 품격조차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후진 것은 옛날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정민 교수의 머리글은 콕 박혀 아프면서도 후련한 기분이 동시에 든다. 주먹도끼를 쓰던 구석기인들은 미개하고 우주로 로켓을 쏘아올리는 현대인들은 문명인이라는 이기적 판단으로 인간 본연의 내면마저 눈부신 발전을 했다고 뭉뚱그려 평가해 버리는 것은 착오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편의를 위한 기술이 발전하였을 뿐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존재들이다. 옛 것에서 배우고 익힘에는 부지런을 좀 떨어도 경망스럽지 않다. 품격이란 걸 좀 갖추고 살아보자는 작은 소망이 들썩이는 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거나 뭉텅뭉텅 건너뛰어 읽기를 해도 좋을 책이다. 짧은 글들이지만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런 문구를 써 넣어야 하는가보다. 오랜만에 응모해 본 이벤트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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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이 건넨 네 글자 이 책은 ‘건네다’라는 말이 있다. 돈이나 물건 따위를 남에게 옮기다. 또는 남에게 말을 붙이다, 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사이다 . 그런 ‘건네다’의 뜻을 품고 있는 이 책은 『옛 사람이 건넨 네 글자』 라는 제목 그대로, 마치 옛사람이 지금 앞에서 말을 붙이고 있는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저자는 ‘네 글자’로 이루어진 말을 기본으로 하여 옛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조곤조곤 건네주고, 우리들은 그 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듣고 있는 모습, 이 책을 들고 있으니 그런 모습이 그려진다, 이 책의 내용은 저자 정민 교수는 그의 책 여러 권을 읽었기에, 매우 친숙하게 여겨지는 인문학자다. 내가 읽은 그의 책은, 『한시 미학산책』, 『미쳐야 미친다』,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이다. 그래서 일단 그의 책은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가 다른 책을 통하여 그가 저술을 통하여 밝히고자 하는 근본 의도를 충분히 밝혔고, 또한 그런 그의 근본 취지를 나 또한 충분히 납득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옛글을 읽으면서 마주친 글들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책이다, 그러니 옛사람의 지혜를 저자의 눈으로 한번 걸러서, 독자들로 하여금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지혜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세상이 발전하고 진보한다는 말은 믿지 않은지는 오래다. 인간은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가 아니다. 역사는 늘 쳇바퀴처럼 돈다.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을 낳고, 우둔은 우둔을 낳는다. 젊은 시절에는 언젠가 좋은 때가 오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그때가 좋았지’만 남았다.> (4쪽)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을 낳고, 우둔은 우둔을 낳는다. 지금도 그래서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시대, 그런 시대가 저자와 독자들이 살고 있는 시대다. 따라서 저자의 고민은 바로 그 점에서 시작한다. 그런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저자는 이렇게 찾고 있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일에서 빌려와 지금을 말하자는 것이 처음 생각이었다. 음미할 만한 옛일을 메모해두면 꼭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와 똑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당장은 아니어도 늘 그랬다. .........지금 막막하고 앞이 캄캄하면 안 보이는 앞으로 더 나갈 게 아니라 뒤를 돌아보는 것이 맞다. 거기에 답이 있고 미래가 있으니까. 옛글에 무선 랜은 없었지만 생각의 힘은 광속으로 펄펄 날았다. 인터넷이 아니래도 통찰은 반짝반짝 빛났다. 후진 것은 옛날이 아니라 지금이다.> (4~5쪽) 차고술금(借古述今), 옛일을 빌려와 지금을 말한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그러한 저자의 고민과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옛사람들의 말을 건네고 있는 저자의 글은 그래서 문제의식이 있으면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 또한 보여주고 있으니, 이 책은 그런 가치가 먼저 있다 할 것이다. 네 글자로 읽어보는 옛 사람의 마음, 그리고 지혜 물론 여기 이 책에 등장하는 시자성어는 우리가 고사성어, 또는 사자성어라는 이름으로 알고있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다. 저자가 옛사람의 글 속에서 뽑아내 우리에게 새롭게 보여주는 사자성어(四字成語)이다, 저자는 이 책에 실린 사자성어를 글의 성격에 따라 네 갈래로 분류했다. 제1부 〈마음 다스리기〉, 제2부 〈세간의 흥정〉, 제3부 〈내려놓기의 기쁨〉, 제4부 〈숫자로 세상 읽기〉 등 총 4부에 25개씩 글을 나눴다. 이 책이 주는 의미 특별히, 이 책의 부제는 ‘생각을 잊은 인생에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멀리하고 사는 우리에게 옛사람의 말을 빌려 건네주는 저자의 목소리도 귀 기울여 들어보는 것도 생각을 하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옛사람이 건네는 말을 들으면서 생각을 해보게 하는 것, 이게 이 책의 가치이다. 더하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저자가 건네주고 있는 해답 또한 들을만하다는 것, 역시 이 책의 가치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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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의외로 많은 시간을 들여 읽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리뷰마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쫓김에 초반을 넘어서부터는 이 책을 그저 한글 부분만 읽어댔다. 가끔 시간을 길게 들여 읽으면 좋은 책들이 있다. 책의 한 부분, 한 글자에서 멈추어 서서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때로는 그 사이에 다른 책 한 권도 끼워넣어도 좋을 그런 책들. 이 책이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다 읽었으되 아직 다 읽지 못하였다. 책을 막힘없이 읽지 못하고 미완의 독서로 남겨두어야 했던 가장 큰 원인은 한자에 익숙하지 않음이며 한자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글자의 구성을 통해 저 한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감은 오나 제대로 된 의미를 알지 못함이다.
물론 집에 옥편이야 몇 개 있다. 하지만 옥편을 찾기에는 시간이 태부족이었다. 그래서 많이 아쉬웠다. 요즘 나오는 동양 고전은 대부분의 경우 한자 원문을 싣는다. 문제라면 원문이 뒤에 실리거나 음없이 실린다는 점이다. 운이 없으면 획수와 부수로 옥편에서 한자를 찾아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면 음이 한자 위에 표기된 한자 원문과 어려운 한자와 의미가 다른 한자, 그리고 해제가 그 뒤를 잇는 것이지만 이 책에서 그것을 바라기엔 내용의 풀어나감이 그에 어울리지는 않았다. 네 글자란 것이 고사성어로만 볼 수는 없고 상용구로 사용되거나 혹은 문장에서 발췌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풀어나가는 과정은 흥미로웠으며 원문이 떡하니 앞에 등장하면 그 자체로 글의 흐름을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시간을 들여 한글 부분을 읽고 원문을 해독하려고 노력하여 많은 시간을 들였다. 한문 문장들은 뜻은 같다 하여도 해석하면서 내게 다가오는 부분이 미묘하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초반부의 일이었다. 리뷰를 쓰려면 일단 책을 다 읽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중간에 그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아쉽다. 나의 무지가.
이 책에 수록된 100개의 네 글자를 찬찬히 살펴보면 삶이란 이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다. 어쩌면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일지도 모른다. 칠등팔갈을 일으키는 것이 인간일 터이니.
책을 덮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겨 나에게 묻는다. "내 몸 하나, 마음 하나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처신이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삶을 잘 살았다 평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읽고 나니 생각이 어지러워진다. 그리고 갈증이 인다. 아마 나는 이 책을 몇 년에 걸쳐 다시 읽을 듯 하다. 출처로 인용한 문장 하나 하나를 다 해독하면서 그 음과 뜻을 따라 생각에 더 깊게 잠기기 위해서.
가끔은 이렇게 읽고 나서 생각에 잠기는 책들이 좋다. 고리타분해보일 수 있는 한문 문장이지만 세상사의 돌아감이 저 근원부터 변하지 않으니 지금도 앞으로도 다 통용될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읽고 나니 동양 고전보다 서양 고전에 더 익숙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왜 그리 되었을까? 열 살에 천자문을 건네 받고 익히라 하셨던 아버지의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내가 한문을 가장 잘 알았던 것은 아버지와 편지를 주고받던 어린 시절이다. 한글을 한문보다 모르셨던 아버지의 편지는 항상 조사만 한글인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남아있던 편지는 어린 딸아이에게 그리움을 가득 담아 쓰셨건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 편지를 읽었으되 30을 넘어선 나는 그 편지의 상당 부분을 감을 잡아 읽어야만 했다. 그렇게 멀어진 글자는 어쩌면 그토록 멀어진 사고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모든 것에 균형이란 중요한 것이다. 요즘의 학문이 유럽에 그 중심을 둘 때가 많다지만 가끔은 우리의 오래된 것에도 신경을 쓰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마침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구절도 읽었으니 나도 한문을 조금이나마 익히도록 시간을 내봐야겠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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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정민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세글자 '놀랍다'이다. 정민 교수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아마도 근면하고, 호기심이 많고, 욕심도 많은 분일 것이다. '네글자의 달인'이라는 애칭이 걸맞게 이 책 역시 조심, 일침 등등 처럼 네글자에 담겨있는 숭고하고 의미 깊은 뜻을 풀어 냈다. 아예 제목도 '옛사람이 건넨 '네글자''다. 엄청난 자료 속에 감춰진 의미를 찾아 내는 저자의 집요함도 그렇거니와, 이런 류의 책이 끊임없이 팔리는 것을 보면 사실,한마디로 '놀랍다' 아마도 엉클러진 세태에 시달리는 가녀린 인생들이 우리 사회 도처에 널려 있고, 동아줄을 잡듯, 무언가 로부터 위안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넘쳐 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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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글자로 본 세상살이 일상을 살아가다 어는 순간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싶을 때나 자신을 위로 삼고 싶을 때 떠올리는 구절이나 고사성어가 있다면 그 안에 담긴 옛사람의 감정과 의지에 기대어 오늘 내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된다. '고사성어故事成語'는 비유적인 내용을 담은 함축된 글자로 상황, 감정, 사람의 심리 등을 묘사한 관용구다. 주로 4글자로 된 것이 많기 때문에 사자성어라고도 한다. 이 네 글자 속에는 사람과 세상이 담겨있다. 옛사람의 감정과 의지에 비추어 오늘의 나 자신과 세상을 본다. 이 책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은 정민선생이 옛글에서 찾은 100가지 사자성어를 통해 "남들 보기에 멋진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건강한 매화를 병들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을까? 반대로 그저 내 한 몸 편하고자 '치마를 걷고 발을 적시는 수고로움'마저 꺼리고 있지는 않을까?" 라며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옛글에서 찾은 결정적 장면, 고전에서 뽑은 사자성어를 통해 현대를 사는 우리가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지혜”를 전한다. 옛글에서 고른 사저성어를 ‘마음 다스리기’, ‘세간의 흥정’, ‘내려놓기의 기쁨’, ‘숫자로 세상 읽기’ 등으로 구분하고 각각 25개씩 촐 100개의 단어를 골라 단순히 사자성어와 그에 관련된 고사를 소개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 담긴 귀한 사유와 성찰을 함께 전한다. 100개의 사자성어 속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일상을 살아가며 꼭 한번 생각해봐야할만한 이야기를 담을 것들로 꾸며져 있다. 개개인의 일상과 그 개인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와 병폐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고할 기회를 제공해주고자 하는 목적의식적인 선택이 주목된다. 기존의 대부분 고사성어를 일려주는 저자들이 중국의 고전에 중점적으로 주목했다면 이 책에서 저자 정민 교수는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비교적 익숙한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바탕으로 내용을 엮었기에 더 친숙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 보인다. 이 점에 다른 책에서는 찾기 어려운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저자 정민 교수는 한양대학교에 제직하며 은 '삶을 바꾼 만남', '미쳐야 미친다',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죽비소리', '책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한시 미학 산책',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꽃들의 웃음판', '비슷한 것은 가짜다',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등으로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저자로 내가 일부러 찾아보는 저자 중 한명이다. “옛날이 답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묵직한 말씀의 힘은 시간을 뛰어 넘는다, 인간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므로 그때 유효한 말은 지금도 위력적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이 말 속에 고사성어를 살펴야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에 하나씩 살펴 100일이 지날 즈음 달라진 스스로를 만날 TN 있길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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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락상평, 고통과 기쁨을 나눠 평형을 유지하기 즐거움과 괴로움은 뗄레야 뗄수없는관계다 즐겁다 자만하지 말고 괴롭다 절망하지 말자 마음이 괴롭고 허전할때는 책과 벗되어 잔잔히 들려주는 이야기에귀기울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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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며 생각한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렇고 그런것들의 사자성어였다. 역시 우리는 너무 틀에 박힌 생각만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정민선생은 지금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옛 사람들은 어떤식으로 생각하며 살았는지를 네글자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렇게 많은 네글자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그저 놀랍다. 한자로 되어 있는 네글자는 쉽게 다가오지 않지만 옛문헌과 옛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이야기에 빗대어 들려주고 있어 그 뜻을 새기기는 그닥 어렵지 않다. 과유불급, 지나친건 모자란것만 못하다고 이 책은 한번에 휘리릭 넘겨 볼 책이 아니라는 생각에 좀 더 마음속에 새길 수 있는 방법으로 필사를 하며 책을 읽기로 했다.
'송무백열' '백열'은 벗이 잘 되는것을 기뻐해 함께 축하해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보정스님이 대둔사에서 본 좋은 글을 같이 보려고 백열록으로 만든 이야기처럼 벗이 잘되는 것을 축하해주고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이담긴 송무백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말도 있지만 친구가 좋은일이 있으면 배가 아픈 요즘 세상! 송무백열하는 옛선조들의 마음을 본받아 진정한 벗과의 소통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비재중'의 네 글자를 풀어 주는 이야기속에는 참 재미난 옛이야기가 실려 있다. 술에 취해 가죽신과 나막신을 한짝씩 짝짝이로 신고 문을 나서려는 임제를 말리는 하인에게 말을 타고 가면 한쪽에서는 가죽신을, 다른 한쪽에서는 나막신을 신었다고 여길것이라는 그의 호탕함에서 나온 이 네글자는 현대의 이야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동영상으로 국물녀가 된 여자의 실상을 알고보니 같은 피해자였다는 사실등 옛사람들의 삶이나 지금의 삶이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어느한쪽만 봐서는 안되는 듯!
![]() '생사요법' 너무도 일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네글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고도 다 끝내지 못하고 야근까지 해야하는 현대인들, 그뿐 아니라 막상 무슨 일을 하려고 보면 일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해야할지 막막할때가 있다. 일단 욕심을 버리고 먼저 할것과 나중할 것을 정한다면 일은 훨씬 줄어들게 된다는 사실! 너무 복잡하게 얽힌 문제나 능력 밖의 일은 일단 밀쳐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무려 7년여동안 매주 한꼭지씩 제목을 네글자로 붙이며 써 온 글을 묶어놓은 이 책! 옛일에서 빌려와 지금을 말하고자 '차고술금'의 뜻으로 쓴 정민 선생의 이 네글자들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주기도 하고 가르침을 주기도 하며 지금 세상을 들여다 보게 만들기도 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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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란 제목을 맨 처음 마주쳤을 때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도 가장 먼저 떠올린 글귀가 사자성어였습니다. 네 글자로 이루어진 말 ... 정도의 뜻이 될까요? 흔히 고사성어라고는 하는 이 말들은 아마도 그 옛날,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대나무나 나뭇조각에 글귀를 새겨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많은 글자를 적을 수 없었고 글자를 최소한으로 함축하는 습관?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환경으로 인하여 뜻마저도 함축하게 되는, 그리하여 넉 자의 글자 속에는 글자 수만큼 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들이 스며들어 있는 듯합니다. 사자성어를 떠올리니 가장 먼저 눈앞에 펼쳐진 것은 책표지의 색상처럼, 얌전한 초록색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제 막 '어린이'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했기에, 까까머리로 까만 교복을 입었던 중학생 시절, 영어와 함께 한문이라는 수업을 들어야 했던, 그럼으로써 소년이 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첫날이 생각납니다. 갓 국민학교를 졸업한 아이의 몸에 머리는 까까머리이고 교복은 3년은 입어야 할, 우장바우 같은 옷을 걸친 몸으로 소년이란 말만으로도 가슴에 푸르고 원대한 포부 하나쯤 저절로 새겨졌을 것만 같던, 담임 선생님 한 분이 전 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 과목마다 전공 선생님이 수업을 들어올 때는 마치 소년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생각도 들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한문 선생님은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선생님이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라는 이름에 걸맞을만한 인자함이나 부드러움보다는 호랑이 선생님에 걸맞은 무섭게 생기시고 풍채도 좋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 책을 받아드니 책표지의 초록과 사자성어라는 의미가 함쳐져 처음으로 한문에 대해서 공부를 하던 그때가 생각 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자성어에는 교훈적인 그러니까 우리가 배울만한 교훈들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만한 글귀들만 현대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겠지요? 사자성어를 들을 때면 왠지 숙연해지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어쩌면 그 안에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우리가 알고 갈고닦아야 함들이 들어있다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조들의 언행이 지금보다 더 지혜롭거나 요즘 세상의 그 어떤 가르침보다 더 귀한 것은 분명 아닐 텐데도, 그런 옛날이야기 속에 담긴 교훈을 들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숙연해짐은 어쩌면 중국의 고사들과 조선의 시대적 정신이 유교에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를 가장 높은 덕목으로 처 주는 그 시절의 교훈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살아감에 반드시 필요한 예의 혹은 인간이기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의에 대해 들려주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정민 선생님의 일주일에 한 편씩 꼬박 7년 동안 제목을 네 글자로 하여 글을 적어오셨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쉽게 우리가 흔히 알만한 사자성어를 다시 반복하듯이 적을 수도 있으셨을 텐데 그러지 않으시고 제게는 낯설고 처음인 사자성어들과 선생 스스로 네 글자로 묶어 만든 고사들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백 편의 네 글자들이 책 한 권에 가득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전에, 물론 소설책을 통해 읽은 것이지만, 중국에서도 유학을 공부할 때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연습장에 휘갈겨 쓰거나 속으로 여러 번 읽으며 참고서와 함께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책 한 권을 음률로 여러 번 읽다 보면 그 뜻도 저절로 익혀졌다고 합니다. 말리 저절로이지 그리 쉬운 저절로는 아니었겠지요. 우리네 서당에서도 하늘천 따지 ... 하며 그렇게 천자문을 읽어나가며 그 문장을 외우고 그 문장이 지닌 뜻을 익히게 되는 그런 공부법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소리가 주는 그러니까 한시나 한문으로 적혀진 문장의 소리가 주는 어떤 느낌을 받을 수가 없어서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교육을 좀 더 받았더라면 이 책을 얼마나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이 많이 들었습니다. 비록 중학교에서 한문을 교육받은 세대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갈고닦지를 않아 아주 사소한, 초급반 정도의 한자가 아닌 이상 읽어내지 못하는 저로서는 대충 띄엄띄엄 읽다가 한자로 된 문장은 건너 뛰어가며 한글만 열심히 읽을 따름인 독자였습니다. 조금 더 책을 재미나게 읽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한문의 문장과 소리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우적축은牛賊丑隱'의 글이 참 재미났습니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연암 박지원의 [사소전士小典]에서의 몇 가지를 옮겨보려 합니다. · 귀가 먹어 큰 소리로 말하는 귀머거리를 '소곤대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 ·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장님이라 하는 대신 '남의 흠을 보지 않는 이' · 혀가 굳고 목소리가 막혀 말 못하는 사람을 벙어리라 하지 않고 '남 비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 등이 굽은 곱사등이는 '아첨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어떤 식으로 불린다고 해도 귀머거리는 귀가 들리지 않을 것이고 장님은 앞을 못 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그들이 가진 면을 단점으로 치부하지 말고 그것을 장점으로 먼저 봐줄 수 있는 그런 덕을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결국 같은 뜻이라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듣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말을 해주는 것이 인간관계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는 차분하게 봄볕 같은 마음으로 찬찬히 읽어볼 그런 책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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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중 한 분이다. 많은 글을 보지 않아도 맘이 가는 사람이 있는데 정민 교수가 그러하다. 그런 작가가 일주일에 한 번꼴로 OO일보의 A면 맨 뒤쪽에서 두 번째 장에 네 글자로 이루어진 한자로 글을 풀어쓴다. 그를 좋아하기에 신문에서 찾아 읽은지 몇 년째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글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날의 신문내용 혹은 며칠 전 신문의 내용들과 정민 교수의 글을 짜 맞추어 가면서 무슨 뜻일까 생각하다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갈 때가 적지 않다. 이유는 당연하듯 한자에 박식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그 내용중 많은 것들은 가슴에 위로도, 반성도, 타박도 하면서 스쳐간다. 가끔 격한 글을 볼 때면 보수적인 그 신문의 논조와 어긋나 다시 글이 안나올까봐 걱정을 하기도 한다.
이 책은 그가 7년 동안 ‘네 글자로 이루어진 한자’로 쓴 글 중에서 100개의 글만을 따로 모아서 만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차고술금(옛일에서 빌려와 지금을 말하는 것)의 한자로 이루어진, 재미있지만 어려운 책이다. 보통 사자성어를 생각하면 흔히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어떤 것들(뜻을 모두 떠먹여 주고, 유래도 소상히 알려주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만, 그가 옛 사람에게서 건네받아 우리에게 전달한 네 글자는 사자성어이되 흔히 보았던 그런 것이 아니라서 좀 어렵게 느껴진다. 신문에서야 비슷한 시기에 어림짐작할 수 있는 글이라 대충 눈치껏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나 따로 뚝 떼어 나와 커다란 4개의 카테고리로 글이 묶여지니 그 뜻을 헤아리기 힘든 경우도 왕왕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절로 머리가 끄덕여지는 것이 있고, 어떤 부분은 우리의 세상사나 정치, 경제에 대해 일갈하는 것이 있어 시원함을 느끼기도 하고, 나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콕 짚어서 이야기해 ‘뜨끔’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슬렁슬렁 이해하고 넘어가도 허투루 볼 부분은 없다. 그의 글은 ‘하나의 네 글자’를 설명하는데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옛 글들을 제시한다. 그러기에 하나의 네 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볼 한자글은 2개에서 많게는 5개까지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 네 글자를 설명하는 페이지는 대개 3쪽을 넘기지 않는다. 신문의 거의 뒷면, 광고 바로 윗부분의 네모 박스안에 들어가는 글이기에 그리 길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한자는 어렵고, 제시되는 글은 많고, 설명은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아주 친절하지 않으므로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정민 교수가 머리말에 적었다. 옛날이 답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묵직한 말씀의 힘은 시간을 뛰어 넘는다고. 그렇다면 그의 글을 보고 전부를 이해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현재, 지금의 우리 모습은 반추해 보는 것으로 어려움을 넘겨보는 것은 어떨까.
그의 글은 ‘옛날 우리 선인들은 이러했다’로 끝나는 사자성어의 설명이 아니다. 지금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이에 맞는 네 글자를 찾아서 옛 사람의 말을 건네주는 것이다. 우리가 보았던 사자성어처럼 ‘예전에 이런 일이 있어서 이런 사자성어가 생겼으니 우리도 이를 본받자’가 아니다. 그의 글은 우리 모습을 먼저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옛 글을 찾고, 그것을 통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고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사자성어도, 네 글자에 들어가는 한자도 상세하고 친절하게 떠 먹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 네 글자를 설명하기 위한 풍부한 예시 글들이 들어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를 보고 옛 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한 나머지 생각은 온전히 각자의 몫으로 남겨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의 글은 어렵고 천천히 봐야하고 자주 들여다봐야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내 마음을 먼저 생각하고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내가 신문에서 보다 이 책이 좀 더 읽기 어려웠던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정민 교수가 우리에게 ‘네 글자’를 건넨 의미는 ‘지금에 집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머리말에서 이야기했다. 지금 막막하고 캄캄하면 안 보이는 앞으로 더 나갈 게 아니라 뒤를 돌아보는 게 맞다고. 후진 것은 옛날이 아니라 지금이라고. 사람들은 갈수록 왜소해지고 게다가 야비해져서 품격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노라고. 그렇다. 지금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왜 지금이 이러한지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궁리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옛 사람이 건넨 네 글자를 어렵다고 내팽겨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책의 표지는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난 원래 표지에 관심이 많은데 그림과 글자가 잘 맞지 않는다. 제목과 저자, 출판사의 글자 폰트가 모두 달라서 어지럽다. 또한 내부와 외부의 글자색을 맞추기 위해 표지의 배경부분에 그린색을 넣었는데 생뚱맞은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표지의 원숭이 그림이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다. 올해가 병신년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생각을 잊어버리고 원숭이처럼 살지 말라는 것인지, 이 책을 읽으면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된다는 것인지 너무 애매해서 볼 때마다 무엇일까 신경이 쓰인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서 좋다.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현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고 옛 글을 살필 수 있어서 좋다. 시간을 두어 읽기를 권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