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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를 읽고 이런 연구방법과 이야기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 읽어보게되었다. 난 역사공부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에 이끌려 읽은 것이니 역사연구 방법에 대한 의견같은 건 얘기할 재간이 없다. 본래 이 책은 1975년에 펴낸 책이니 이런 미시사 연구를 막 시작하던 시기에서 벌써 40여년이 훌쩍 지난 것이다. 그동안 다른 책들도 많이 나와있고 더러 읽어보기도 했다. 물론 나야 이야깃거리로 읽은 것이지만 역사가 재미있어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대부분 내가 읽었던 책들은 한가지 주제에 대한 역사를 훑어보는 것으로 진정한 미시사는 아니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진정한 미시사는 뭐란 말인가? 나같은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 첫 대담 질문에 미시사라는 용어에 별로 큰 의미를 두지않는다고 하였다. 마치 미시사를 연구대상의 규모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현미경적 관점 분석의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아하, 바로 이것이었구나. 내가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때문이었구나하고 무릎을 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현미경으로 연구하던 것은 다른 것이지만, 이해하기가 쉬워졌다. 역사를 이렇게 자세하게 관찰함으로써 그 큰 그림의 밑바탕을 제대로 세우는 일이 되겠구나하는 깨달음(?)이 생겼다. 그런데 정작 저자는 연구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중요한 것이란다. 그럼 내가 이 책을 읽고 어떤 것을 알게 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인데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내게는 매우 당혹스럽다. 그냥 이야기책으로서만 읽기에도 참 재미있었으니 그런 것은 신경쓰지말까싶다가도 그래도 이게 그렇게 가치있는 책이라는데 저자가 말하려고하는 의도는 알아들어야되는 게 아닌가싶어 자꾸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 책은 16세기 베네치아 프리울리 지역의 방앗간 주인에 대한 이단 심문관의 일지를 재구성해서 써내려간 것이다. 전작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베네치아의 기록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지만 이렇게 몇세기가 지난 뒤에도 그 기록들을 찾아서 역사를 구성해낸다는 것은 여전히 놀라운 일이다. 물론 이단 심문관의 재판 기록만으로 이 책이 쓰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들이 많다. 일례로 주인공 메노키오의 경제상황을 추측해내는 일로 딸을 결혼시킬 때 들어간 비용을 산출해서 어느 정도라고 얘기하는 것도 그런 자잘한 기록까지도 다 보존되어있기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놀랍지않은가? '코푸는 손수건 5개 6리라'라는 기록이. 앗, 이야기가 딴 방향으로 샜는데 그렇게 기록들을 재구성해서 재미있게 써내려간 한편의 소설같은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했는가를 찾아내보고자 애썼다.
피노키오가 자꾸 떠오르는 이름, 주인공 메노키오는 방앗간 주인이라고 했다. 방앗간 주인은 그 당시 농민층도 아니고 귀족층도 아닌 중간 지대에 있는 신분이었다. 그는 읽고 쓰고, 암산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교회에서 행정관을 담당하기도 한 사람이다. 즉 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가 종교 재판소에 고발되었는데 '이단적이고 불경스러운 발언'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 심문내용들이 이어지는데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그 당시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하고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떠벌린다. 그는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인데 자신이 책을 읽고 알게 된 것을 생각하고 추론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이론을 만들었는데 그걸 누구와 진정으로 논쟁해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 재판소에서 심문관인 주교대리나 신부님을 상대로 펼쳐보였던 것은 아닐까싶다. 일반적으로 주변의 사람들과는 이런 토론이 잘 이루어지지않았을테니 아마 그는 죽으면서도 그렇게 자신의 생각들을 펼쳐보이고 논박당한 것이 억울하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찌해서 그런 생각들을 갖게 되었는지를 추적해보는 과정이 자세하게 들어있다. 그 시기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창한지 반세기가 지난 뒤였으니 아마도 그런 이야기가 흘러 들어갔을 거라고 여겨진다. 또한 메노키오는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 책들이라는 게 교회의 권위있는 책이 아니라 외경과 같은 책들이었고, 또 하나 여행기가 있었다. 다른 지역의 생소한 문화에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해 신앙의 교리들을 바꿔나가는 모습은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혹시 코란을 읽게된 것 같다는 추정이 있다. 그의 책은 몰수 당했는데 이상하게 그 목록이 없다.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다. 고대 신화에서 근대과학을 지향하는 자연주의및 사회 혁신을 향한 유토피아적 희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념들이 녹아들어가 있단다(저자의 서문에 있는 표현이다). 범신론적인 종교관을 나타내기도 하는 그이지만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를 거부하기로 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대로 잘 따를 것을 약속하면서 방면되기도 했지만 15년 뒤 똑같은 죄목으로 다시 고발되어 결국 화형에 처하고만다. 머릿속에 자리잡은 생각이 바뀌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역사의 주역도 아니고 대표성을 띈 인물도 아니지만 16세기 한 인물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역사가 소홀히 여겨온 민중문화에 대해 들춰보고자한 것이란다. 물론 '민중문화'란 단어의 이해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민중 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가 아니라 '민중 계급에 부과된 문화'를 연구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수준이 다른 지배계급과 종속 계급 사이의 문화 상호 순환에 대한 연구의 일부가 되겠구나하는 생각이다. 어쨋거나 이 책은 어렵고 긴 서문이 있어 몇번 더 읽어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저자는 결론을 내는 대신 이렇게 긴 서문이 본문과 다르게 학술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본문을 다 읽고나서야 조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나같은 일반적인 독자라면 책 읽는 순서를 바꿔서 읽기를 권한다. 옮긴이의 서문까지 60페이지다.
아참. 중요한 것을 빼먹을 뻔했다. 주제가 어떻든간에 정말 재미있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같이 흥미진진함이 가득하다. 지금 세상에서야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자유겠지만 그 당시 그런 생각을 하고 거침없이 얘기한 주인공 메노키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길 권한다.
사족으로 책 내용에 오류가 있어 지적한다. 232페이지 마지막 줄 '준성사(예를 들어 성체)'에서 괄호안의 성체는 저자의 글인지 옮긴이의 해석인지 모르겠으나 성체는 준성사가 아니라 성사이다.
그리고 여러차례 '보석'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보속'이 맞는 말이다. 자꾸 눈에 거슬렸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다이아몬드같은 보석을 바치라는 이야기로 읽히지않을까하는 우스운 상상을 해봤다. 물론 각주에 설명이 있기는 하다. 다만 그 설명도 좀 아쉽기는 하지만. |
| 미시사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내용에 대한 분석과 평가만을 읽어왔던 진즈부르크의 책을 읽었습니다. 본격적인 미시사연구의 선구자격인 진즈부르크의 저작으로 최근에 갖게 된 미시사에 대한 관심 때문에 손에 쥐게 된 책이었습니다. 거의 4주간 이 책에 매달려 있었고, 한번보고, 정리하고, 다시 한번 보고... 이렇게 한구절 한구절을 다시 곱씹으며 이 신기하고 놀라운 저작을 만들어낸 저자에 대한 존경과 질투를 매순간 느끼며 한장 한장 놀라움과 기대감과 질투를 담아서 읽어 나갔습니다. 책을 한번 잡으면 단거리 달리기 하듯이 해치우는 저였지만 이 책은 그렇게 읽어 내려갈 수 없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음미하며 읽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더군요. 마치 에코의 글과 같은 느낌... 그와 같은 박학다식과 이탈리아적인 인문학에 대한 정서가 닮겨 있는 듯한... 그러면서도 분석적이고, 세밀한 부분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까지... 번역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역사서를 소설처럼 다룬 역자들의 태도가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손을 통해 번역되어진 그래서 무언가 누뎌지고 잘못 인도되어진 듯한 서술들이 자주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충격적인 글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나서... 마구 읽고, 마구 낙서하고, 마구 줄을 그으며 마구 가지고 다닌 흔적이 가득한 책에 겉 표지를 씌우면서 나도 이런 것을 쓰고 싶다는 나도 이만한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야무진 꿈도 문뜩 떠오르더군요. 여러가지 일이 많았던 오늘이지만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이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가슴 벅차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한권의 책을 읽고, 그것을 나의 초라하고 작은 서가에 꼽는 순간... 그 순간의 희열은 제겐 마치... 무언가 큰 꿈의 세계를 거닐다 온것처럼 소중한 순간이 되곤 하거든요. 에코와 웨난, 그리고 진즈부르크...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리스트에 또 한명의 이름을 올렸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구요. 카를로 진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 중세와 근세의 교차점을 살아온 한 방앗간 주인의 종교와 세계에 대한 관념을 16세기의 종교재판 서류를 통해 재구성하고 있는 글입니다. 16세기를 살아간 한 인물의 세계관이라는 조그맣고 사소한 듯한 주제에 대한 추적을 시도하는 진즈부르크의 날카로운 시각과 놀라운 문학적 서술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수사학적이며 종교적이며 사변적인 사료들을 깔끔하고 체계적인 사고와 사상, 그리고 사회적 조류로 재구성해내는데 성공한 듯 합니다. 게다가 그는 그 일단의 사료들의 저변에 숨어있는 당대의 이름 없는 민중들과 사회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놀라웁도록 치밀한 당시 사회와 한 개인의 삶에 대한 세밀화 한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도 흐름도 정지한 듯 한가한 도시와 전원의 풍경화속에 자리잡고 있는 한 마을과 한 채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개개인들의 사고에 대한 문헌적이며 심리학적이며, 또한 인류학적인 접근을 통한 추적입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작은 가랑잎 하나 머리카락 하나도 그의 시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작은 파편에 대한 고찰일 수도 있지만, 그 작은 파편이 투영하고 있는 거대한 실체에 대한 분석이 되기도 합니다. 미시적, 현미경적 차원의 분석은 세포와 DNA에 대한 연구마냥 미세하고 부분적인 것에 대한 연구이지만 그것이 곧 전체를 연결하고 형성하는 중요한 정보의 내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즈부르크는 메노키오라고 불리운 도메네고 스칸델라라는 수억분의 일의 세포에 자리잡은 그의 개인적인 사고라는 DNA의 정보를 통해 그것이 투영하고 있는 16세기의 세계관의 일부를 유전자지도화 해내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인간게놈에 대한 연구처럼 그의 미세연구는 역사적 순간에 대한 인류사회의 한 순간에 한 지역 한 인물의 사고에 대한 게놈적 분석을 통해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그것을 잉태한 세계를 지도화하는데 성공한 듯 합니다. 거대와 주류에대한 역사적 담론의 텅비고 메마른 듯한 대지는 이제 주변과 미세에 대한 연구로 기름진 대지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저도 그 구석탱이 한조각을 맞추고 있을 수 있다면 더 좋을 듯도 하구요. |
| "미시사"라는 생소한 역사학적 접근방식은 너무도 참신한 시도임에 틀림없다. 기존 역사학자들이 추구하는 사회의 거시구조를 통한 접근을 지양했다는 점에서,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미시사는 사회의 거시구조보다 아주 사소하고 미세한 기층 부분에 집요히 매달려 마치 '실타래를 풀어나가듯' 문제의 핵심에 도달한다. 그것은 마치 셜록홈즈가 길 위에서 발견한 담배꽁초로 사건의 실마리를 풀듯, 혹은 모렐리가 초상화 속 인체의 사소한 특징을 통해 작품의 진위를 감정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비록 변두리 혹은 주변을 통한 접근방식이지만, 사회의 핵심적 구조와 원리에 가까이 다다를 만큼 엄청난 효용성을 지니고 있다. 저자의 역사 서술방식은 흥미진지하고 긴장감 넘치는 추리소설과도 같다. 그러나 문학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그것은 엄격한 역사이다. 중세시대 한 농부의 삶을 사료에 기초해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또한 이러한 한 인물에 대한 조명을 통해 사회의 본질적 구조와 핵심원리에 접근하고자 하는 저자의 야심은 수많은 역사가들의 진실한 염원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이탈리아의 농부이자 목수이며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로부터 실타래를 풀어 나간다. 저자는 메노키오의 언술과 행적 그리고 소장한 장서를 바탕으로 그의 독서법을 분석하였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메노키오의 독특한 사상체계가 바로 농촌문화의 오랜 전통인 구전문화를 바탕으로, 인쇄술의 발전에 의한 기록문화를 재구성함으로써 형성되었다고 진단한다. 방앗간 주인을 통한 미시적 접근으로부터 구전문화에 기초한 진보적 현실적 반기득권적 농민문화의 오랜 전통 즉 거시적 구조체가 드러나고 있다. 사소한 시작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듯! 양쯔강에서 펄럭이는 나비의 날개짓이 지구의 반대편에서 태풍을 일으키듯! 이러한 역사적 접근방식이 서구에서 약 30-4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한국사가 위로부터의 역사서술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좋은 책들이 한국사회에 소개되고, 참신한 역사적 접근방식들이 도입됨에 의해서 조만간 한국역사도 더욱 풍요질 수 있기를 바란다. 결국 역사를 뒤바꾸는 힘이 한 영웅보다도 대중의 힘에 기초한다는 진부적 지식에 근거할 때, 아래로부터의 역사서술은 한국사회에서 그 무엇보다 시급하다. |
| 새로운 역사학 또는 기존 역사학의 새로운 대안이라 불리워지는 미시사... 작년에 미시사라는 영역에 대해 처음 접하면서 많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란 항상 거대담론에 대한 것이었다. 우선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국사교과서 부터가 민족주의-때로는 그 변형인 국가주의-라는 거대담론을 축으로 하고 있다. 그외에도 맑시즘의 경제사학이 그러하고 역사에서 민중의 복원을 얘기하는 아날학파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일반적인(?) 역사학에 대해서 새로운 틈새찾기를 시도하는 미시사라는 분야는 그 문제제기만으로도 신선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신선함만으로 평가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거대담론에 대한 비판이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역사에서 알고자 하는 것이 흥미로운 옛 사실 정도가 아닌 이상 거대 담론이 뒷받침되지 않는 역사라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거대담론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역사라는 것은 결국 역사적 전망의 부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역사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데 있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그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자각하고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미시사라는 분야는 그런 비판의식으로 그냥 묻혀버리기에는 그 의미가 의외로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거대 담론속에서 묻혀진 수많은 민중들의 생각이나 생활 이런것들이 좀 더 잘 복원된다면 각 시대에 대한 접근이 훨씬 풍요로와 질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이런 고민들을 가지고 있던차에 치즈와 구더기가 번역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책은 16세기 종교개혁과 마녀사냥의 시기 메노키오라는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에 대한 이단심문관들의 재판기록을 토대로 당시의 민중문화(구전문화)와 지배문화(기록문화)의 접점을 탐색한다. 책의 주인공인 메노키오는 인간과 우주가 신의 창조물이라는 기독교적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고, 태초에 모든 것이 땅, 공기, 물, 불이 뒤섞여 있는 카오스였으며, 카오스의 소용돌이로부터 모든 물질이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치즈에서 구더기들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메노키오는 그러한 구더기들이 바로 천사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신적존재성을 부정하고 마리아의 성령잉태를 부정하는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철저한 이단이다. 그러나 종교재판, 마녀사냥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메노키오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입장을 재판관 앞에서 당당히 밝힌다. 그리고 교황, 추기경, 군주 앞에서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역시 같은 생각을 기꺼이 밝히겠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입장을 피력할 기회를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그가 읽은 책들 당시의 여러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살피면서 메노키오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과정을 탐색해들어간다. 그는 어떠한 기존의 이론(기록문화들)에도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해석을 해왔다는 것이 밝혀지고 저자는 그것의 기원을 구전에 의지한 당시의 민중문화와의 조우에서 그 기원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복원의 과정에서 당시의 사회상황, 각 계층의 상태, 생각들이 구체적으로 복원되어 우리 앞에 펼쳐진다. 이러한 작업을 해내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작가인 진즈부르그의 문학적 역사적 상상력이 큰 몫을 해낸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없을 바에야 어차피 역사서술의 많은 부분은 상상력에 기인할 수 밖에 없다고 했을 때 저자인 진즈부르그의 문학적 역사적 상상력은 정말 치열하고 훌륭하다. 어쩌면 그가 거대담론이라는 강박관념에 매이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치즈와 구더기'가 훌륭한 역사서라는 것과는 별도의 여전히 고민은 남는다. 이러한 16세기의 훌륭한 재현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게된다. 아직도 거시사 위주의 기존 역사학에 익숙해있는 나는 여전히 미시사의 역사적 전망에 대해 묻고싶다. |
| 이 책은 1584년 종교재판소에 고발되어 재판을 받는 이탈리아 시골의 방앗간 주인이었던 메노키오라는 별명을 가진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마을의 행정관도 한 적이 있었고, 풍요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당시 일 반 민중의 삶의 모습으로는 드물게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자이다. 그는 이러한 읽는 능력을 통하여 많은 책들을 읽었으며 이러한 책은 단순한 소일거리의 문서가 아닌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되었으며 현실적으로 격리되었던 상류문화를 향한 일종의 접촉수단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읽을 수 있었던 책들을 토대로 나름대로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생각들을 발전시켜 마을 사람들이나 가까운 학식 있는 신부나 이방인들ㅇ게 자신의 이단적인 학설을 주장하다가 체포된 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변론하다가 끝내 처형된다. 그의 우주관에서 그는 혼돈에서 우주가 생겨나는데 이는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며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천지 창조와 삼위일체를 부정하였다. 그에 이어 그는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였는데 성직자를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장사꾼이며 교회의 여러 의식은 단순히 대중의 재물을 빼앗기 위한 사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주장으로 투옥과 방면을 되풀이한 그는 결국 1599년 화형을 당하고 만다. 과연 저자인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를 당대 민중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메노키오를 통해 16세기 민중들의 생활, 사상과 종교에 대한 관념도 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미시사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부분들일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가능하지 않다면 하나 혹은 소수의 인물, 사건만으로 당시의 엯를 재구성한다는 미시사의 개념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많은 의문이 있는데 글의 뒤편으로 돌린다. 흔히 가질 수 있는 생각, 즉 당시의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사상 체계는 절대적인 기독교 문화로서 이는 지배층을 비롯한 모든 이의 일상생활과 관념을 통제했을 것이며 다른 사상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 했을 것 같은 선입견은 이 책을 통해 산산이 부서진다. 실테로 사회 전체를 기독교적 관념이 지배한 것은 아니며, 기독교라는 것은 봉건 영주들을 비롯한 지배층이 기독교를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당시의 모습에 대한 올바를 이해가 아닐까. 중세 유럽의 모습을 기독교로 이해하는 것은 조셉 폰타나가 거울에 비친 유럽에서 말했던 역사를 바르게 바라보는데 장애가 되는 거울에 스스로 갖힌 셈이 아닐까. 이단 심문관의 집요한 질문에 답변하던 과정에서 메노키오가 든 비유, 즉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난다는 비유는, 그 자신이 치즈를 제조하는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나온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무로부터 생겨나는 만물은 없다는 것, 즉 치즈가 없이는 구더기라는 생명체도 태어날 수 없다는 자연적 인과관계를 통해, 하느님은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 자신도 치즈처럼 썩고 부패한 혼돈의 과정을 통해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나아가고 생명체도 만든다고 주장한다. 메노키오의 말에는 기존의 창조론과 당시에 태동하던 과학적 창조의 개념이 혼란스럽게 뒤섞여있다. 메노키오가 혼돈은 스스로 움직인다고 말할 때, 이단 심문관에게는 그런 메노키오의 말이 하느님의 창조적인 권능을 인정하지 안흔ㄴ 불신자의 전형적인 태도로 보였던 것이다. 혼돈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한 메노키오의 말은, 우주론에 대한 근대적 사유와 상통한다. 메노키오의 이야기는 이제 근대적 우주관에 대한 계속된 증명이 아니라, 그런 우주관을 앞질러 획득한 민중이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라는 혼란한 시대에서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중세의 전형적인 세계관과 그 기초를 이루고 있는 당대의 지배질서와의 충돌로 서서히 나아간다.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거도 탐욕스런 권력과 하층민중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로 타락해가고 있던 중세의 권력체계에 의해 철저히 배제된 민중의 역동적 삶을 메노키오에 대한 재판과 심문 문서를 통해 재현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중세에서 근대적 사고 방시의 기원을 특정 엘리트 계층이 아닌 일반 대중들의 문화에서 찾으려 한 것이 저자의 의도라고 파악한다면 과연 무리한 추측은 아닐 듯 하다. 메노키오의 우주관과 천지창조관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여지는 기독교 사상을 단순히 수용하거나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여러 책을 읽고, 나름대로의 사고를 통해 자신만의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는 민중문화의 힘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저자는 유럽에서도 기독교 문화의 저변에는 그것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또 하나의 독자적인 민중문화가 존재했음을 이렇듯 보여주는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메노키오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동시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황당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주장에 공감했던 사람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은 재판기록에나 가끔씩 등장하는 예외적 인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농민층과 그 문화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려던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런 추론은 메노키오의 모습은 결코 대표적인 민중의 모습이 아니라는 라 카프라의 주장과 옮긴이의 서문을 통하여 약화되고 말았다.- 허나 메노키오가 비록 완전히 민중의 모습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닐지라 하더라도 종교재판관과 피고인 메노키오 사이의 대화가 연결되고 있지도 않은 채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의 대화가 어긋나는 바로 그 장면이 당시에 공존하고 있던 다른 계층의 삶의 모습이 가졌던 서로 다른 두 관점이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분명 적어도 둘 이상의 계층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 사실은 지금껏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았던 그 상류문화의 시각이 아닌 민중 혹은 메노키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역사를 강조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서양사를 모르고 따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지 않다면 읽기 어려운 책. 어려운 책이다. |
| 역사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독특한 서술방식을 가지고 있다. 역사와 문학을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를 스케치하는 조너선 스펜스의 방식이 참신하듯, 진즈부르크의 역사학도 매우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미시사라 불리우는 그의 역사학적 접근방식은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접근하는 기존의 연구방법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아래로부터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전체의 핵심구조에 접근해 간다. 마치 셜록홈즈가 길거리의 담배꽁초에서 사건의 핵심 단서를 포착해내듯, 알려지지 않은 아주 사소하고 미세한 부분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실타래를 풀어나가듯" 사건을 질서정연하게 배열한 후, 문제의 해결에 다다른다. 따라서 탐정과도 같은 진즈부르크의 역사적 접근방식은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비록 과거를 살았던 옛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설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방식만은 추리소설처럼 극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진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는 이탈리아의 농부이자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진즈부르크의 메노키오는 "셜록홈즈의 담배꽁초"와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메노키오로부터 사건의 단서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그가 매우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야심은 대단하다. 왜냐하면 평범한 중세농부의 이야기로부터 실타래를 풀어나가, 중세농촌 사회의 핵심적 구조를 파헤치는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진즈부르크는 이탈리아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 관련 자료를 중세교회의 종교재판 기록으로부터 찾아냈다. 그는 메노키오에 관한 기록을 꼼꼼히 훑어본 후, 메노키오의 언술과 소장장서 및 독서법까지 추적할 수 있었다. 메노키오의 독서법은 매우 중요한 단서인데, 왜냐하면 그의 독특한 사상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서를 바탕으로 진즈부르크는 메노키오 즉 이탈리아 농부의 사상체계의 형성이, 바로 중세 농촌사회의 오랜 전통인 구전문화를 바탕으로, 기록문화를 재구성했기에 가능했다고 진단한다. 방앗간 주인을 통한 미시적 접근으로부터 시작해, 구전문화에 기초한 진보적 현실적 반기득권적 농민문화의 오랜 전통 즉 거시적 구조체가 드러나고 있다. 사소한 시작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마치 양쯔강에서 펄럭인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 태풍을 몰고 오듯! 방앗간 주인으로부터 시작해 중세사회의 핵심구조를 파헤친, 진즈부르크는 "역사를 추적하는 탐정"이라 불릴 만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이러한 역사학적 시도가 이탈리아에서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서양에서 미시사의 태동과 궤를 같이 한다. 반면에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여전히 한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정치경제사에 몰두하고, 정치상층 인물로부터 시작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한국사학은 너무도 진부하고 보수적으로 느껴진다. 서양이 일찍부터 주목해 왔던 일상사 심성사 미시사의 영역은 한국에서 아직도 미개척된 상태로 남아 있다. 아마 일반인들이 한국사를 외면하는 것은 상당부분 그러한 이유에 기인한듯 싶다. 그렇다면 역사의 대중화,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과제는 자명해졌다. 선택 역시 더욱 명료해 졌다. 기존의 접근방식을 고수해 역사를 학자군의 지적놀음으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아래로 부터의 역사"를 추구함으로써 역사가 일반 대중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도록 할 것인지의 여부가 말이다. |
| 미시사에 대해 들어 본 사람이라면 우선 이 책 <<치즈와 구더기="">>의 제목 역시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탈리아 역사학자인 진즈부르그의 이 책은 1976년에 쓰여진 미시사의 '고전'이라 할 만하며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미시사에 관한 담론과 저작들이 출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효시로 꼽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메노키오라는 한 방앗간 주인의 이단 재판에 관한 문헌을 통해 고증된 진즈부르그의 상상력과 더한 통찰력은 그의 이후에 계속되는 저작들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이 책의 서두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바흐친의 방법론을 통해 그는 메노키오라는 인물을 단지 하나의 확대경으로 사용하여 중세 유럽에 퍼져있던 민중 사상을 추적해 들어가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밝혀 들어가는 메노키오의 사상 이면에 자리한 당대의 숱한 민중들의 정신 세계(망탈리테)에 윤곽을 그려넣고 색을 칠하고 옷을 입혀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구체상으로 밝혀내기에 이른다. 진즈부르그의 이런 통찰과 노력은 칼라일을 비롯한 서양 사학자들의 영웅사관과 정확히 배치되는 나머지 반쪽을 드러냈다는 데 무엇보다 큰 의의를 가질 것이다. 그동안 '이름없는' 채로 남겨져 있던 민초들의 삶과 정신세계에 제 몫의 이름을 찾아주려는 그의 진지한 사명감은, 이 책이 그려보이는 내용들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미 잔잔한 감명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역사학도나 역사가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이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정신의 기록장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치즈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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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구더기"라는 제목을 보니 뭔가 친근한 느낌이 날 법도 하다. '치즈'와 '구더기'의 조합은 적절해 보인다. 치즈에서 구더기가 피어나니깐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제목만 봤을 때 독자들은 '치즈와 구더기'라는 친근한 단어임에도 심오한 내용이나 어려운 내용이 담겨있을 것 같은 궁금증이나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책은 흥미가 있어야 잘 읽히는 법이다. 두려움을 가진다면 잘 읽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내용에 대한 두려움이 증가한다. 물론 두려움만 있다면 안 읽힌다. 그런데 이 책은 두려움과 함께 궁금증도 증가한다. 그리고 점차 빠져들게 된다. 이 책의 배경은 이탈리아 1500년대 중반에서 말기정도이다. 즉 중세유럽이 그 배경이다. 중세유럽이 배경이라면 종교적인 느낌이 강하게 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시기여서 종교관에 대한 새로운 혁신이 일어나는 시기다. 즉, 종교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과도기적 시기가 이 책의 배경이다. '메노키오'는 16세기의 한 방앗간 주인에 불과하다. 여기서 방앗간 주인을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의 방앗간 주인의 지위는 그렇게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심문관 같은 지위에 비해서는 낮기 때문이다. 메노키오는 심문관과 대리인 앞에서 종교가 그렇다는 건 아닌데 자신이 믿고 있는 선에서만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메노키오는 먼저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다. 그리고 성직자의 가혹한 착취와 부정한 축재를 비난했다. 또 기독교는 대중으로부터 재물을 착취하기 위한 사기극일 뿐이라고 말했다. 메노키오는 일단 기독교의 외면적인 부분을 반박했다. 그러고 나서 기독교의 내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뿌리를 반박했다. 그 내용은 대강 신과 인간 모두가 혼돈 속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이 말이다. 또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말하면서 또 한 번 자신의 종교관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렇게 여러 번의 심문이 진행되었고, 1599년 메노키오는 처형되었다. 메노키오는 처형될 만 했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바로 16세기라는 배경이다. 대중들은 세계관은 변화를 시도하고 성직자들과 지배층들은 대중들의 종교관, 세계관 변화를 막으려고 하는데서 충돌이 빚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메노키오 같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메노키오는 엄밀히 말해 피지배층이다. 메노키오는 피지배층의 신분으로 지배층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주장했다. 즉 지배층에 반하는 생각들을 피력한 것이다. 메노키오의 용기는 배울만하다. 현재라면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말해도 메노키오처럼 처형은 되지 않는다. 16세기라는 배경에서 메노키오는 그 당시에는 이단적으로 보이는(물론 지금 봐도 기독교에 약간 반하는)생각을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없이 표현했다는 것이 가치를 가질만 하다. 이 책을 쓴 작가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1970년대에는 새로운 역사 사조인 미시학적 관점을 통해 치즈와 구더기를 썼다. 1970년대의 구조적 역사 관점이 주를 이루던 시기에 이런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다. 이 책이 쓰여진 과정을 봤을 때, 메노키오와 이 필자는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노키오는 그 당시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 책의 필자도 책을 쓸 당시의 관점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 공통점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아마도 독자들에게 종교라는 딱딱한 소재를 사용해서 어떤 깨우침을 주려고 한 것 같다. 이 책에서, 16세기 대부분 대중들은 기독교를 맹목적으로 믿었는데, 그것을 메노키오라는 인물을 내세우면서 반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자신이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존재에도 의심을 가해보고 새로운 관점으로도 해석해보라는 필자의 충고가 들어있지 않나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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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이 담긴 책
나는 왜 책을 읽는가? 가끔 자문해 볼 때가 있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끊임없는 지적 욕망을 자제할 수 없어 책을 들곤 한다. 어떤 이유에서 출발하든지 독서란 참 의미있는 행위라는 걸 깨닫게 된 게 ‘치즈와 구더기’였다.
16세기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방의 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책읽기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독서를 통해 당시 유럽을 지배한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부정하였고, 문자를 권력의 한 방편으로 이용한 성직자들을 거침없이 비판하였다.
메노키오가 이렇게 책을 읽고 자신의 주장을 편 계기는 당시의 시대상황에 기인한다. 교황과 성직자는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고, 신도들에게 천국행 티켓인 면죄부를 판매하기에 이른다. 보다못한 마르틴루터가 종교개혁을 외쳤고, 그의 주장은 인쇄술의 힘을 빌려 지방곳곳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글을 읽고 쓸줄 알았던 시골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는 자신이 알고 있던 구전과 서적들을 비교 분석해 창조설을 부인하고, 우주생성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태초에 모든 것은 물,불,흙,공기 등이 섞여있는 혼돈의 상태였는데 마치 우우에서 치즈가 만들어지듯 치즈에서 구더기가 나왔고 이를 천사라고 생각하였다.
메노키오의 이러한 발상은 그리스 자연철학자의 관점과 같았으며, 성직자의 입장에서 보면 건방진 이단아였다. 그는 그 댓가로 15년 간 두 번의 재판을 걸쳐 화형당했지만, 그의 주장은 지금 일반적인 학설이 되었다.
치즈와 구더기는 미시사(微時史)연구라는 새로운 영역의 결과물이다. 그동안 역사가 거시적 관점인 지배자의 입장, 내려다보는 역사였다면 이 연구는 종속계급의 입장에서 서술된 특징이 있다. 저자 진즈부르그가 연구대상을 메노키오로 삼은 것은 상층문화와 민중문화가 교류하는 경계에 놓인 다각적이고 입체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노키오의 이단적 사고와 독창성은 개인차원이 아니라 민중문화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메노키오는 창조설을 부인했으나 기독교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교황과 사제들의 억압과 부패를 직시했기 때문에 가톨릭 교리에 반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의 신앙을 존중해 자연의 하느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실천적 믿음을 강조한 메노키오의 신앙관은 현대 종교인들에게도 일침을 가한다.
미시사라는 새로운 역사 연구의 장을 연 진즈부르그. 그가 연구대상으로 삼은 평범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닮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물과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한 결과 이러한 독창성 있는 학설과 우주관을 성립할 수 있었다.
책은 조금 딱딱하고 어려웠다. 특히 성경과 서양사, 참고문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더 힘들었다. 하지만 메노키오가 독서를 통해 정신세계를 확장하듯 나도 책장을 덮는 순간 내 정신의 성장을 느끼며 기쁘고 뿌듯하였다.
독서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작가와 독자의 대화이기도 하다.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아르키메데스적 사고의 발견을 통해 진정한 독서의 의미를 깨닫고, 나는 독서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꿈꿔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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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즈부르그라는 이 책의 저자는 미시사에 있어서는 선구적인 업적을 쌓고, 미시사의 권위자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한국경제사'수업시간에서 홍성찬 교수님이 이 책을 언급하시며 읽어보란 권유를 하시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뿌듯하던지...
미시사라는 하나의 새로운(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고 약 30년정도 된....) 역사연구방법에 대한 결과물로서 이 방면에서는 알아주는 작품이란다.
16세기 방앗간 주인의 화형을 두고 벌어진 심문의 기록을 근거로 그가 생각한 것들이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그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는가를 역추적하는 것이다.
가독성을 높이려면 그 책의 수려한 내용은 물론이고 형식면에서도 눈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내용에 대한 평가야 이미 학계에서도 인정한 것이고 형식에서도 성공했다. 내가 보기엔.
그가 남긴 발언 하나하나를 거꾸로 추적하는 방식이 그러했다. 너무 무리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범죄사건 레포트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벌써 450년이나 지난 자그마한 사건을 모자란 자료를 이용해서 추적한다는 것이 쉬운 과정은 아니지만 희끄무레한 상을 또렷이 하는 그 과정이 흥미로운 것만은 분명하다.
방앗간 주인의 성서관, 그리스도관이 당시 지배적인 세계관과 동떨어진 것이 첫째 흥미고, 평민 신분으로 책을 볼 여유도, 여건도 없었던 그의 그러한 독창적인 생각들이 사실 가장 '근대적'이었다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 내가 맘대로 '근대'라고 규정하는 것은 겁나고 적어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 생각과는 비슷했다.
이런 말이 하도 자주 나와서 이제는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그는 시대를 앞섰던 것이다. 결국 그는 화형으로 삶의 종지부를 찍는다.
이 책을 읽은 나의 감상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