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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십일 서포터즈로서 신간을 받아본 주제에 매우 솔직한 서평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시설에서 지내는 청소년 일탈 행위가 담겨 있는 이 소설, 강도가 매우 세다. 뭣도 모르고 고등학생 때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읽었다가 충격 받은 기억이 났다. 무라카미 류 주인공은 성인이기라도 했지, 아마도 첫 작품인데 극찬을 받았다던 이 소설은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 "파놉티콘" 속 주인공이 청소년들이라면 몇 배 충격이다. 발달 단계 상 감정적 혼란을 겪으며 센척하는 중2들을 종종 보며 살고 있지만 이 정도 급의 친구들을 만난다면 과연 앵거스처럼 유연하게 대할 수 있을까. 누가 이들을 이렇게 아프게 만들었나 싶어 분량도 꽤 되는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괴로웠다. 최근 읽은 책 중 다 읽기 가장 힘들었다.
벤담이 제안했고 푸코가 감시와 처벌하는 사회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왔던 원형 감옥 아이디어 '파놉티콘'을 작가는 이 소설에서 현실화한다. 감옥 독방들보다 약간 높은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자리잡은 원형 감옥 중앙에 있는 감시탑에서는 죄수들 일거수 일투족을 24시간 내내 항상 감시할 수 있다. 감시하지 않고도 감시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이유는 감방에서는 감시탑에서 감시를 하는지 안하는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선에서의 권력 차이는 감시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죄수는 감시를 내면화한다. 이 이야기에서 여주인공은 누군가 자신을 실험하고 있다는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특히 이 이야기 배경은 파놉티콘이라는 '시설'이다. 여러 이유로 보호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미성년자들을 '클라이언트'라고 부르며 보호하는 시설이다.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주인공은 욕-폭력-흡연, 음주, 약물남용- 길거리에서의 일 의 악순환 속에서 머릿 속으로 끊임없이 사고 실험을 한다. 이를 '생일 게임'이라고 부른다. 만약 내가 어디서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변주하는 게임인데 이 내용에는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담겨 있어서 안쓰럽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며 증오하고 저주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누가 사용했는지도 모르는 시설 독방에서 문도 꽉 닫지 못하고 지내야하는 삶 속에서 정체성 혼란과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몸을 확인하기 위해 각종 일탈 행위들을 이 시설에 사는 청소년들은 공감하며 함께 행하고 있다. 주인공은 '실험'이 다음 타켓을 정하면서 한 명 한 명 '제거'해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여기 파놉티콘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는데, 이 이야기 결말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현실인지 환상인지 나는 모호하다.
약물을 복용하는 장면이 계속 나와 불편했기에 혹시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도 꽤나 하드코어한 장면이 만들어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4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이야기는 클라이맥스가 있다기보다는 계속 높은 강도의 충격을 유지하는 듯하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의미들을 발견해 보여주는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아, 이 이야기가 그런 의미도 담고 있었어??' 생각하며 오히려 놀랐다.
오타: 16쪽 길거기-> 길거리 361쪽 아릴라가-> 아일라가 396쪽 잡아 다-> 잡아 끈다? 399쪽 빗지 않다-> 빗지 않는다? 옮긴이의 말 많지 않아던지-> 않았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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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고 아픈 작품을 만났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읽었다. 어둡고 암울해서 헤어 나오기 힘들어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작품도 있었고, 때론 비탄과 우울함에 묻혀서 한동안 그 기분에서 벗어나기 힘든 작품도 많았다. 사회 밑바닥 소설, 잔혹한 추리스릴러 등은 바닥을 찍고 또 찍어서 인간의 추함에 넌덜머리도 많이 느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아파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 자부했었는데 전부 허당이다. 파놉티콘이라는 것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사상가로 잘 알려진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것으로서 산업혁명 이후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가 해체되면서 각종 범죄가 사회 문제로 대두하자, 효율적인 감금 시설을 통해 수감자를 교화 · 재사회화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내놓은 것이다. 따라서 파놉티콘은 이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으로써 비록 실패한 계획이지만, 근대의 작동 원리를 상징하는 장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첨단기술을 이용해 개인을 통제하는 정보 감시, 전자 감시라는 더욱 미시화된 형태로 작용하고 있다. - <출처 : 파놉티콘/ 제레미 벤담 / 책세상> 열여섯 생일을 앞두고 있는 아나이스는 폭력, 마약이 일상이다. 그녀가 약에 쩔어 기억하지 못하지만, ‘경찰폭행 살인미수’에 준하는 혐의로 ‘파놉티콘’에 입소한다. 그곳에는 그녀와 비슷한 소년, 소녀들이 있는 곳으로 유대감이 형성되기도 하고, 권력의 서열을 위해 간혹 싸우기도 한다. 아나이스의 전력은 화려하다. 태어나길 엄마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채 태어나기도 했지만 엄마라는 사람은 “오십몇 차례나 이사를 다니고, 이름만 세 개를 쓰고, 정신병원에서 나를 낳고는 흔적 없이 사라진 무명씨”(p. 146)이다. 즉, 자기 존재에 대한 위태로움을 늘 가지고 있으며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스물세 군데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됐고, 열한 살때 거기서 나와서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을 옮겨 다녔어.” (p.88)라고 말할 정도로 여기저기 뜨네기처럼 정처없이 삶을 살았다. 그녀의 삶이 보여주듯이 안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어디에 소속되는 것을 느껴보지 못한 그녀이다. 창녀 양엄마 테리사가 유일한 안식처같은 느낌이니 말해 무엇할까. 그런 테리사도 싸늘한 시신이 된 것을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아나이스를 괴롭힌다. 또한 약에 취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크레그 순경을 몽둥이로 폭행해 반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결정적이긴 했지만 그녀는 늘상, 대마초를 일상인 듯 피운다. 자기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마리화나를 소지해서 잡히기도 하고, 망치, 몽둥이 등 갖가지 무기를 휘두르고, 경찰 차량도 망가트리고, 그녀는 싸움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싸움을 피하지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문제를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녀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각은 냉담하기만 하다. 아나이스가 자신은 실험체라고 여기기 때문에 언젠가는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한 파놉티콘의 감시탑에서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중경비시설로 가서 결국 감옥에서 썩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하다. 사실 전적으로 아나이스의 시선에서만 살피자면, 아나이스는 돌출되고 파괴적이고 또한 그와 반대로 연약하고, 정직하다. 그녀는 의리를 아는 사람이고, 일부 몰지각한 어른과 달리 아이들의 소중함도 알고, 자신에게 아나이스라는 이름을 주었던 양엄마 테리사의 죽음을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늘 가슴에 품은 예민한 소녀이다. 정에 굶주린 아나이스는 옳지 못한 온기에 자신을 내맡기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아나이스는 지식에 대한 섭취를 하는 방법이 구글을 통해서라는 한정적인 수단이라서 그렇지 머리는 기가 막히게 좋다. 그리고 그녀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결부해 생각하기 때문에 여느 철학자 못지않게 사상적이다. 그녀의 똑똑함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들 중 일부는 코끼리를 비유로 들어가면서 통상적인 오류를 신랄하게 지적하는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나 또한 코끼리의 비유를 읽으며 코끼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기 코끼리는 결국 굶어 죽게 된다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부류를 교화시키지 못하고 도퇴시키고 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설 속 파놉티콘에서 아이들을 카누에 태우며 ‘보통의 사람’이 하는 행동 양식을 따라해 보라고 권하지만 사실 우리들도 특정한 때에만 배를 타기 때문에 파놉티콘의 교화 프로그램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를 위한 교화 프로그램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교화 프로그램이 사람들과 괴리를 더욱 극명하게 만들고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소지를 안고 있다는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감시탑 시창이 햇살을 받아 태양만 한 벌레 눈들이 부릅뜨고 내려다보는데 그러고 보니 감시탑은 누가 굳이 그 안에 앉아 자리를 지킬 필요도 없는 존재다. 저 혼자서도 잘만 감시하니까.’(p. 100) 따라서 파놉티콘 속에 갇힌 아이들이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감시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유도하고 오히려 여봐란 듯이 시선을 유도하며 역행하게 만드는 아이러니를 낳게 한다. 그들은 결국 죽거나, 사라지거나, 개를 상대로 섹스를 하는 등 더욱 범죄에 깊게 닿게 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래서 벤담이 주장한 것처럼 ‘효율적인 감금 시설을 통해 수감자를 교화 및 재사회화’가 아닌 ‘범죄의 재생산’의 장소이며 길리언 플린의 말처럼 파놉티콘 자체가 ‘사악한 장소’라는 것을 드러나게 할 뿐이다. 아나이스는 유일하게 격려해주는 앵거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파리로 떠났다. 그녀가 그리는 비일상적인 현실을 뒤로하고 상어의 심장을 가진 평범한 여자아이로써, 자신의 꿈인 화가가 되기 위해 초현실을 감행한 것이다. 이것이 성공할지 미지수다. 이것이 그녀의 희망이 현실이라는 벽에 몽상가적으로 부딪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아기코끼리처럼 어른들 틈에서 굶어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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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페이건 (사진 출처: 아르테 네이버 블로그)
지은이인 제니 페이건은 그리니치 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했다고 하는데요. 학생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학점을 받아, 런던 로열 홀로웨이 대학의 장학금을 받고 석사과정을 밟을 정도로 수재라고 하네요. 시집을 출간한 적도 있다고 하구요. '파놉티콘'은 그녀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Scottish Screen 문학상을 수상했고 2012 영국 서점이 최고의 데뷔작(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워터스톤즈 서점의 '워터스톤즈 11'에 이름을 올렸다고 하네요.)으로, 2013년 최고의 젊은 영국 작가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고 하구요. 그리고 영국 사실주의 영화감독 켄 로치가 영화화를 결정했다고 하구요. 최고의 젊은 영국 작가 선정은요. 영국 문예지 '그랜타'에서 1983년부터 10년마다 영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소설가를 20명을 선정하는 것이라고 해요. 선정 기준은 '앞으로 영국 소설을 이끌어 나갈 잠재력'이라고 하네요. 그 잠재력을 저도 보고 싶어, 기꺼이 작품 안으로 가까이 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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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 설계도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 1967년 폐쇄된 쿠바의 Presidio Modelo 감옥(파놉티콘) 외부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 1967년 폐쇄된 쿠바의 Presidio Modelo 감옥(파놉티콘) 내부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난 실험이다. (…) 난 감시 대상이다. (…) 싸울 때도, 섹스할 때도, 자위를 할 때도, 저들은 날 지켜본다. (…) 저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7쪽.
열다섯 살 소녀 아나이스의 목소리로 이렇게 시작해요. 이 소녀는 폭력과 마약에 물들었구요. 여경을 혼수상태로 만든 용의자로 '파놉티콘'에 오게 돼요. 물론 아나이스는 마약을 한 상태였기에 기억이 없구요. 소녀가 오게 된 파놉티콘. '파놉티콘'은 언제든지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만든 원형감옥을 의미한다고 해요. 파놉티콘(Panopticon)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단어라고 하구요.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스물세 군데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됐고, 열한 살 때 거기서 나와서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 옮겨 다녔어." -88쪽.
아나이스는 여러 위탁 가정을 옮겨 다녔었구요. 입양됐었어요. 양모는 몸을 파는 여인이었구요. 살해당했어요. 늦게 발견한 아나이스는 죄책감을 갖고 있구요. 그렇게 살면서 좋지 않은 어른들을 만나기도 하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폭력과 마약에 손을 댄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 파놉티콘에서 소년들, 소녀들과 함께 해요. 그리고 감시를 당하지요. 그래서 상상해요. 또 생각하구요.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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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진실들은 그 무게가 얼마나 압도적인지 온 세상과 바다를 합친 무게와도 맞먹는다.' -433쪽. 저는 이 소설에서 두 가지를 봤어요. 바로, 가정 위탁 제도와 감시 문화였어요. 물론 표현이 거칠었어요. 소녀의 욕설과 힐란이 난무했지요. 그래서 낯설고, 불편했어요. 그러나 그 소녀를 통해 사회 문제를 과감하게 그려냈어요. 요즘 우리나라는 아동 학대 사건으로 시끄럽지요. 인천 11살 소녀 학대 사건이 2015년 12월에 알려졌구요. 부천 초등생 시신 훼손 사건도 2016년 1월에 밝혀졌어요. 또, 2016년 2월에는 부천 여중생 시신 방치 사건이 화제가 되었지요. 정말 안타까운 일들이에요. 모두 가정에서 부모에게 해를 당한 사건들이에요. 인천 11살 소녀는 이제 희망을 갖게 되었지만, 그 상처는 남을 것이구요. 다른 두 사건은 이제 두 희생자만 남겼지요. 이 아이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해졌고, 그들이 좋은 곳에 위탁되었더라면, 아픔이 없었을 텐데요. 아쉽더라구요. 또, 탐욕의 눈을 한 어른들을 멀리하며, 가정 위탁 제도가 올바르게 나아가야 하구요. 그래서 어린 생명들을 소중히 보호해주었으면 해요. 소설의 아나이스는 가정 위탁 제도 속에서 자신이 만난 더러운 어른들을 비추는 거울이었어요. 그렇기에, 폭력과 욕설을 그려냈던 것이지요. 올바른 가정 위탁 제도, 꼭 필요한 것이에요.
또, 감시 문화가 보였어요.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말해요. '현대의 컴퓨터 통신망과 데이터베이스가 마치 죄수들을 감시하는 ‘판옵티콘’처럼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할 것'이라구요. 판옵티콘의 특징은 빛과 시선의 비대칭성에 있다고 해요. 즉, 판옵티콘에서 감시탑의 감시자는 죄수를 언제 어디에서든 감시할 수 있는데요. 그렇지만, 죄수들은 중앙 감사자의 시선이 어디를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도록 설계한다고 해요. 그래서 죄수들은 늘 감사받는 느낌을 가지게 되구요. 결국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고 해요. 미셀 푸코의 말처럼 정보기술이 발달하면서 개인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에 노출되구요. 또 곳곳에 CCTV가 설치되면서요. 권력 기관은 개인을 보다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 정보 인프라를 이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고 해요. 그리고 암울한 미래에 대한 시각을 가진 소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요. 소설 속의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를 통치하는 독재자가요. 모든 사람을 텔레스크린을 통해 감시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해요. 'Big Brother is Watching You'라구요. 그러나 우리는 시놉티콘(Synopticon)으로 가도록 해야 해요. 시놉티콘은 '서로 동시에 감시한다.'는 뜻으로 대중이 권력자를 감시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해요. 소설 속 아나이스의 상상과 생각을 읽는 우리에게 아나이스는 다른 시선을 보내기도 하잖아요. 아나이스를 보는 우리에게 마주친 아나이스의 시선. 그것이 시놉티콘이었어요. 인터넷의 발달, 그리고 활발한 시민 운동 등으로 시놉티콘으로 가는 길이 열릴 거예요. 소설의 아나이스가 마지막에 말하잖아요. '나는, 오늘 시작한다.'(464쪽)구요.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진흙 속에서 연꽃이 핀다고 하잖아요.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감시의 시선을 알고, 문을 열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 것처럼요. 이렇게 가정 위탁 제도와 감시 문화를 보여준 소설, '판옵티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실된 거울이었어요.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으로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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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제목에 떡 하니 나와있는 파놉티콘이란 말이 무엇인지 익숙하지 않아서 인터넷의 힘을 빌어 확인해봤습니다. 무슨 과자이름이나 지명 혹은 사람이름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예상외의 내용이 나왔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니 파놉티콘이란 감옥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과 관련있는 다양한 내용들이 있었지만, 대략적으로 말하면, 원형으로된 죄수들의 방을 가운데 간수들의 방에서 감시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구조를 말합니다. 말로 하면 뭔가 대단히 복잡한 것 같은데요. 인터넷에 나온 그림들을 몇 장 찾아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리 복잡한 구조는 아닙니다. 그러면 이 책의 제목을 굳이 번역하자면 일종의 '원형감옥', 뭐 이 정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목에 감옥이 있는 이 책은 과연 무슨 내용일까, 그저 외국 소설인데 작품이 괜찮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선택한 책이었습니다. 책의 주인공은 15세 여자 아나이스입니다. 보통은 15세의 여자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소녀라고 부르기 마련입니다. 그런 소녀가 감옥에는 왜? 라는 생각과 함께 한 줄 한 줄 책장을 읽어 나갔습니다. 사실 책의 제목을 검색할 때 까지만 해도 책이 주인공이 미성년자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감옥이 제목인걸 보니, 예전에 봤던 몇 편의 감옥 탈출 영화를 떠올렸습니다. <이스케이프 플랜>, <쇼생크 탈출>, <빠삐용> 같은 탈옥 영화를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파놉티콘>이라는 말을 듣고보니, 전에 봤던 옛날 영화중에 이와 비슷한 감옥의 형태를 본 기억이 나서 찾아봤습니다. 좀 오래전에 나온 <포트리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 전형적인 <파놉티콘> 스타일의 감옥이 나옵니다. 이렇게 강렬한 액션영화를 떠올리다 만난 십오세 소녀는, 이런 액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접게 만들었습니다. 뭔가 강력한 촛점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액션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드라마 장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책을 읽다보니 여러가지 것들이 머리속을 복잡하게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 열다섯살짜리가 마약과 폭력으로 인해 감옥으로 오게된다는 사실 자체부터가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설정이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보호자, 특히 부모들에 대한 이슈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이는 당연히 보호받고 있을거라는 일종의 사회적 편견 혹은 집단 최면에 걸린채, 실제로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모른척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라는 반성을 하게 만든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어서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 아나이스도 어쩌면 잘못된 어른들로 인해 피해받은 소녀이고, 그런 폭력은 결국 아이들을 피폐하게 만들며, 그 아이들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우리의 뒤통수를 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 파놉티콘이라는 설정은 감옥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 있는 다양한 기술들, CCTV나 통신관련 정보등등 으로 인해 알게모르게 우리의 삶이 감시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제한된 장소에 있기 때문에, 감시를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습니다. 또한, 감시받는 사람들 또한, 감옥이라는 특수성 속에서 스스로 감시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감옥이 아닌 보통의 사회 또한 감옥 못지 않은 감시가 가능한 것이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곳곳에 있는 수많은 CCTV는 이미 셀 수도 없고, 어느 곳에서 우리들을 촬영하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기술이 발달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했지만, 그런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셋, 파놉티콘은 감시하고 감시받는 것을 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렇다보니 아나이스 또한 감시를 받게되면 인간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시와 같은 통제를 받으면, 인간은 자유를 갈구하게 되는데요. 아나이스의 상상속에서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망상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많은 의미를 담은 것 같기도 한 여러가지 것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약간은 제정신이 아닌것 같기도 하고, 약간은 억지스럽기도 한 느낌도 들었고, 일종의 정신승리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소설의 여러 측면중 즐거움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냥 가볍게 읽고, 넘어갈 수도 있는 내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무겁게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다양함은 약간은 산만한 느낌을 줄 수도 있었지만, 글을 따라가다보면, 그런 산만한 느낌은 거의 없었습니다. 주인공 아나이스의 시각이라는 것이 결국,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대변할 수 있고, 또한 그런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크게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고민해 볼 수도 있고, 작게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넘어갈 수 도 있는 즐거움을 원하는 분들이라면 좋은 선택이 될 거 같습니다. |
자신의 모든 것이 다 보이는 생활공간에 산다는 것은 악몽이다.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강렬한 문구를 담은 제니 페이건의 '파놉티콘'.... 200여 년 전에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원형 감옥을 일컫는 말로 24시간 보이지 않는 상대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소녀 아나이스 핸드릭스를 통해 탈출구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소녀의 고통스런 상처투성이 성장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경찰에게 잡혀 끌려가는 와중에도 아나이스는 자유로운 생각으로 가득하다. 열두 살 이후 한 번도 좋은 시간을 가진 적 없었던 아나이스는 다시 또 힘든 시간을 보낼 거란 생각이 든다. 아나이스가 생활하게 될 '파놉티콘'... 예전에는 정신병원이었던 이곳의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아이와 어울려야하는지 단숨에 파악한다.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인식하고 감시자들이 눈길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고 느끼는 아나이스는 극도로 예민한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다. 아나이스는 삐딱함을 온 몸으로 보여준다. 솔직히 착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문제 소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거침없이 내뱉는 험악한 말, 폭력, 남자, 온갖 마약류 등을 흡입하며 거친 모습을 보인다. 아나이스에게 목을 맨 남자친구는 수시로 아나이스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일삼는다. 남자친구를 무심히 모른 척 외면하지 못하는 점에는 아나이스가 가진 환경적 요소가 크다. 자신을 낳은 부모님을 모르기에 생일 게임을 통해 자신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부모님, 형제자매 대한 끊임없는 상상을 반복한다. 아나이스는 언젠가 프랑스에서 생활하는 자신은 행복할 거라 생각한다. 이런 아나이스의 모습이 안쓰러운 마음이 크게 작용하지만 그럼에도 아나이스의 모습이 쉽게 이해가 된다고 말하기 힘들다. 아나이스 인생의 기점이 된 테레사가 아나이스 곁에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이야기가 주는 무거운 분위기에 불편함을 느끼기 쉽지만 현실이 가진 추악함을 포장하지 않고 보여주는 아나이스의 모습을 통해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아나이스는 물론이고 파놉티콘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불량학생을 연상시킨다. 요즘 학생들은 어른들도 쉽게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무섭다. 우리나라가 마약류에 엄격한 규제를 가지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나온다. 불편함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이지만 우리나라와 다른 사회기준을 가지고 있고 아나이스를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앵거스와 조앤 같은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싶다. 파놉티콘에서는 아나이스의 삶은 행복할 수 없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파리로 탈출을 감행하는데 아나이스의 바람처럼 파리에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아나이스는 착한 아이는 아니다. 아나이스의 모습이 너무나 강렬해 쉽게 잊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아나이스의 모습에는 저자가 직접 다양한 수용시설을 찾아다니면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져 있어 아나이스를 더 사실감 있게 그려냈으며 어른들의 의해 움직이는 사회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져 있다. 이 책이 영화화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어떤 영화로 나올지... 아나이스는 착한 아이가 아니고 거칠고 위태로운 모습이 너무나 강렬해 쉽게 잊히는 캐릭터가 아니라 주인공이 누가 될지 궁금해질 정도다. 아나이스의 내면을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는데 옮긴이의 글을 통해 아나이스의 모습이 가진 아프고 거친 이미지가 저자의 의도를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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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실험이다. 늘 그랬다. 이건 기정사실이자 내개 할당된 자유이자 엄연한 팩트다. 난 감시 대상이다. 학교에서나 사회복지사와 면담하는 자리며 법원이나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물론이고, 거기서 그치지도 않는다. 언제고 저들은 사방에서 날 감시한다. 나무에 오른 날 감시한다. 난 떡갈나무 가지 중 제일 길고 튼튼한 가지를 골라 매달린 채, 내 평생의 소원과 꿈들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몇 시간이고 버틸 수 있다. 저들은 휘영청 걸린 달과 눈싸움을 하는 날 감시한다.
감시당하는 우리 사회를 고발하다
소설은 청소년 보호시설 '파놉티콘'에 배치된, 폭력과 마약에 절어버린 열다섯 살 소녀 아나이스 헨드릭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거친 욕설과 다소 듣기 거북한 비난들이 난무하는 이 소설은 어떤 문학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2012년에 데뷔한 제니 페이건(사진)은 될성부른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워터스톤즈 서점의 '워터스톤즈 일레븐'에 이름을 올렸다. 또 2013년 최고의 젊은 영국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제니 페이건
'파놉티콘(판옵티콘)'이란 C자형 원형감옥이다. 이는 1700년대 후반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레미 밴담이 설계한 감옥이다. 이 감옥의 특장은 감시자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모든 수감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지만, 수감자들은 감시자를 결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곳에 후송되어 49호실에 배치되어 이동하는 아나이스의 눈에 비친 모습은 이러하다.
건물 전체가 곡선형을 이룬다. 정확히는 알파벳 C자 모양이고, 그 곡선을 따라 건물 맨 위층에 굳게 닫힌 검은색 문이 여섯 개나 있다. 그 바로 아래층과 그 밑에 층에도 똑같은 문이 여섯 개씩 나 있는데, 문마다 하얗게 칠했고 하나도 빠짐없이 활짝 열려 있다. 여기선 소등 전에는 문을 절대로 닫는 법이 없다고 들었다.
파놉티콘
아무튼 이런 특성 탓에 감시를 받지 않을 때조차도 수감자는 스스로 감시받는다고 여기게 된다. 이 양식에 맞춰 건축된 수용시설에 주인공인 아나이스가 입소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녀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아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처지의 청소년들이 대개 그렇듯 그녀 또한 여러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나쁜 어른들을 만나고, 험한 일을 겪고, 폭력과 약물에 길들여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나이스는 정작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찰관을 공격한 혐의로 파놉티콘으로 후송된다. 수용된 파놉티콘 내에서도 소녀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연대를 형성하고 몰래 들여온 약물을 복용하는 듯 제멋대로인 듯하지만 정작 자신의 알몸을 감출 권리조차도 얻지 못한다. 항상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이미 영국 최고의 사실주의 영화감독 켄 로치에 의해 영화화하기로 결정되었다.
열다섯 살 소녀 아나이스 헨드릭스는 스코틀랜드 정신병원에서 태어나 여러 위탁 가정을 거쳐 폭력과 마약에 빠지게 된다. 경찰관을 공격한 혐의로 어린 범죄자들의 보호시설인 파놉티콘으로 호송하는 경찰차 뒷좌석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세상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한다. 첫 인상이 벌써 뭔가 억울한 사람과 사악한 교도관들의 만남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파놉티콘에 도착한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딱 질색이다. 신변 인수, 낯선 장소, 직원들, 서류철. 땅굴이도 있어서 그 안에 기어들어 가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나무 위에 지은 집이라든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브렌다 선생의 안내를 받아 3층으로 올라갔다. 여자 아이 3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49호실은 층의 한가운데 방이다. '콧수염'은 양쪽 뺨에 갈색 선을 나선형으로 세 걔씩 그렸는데, 눈은 크고 갈색이다. 귀걸이는 안 했고 머리가 길다. 이름은 '타시'다. 야구모자를 쓴 '커트 머리'는 배때기에 칼자국 투성이며, 골반에 살이 튼 걸로 봐서 애 엄마인듯하다. 이름은 '쇼티'다. 그리고 '아일라', 이렇게 3명이다. 앞으로 자주 부딪힐 인물들이다. "방문은 항상 열어두는 걸 원칙으로 한다, 아나이스. 대신 옷을 갈아입을 때는 당겨서 일부 닫을 수가 있어. 안은 아무도 못 들여다봐. 물론 감시탑이 있기야 하지만 거긴 아무도 없거든. 야간 간호사 선생님이 근무 중일 때를 빼고는.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은 유사시에 중앙 잠금 장치를 이용해 시설 내 문을 전부 잠글 수 있어. 거주자 안전을 위해서!" 아나이스가 옷을 벗던 동작을 멈추자 브렌다가 고개를 젓는다. 이는 속옷까지 다 벗으라는 신호인 셈이다. 그녀는 팬티를 벗어 비닐봉지에 던진다. 그런데, 이 방은 전에 있던 방보다 작다. 복도에서 다시 탕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까 그 남자앤가 보다. 난간을 아주 후려 팰 기세다. 파놉티콘에는 남자애들도 있다. 물론 여자애들과 함께 방을 사용하지 못한다. "남자애들 방은 대부분 2층에 있어서 문 왼편에 서서 갈아입기만 하면 아래층에서 옷 갈아입는 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도록 방문을 열고 지내는 게 여기 규칙이다. 여기 파놉티콘에 비밀이란 없거든"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다들 감시받길 원하는 것처럼 군다. 누군가가 밤낮 안 가리고 자길 쳐다봐줬으면 하는 것 같다. 온라인에 사진을 올리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자기를 맘대로 들여다보게 놔두잖아! 심지어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또 실제보다 뽀샤시하세 광이 나는 척 굴지. 어떤 사람들은 아예 서너 군데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게시물을 올린다. 그뿐인가. 직장에서는 상사가 감시하지, 버스에서는 카메라가 감시하지, 하물며 기차 안에서도, 부츠 매장에서도 오죽하면 감자튀김 가게 앞에서마저 카메라한테 감시당하며 산다. 그리고 집에 가면? 구경할 사람이 누가 있는지 보러, 누가 자길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 어김없이 또 온라인 접속을 한다! 감시탑을 한참 동안 쳐다보면 꼭 벌레처럼 보인다. 창에 반사된 해가 황금빛 홍채처럼 작게 빛날 때면 특히 그렇다. 어젯밤처럼 달이 깃들면 창백한 눈동자를 하고서 줄곧 사람을 좇는다. 층층이, 방방이, 모두가 저 창에 반사된다. 심지어 아나이스 자신도 저 안에 깃들어 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올려다본다. 지금 그녀는 3층 층계참에 앉아 있다. 가부좌를 틀고 고무공 던져 받기 놀이를 하는 중이다. 공은 곱슬머리 남자애한테서 뺏었다. 브라이언이라는 사이코다. 이 공놀이에서는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받아야 한 번으로 치는데 벌써 170번째다. 공을 떨어뜨리면 돼지가 죽을 거란 뜻. 돼지는 바로 그녀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경찰관을 지칭한다. 돼지가 죽으면 날 열여덟 생일까지 철통보안 중경비시설에 처박힐 거다. 그다음은 감옥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멀쩡히 버틸 리가 없지. 열여섯 살까지도 버티기 힘들걸. 그때쯤엔 벌써 죽었을 테니. 그럼 아나이스, 돼지, 테리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탁됐던 집에서 만난 제이크 녀석, 목에 줄을 맨 제이크까지 한데 다시 뭉치는 거지. 황천 가기 전 마지막 유치장에서 포커나 치고 앉았을 불쌍한 우리 신세. 공이 어느새 완벽한 리듬을 이루며 척 하고 손에 붙는다. 벌레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 저놈의 감시탑, 얼굴을 박살내달라고 아주 애원을 하네.
아나이스는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스물세 군데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됐고, 열한 살 때 거기서 나와서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 옮겨 다녔다. 늘 같은 악몽을 꾼다. 상습적으로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런 악몽에 자주 시달린다고 한다. 아나이스는 여전히 마약을 끊지 못하고 있다. 경찰관 폭행 사건도 그렇다. 그녀는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도 분명 마약에 취한 상태였을 것이다. 꿈에서 저들은 바늘 끝보다도 작은 점 같은 아나이스를 키운다.
극미한 세균 조각에서부터 그녀를 배양해갖곤 방호복과 마스크로 무장하고 현미경에 날 올려놓고 관찰한다. 바보 같은 노래가 갑자기 떠오른다. 이게 무슨 노래였지? 테리사가 불러주던 동요지. 여자아이들은 설탕과 향신료, 세상의 온갖 달콤한 것들로 빚어 만들었다는, 지랄 같은 노래.
소설 속에서 아나이스는 여러 어른들을 만난다. 위탁가정에서 만난 어른들과 경찰관, 그리고 법 집행인들 등등. 대체로 질이 나쁜, 세상의 더러움을 모아놓은 것 같은 어른들의 모습이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것이 곧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반항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하루하루는 더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희망의 싹 같은 것이 보인다.
그녀는 파리에서 온 프랜시스 존스로 신분을 세탁한다. 그녀는 실종자 명단 벽보에 붙은 얼굴이 아니다. 이제 그녀는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다. 이제 다 끝났다. 더 이상 실험은 없다. 면담도 없고, 파일도, 중경비시설로의 직행도, 사람을 패는 일도, 사람에게 된통 당하는 일도, 감방에 갇히는 일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오늘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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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명사. 언제나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감방을 원형으로 만든 원형감옥. 그리스어 파놉토스는 모두에게 보인다는 뜻. (표지 中)
영국 최고의 사실주의 영화감독 켄 로치가 영화화 결정하고 Scottish Screen 문학상 수상, 2012년 영국 서점 선정 최고의 데뷔작, 2013년 최고의 젊은 영구 작가 선정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소설이며 열다섯 살에 파놉티콘에 갇혀 실험 대상이 되어버린 소녀에 관한 이야기 <<파놉티콘>>의 소재가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져 읽어보게 된 소설이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언어가 너무도 거칠어 받아들이기가 좀 어려운 작품이었다. 문화적 차이를 감안해보지만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허나 아나이스의 이야기는 파놉티콘이라는 감시 체제가 자기 검열의 형태로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현 감시 사회, 즉 우리 대다수의 일상과 다시 만나게 된다는 역자의 말처럼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라 생각된다. 앞서 '파놉티콘'의 정의에 대해 쓴 것처럼 파놉티콘은 '모두 본다'는 의미로, 이는 영국의 철학자인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구조는 이중 원형으로, 바깥 원에는 수용자들이 배치되고 안쪽 원에는 감시탑이 배치되어 모든 수용실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수용자들은 감시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감시자의 감시를 받지 않을 때조차 자신이 감시받는다고 여기게 된다고 한다.
저들은 날 보고 있고, 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저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본문 7p)
이 소설은 열다섯 살의 소녀인 아나이스가 '파놉티콘' 시설에 입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나이스는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위탁가정을 스물세 군데를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되었지만, 열한 살 때 나온 후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을 옮겨 다녔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아나이스는 이렇게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폭력과 약물에 길들여지게 된다. 아나이스는 폭력 전력이 상당하다. 마리화나 소지, 흉기 소지, 헤로인 17그림 소지 등 16개월 동안 무려 100건이 넘는 위반 행위로 기소된 전력이 있다. 이번에 아나이스가 이 시설에 오게 된 것은 경찰을 공격했고 그 경찰이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파놉티콘에 들어오게 된 아나이스는 시설의 비슷한 류의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고 몰래 들여온 약물을 복용한다. 이들의 생활을 엿볼 때 언뜻 보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감시자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에도 없는 것이다. 단 아나이스의 상상의 세계만 빼고 말이다. 아나이스는 자신만의 생일 게임으로 자유를 즐긴다. 상상 속에서 그녀는 다양한 삶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 파리를 생각하자. 뉴욕, 피렌체, 제이를 생각하자. 제이와 키스하는 생각, 제인의 품에 안긴 느낌을 생각하자. 경찰이 작아지기 시작한다. 처음엔 그저 머리 크기가 묘하게 안 맞는다 싶을 정도였는데, 곧 코가 점점 길어지더니 몸 전체가 빠른 속도로 내게서 멀어진다. (167p)
사실 거칠고 노골적인 표현들로 인한 흡입력 부족 때문에 아나이스를 통해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되짚어보는 소설의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나의 독서력이 많이 부족했다. 책을 읽은 후에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역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로소 이 소설이 가진 의미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열다섯 살의 사춘기 아나이스의 이야기를 담아냈지만 청소년 소설이라 하기엔 너무 버거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지식한 나의 생각으로 인해 청소년 소설의 주제와 이야기의 폭이 넓어진 것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다.
아나이스가 다른 어떤 소설 속 인물들보다 인상적이고 특별한 이유는 십대 사춘기 '소녀'로서 겪는 (비)일상적인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초현실을 진솔하게 그려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춘기 소녀의 환상과 두려움, 욕망과 꿈, 당돌함과 무모함, 투박함과 예민함을 거침없이 담고 있기에. (옮긴이의 말 中)
물론 사춘기 소녀가 겪는 심리적인 부분을 많이 담아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나이스의 현실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독자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는 무지수이다. 분명한 것은 이는 개인적인 견해라는 점이고, 나의 독서력은 부족하며, 상당히 고루한 편임을 분명하게 밝혀둔다. 「트레인스포팅」의 저자 어빈 웰시가 이 소설을 두고 "페이지마다 열정과 놀라운 스토리텔링의 마법이 가득해 생기가 넘친다. 매우 감명 깊은 작품이다." 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을 볼 때, 내가 알지 못하는 이 소설만의 의미와 매력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거칠고 노골적인 표현으로 인해 이 소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듯 싶었는데, 역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 소설을 알게 되었다. 이를 음미하며 다시 읽는다면 분명 그 매력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고로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금 꼭 읽어볼 생각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내게 낯설었지만 그동안 꽉 막혔던 사고를 조금은 열어볼 수 있었던 작품은 아닐까 싶다.
헐벗은 느낌, 노출된 기분이다. 이는 아나이스가 반복하는 말이다. 실제로 아나이스는 자신을 보호해줄 피부가 없는, 우리 대다수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여러 사적이고 사회적인 울타리를 누리지 못하는 '취약' 청소년이다. 하지만 이런 소삭을 들킨 것만 같은 느낌은 사실 보편적이다. 다만 우리 대개는 혼돈의 시절을 지나게 되고 그렇기에 이에 성장통이란 이름을 붙이고 잊어버릴 여유가 있다면, 또 많은 이들이 나이와 사회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그 진통을 오래 안고 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많은 경우 계속해 불안정한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런 한편 다른 차원에서는 그러한 헐벗은 느낌이 나날이 보편화되어 지극히 당연한 것은 받아들여지고, 심지어는 그를 반기고 끊임없이 제 헐벗은 상태를 재확인해야 하는 이상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아나이스의 이야기는 파놉티콘이라는 감시 체제가 자기 검열의 형태로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현 감시 사회, 즉 우리 대다수의 일상과 다시 만난다. (옮긴이의 말 中)
(이미지출처: '파놉티콘' 표지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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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한참 공부를 하다 잠깐 졸 때 갑자기 방에 들어와 등짝을 후려치던 엄마가 생각난다. 열심히 공부할 땐 쳐다도 안 보던 엄마는 항상 잠시 쉬느라 딴짓을 하거나 잠을 자는 기막힌 시간에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난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딱 그 시간에 맞춘 것일까 하며. 요즘은 드라마도 게임도 엄마 눈치 안 보고 한다지만 그때는 정말 오싹했다. 하지만 엄마의 감시에서 자유로워진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자가 늘었다. 거리의 CCTV가 자동차의 블랙박스가 어딜 가든 따라다니고, 장 보러 자주 가는 마트도 내 행동을 녹화한다. 우리는 타인의 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감시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아나이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열다섯 살 아나이스는 수없이 많은 시설로 옮겨 다니고, 입양과 파양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잦은 크고 작은 범행들로 아나이스를 보는 경찰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그러다 평소 유난히 아나이스를 싫어하는 여자 경찰을 폭행해 의식이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고 파놉티콘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아이들이 있었다. 문을 닫을 수 없는 방, 감시탑. 자신이 실험실에서 배양된 실험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아나이스는 감시탑이 더 가까이서 자신을 감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파놉티콘에서의 추방이 결정되고, 그곳에서 사귄 친구도 죽자 아나이스는 떠나 새로운 이름으로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 자유의 몸이 된다. 처음에는 파놉티콘이라는 책이 무척 불편했다. 제대로 된 정신 상태를 가진 아이가 할 말과 행동인가 싶었고 이해를 해보려 몇 번을 봐도 내 사고방식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물론, 어른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그런 어른들을 보면서 자랐다면 거칠고 비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버거웠다. 어른들이 어른답지 못한 세상이라 아이가 아이답지 못한 것도 어쩔 수 없다지만 세상에 대항하는 방법이 너무 거칠었기에. 다 읽은 지금도 편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약간의 이해가 불편함을 조금 상쇄시켰을 뿐이다. 아나이스가 계속 생각했던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등에 대한 것들의 질문들은 나 역시도 해봤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아이였기에 약간은 이해할 수 있었고, 덜 불편할 수 있었다. 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아나이스가 화자다. 글로 전해지는 아나이스는 무척 생생하다. 마치 모세혈관까지 투명하게 비치는 듯하다. 망상과 공상과 현실이 뒤섞인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꽉 들어찬. 날 것의 불편함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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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실험이다. 늘 그랬다. 이건 기정사실이자 내게 할당된 자유이자 엄연한 팩트다. 난 감시 대상이다. 학교에서나 사회복지사와 면담을 하는 자리며 법원이나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물론이고, 거기서 그치지도 않는다. ..... 저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 파리. 파리로 당첨. 나는 파리에서 온 프랜시스 존스다. 나는 실종자 명단 벽보에 붙은 얼굴이 아니다. 서류철에 든 숫자나 통계치가 아니다. 나는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다. ...... 나는, 오늘 시작한다. '난 실험이다'로 시작해서 '나는, 오늘 시작한다.'로 끝나는 제니 페이건의 소설 <파놉티콘>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복지시스템에 맡겨져 길러진 15살 소녀인 아나이스 헨드릭스의 독백으로 이루어졌다. 그녀의 첫 이름은 제48구역 7652.4.였다.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스물세 군데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됐고, 열한 살때 거기서 나와서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을 옮겨 다녔어. p.88 이런 아나이스는 마약과 술과 담배에 쪄들어 지낸다. 그러던 그녀가 경찰을 때려 식물인간을 만든 혐의로 보호시설인 '파놉티콘'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의 독백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기도 한다. 그녀가 혼자서 자주 하는 놀이는 '생일 게임'이다. 생일 게임에서 아나이스는 여러 형태의 부모를 상정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상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그녀는 자신이 여러 가지 실험으로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름이 없는 동물도 엄마 아빠가 있는데...... 그러니 본인은 무언가로 빚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근대사회가 되면서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의 해체에 대한 우려가 생겼다. 제러미 벤담은 이런 범죄자들을 수용할 원형감옥, 파놉티콘을 구상한다. 범죄를 등급별로 나누고 무리별로 격리를 시키는 원형감옥은 소수의 인원이 다수의 범죄자를 감시할 수 있고, 감시를 당하는 사람은 감시하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 감옥은 마침내는 스스로를 스스로가 감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원형감옥을 만들게 된 철학적 바탕은 바로 공리주의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행복은 행위자의 행복이 아니라 행위의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의 행복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 문제 있는 사람들을 격리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셀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이것은 차별과 배제의 논리 위에 있다고 비판한다. 그런 감시 기관의 하나인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인간적 장치가 아니라 이성 중심적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해 온 장소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관찰, 규범적 판단, 검사 등 규율로 길들여진 몸을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항상 관찰되고 있으며, 사회는 개체를 부단히 비교, 분리 계층화 시킨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공부 열심히 해라' 등 사회가 '옳다고 규정한' 것을 어떤 사람이 동조하기를 거부하면 결격자,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낙인을 찍는다.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정체성도 타인과의 교류에서 정해지고 자기에 대한 평가도 주로 타인의 관찰에 의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전히 제러미 벤담의 원형감옥은 건재하다. 우리 사회는 약자에 포악하고 보다 정교화된 형태로 진화했다. 이 책의 저자인 제니 페이건은 그 사회적인 기관, 시스템의 하나로 사회복지의 대상들을 생각해 볼 것을 말한다. 관찰과 규범적 판단과 검사로 분류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고 있는 사회복지의 대상들. 그중에 한 명인 아나이스는 작은 배려에 크게 감동한다. 비록 창녀였지만 자신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던 테리사,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나'로 봐주었던 헤일리, 그리고 사회복지사 앵거스. 다른 사회복지사는 부모를 알 수 없는 너의 정체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너의 정체를 받아들여야 너의 정체성 문제가 해결된다고. 그것에 대한 아나이스의 생각은?
받아들임? 온통 상처뿐인 아이한테 그 존재의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글씨를 잘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그 종이에 잉크를 엎지르고 말았다. 실수다. 그래서 글씨를 쓰지 않고 마구 낙서를 해버리고 말았다. 아나이스의 삶은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생일 게임을 하면서 다른 삶을 꿈꾸어본다. 아나이스의 꿈은 너무 소박해서 슬프다.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되고, 프랑스어를 배워 파리 중앙도서관에 잇는 책들, 심지어 백과사전부터 편람까지 모조리 다 읽고, 할머니 대신 장을 봐오고 빨래를 돕는 자원봉사를 하고 할머니의 한창때 이야기를 듣는 호사(?)를 누리고 싶어 한다. 평가 분류 실험이 아니라 단지 '나'이고 싶어 하는 꿈을 가진,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나'라서 원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는 아나이스의 삶은 쉽게 바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아나이스는 탈출한다. 예전에는 이런 사고무친 고아를 온 동네 사람들이 서로 키웠다. 이 집에서 밥을 먹고 저 집에서 잠을 자고. 그러면서 아이의 상황을 모두가 공감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공감을 얻기 힘들다. 이들은 격리된다. <파놉티콘>은 우리가 감시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갖게 했다. 당연하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 있어'라고 말한다. '우리는 길들여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길들여진 거야.'라고.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은? 더 철저한 감시는 아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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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감옥은 참회의 장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감시, 통제 효과를 가질 수 있는 ‘파놉티콘’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고안했다. 푸코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수감자는 항상 자신이 감시 받는다고 느끼고 스스로를 감시하며 자기 통제를 내면화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이디어가 파놉티콘이다”라며, 현대사회 전반에 내재된 규율사회의 메커니즘을 규명해내기도 한다. 그리고 한 해 최고의 문학 데뷔작을 선정하는 워터스톤즈 일레븐Waterstones Eleven에 선정된 제니 페이건의 소설의 제목 역시 <파놉티콘>이다. 작가는 ‘파놉티콘’속으로 던져진 아나이스를 통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세상의 깊은 암연을 그려낸다. 길거리 생활에 익숙한 아나이스 헨드릭스는 열여섯 생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날 청소년 보호시설인 ‘파놉티콘’으로 가게 된다. 그녀는 여경찰이 극심한 혼수상태, 즉 뇌사에 빠지게 된 사건에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면서 이 수용시설로 가게 되는데, 문제는 그녀 자신도 마약에 잠식되어 있어서 제대로 기억조차 해내고 있지 못하다. 아나이스는 이미 그 수용시설에 대한 정보를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그들끼리의 네트워크가 있어서, 정보가 공유되고 있는 것인지 몰라도 아나이스는 이미 그 수용시설에 대한 정보를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 C자형 건물 정 중앙에 솟아 있는 감시탑속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그들이 감시를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을 힘겨워하며, 점점 더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게 된다. 독자들 역시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아나이스의 머릿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생각도 말도 상당히 거친 편이라 처음에는 꽤나 불편하기도 했다. 심지어 잘 못 읽었나 싶은 부분도 있었을 정도였는데, 나중에 번역가의 글을 읽으면서 그 어려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그녀가 처음에 했던 ‘생일게임’을 떠올렸다. 그녀가 왜 그렇게 신중하게 출생담을 골라야 했는지, 소설을 읽는 내내 너무나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런 말을 본적이 있다. 아차 삐끗해서 조금만 위쪽에서 태어났으면 우리는 북한에서 살았어야 했다고… 그처럼 아나이스가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은 자의적인 선택 이전에 이미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울 때도 있고, 읽기 편한 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수 밖에 없는 아나이스의 매력이 독특했던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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