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처'는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읽었었던 글이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읽으면 그 느낌도, 나의 생각도 달라지는 법... 다시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감상을 했다. 내일 아침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장롱을 뒤지며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를 찾는 아내를 보는 '나'는 한없이 처량해짐을 느낀다. 그러다 문득 오늘 있었던 T와의 일이 떠오른다. 한성은행에 다니는 친척 T가 찾아와 아내에게 줄 우산을 샀다며 자랑을 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아내는 매우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보수 없는 독서와 가치 없는 창작에 매달려 돈 한푼 벌지 못하고, 아내의 옷가지들과 살림살이를 전당포에 내다 걸어서 하루 한끼를 때우는 처지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처가에서 온 할멈이 잊고있던 장인의 생신 날인 것을 알리며 오라 한다. 처가로 나서며 비단옷이 아닌 당목 옷을 입고 남들처럼 고운 신도 신지 못 하고 청목당혜를 신은 아내를 본 '나'는 쓸쓸함을 느낀다. 처가로 들어서는 '나'를 쳐다보는 낯선 사람들의 눈빛에 '나'의 허름한 모습을 보고 이 집 하인인냥 경멸히 여기는 생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처가에서 만난 처형은 기미를 잘해 돈을 잘버는 남편을 만나 부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 위의 시퍼렇게 든 멍이 분칠을 해서 숨기려한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나'의 눈에 띈다. 처형의 생김새는 아내와 무척이나 흡사한데 처형에 비해 아내의 얼굴은 너무나 수척하고 시들시들 마른 낙엽 같다. 더욱 쓸쓸한 생각이 들어 '나'는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마시고 결국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인력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와 아내는 처형의 눈 위에 멍든 것을 이야기하고, 아내는 돈이 없어도 서로 의좋게 지내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며 충심으로 공명해주고 '나'는 무척이나 흡족한 기분이 든다. 이틀 뒤 놀러 온 처형이 아내에게 신을 사다 주고 간다. 아내는 머뭇거리다 어서 펴보라는 '나'의 말에 신을 신어보고 좋아한다. 없는 살림에 갖고 싶은 것도 참고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는 아내에게 '나'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나'와 아내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O.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가난한 두 부부...크리스마스를 맞아 서로에게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지만 돈이 없어 고민하다가 아내는 머리를 잘라 남편의 시계줄을 사고, 남편은 자신의 귀중한 금시계를 팔아 아내에게 줄 머리빗을 산다. 하지만 머리를 짧게 자른 아내에겐 빗이 필요 없었고, 시계줄을 달 시계가 없으니 남편에게 시계줄도 필요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던 소중한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의 이야기 말이다. 노래 가사 중에서도 이런 내용이 있다. "가난함 앞에서는 사랑도 무가치하다고..." 그 말이 정말 맞는 것일까? 정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빈처와, 크리스마스 선물... 이 두 이야기에서는, 그리고 내 생각에서도 그것은 통하지 않는 말이다. 가난이든 그 어떤 것이든 진정한 사랑 앞에서는 그 힘을 꺾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나의 부모님은 지금 이혼하신 상태이다. 엄마는 아빠의 무능함을 탓했고 그런 엄마를 감당하지 못한 아빠...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빈처와 크리스마스 선물...이 두 이야기가 나의 부모님 이야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내가 예전 중학교에 다닐 때 빈처를 처음 읽었을 때는 부모님도 이혼하시기 전이었다. 이 글을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읽어 내가 받게 된 다른 느낌은 아마도 그 사실 때문일 것이라 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는 그런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어째서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다고 믿고있을까... 아니, 믿고 있다기보다 억지로 믿고싶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가장 소중한 것...하지만 우리들이 잊고 사는 것이 바로 서로에 대한 믿음,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 나는 그것을 잊지 않고 항상 마음속에 새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만약에 내가 그 소망처럼 살아간다면...내 앞에 밝은 미래가 놓여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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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된 이 시점에 겨울비 이야기는 좀 뜬금없지만, 겨울에 비가 오면 난 항상 이 문장을 떠올린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첫 문장이다. 묘사가 참 생생하다고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을 것은 아니지만 현진건을 한국의 안톤 체호프라고 추앙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소설이긴 하다. 플롯 구성이나 배경을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갖다 쓴 솜씨는 우리 근대문학의 초창기에 나온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참 빼어나기는 하다. 현진건의 작품들 중에는 <운수 좋은 날>말고도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작품들이 많다. 몇 번 되풀이해 읽어도 재미있을 만큼 나도 현진건을 좋아한다. <빈처>도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한다.
<빈처>는 현진건이 소설가로서 아직 유명해지기 전 습작시절의 일화들을 그린 자전적 이야기로 이해해도 될 법하다. 가난한 나의 아내, 빈처. 스스로 예술가의 아내로 살기로 마음먹고 가난 따위는 입에 담지조차 않으며 오직 남편의 성공만을 바라는 연상의 아내.(게다가 처가가 부자다!!) 혹여나 소설가 남편이 기죽을까봐서,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 전부 전당포에서 쌀로 바꿔먹고, 마지막 남은 저고리가 어디있나 소리죽여 찾는 속 깊은 여자.
그런데 아내를 바라보는 주인공 '나'는 참 못났다. 2년 동안 돈 한푼 못 벌어온 남편을 대신해 집안살림을 맡아서 하는 아내가 참 고맙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잘나가는 친척 동생이 다녀간 후 '당신도 이제 살 도리를 좀 하셔요'하고 조심스레 얘기하는 데에다 대고선 '막벌이꾼에게나 시집갈 것이지!'하면서 소리를 빽 지르기도 한다. 어떨 땐 고마운 마음이 막 일어서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하고 혼자 감격하다가도 근심하는 아내의 표정을 먼발치서 보고는 "계집이란 할 수 없어."하고 삐치기도 한다. 허허허 이 양반 중2병인가.
하지만 이 남자가 아내에게 바라는 것은 참 간단하다. 여자 입장에서는 양심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왼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비소하고 모욕하여도 상관이 없지마는 마누라까지 나를 아니 믿어주면 어찌한단 말이요." 요즘 일반적인 여자들은 이런 남자랑 결혼 못하겠지? 아니 한때의 뜨거움으로 결혼하더라도 2년이나 돈 한푼 못 벌어다 주는 남자에게 누가 그렇게 해주겠는가. 하지만 속 깊은 우리의 가난한 마누라는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여자가 그런 것들을 다 감내하고 이해하려니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편이 돈은 잘 벌지만 허구헌 날 두들겨 패는 처형이 집에 들러 신을 한 켤레 선물하고 간다. 아내는 그 신을 신고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다 이해하고 감내하는 게 아니라, 물질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사실은 부족한 것을. 다만 참고 있을 따름인 것을 말이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아내에게 건넨다. "나도 어서 출세를 하여 비단신 한 켤레쯤은 사주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생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아내는 밀려오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남편에게 안기고 남편은 그래도 변함없이 자신을 격려해주는 아내를 덥썩 안으며 눈물의 키스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오늘 아내에게 내가 결혼하고 나서 좀 변했다는 말을 들었다. 전보다 내 얘기에 덜 귀기울이고, 약속한 것도 예전처럼 잘 지키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결혼을 했으니 전보다 이해를 더 많이 해주겠거니, 더 많이 받아주겠거니 생각했는데 속된 말로 좀 '빠져가지고' 아내를 섭섭하게 만들었던가 보다. 참 후회스럽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서 더 많은 행복을 함께 찾아가주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빈처>의 대사를 빌어 사과하고 싶으다. "아아~ 나에게 위안과 원조를 주는 나의 천사여!" |
| 왠지 너무나 괴상하면서도 처절한 느낌이 든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었던 {B사감과 러브레터}도 그렇다. 뭐랄까 주인공은 아주 불쌍하면서도 괴상한 느낌을 강렬하게 남겼다. 이 괴상하다는 말은 이 사감의 괴상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현진건 작품 전체에서 감도는 느낌이다. 이건 나 혼자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현진건의 작품은 대체로 매우 우울하고 처절하고 슬픈 현실에 놓인 주인공들의 이야기이다. 이런 이유는 물론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슬픈 이야기들을 읽으면 순수하게 슬퍼할 수가 없다. 글들은 마친 슬픔을 표현하기 보다 조금 동떨어져서 다른 이야기를 하듯이 슬픔을 이야기한다. 나는 왜 느낄 수가 없는 걸까? 주인공들과 동화 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다 읽은 후에 어떤 감정이나 느낌을 가지기 보다 왠지 얼빠진 사람이 되고 만다. 머리 속이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사립 정신 병원장}이다 최고로 처절하다는 생각이다. 결국은 미쳐버려서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이 잊쳐지지가 않는다. 난 잘 모르지만 . 그 모습이야말로 작가 자신의 내면이 가장 표현된게 아닐까? 나는 그 외의 작품을 읽을 때 이 {사립 정신 병원장}의 주인공의 글을,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결국 자신을 몰아 붙이는 느낌이다. 작가 자신이 이 글들을 쓰면서 너무나 자신을 어딘가로 몰아붙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 소설들의 어떤 스토리에서 말고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작가 자신의 불완전함과 비정상적인 면이 많이 슬펐다. |
| 「할머니의 죽음」은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본가에 들어가는 손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할머니는 노환으로 오랜 세월 앓은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초상 치를 만만의 준비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를 일으켜달라는 말로써 손자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식구들은 엉덩이 부근의 상처를 핑계로 이를 저지한다. 이것은 한 인간의 살고자 하는 욕망, 그 본성이 얼마나 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엉덩이의 아픔까지도 감수할 만큼, 병석에서 일어나 삶에의 활기를 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때문이다. 이때 가장 주목할 부분은 할머니가 손자에게 서방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과 단추며 옷고름을 풀어헤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손자 외의 식구들은 이를 할머니의 실성 정도로 생각하고 웃음을 감추지 못하나, 손자만큼은 할머니가 자신의 갑갑함을 이런 식으로 대변했다 해석한다. 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정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얼마나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시종일관 할머니의 시중을 드는 중모는 함께 있는 시간은 많을 테지만, 그럴수록 생활이 힘들고 할머니가 짐처럼 느껴질 횟수가 많아진다. 이는 결코 중모의 잘못이 아닌, 대외적인 약자를 거둘 때에 드는 어쩔 수 없는 심경이다. 하지만, 손자는 본가와는 떨어져 사는 신분으로서 간혹 찾아뵙는 할머니가 애닯게 느껴질 뿐 원망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또한, 할머니와 손자와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끈끈한 정은 그를 서방님으로까지 왜곡시킬 정도로 깊다. 이를 통해, 인간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나타나는 행동과 타인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호상으로 여길 만큼 삶에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에 직면해 있지 않은 제 3자의 입장일 뿐 할머니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결코 노인의 탐욕으로 읽을 수 없다. 가령, 스스로 죽기를 기도한 사람이 물에 빠지면 그들은 극한 상황에서 백발백중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투신자살한 시체들을 부검해 보면 살고자 했던 몸부림이 여과없이 드러난다고 한다. 이처럼 할머니는 인간 본성에 충실하여 더 살기를 갈망한 것이다. 이러한 심경을 간과한 채, 그저 엉덩이 부근의 상처를 들어 누워있기를 강요한 중모는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야속한 존재로 비춰졌을 것이다. 때문에 할머니는 평소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던 손자를 서방님이자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할머니가 손자를 서방님이라 부르고 나서, 손자를 자신과 동일시 한 것은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원론적 설명을 하기에 합당한 행동이다. 또한, 할머니는 앞서 저승에 간 서방님(손자에게는 할아버지)을 본 것이기도 하므로 죽음에 대한 암시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필이면 죽은 영감을 나이 어린 손자에게서 발견해낸 것은 죽음이 가진 양면성이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할머니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그만 죽고 싶다는 감정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처럼 살고자 하는 욕망의 교차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죽음의 양면성은 이 외에도 드러난다. 소설의 말미에 보면, 할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기를 회복하고 밝은 모습을 보인 즉시 죽음으로 직행하고 만다. 죽음은 단순히 아프다고 해서, 아픔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든 운명이다. 인간의 삶을 하나의 원으로 볼 때, 아픔은 죽음과 맞닿아 있고 죽음은 또 삶과 맞닿아 있다. 때문에 할머니의 죽음은 급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삶의 순환선에서 극히 자연스럽게 도달한 종착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나이 어린 손자가 할머니의 죽음을 바라본 설정은 젊음과 늙음, 탄생과 죽음이 커다란 원 안에서 함께 숨쉬고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소설은 인간에게 있어 삶과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
| 모두 중학교 권장도서격의 작품들입니다.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사실적이고 당시 사회의 모순들이 녹아 있죠. '운수 좋은 날'에서 그 운수 좋은 날이 아내가 죽는 날이었고, 'B사감과 러브레터'는 한 노파의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중에 B사감과 러브레터를 제일 인상깊게 읽었는데요. C학교의 교원 겸 사감인 B사감. 그녀는 겉보기에 남성혐오증이랄까..가 있는 사람이고 못생긴 노파에 여학생들이 러브레터라도 받으면 그것을 뺏고 편지를 받은 여학생을 심문(거의)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C학교의 여학생들은 B사감의 진실을 보고 맙니다. 그 노파 사감은 밤마다 러브레터..물론 여학생들에게 뺏은;-_-)를 들고 혼자 읽으며 원맨쇼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뭐..사람들 말로는 모두 B사감을 경멸하지만 사실 그 B사감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지 않을까요. 사람의 엄청난 양면성이란. |
| 남자란 다 같은 것일까? 여러 달콤한 말에 속아서 시집 왔더니 온갖 고생 다 시키고 큰 소리치는, 나 같으면 면목이 없어서 그나마 아내덕에 연명하는 목숨 감지덕지할텐데 말이다. 화자는 아내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계집이란 할 수 없어." 라든지. "막벌이꾼한테 시집을 갈 것이지, 누가 내게 시집을 오랬소! 저 따위가 예술가의 처가 다 뭐야!" 하고 오히려 구박한다. 나라는 인물을 보면 중3국어 교과서에 나왔던 '딸깍발이"들이 생각난다. 생활력이 없어, 매일 책상 머리만 지키고 앉아 보수없는 독서와 가치없는 창작밖에 할 줄 모르는 무능력한 인물! 그의 아내들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무능력한 남편들은 책임감도, 자존심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T 나, 처형이 자신들의 잘 되어가는 형편을 자랑하고 예쁜 옷감이나 양산을 자랑하여도 처형은 자기 남편에 매일 맞고 산다. "빈곤 속의 풍요" 란 말이 생각난다. 원래는 아마 "풍요속의 빈곤"이었을 것이나. 내가 고쳐 보았다. 이는 가난한 주인공 내외를 가리킨다. 처형처럼 돈이 많더라도 행복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부자라고 할 수 없는것이다. 그런식으로 부자라면 차라리 가난함 속에서도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가진 주인공 내외가 훨씬 나을 것이다. |
| 소설가인 가난한 남편과 이를 믿고 따르는 아내, 가난해서 늘 생활고에 시달리긴 하지만 부부의 사랑만은 남다르다. 부유하긴 하지만 늘 맞고 사는 처형을 통해 물질적 행복보다 정신적 행복이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던가. 가난한 부부가 서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데,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의 긴 머리에 꽂을 핀을 사고, 아내는 긴 머리를 잘라 남편의 허리에 찰 시계줄을 사줬던 거 같다. 둘 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부자인 부부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이게 현실이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