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후감을 쓰려면 책 내용을 소화해 내야 한다. 그러려면 2번은 읽어야 한다. 그렇게 썼다. 그렇게 써야 맞는 지 안다. 요즘 독후감은 아니올시다. 그냥 슬금슬금 책 내용 따다 몇 줄 올리면 독후감이다. 인터넷 서점의 요구도 그렇다. 내용이나 줄거리 보다, 느낌. 내용이야 읽으면 아는 것. 중요한 것은 느낌. 요는 많이 팔아야 하니 좀 삼빡한 걸로. 읽지 않곤 죽고 말, 한 마디, 기똥차게 쓰라는 말씀이다.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고 나면 한 마디 꼭 걸고 넘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못 마땅하다. '꽤 따지고 자빠졌네'하며 그들이 얼마나 확실히 독파했고 정확히 들었나 의심해 본다. 나는 비판보다 긍정 쪽이다. 일단 긍정하고 한 참 삭여 본 다음, 따지는 편이다. 아니 따지지도 못할 테지. 6, 70년대 전형적인 모범생이 어떻게 선생님의 그림자를 함부로 밟느냐. 따라서 독후감도 비평의 눈을 뜨지 못한다. 첫 번째 권의 철학하는 법, 생각하는 방법을 읽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평생의 버릇이란 이유 때문이다.말, 말, 말, 말이면 되었지, 말에 토를 달고, 이유를 달아 문제를 만들까. 말을 따지다니. 말을 해부하다니. 쏘쒸르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이다. 인간의 조상-최초의 인간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의 기원은 찾을 수 없다. 언어는 사회적 산물이다. 한정된 지역에서 확정된 표현은 관습과 규약에 따라야 한다. 기표와 기의는 자유롭게 계약을 맺고 그 것에 따른다. 기표는 서로 달라야 한다. 쏘쒸르는 말을 통합체와 계열체로 나누어 통합체에서 인접성을 계열체에서 유사성에 해당되는 빈칸 채우기 놀이라고 말한다. 그의 제자 야콥스가 실어증 환자로부터 통합체에서 말을 하나로 묶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계열체에서 요소들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는 것을 보고 더욱 확실하게 굳힌다. 쏘쒸르의 이런 논의는 현대의 대표적인 과학으로 인문사회학에서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이 구조주의, 기호학, 후기 구조주의이다.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말은 세계를 그린다. 자연과학의 명제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명제들이지만 형이상학이나 윤리 종교적인 명제들은 무의미한 명제라고 한다. 따라서 말할 수 없는 명제(형이상학적) 는 침묵해야 한다. 언어 즉 의미는 사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장기를 둘 줄 알아야 말의 의미를 아는 것처럼, 말도 말을 사용하므로 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으며 말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말의 의미는 그 쓰임이며, 쓸 줄 알아야 뜻을 안다. 형이상학자들은 낱말들이 일상적인 말놀이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쓰이는 것을 무시하고 낱말들에게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이들은 말놀이 바깥에서 따로 노는 말들이다. 예를 들어 지식, 자아, 명제, 고통, 영원, 지고함, 순수, 이런 단어들의 의미나 본질이 말놀이와 무관하게, 일상적인 쓰임과 무관하게, 아니 그 위에 있다고 여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들을 일소하고자 한다. 누구나 포스트모던에 관하여 한마디쯤은 한다. 그래야 알아주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성이 잠들면 인간 내부와 외부에서 어두운 힘이 세력을 떨친다. 무지가 믿음으로, 불합리한 특권이 권위로, 소수의 이익이 전체의 복리로 둔갑한다. 암흑을 추방하는 이러한 이성의 빛은 진선미의 각 영역에서 합리적인 과학, 보편적인 도덕, 자율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암흑을 추방하고 성숙과 해방을 마련한다. 총체성을 주체로 삼는 모더니즘 - 지식을 모조리 백과사전에 담아 세계를 완벽하게 알고, 이성과 지식을 무기로 삼아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난다. 헤겔의 역사 변증법은 역사를 자유의식의 진보하는 과정,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 이야기 모두 내용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기본 틀은 같다. 인디언들의 착취와 아우쉬비츠의 대학살과 레닌 체제의 비극들은 모더니즘의 해악이다. 획일성 총체적 토론이 필요 없는 집단 체제 등, 모던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그 잔혹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참 지난 뒤 그 해악을 뒤늦게 안다. 최근 검찰 조사도중 숨진 사건이 바로 그 잔재가 아닌가. 아직도 그 뒤안길에서 저린 발을 빼지 못하고 아침마다 신문 만화를 보면서 쓴웃음을 웃는다. 왜냐하면 모두들 알면서도 새삼스러운 듯 놀라는 꼴들이 아니꼽기 때문이다. 일방적 마녀사냥, 매카시즘, 수지 김 사건 등등. 포스트 모던 아저씨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라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의 진리나 정의보다 더 나은, 더 완전한 진리와 정의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자아 이제 포스트 모던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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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의 철학 3권은, 2권의 칸트와 데카르트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드디어 20세기 초까지 다다랐다. 다루는 내용은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언어가 대상을 지시하며 그 관계는 필연적이라는 기존의 관점이 착각일 뿐이라는 소쉬르의 언어 철학을 시작으로, 그 배턴을 넘겨받은 비트겐슈타인은 지난 시기의 철학을 몽땅 해체한다. 대학원 시절에 [논리철학논고]를 탈고해 지도 교수인 러셀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는, 철학의 모든 논의는 이제 끝났다며 시골에 내려가 아이들이나 가르쳤다는 비트겐슈타인은 그야말로 근대 철학의 종결자다. 두번째 강의인 ‘포스트모던 마을의 작인 이야기들’은 피노키오의 철학 4권을 위한 워밍업이다. 하나의 기준으로 서열 짓고 체계화한 기존 세계를 해체하고, 다양한 관점과 기준이 있으므로 세상에는 우월하거나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데카르트 같은 올드한 철학자만 알고 있었다면 짜릿하고 흥분되는 지적 쾌락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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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해 머리가 아프던 나에게 다가온 한줄기 빛같은 책.. 선생님의 이야기를 따
라가다 보면 어느새 새벽 3시가 되어있다. 3편에서는 언어를 이용한 세상의 이치, 개
념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세상의 고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마치 철학가
가 된 기분.. 강추!! |
| 특정 영역에만 편중된 독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랜만에 철학책(?)을 꺼내들었다. 마음 같아선 두껍고도 고전적인 무언가를 읽어보고도 싶었으나 나의 지적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재미있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신선하다. 아마도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여느 책보다도 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책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다소 독특하게 보이는 그림까지 보고 있노라면 철학 서적이라는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읽는 재미의 쏠쏠함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철학은 나에게 어렵디 어려운 분야이긴 하지만 말이다. 언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의심을 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전화 통화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하는 과정 속에서 언어는 나에게 너무도 당연한 것, 그래서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알고 있었던 것 마냥 여겨진다. 물론 학교라는 제도권 교육을 통해 인위적(?)으로 습득한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언어에 대해 쏘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은 말하고 있다. 기표와 기의 라는 다소 딱딱한 듯한 개념과 함께 그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언어 역시 사람들이 형성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진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도 언어는, 사람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었으면서도 동시에 그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라는 점에서 인간 사회를 연구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언어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전을 통째로 암송해서 엄청나게 많은 단어를 아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두고 언어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이 말하는 단어가 실질적인 사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언어 그 자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 그들이 엿보고자 했던 것은 언어를 매개로 한 삶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의 철학자들(!)은 언어 속에 존재하는 거대한 구조를 발견했던 것 같다. 우리의 말은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구조 안에서의 변형임을… 이 책은 동시에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유행처럼 입에 달고 살았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 하지만 중심적인 무언가에 대한 거부 이외에는 다른 말로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단순한 다원주의 차원이었다면 아마도 이처럼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지는 않았으리라. ‘포스트’라는 말이 가지는 이중적(?) 의미 때문에 모더니즘 이후에 도래하는 새로운 사상 정도로만 해석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존재하기 전에도 가능한 것이라고 하니, 언어적 의미에 치우쳐 쉽게 생각하려 하다가 오히려 가시밭길을 돌아가는 꼴이 되었다고나 할까나. 단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외치는 목소리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까나. 어떠한 대안도 완벽한 것은 존재치 않고, 하나의 정의가 다른 정의로 교체되는 것이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일 수 없음을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은 주장한다. 뭉뚱그린 추상적 설명에 그치지 아니하고 다방면에 거쳐 다양한 방식으로 모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리오따르의 모습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역시 오랜만에 읽는 철학 서평이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나의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이 심히 난해하다.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언어로 다시 말하는 것이라고도 하던데, 아무래도 난 이해를 위해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
| 이책을 읽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은 철학적인 면보다도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적수인 칼포퍼의 생애에 초점을 맞춘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겨우겨우 힘겹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철학에 대해서 초보자인 사람들이 다른 어려운 책들을 읽기 전에 먼저 읽는게 좋을 듯 싶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던지는 말들에 대해서 자세하고도 쉽게 설명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은 다른 철학책들과 달리 완성된 '어려운'철학을 앵무새 처럼 말하는게 아니라 좀더 쉽고 일상적인 언어로 철학적 사고과정을 하는 방법을 알려 줌으로써 철학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게 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