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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던 리영희 선생의 말씀이 진정 옳은 말씀인가에 관해 고민(?)해보던 때가 있었다. 아니, 양쪽 날개가 있어야 새가 날 수 있는 것은 맞겠지만, 오른편 날개를 '보수'로 개념정의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관한 의문을 품었다라고 하는 것이 좀더 정확하겠다. 한창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만났던 책이 바로 이책이다. 책은 너무도 날카롭고 자신있게 일갈한다. 보수는 날고싶지 않은 새의 마음이라고, 때문에 보수는 '극복해야 할 대상'인 것이라고. 차라리,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난다면 그것은 진보와 보수가 아닌 진보와 성찰이라는 날개로 난다고 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그리고 책은 자유주의가 주류적 담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학문적인 '나누기'를 잘한 것이 무엇보다 큰 요인이었다는 것(예를들어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에 친화적이지만, '자유민주주의'라는 언술은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의 구획속으로 포함시켰다), 언론자유를 외치며 세무조사에 반대하는 보수언론이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자유가 억압당할 때에는 침묵했다는 사실을 강하게 지적하면서 보수주의자가 외치는 자유주의의 원류라 할 수 있는 독립신문을 중심으로 한국의 자유주의(정확하게는 '보수주의자가 외치는' 자유주의)를 비판해 나가고 있다. 문제는 정말 힘있는 문체로 힘있게 전개된 서론에 비해, 독립신문에 대한 분석이 이어지는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지루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루함은 사실, 저자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독자인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박노자 씨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대강 읽었던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적확한 문제의식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드러난 서론부분 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책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책세상문고-우리시대 시리즈 중 내가 처음으로 구입했던 책이라는 점에서 묘한 애착이 가는 책이기도 하다는.^^;;;; |
| 나는 이 책의 제목과 겉 표지만 보아도 '재미' 라는 것과는 동떨어진 책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가 있었다. 이 책의 겉 표지에는 그 옛날의 '독립신문' 이 그려져 있는데, 그 '독립' 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 현 사회의 '보수' 주의자들이 외치는 소위 '자유' 라는 것에 이어진다고 작가는 보고 있다. '보수' 와 '자유'. 얼핏 보면 어떤 연관성을 찾기 힘들겠지만, 작가는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보수' 와 '자유' 의 공통점을 세심하게 찾아내고, 또한 그 이면에 숨어있는 것까지 찾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독립신문' 에서부터 '친제국주의 이데올로기' 까지.... 이런 어려운 단어가 속출하지만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
| 신처럼 떠받들여지고 있는 우리의 '자유'라는 단어가 실은 얼마나 부르주아적인 단어인지, 진정한 '자유'와는 얼마나 동떨어진 외침인지를 신랄하게 논증하고 있는 책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자유라는 말, 민주주의라는 말이 갖는 위력 때문인지 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하여 연구하려는 학자가 얼마 안된다는 걸 생각하면 이나미씨의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은 매우 소중한 결과물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보수주의라는 개념에 만연되어 있는 허구적 껍질의 까발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보수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가려는, 그러기 위한 권력을 유지시키려는 또하나의 욕망!을 버리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 뿐, 뭐뭐 '주의' 씩이나 될 정도로 의미심장한 용어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를 보수주의의 허구에서부터 시작하였듯, 한국에서 자유를 외쳤던 시발은 보수적 욕망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에서부터였다. 진정한 자유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텐데, 오히려 억압자들에 의한 외침이 한국의 자유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자신이 외치는 자유의 진정성에 대하여 다시한번 돌아보게 될 것이며, 너무나 당연한 가치로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하여도 재고려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 역사는 늘 흥미롭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를 가능케 하는 근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 자유가 존재했던가.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나는 반문해본다. 책은 자유주의의 개념이 모호하다는 식의 자유주의에 대한 조금은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들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나라의 자유주의가 상공업에 대한 태도의 변화 과정 속에서 나타난, 부의 축적을 위한 자유추구와 연결된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자유주의를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바도 무방할 듯 싶었다. 또한 그녀는 자유주의 내부에 제국주의적 흐름이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예로 든 이완용의 연설은 실로 놀라웠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읽어도 그다지 시대상과 뒤떨어지지 않는 듯해 보이는,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기반한, 능력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식의 현대 경영학 등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원리 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상은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로 이끌었으며, 제국주의를 미화하게 되었다(p100)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로서 저자는 서양의 많은 국가가 다른 나라를 침범함으로써 자신의 자유주의를 확고히 했던 것, 우리 나라 개화파의 친일적 성향, 더 나아가 독립신문이 보여주는 사회진화론적 성격을 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독립신문의 조선도 청국을 쳐 요동과 만주를 차지해야 한다는 사회진화론적 성격의 논설은 지금껏 한번도 접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현대 사회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엿본다. 자유주의는 그 성격상 제국주의와 맥락을 같이하고 세계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역시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미국적 질서 속에서 세계를 재편하고자하는 제국주의적 흐름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자유주의의 기원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택한 독립신문에 대한 분석은 시종일관 흥미로웠다. 일반적으로 중,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우리는 독립신문을 진취적인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백성들을 계몽시켰다는 식의 긍정적 매체로서만 배워왔다. 그렇기에 실제 독립신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보다 진보적이고 개발된 국가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서 그 내에서 독립을 이루는 것이 조선의 앞날을 위해 더 낫다는 식의 논조, 일본에 의한 조선의 지배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지닌 역량을 보았을 때 조선에게도 바람직하다는 식의 논조를 접했을 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독립신문을 이끌었던 개화파들이 지니고 있는 한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그토록 엘리트주의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는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타국에 의한 지배 마저도 정당화시킬 정도로 자유주의에 심취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지금껏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민주주의의 개념을 혼돈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필요에 의해 채택된 제한적인 개념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전세계적인 흐름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상반적 개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자신의 권력을 상실하지 않길 바랬던 자유주의 진영의 발악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정치참여를 막고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즉 민권의 신장 아닌 민권의 제한과 관련이 깊은 것이라고… 사람들은 자유주의라고 하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자유주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듯 핟.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자유 라는 개념을 놓고도 보수, 진보 진영 모두가 찬성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은 자유주의의 기원이라는 제목과는 약간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차라리 독립신문을 중심으로 본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이라고 제한점을 두었으면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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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한국 보수주의자들이다. 궁금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답을 알고자 하여 이나미씨는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를 썼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자유주의는 쿠무인가를 보고 싶어한다.
이나미는 보수적 정치가들이 외치는 '자유'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자유이르모 '보수주의'라는 다른 이름을 불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이나미가 규정한 보수주의는 무엇일까"
"보수주의는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욕망'이다. 보수주의는, 어느 문인에 의해 아주 적절히 지적된 바와 같이, '이념'이 아니라 '욕망'이다. 즉 사회를 굳건히 떠받치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필수적인 신념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욕망'이다." (11쪽)
보수주의가 신념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과 안락함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이 내용의 전부라고 일갈한다. '신념'이 아욕망이라 할 때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보수주의를 갖고 있다. '욕망'으로만 산다면 사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극복'해야 한다. '자유주의'를 '보수주의'와 동일시하는 한국 사회 보수적 정치가들 논리는 여기서 무너진다.
이나미는 '자유주의'를 이나미는 <브리태니커> 정의한 "봉건제와 절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자유 평등의 인간상과 합리주의를 계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과 교양을 지표로 하여 빈곤한 계급을 정치과정에서 제외시키고 자산가 계급에 봉사한다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를 동의한다.
그럼 우리나라는 언제쯤 '자유주의가' 들어왔을까? 이나미는 <독립신문>에 주목한다. 유교가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조선시대는 '자유주의적' 성격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독립신문> 대중을 상대로 '자유주의'를 전파했다고 이나미는 주장한다.
"독립신문은 주로 그 동안 유교에 의해 경시되었던 이익 개념과 상업에 대해 재평가하며, 개인의 생명권, 재산권, 자유권과 경젣적 독립을 강조했다."(14쪽)
문제는 <브리태니커>가 말한 자유주의 개념처럼 빈곤한 계급을 정치과정에서 제외시키고, 자산가 계급에 봉사하는 사상이 녹아 있고, 자유주의 개념이 성립되었을 때 서구는 제국주의가 싹트면서 제국주의를 미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나미는 자유주의를 다시 기억해야하지만 '자유주의'가졌던 특징을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독립신문>은 '자유'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독립신문> 1899년 1월 10일자 '인권자유'에서 "자유라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욕심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 욕심을 능히 어거하야 좋은 일이면 나의 마음대로 하고 그른 일이면 하지 아니하는 것이 실상 자유의 본질"이라 했다.
<독립신문>이 자유를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유교' 강조하는 '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자유주의 핵심이 이익과 행복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주의인데 아직들은 '자유'를 '옳음' 곧 '의'를 포함하지 않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립신문> '유교' 지배 이데올리기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지만 자유주의 핵심 개념인 '독립'을 "자기 힘과 재주가 있으면 벌어먹고 세상에 자주독립한 백성이 되어 빈부 귀천 간에 사람마다 자기 십상에 자유권을 가지고 있으며"로 규정하고 "양반은 이제 더 이상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걷을 권리가 없다"고 양반을 비판하였다.
이는 <독립신문>이 유교에 경시되었던 이익 개념과 상업에 대한 재평가, 개인의 생명권, 재산권, 자유권을 강조하여 우리나라에 자유주의적 내용들을 도입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독립, 재산권을 강조하는 '자유주의'가 어떻게 '제국주의'와 짝하게 되었을까?
"'인간의 권리'에서 '인간(men)'은 전 인류가 아닌 백인, 그중에서도 남성을 의미했으며 '개인의 자유'에서 '개인'은 우수한 개인을 의미했다. 인간은 자연을, 남성은 여성을, 백인은 흑인을 지배할 권리를 가지며 따라서 인간, 개인은 백인 남성을 의미했다. 이렇게 자유주의와 제국주의는 양립했으며, 시기적으로도 동시대의 산물이었다." (77쪽)
결국 자유주의는 '인간'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성과 백인 우월주의와 적자생존이라는 서구제국주의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우리가 강하면 약한 나라를 지배할 수 있고, 우리가 약하면 강대국에 지배받을 수 있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어 일본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동조하는 세력도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다.
나아가 이나미는 한국의 자유주의는 서구 자유주의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민권의 신장이 아닌 민권을 제한하는데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백성과 신민, 인민과 국민 등 여러 가지 민 개념을 그들의 의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고 한다.
개화파인 윤치호는 "민중은 무식하고 어리석으며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운동을 일으킬 능력이 없다"고 했으며 <독립신문>은 "평민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한 정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며"라고 했다.
"개화파는 유교의 전통적인 민 개념을 공유하면서 민을 철지히 불신했다. 그들이 민권을 주장한 이유는 자신들의 개인적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자유주의 사상은 우민관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144쪽)
이렇듯 한국 자유주의는 서구제국주의가 자유주의와 손을 잡았듯이 박영효는 친일인사가 되었고, 민권을 소리높여 주장했던 독립협회는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서 외국군대의 조선 땅 진주를 주장했다.
자유주의를 마냥 외친다고 무조건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라도 '자유주의'를 주장할 수 있지만 그 자유주의 본질을 안 다면 자유주의가 아닌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것이 이나미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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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장집 교수의 최근작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함께 본 책이다. 이 책의 부제가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이었는데, 이나미씨의 이 자그마한 책이 그 보수적 기원을, 서양, 일본, 중국 한국 안가리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가 공격하는 대상은 보수주의자들이 참칭하는 "자유주의"(혹은 자유지상주의)다. 여기서의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배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강한 자들에 대항하여 약한 자들이 연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란 형용모순적 용어가 보수주의에서 사용되는 것은 보수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민중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기 때문일 뿐이다. 또한 이 책은 박노자씨의 개화기 한국사에 대한 고찰과도 나란히 놓고 읽을 수 있다. 이나미씨는 개화기 당시 독립신문에서 사용된 자유주의적 담론들인 자유, 이익, 독립 등의 용어를 밝히며 그들이 인종차별주의와 경쟁지상주의, 사회진화론, 제국주의 담론에 오염되어 있었는지도 보여준다. 이런 것들이 한국 자유주의의 보수적 기원을 이루며 오늘날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참칭하는 소위 메인스트림의 척도가 된 것이다. 이나미씨가 말미에 <브레이브 하트="">에서 멜깁슨이 외치는 뜬금없는 착각적인 "freedom"과 <글라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의 뒤늦은 냉소적 자각을 뛰어넘는 진정한 자유인의 사표로 록커인 한대수를 지적한 점도 안성마춤이었다.글라디에이터>브레이브>민주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