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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그 이름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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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아름다운가? 아니 아름다울 수 있는가? 죄가 있고, 시간 앞에서 힘 앞에서 나약한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아름다움을 위해 아파하고 시간 앞에서 좌절해온 이 시인의 행보가 아름다와 보이는 것인 그가 단순히 많은 언어들 앞에서 좌절하면서도 그 언어들을 절묘하게 주무르는 시인이기 때문일까? 적어도 그의 글들은 상처 입기 쉬워서 아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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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아름다운가? 아니 아름다울 수 있는가? 죄가 있고, 시간 앞에서 힘 앞에서 나약한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아름다움을 위해 아파하고 시간 앞에서 좌절해온 이 시인의 행보가 아름다와 보이는 것인 그가 단순히 많은 언어들 앞에서 좌절하면서도 그 언어들을 절묘하게 주무르는 시인이기 때문일까? 적어도 그의 글들은 상처 입기 쉬워서 아프고 아픈만큼 충분히 아름답다. 적어도 내게는..... 그가 근무를 하고 있는 지방의 어느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나는 아주 특별하게 그의 시를 동경하며 읽었고, 학교 도서관과 인문대 나무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 작고 꼬장하게 생긴 시인을 우연히 만난다는 사실에 시 이상으로 감동한 적이 있었다. 시인과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왔던 시절...나는 지금보다는 순수하고 지금보다는 더 청춘이라는 이름의 힘이 있었던 때였던 것 같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그의 시집들을 읽고 살림에서 나온 그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나는 말없의 그의 언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린...그래서 곁에 있고의 싶었던 그의 말들...그리고 다시 내가 이 사회에서 황폐해진만큼 그와 나와는 다른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의 새로운 책을 보면서 그때의 나의 감성을 찾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 참 부질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랭보를 공부하는 칠십의 랭보 연구가의 스승이 가장 왕성한 청춘의 랭보라는 그의 말처럼 나도 그때의 내가 될 수 없음을 그리고 그때의 내가 지금의 말없는 스승임을....지나간 시간을 마냥 그리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비춰 지금을 다시 복원해 보려는 나의 꿈은 어쩌면 삶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난 이렇게 그의 책을 들고 지나간 나만의 시간으로 간다. 혼자서 묵묵히....그리고 도 책을 펴 든다. 시인은 자신만의 언어 안에서는 결코 죽지 않는다. 이성복 역시 여리고, 쉽게 상처입고, 흉터조차 지워지지 않는 그의 말들 안에서 살고 나 역시 그의 언어 안에서 내 삶의 조각을 끼워 맞춘다. 오랜동안 잊고 있었던 그의 말들 속으로 빠져들었던 아름다웠던 봄이다.
c******e 2002.05.2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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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적인 은유, 풍요로운 사유를 통한 불순한 언어의 성찬...
"고혹적인 은유, 풍요로운 사유를 통한 불순한 언어의 성찬..." 내용보기
이성복을 읽는 일이 항상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간혹 그의 말은 너무 비정하고 신랄하여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고혹적인 그의 은유들을 살피는 일은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지 없이 기쁘다. 그가 사유하는 세계가 내가 살아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내가 살아내고 있으되 제대로 알지 못했던 또다른 세계, 그러나 어쨌든 공유할 수밖에 없는 세계라는 것
"고혹적인 은유, 풍요로운 사유를 통한 불순한 언어의 성찬..." 내용보기
이성복을 읽는 일이 항상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간혹 그의 말은 너무 비정하고 신랄하여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고혹적인 그의 은유들을 살피는 일은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지 없이 기쁘다. 그가 사유하는 세계가 내가 살아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내가 살아내고 있으되 제대로 알지 못했던 또다른 세계, 그러나 어쨌든 공유할 수밖에 없는 세계라는 것에 의지한다. "...그의 몸의 불순함은 삶과 세상의 불순함이며, 순결한 삶과 순결한 세상은 불순한 몸의 꿈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이 세계에 깃든 내 육체의 억울한 불순함도 보상받는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의 원죄와 같은 것이었구나 안심하게 된다. 깃털같이 미천한 순결함 대신 불순한 몸을 부여받고, 순결한 삶과 세상에 대해서는 꿈꿀 뿐이라는 사실이 슬프지만 받아들일 무엇이 된다. "...언어는 때묻은 것, 부패한 것, 쪼개진 것, 찢긴 것, 불어터진 것 등 상처난 삶의 여러 표정들을 슬라이드 필름처럼 간직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어는 그 표정들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시의 순간은 언어의 지각(知覺)에 도저한 변동이 생김으로써 미처 짐작지 못한 단층의 굴곡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시가 말의 음악이라면 그 음악은 삶과 마찬가지로 '오염된' 음악이다. 그 음악은 오직 오염되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 몸의 불순함에서 한 걸음 나아가면 거기에 때묻고 부패하고 쪼개지고 찢기고 불어터진 삶을 간직하고 있는 언어들이 있다. 삶이 불순하니 삶을 노래하는 언어는 오염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행복이 가득한 언어가 아니라 뚝뚝 피가 돋을 것 같은 상처의 언어이다. 발갛게 부풀어오르는 상처에 뿌려지는 소염제인 언어가 아니라 고스란히 상처와 하나가 되고 마는 자연그대로인 채의 불순한 오염물질인 언어이다. "예술가는 언제나 예술의 길과 세속의 길 사이에 있는 존재이며, 예술은 세속에 대한 그리움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세속을 떠나지 않는다면 어찌 세속을 그리워할 수 있겠는가. 모든 그리움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구축한다..." 하지만 거기에도 그리움이 존재한다. 어느 순간 제가 있을 자리를 떠나 존재의 이전을 경험한 언어는 항상 그립다. 세속을 떠난 언어, 그래서 예술이 된 언어들은 자신의 그리움을 추상으로 구축한다. 그리고 비로소 그리움을 자신의 것으로 떠안을 수 있게 된다. "어느 해 쌀쌀한 늦가을 바람이 부는 왜정식 벽돌 건물 앞을 한 젊은이가 꼬지꼬지 때묻은 바바리 깃을 올리며 지나갔다. 너무도 많은 질문이 있어서 그의 머리는 끓는 국처럼 뜨거웠다. 아직도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리움은 언어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현재의 자신이 돌보지 못하는 과거의 자신을 향하는 그리움. 이제와 비로소 떠올려보지만 명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부담스러운 그리움. "요컨대 아우라는 한 대상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대상에게 만들어준 것이다. 본시 대상은 아우라를 가져본 적이 없으며, 따라서 잃어버린 적도 없다. 그러므로 아우라 상실의 시대란 우리가 대상에 아우라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라고 말하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정말... 벤야민의 아우라라는 개념을 듣고 퍼뜩 놀랐던 것이 언제였더라. 하지만 이제 아우라 상실의 시대, 대신, 아우라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 라는 표현은 얼마나 정확한가. 그리움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그것이 이름을 갖지 못할 때이다. 아우라의 상실은 기계적인 복제 때문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줄 우리의 능력이 상실된 것에서 비롯된다. "...문학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여러 사실들의 공식화된 표현이거나 내가 알아내려고 애쓰는 부분에 대입해보기 위해 임의적으로 만든 도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 표현이나 도식들은 대체로 대칭적이거나 역설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왜 그럴까. 아마도 삶의 구조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삶은 역설과 대칭을 자신의 구조로 삼는다. 때문에 우리들의 문학의 표현 또한 대칭적이거나 역설적이다.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토대로 자신이 알려고 하는 사실들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면... "...시는 헛도는 플라스틱 병마개 같은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엔 미세한 금이 가 있다. 그러나 다시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시라는 병마개가 헛돌기에 삶은 영원히 닫히지 않는 것이다..." 절묘하다. 고개를 내두르면서 작가의 글을 읽는다. 헛도는 병마개 같은 시와, 그렇게 영원히 닫히지 않는 삶. 시에 대한 작가의 아포리즘은 언제나 대단하다. 그것은 그가 시인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시인이면서 시인이기를 잠깐씩 그만두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잊을 것이고, 그에게 시는 무정형의 무엇이 될 것이다. 다만 잠깐씩 시쓰기를 그만두는 순간, 그때 시인은 시에게 몸피를 입혀주는 것이다. "아, 언제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처럼 글을 쓸 수 없을까. 그것들의 삶에 먹고 입을 것에 대한 걱정이 없듯이 글쓰기를 의식하지 않는 글, 글을 의식하지 않는 글쓰기, 오직 글쓰기의 현재진행형만이 있는 지점에 도달할 수는 없을까..." 자신이 도달한 지점은 언제나 의심스럽다. 어쩌면 시인인 그는 자신이 지금 그곳에 도달해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를 의식하지 않는 글쓰기. 도달할 수 없을것만 같은 그 지점에 지금 내가 도달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은 조바심이 될 터이고, 그래서 그 도달은 요원한 미래 내지는 희망이 되고 말 것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02.07.16.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