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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스타 인문학자'라고 하며, 본업은 문학평론가이지만 인문학의 '대가'라 불리우는 학자의 저서라면 늘상 그러하듯, 책은 자신의 분야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부문에 대한 코멘트가 이루어지고 있다. 칸트의 미학과 철학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윤리학의 지평을 열고자 한 본서는, 저자 말마따나 '칸트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며, 아울러 칸트를 내세워 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본서에서 언급되는 칸트에 대한 수많은 인용과 설명에도 불구하고 칸트에 대해 다소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물론 모르는거보다야 아는게 낫긴 하겠지만) 저자는 칸트를 '빌어다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고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본인 답게) 전쟁책임이라는 문제를 고민하다가 책임은 무엇이며 윤리란 무엇인지라는 생각을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러한 생각의 도중에 칸트에 관심을 갖게 되어 본서를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한다면 이 세상에 진정 자발적인 인간의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원인을 따져들다보면 정신분석학적, 사회학적, 시공간적 요인 등으로 인해 개인의 자발적인 의도로 이루어진 행동은 사라지며, 따라서 책임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자유'란(그리고 그로인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되는 '책임'이란) 진정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그러한 자유는 실천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언급한다. 즉, 자유란 '자유로워지라'는 의무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자유'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에 따른 '책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에 기반하여 저자는 우선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한다. 저자가 말하는 도덕이란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의미로, 윤리라는 말은 '자유'라는 의무에 관련된 용어로 이해된다.(물론 이것은 저자의 자의적인 개념설정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선 칸트의 미학적 관심에 주목하여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논한다. 우리는 잔인한 장면을 그린 고전 영화를 보며 아름답다거나 쾌감을 느낀다. 이는 그 영화를 보는 동안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잔인함에 대한 분노나 공포를 '괄호에 넣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단순히 예술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닌것이 이를테면 의사들은 어찌보면 징그러운 수술도 가볍게 해내고는 저녁으로 편안히 삼겹살을 구워먹곤 하며, (바람직한) 판사들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그 친구에 대해 공정한 판결을 내릴 줄 안다. 이는 같은 대상을 판단함에 있어 다른 부문을 '괄호에 넣어'판단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굉장히 많은 훈련이 필요함은 자명한데, 저자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한 훈련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모든 원인을 탐구하여 무엇이 진짜 원인임을 밝히는 것과 별개로, 그러한 원인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하여 책임의 영역이 논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적 기준 앞에서 모든 것을 동일시하여 결국 '오십보 백보'로 모든 실천적 영역까지 상대화하여 책임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원인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상대론적 결과와는 별개로, 그러한 연구들을 토대로 한 '책임'영역의 검토가 엄중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저자는 "인간을 수단으로 뿐만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여기서 저자는 칸트가 "수단으로가 '아니라'"가 아닌, "수단으로 '뿐만아니라'"라고 말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즉, 칸트는 같은 대상을 바라봄에 있어 다른 영역에 다른 시각이 필요함을 전제로 했다는 것이다.)는 말에 기반하여, 공리주의적 윤리관이나, 하버마스나 아렌트 식의 '내부적 합의'에만 주목하는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사실 하버마스나 아렌트의 합의론에는 외부인에 대한 배려는 없다. 결국 사회 안에 존재하는 자들간의 합의만이 중시되어 어찌보면 '자유로워지라는 의무'의 결정적인 판단기준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의 외부인-여기에는 죽은자나 다음세대도 포함된다(이 점이 본 저서의 또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생각이 든다)-이 배제되는 결과가 도출되어 책임문제는 사라지고 말게 된다. 아울러 공리주의는 자유, 즉 자기원인적인 것이 아닌 외생적인 요소(그러니까, 주변과의 비교를 통한 이익?)에 의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간을 피폐시키며 수많은 문제-이를테면 환경이나 생명-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저자의 지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더 절실하고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물론 저자는 윤리적인 판단과 실천을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 윤리적인 실천을 하는 일은 공동체의 도덕에 상충하는 경우가 많으며, 때문에 윤리적 실천은 종종 그러한 실천을 한 사람 본인을 불행에 빠뜨리곤 한다.(심지어-그 어려움때문에-칸트는 '윤리적으로만큼은' 종교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저자는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윤리적 개입'이 더더욱 절실히 요구됨을 역설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윤리적 개입은 맑스의 사상에도 알게모르게 이어져, 그는 단순히 결정론적으로 사회주의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 그대로라면 빠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야만을 제거하기 위해 '윤리적 개입'의 요청으로서 사회주의를 이야기했다고 주장한다.(저자는 이러한 주장의 결정판(?)으로 얼마 전 '트랜스크리틱'이라는 두툼한 책을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이 책 또한 여기저기서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실, 본서는 이러한 짧은 서평으로는 차마 그 내용의 일부조차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광범위한 의미를 담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도 한두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세기의 '야만'이 채 제거되지 못한채 21세기를 겪어 나가고 있는 오늘(지금도 중동에서는 '20세기의 여파'로 인한 또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저자가 말한 윤리적 요청이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되기에, 본서는 더더욱 읽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끔씩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다소 두서없이 엮어져 간다는 느낌도 들고 다소 산만하게 읽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읽다보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있음이 느껴질 것이다. 어렵지 않은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수많은 모티브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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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문예비평가로 알려져 있다. 왠만한 철학책들을 보면 그의 이름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고 한국 철학자가 쓴 철학서에도 그의 이름이 종종 언급된다. 그것도 철학의 주변부인 일본인이라는 편견이나 폄하가 아니라 어떤 서영 철학자의 사유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높은 사유와 그 전개를 보여준다고 극찬하면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그의 책을 읽어보려고 <트랜스크리틱>이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들을 기웃기웃 거리다 결국 가장 처음 만나게된 그의 책이 바로 이 <윤리21>이다. 책 제목을 보면 무슨 영화잡지를 패러디 한 느낌이 든다. <씨네21>과 같은…그러나 <윤리21>이라는 간단한 제목속에 전쟁책임에 대한 그의 사유의 결론을 볼 수 있다. 결국 책임이라는 것은 윤리에서 나오면 21세기 철학적 사유는 윤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책임에 대해서 사유하다 보니까 결국은 칸트의 철학적 사유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은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수년전부터 나는 전쟁책임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본질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서 책임이란 무엇인가, 윤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애 한다고 느꼈다. 그때 나는 칸트의 ‘비판’이 지금도 가장 근본적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단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칸트의 윤리학과는 다르며 나도 칸트를 내세워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에 대해 다소 알고 있을 필요는 있다….그것을 근본적으로 생각한 결과 칸트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라타니 고진은 전쟁책임에서 ‘책임’을 말하기 위해서 긴사유의 과정을 거치며 결국 ‘책임’이라는 것은 ‘자유’와 ‘윤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책의 3분의 2를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한 사유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 책이 쉽게 이해가 되지않고 인내하고 후반부까지 끝까지 읽어야 이해가 되는 것은 그러한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적 사유를 따라가는 것이 지루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1장부터 8장까지 전쟁책임에 대한 지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일본에서 일어났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결국 책임을 말하기 위해서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책임을 말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말해야 하며 스스로가 제일 원인이 되기위해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칸트의 철학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데카르트, 스피노자, 마르크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논의가 개입되고 특히 칸트의 윤리학이 언급되기 때문에 읽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전개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를 개괄적으로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1997년 고베시 스마구에서 일어난 중학교 3학년 소년에 의해 연속 살인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일본사회에 알려졌을 때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사회에 일반적인 담론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그 소년의 사건은 ‘부모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엄청난 압박이 일본사회로부터 가해졌다. 여기서 가라타니 고진은 사회가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며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회 공동체의 규범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가 아니라 ‘도덕’이라고 규정한다. 전자는 사회(공동체)가 부과하는 선악의 기준이고 후자는 진정한 인간성이라고 불릴수 있는 ‘윤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가 나오기 위해서는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그는 전쟁책임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시작한다. 그러면 참된 윤리는 진정한 ‘자유’에서 나오는데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가 있을까? 인간의 자유는 결국 인간을 둘러싸고 강제하고 있는 구조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자유라고 생각하는 모든 인간의 행동은 결국 찾아 들어가보면 외부에서 주입된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주체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주체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상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적으로 되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칸트는 ‘자유로워지라’는 의무로 설명한다. 자유는 오직 당위(의무)에서 나온다고 칸트는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책임이라는 것은 우리가 자유, 즉 자기가 원인이라고 상정할 땜나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전쟁책임을 말하기 위한 철학적 지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칸트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는 책임에 대한 사유끝에 결국 칸트의 철학에 이른 것이다.
9장부터 12장까지가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려는 전쟁책임에 대한 본론인데 진짜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은 9장 딱 한장이다. 그래서 9장이 본론이라고 할 수 있고 나머지 장들은 타자에 대한, 죽은자들에 대한, 미래에 태어나지 않은 타자들에 대한 윤리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사유이다. 9장에서는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한 책임을 물을대 언제나 개개인이 과거를 알고 반성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미묘하게 잘못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가장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고 일본의 상징적인 존재인 '천황'에 대한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그의 명령을 따른 실무자들이고 그리고 마지막이 일본인 개개인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일본의 철학자로서는 매우 파격적이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천황'의 위치와 권위를 생각할때 천황의 책임을 묻는 것은 위험한(?) 행동일 수 있지만 고진은 지식인 답게 윤리적 관점에 따라서 그것을 행하고 있다.
전쟁책임에 대해서 이런 사유를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사유라는 것은 형이상학적 기반 인데 그것은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는 바탕이 되며, 현실을 정확히 인식할 때 현실에 적용하는 행위의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유하는 자는 지혜자이며 정신적 지침을 내리는 지도자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전쟁책임에 대해서 숙고하므로 올바른 해법을 마련해주기 위해 칸트의 철학을 빌려서 윤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자들의 사유와 용어가 그러하듯이 고진의 사유와 용어 또한 지나치게 딱딱한 개념화된 용어이며 그로인해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을 괜히 어렵게 말하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진짜 본론은 9장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전부다가 책임에 대한, 윤리에 대한 길고 지루한 철학적 진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난한 사유의 과정을 거쳐 분명하게 떠오르는 결과적 사유를 말하고 실천할 때 그에 대한 결과는 곧 옳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한 분명한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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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3조의 저술이라 해야 할까.‘칸트’의 실천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실천)의 탐험을 기저(基底)로 하여, 일본인의 도덕관과 책임의식의 실체를 궁구(窮究)하고, 인류사회의 당위인 지속가능한 순환적 사회의 구축을 위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사유를 환기시키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도덕성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지만 이 규명의 여정에 등장하는 일본인의 공동체의식이나 천황의 전쟁책임과 같은 제재(題材)들이 우리 한국인에게 시사하는 것들 탓에 이해에 구체성을 띠게 된다.
일본 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적군파의 인질살해사건의 일화로 시작하는데,“도대체 ‘책임’이란 것에 회의적인 일본인들이 왜 열렬하게”사건가담자들의 부모에게 책임을 추궁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여기서 소위 주체나 원리도 없는‘사회’도덕이라는 일본의 특수한 현상을 들춰낸다. 그 실체는 마을공동체라는 것으로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사회로 보이지만 단지 개인 자신들의 고립이 두려워서 모이는 것뿐이며, 그들 사이에 돈독한 우정이란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정이 존재키 위해서는‘자기’가 있어야하는데 바로 이 공동체라는 것에 자기가 없는 것, 즉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데 자기(에고)도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도 없는 이 모호한 공동체가 도덕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관련도 없는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기이한 현상으로 표출되는 것이지만 정작 도덕적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의 주체로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즉, 이 고찰은 주체의‘자유’가 도덕적으로 어떠한 위치를 지니는지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자유라는 관점에서 도덕을 인식하는 칸트의 실천윤리에 대한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과연 자유의지라는 것이 진정 존재하여 선택하는 것인가에 이르면 그 자유는 이내 불확실해진다. 마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디까지나 인과성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며, 따라서 인간의 행동은 모두 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자유 따위는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결과가 되고 만다.
여기서 칸트는 자유는 결코 이처럼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인식하고자하는 의지, 바로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으로 비로소 자유가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도덕성은 선악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문제이며, 자유 없이 선악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연적, 사회적 인과성을 배제하고 오직 자유를 의지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니, 실제로 자유롭지 않다고 할지라도 자유로웠던 것처럼 간주하는 것, 다시 말해 인생을 타인이나 주어진 조건 탓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자신이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책임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를 보다 진전시켜 생각해 보면 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을 그렇게 믿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윤리적(자유)인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한편 공동체의 도덕을‘도덕’으로,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을‘윤리’로 구분한 칸트의 세계시민(Cosmopolitan), 즉 공공적으로 생각하는 의지를 지닌 시민의 상정은 인류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하는 윤리의 도달점을 말한다. 즉 진실이지만 자기연대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 - 부정한 조직을 정의심과 용기로 공개할 경우 자신의 조직에서 배제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 곧 세계시민으로서 행동하면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조직을 위해 좋은 구성원, 가족을 위해 좋은 아빠가 되는 소위 사회도덕을 지키면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인 윤리를 지킬 수가 없게 된다. 이는 윤리적이라는 것은 바로 도덕성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진정 윤리적이라는 것은 이처럼 자기와, 연대의 희생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 영미(英美)계 윤리학의 중심사상을 이루는“타인에게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된다!”는 공리주의의 경우 이미 자기 원인적, 즉 자유가 아니라는 점에서 도덕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더구나 공리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현대자본주의가 분업과 교환이라는 타자를 수단으로 삼는 것, 즉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는 것을 희생시키고 있으며, 공공적 합의라든가 사회적 계약과 같이 지극히 협소한 타자, 즉 살아있는 타자에 한정되어 미래의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된다. 선(善)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등식,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추구라는 신념을 고수하여,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려 한다면 전(全)지구적 환경파괴, 에너지와 식량부족 등 비참한 사태가 초래되는 것은 불가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참한 사태를 체험하는 것은‘미래의 타자’이며, 이들 미래 인간이 참여하지 않은 공리주의의 공공적 합의라는 것은 이미 도덕성을 결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린 미래의 인간을 위해서 희생(생태계의 복원, 자원의 절제 등...)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의무’, 윤리(실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후(戰後) 일본 천황의 형사적 책임에 대한 논의들을 통해‘책임’이라는 도덕적 의무를 성찰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과 일본의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의 문제로 관심을 증대시킨다. 독일의 경우 전후‘뉘렌베르크 재판’을 통해 전범들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물음으로서 정치적, 도덕적 책임의 단계로 진전되었으나, 일본의 경우 천황의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고 엉뚱하게도‘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라고 국민의 책임으로 전가하여 전쟁 책임의 논의가 모호하고 불투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누구도 책임을 질 사람이 없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무책임 체계’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천황 대신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어딘가 부당하다는 것이며, 이는 일본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부족한 이유가 되고,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 나아가지 못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적 관심을 배제하는, 일종의 무관심(저자는 괄호에 넣는 것이라는 기발하고 유용한 표현을 하고 있음)을 통해 도덕을 보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지적 쇄신과 책임의 요청이 있다하겠다.
사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우리들이 풍요로움과 물질적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현재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항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연환경의 리사이클수준을 넘어서는 위기와 남북문제와 같은 양극화로 인한 갈등을 비롯한 숱한 윤리적 문제가 있다. 우리가 현재의 행복을 위해 미래의 인간에게 계산서를 돌린다면, 즉 그들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것은 윤리의 공공연한 부정과 파괴가 되어버린다. 아마 내셔널리즘의 환기와 자국민의 행복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칸트의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윤리는 그래서 21세기 지속가능한 순환적 사회를 형성하는 우리 인류의 생존을 위한 모럴이라 하여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이성비판(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누비며, 마르크스주의의 가능한 코뮤니즘의 이상에 이르기 위해 언급되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가라타니의 철학향연은 문학적 감상을 초월하는 재미에 빠져들게 한다. 칸트, 니체, 스피노자, 키에르케고르, 프로이트, 야스퍼스, 헤겔, 아도르노, 데리다 등을 종횡무진하며 자유와 이성, 도덕과 윤리를 수월한 언어로 대중에게 전달해주는 이 저술은 보편적 도덕 법칙에 대한 칸트주의의 秀作이라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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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와넬 군이 추천해준 어마어마한 책들 중에서 다시 엄선해 준 책이다. 처음에는 쉽게 읽히더니 뒤로 가면서 개념들이 서로 얽혀서 엉망으로 얽혔다. 오랫만에 느슨해진 생각의 고리들을 다시 조여야했다. 그러나 늘어질대로 늘어진 생각의 고리가 쉽게 조여질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디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윤리에 관한 책이다. 제목이 윤리 21 아닌가? 그럼 21은 뭔가하니 21세기의 21이란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윤리의 시대라는 소리가 된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윤리란 것은 또 무엇인가? 중학교 때 도덕을 배웠고 고등학교 때 윤리를 배우긴 했는데 뭐가 뭐란 말인가? 가리타니 고진은 도덕과 윤리를 분리시켜 생각하게 만든다. 도덕과 윤리를 분리시키고 개별적인 것으로 확립하는데 책의 전반을 사용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
도덕과 윤리를 어떻게 대별할 것인가하면 도덕은 작은 집단 내에서 통용되는 판단 기준과 습속이라고 보는 것이고 윤리는 한 발 더 나아가 작은 집단이 아니라 세계 공공집단에서 통용되는 절대적인 기준 - 절대적인 기준이란 말은 내가 쓰는 말이다. - 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뭔 문제인고 하니 개인적 판단과 공공의 판단 즉 개인과 집단의 판단의 괴리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당연시 되는 결론이 넓은 집단에서 보면 반드시 옳은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이 9.11테러를 당했다고 이슬람 세력에게 피의 복수와 같은 것을 감행한다고 했을 때 미국 내에서는 당연한 응징이라고 용인 받을 수 있지만 세계의 시선으로 볼 때 테러의 원인이 아닌 것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다. 도덕과 윤리는 어쩔 수 없는 괴리를 나타낸다. 합치도 되지만 불합치도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불합치되는 것을 합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되지 안을까? 이것은 내 생각이다. 가리타리 고진이 말하지 않았으나 그 행간에 그리 읽힌다.
이러한 도덕과 윤리의 개념을 정립하면서 가리타니 고진은 칸트에 기대어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신도 인정하듯이 칸트를 통해서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개념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고 있지만 철학에 대한 어쩔수 없는 선입견과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생각을 대충이라도 알아야 이해와 오해와 오독의 거리를 조금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리타니가 칸트에 기대어 있고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에 기대어 있더라도 오랜 시간 읽고 오랜 시간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철저한 자기화가 이루어진 것이어서 섣부르게 다가갔다간 뼈도 추리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 것이니 준비는 단단히 하고 빠져들도록 형이상학적인 바다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명확한 개념화 뿐이다.
가리타리 고진은 전쟁의 새대에 종언을 요구한다.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세계시민적인 견해에서 윤리적 판단을 요구하는데 윤리적 판단에서는 모든 전쟁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서구의 제국주의가 심판 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판단되는 것이라는 견지를 뒤집어야 하는 난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윤리의 시대가 도래한다면 당연히 서구의 제국주의는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다. 윤리에 의한 도덕의 심판받을 시대가 우리가 타자가 되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가리타리 고진은 또 다시 도덕과 윤리에 있어 자유의 개념을 정립하는데 , 사실 나는 이 부분까지는 내 식으로든 가리타리 고진 식으로든 설명하기를 포기하려고 한다. 선명한 자기 정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뜬 구름을 잡아본다면 하나의 현상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는데 의무는 인식에서 온다 . 인식은 사건의 원인을분석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원인라는 것이 일 대 일 대응하는 것이 아니어서 다변적이고 다원적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복잡해지면 뭉쳐서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고 하는데 사실 자유의지라는게 있을 수 없다.자유로운 선택은 은연중에 그렇게 선택하도록 만들어 놓은 잘 짜여진 연극의 결론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원인을 추궁하고 인식하기 전에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일본의 도덕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정도로 뜬 구름을 잡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개인의 판단과 집단의 판단의 상이성 속에서 혼란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길 권하여도 좋을 책이다. 집단의 결정에 있어서 개인의 소수의견이 묵살되는 상황에 처해진 사람도 당연히 한 번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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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실천윤리 - 가라타니 고진, 『윤리21』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21』(사회평론, 2002)에서 (개인의) 윤리와 (공동체의) 도덕을 구분한다. 그는 “도덕이라는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를 ‘자유’라는 의무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한다.”(9쪽) 이를테면 ‘부모의 책임을 묻는 일본의 특수성’이라는 항목에서 지은이는 개인의 잘못을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본 사회의 풍토를 문제 삼는다. “아이가 저지른 일에 왜 부모가 책임을 지는가? 그 경우 그것은 누구에 대한 책임인가?”(22쪽)라고 지은이는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회’이다. 아이의 잘못을 부모의 책임과 연관 짓는 존재는 사회라는 ‘상상의 공동체’다. 매스컴이 나서서 그런 아이를 키운 부모들을 질타한다. 지은이의 말처럼 “만일 그 결과 비난과 공격을 받은 부모가 자살했다면 그것에 ‘사회’는 책임을 질까?”(22쪽)
한편으로 지은이는 이 이야기의 맞은편에 아들의 잘못을 부모의 책임과 연결 짓지 않는 ‘사고 실험’을 제시한다. 아들은 한국식으로 말하면 ‘빨갱이’이다. 사회적 비난이 아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쏟아진다(실제 한국사회에는 ‘연좌제’가 있었다). 이런저런 무언의 사회적 압력을 받으면서도 아버지는 ‘사회’를 향해 사죄를 하지도 않고, 회사를 그만두지도 않는다. “만약 자신이 직장을 그만둔다면 그것은 아들에게 자유가 없다고 간주하는 일이 된다. 아들이 한 일에 대해서는 아들이 책임을 지면 된다.”(32쪽)고 아버지는 생각한다. 지은이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 아버지는 아들이 한 행위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아들이 책임을 져야할 (자유로운)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끝가지 인정하려고 한다.”(33쪽)라고 지은이는 쓰고 있다.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미나마타병은 신일본질소라는 회사가 바다에 흘려보낸 유기수은에 의해 생긴 병이다. 그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던 기술자가 있다. 그는 회사에 사실대로 상황을 보고했지만, 회사는 기술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피해 상황이 드러난 후 여러 기술자들이 회사에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회사를 ‘위해’ 그것을 비밀에 부친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회사의 이익을 지켰다. 침묵한 대가로 이들은 회사에서 잘리지 않았고, 가족들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회사를 위해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한국사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조직의 진실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생매장당하는 사회에서 회사의 규범=이익을 외면하고 개인의 윤리를 선택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좋은 사원이 되라, 좋은 아버지가 되라, 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도덕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에 반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도덕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그들은 그것이 ‘의무’에 반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미나마타병 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고 난 뒤부터 고민한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들의 고민은 사회의 비난에 대한 고민이다. 이제 그들은 사회의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악인’이 되었다. “내 행동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그들은 변명한다. 그러나 그들을 공격한 사람들은 똑같은 상화에서 어떻게 할까? 그 이후에도 이와 동일한 사례는 많다. 텔레비전 방송국 자체도 불상사를 숨기려고 하거나 보도해야 할 사실을 은폐하는 일이 있다. (96~7쪽) 사실 이 책은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글이다. 당장 우리 사회는 아직도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측이 진심어린 사과를 여전히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국가와 국가 관계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에게 ‘개별적으로’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인 셈이다. 위안부 할머니들 입장에서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그녀들은 한 개인으로 제국주의의 폭력을 고스란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진심어린 사과를 원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국가와 국가의 관계로 이를 해결하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은 당연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대다수의 일본인은 일본 정부의 입장을 따른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이익이 걸린 문제여서 그런 걸까?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그들은 소수이다.
그래서일까, 지은이는 ‘역사 다시 보기’는 불가피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위안부 문제에서 그는 “여성의 관점에서 전쟁을 다시 보는 것, 세계사를 다시 보는 것”(180쪽)을 이끌어낸다. 위안부 문제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가부장제 논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관계로만 보면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논리는 상대적으로 묻혀버린다. 지은이는 이러한 ‘역사 다시 보기’를 억압된 타자가 복귀하는 상황과 결부시킨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그것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억압하고 있던 ‘타자’가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180쪽) 공동체의 규범=도덕에 매몰된 사람은 회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는 사람들처럼 타자의 비극에 눈을 감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타자를 생명이 있는 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추상=상상이 이 땅에서 실제로 숨 쉬며 사는 생명=타자를 대신하는 꼴이다. 칸트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타자를 오로지 ‘수단’으로만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은이가 왜 공동체의 도덕과 개인의 윤리를 구분하면서 일본의 ‘전쟁책임’을 논의하고 있는지 알 만하다. 전쟁책임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전승국의 입장에서 패전국의 전쟁책임을 묻는 게 핵심은 아니라는 말이다. 전승국이든 패전국이든 ‘전쟁책임’이라는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다. 지은이는 “나는 머지않아 미국의 원폭투하에 대한 ‘책임’을 묻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179쪽)고 쓰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식민지 사회에 저지른 죄악에 진정한 ‘책임’을 묻는 시대 또한 반드시 올 것이다.
문제는 그 ‘책임’이란 게 개인의 윤리와 더불어 실현될 수 있다는 대목이다. 당장 위안부 문제만 해도 공동체의 규범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윤리는 타자를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는 그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역사에는 의미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실천적(윤리적)으로만 존재한다.”(191쪽)는 지은이의 말은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실천적=윤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당장 우리는 ‘촛불 혁명’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천=윤리가 모여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 지은이는 바로 이 ‘윤리’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사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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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5년 <한일작가회의>에서 「책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한 강연과 1997년 <여성·전쟁·인권>학회에서 「책임과 주체」라는 주제로 한 강연을 가필, 재구성한 것이다. 제목답게 21세기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윤리의 가능성에서 다각도 고찰하고 있는 대단한 역작이다. 실은 가라타니 고진이란 학자의 글은 이번이 처음이라 어떤 내용일까 많이 궁금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고 수긍될 만한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다소 머리가 아플수도 있었던 것은 다양한 철학가들의 등장과 일상적인 용어의 낯선 해석 탓이 아닐까 자위해본다.
우리는 누군가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의 원인을 찾기 마련이다. 미성년자의 범죄가 발생되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지를 놓고 설왕설래하기 시작한다. 원인이 발견되면 마치 그것이 큰 죄악인 양 몰아세우고 현실을 비판만 할 뿐 아무런 대안책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일본에서는 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당사자가 죄값을 치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의 부모들이 사죄를 하거나 심하면 자살에 이를 때까지 사회가 그들을 몰아세운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경향은 없지만 그들의 행동이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의 이면에는 ‘공동체’만 있고 ‘자신’이 없기 때문이란 결론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원인을 아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라는 것이다. ‘원인을 아는 것’은 그 상황을 ‘인식’하는 것이고 ‘책임을 묻는 것’은 ‘윤리 곧, 실천 ’적인 문제란 것이다. 그렇게 명확하게 규명지어놓지 않으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인식하는 것조차 안하려고 내빼기 때문에 개념을 명확하게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말대로라면 한 미성년자의 탈선의 ‘원인’이 부모의 양육 부재에서 왔더라도 ‘책임’은 그들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구별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칸트이다. 그렇기에 누군가 어떤 것을 갖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그’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그것을 가지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도 그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누구나 아무 일을 해도 된단 말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범죄자가 되지 않는 것 뿐이지만 그렇다고 악한 행동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하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 칸트는 그것을 지상명령에서 찾았다. 단어의 선택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의 ‘지상명령’이란 ‘자유로워지라’라는 명령으로, 국가나 공동체가 강요하는 의무랑은 차원이 다르다. 자유로워지는 명령을 따르는 것은 자유이니, 그다지 모순된 점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타자를 수단(자연)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자유)으로 대하라’라는 명령까지 모두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무로써 가능한 것으로 규정해두었다.
이런 칸트의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는데, 여기서 필자는 도덕성이란 말고 윤리성이란 말을 구별해서 사용했다. 도덕성이란 말은 한 국가나 공동체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고, 윤리성은 세계시민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래서 미국의 9.11 테러에 대해 아프간을 공격한 것은 그 나라에서는 도덕적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봤을 때는 윤리적이지 못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단어는 서로 상치될 수 있다. 그 때는 항상 세계시민적인 생각으로 윤리를 봐야 한다. 따라서 각 국가 간에서의 도덕성은 묻기가 곤란하기에 칸트는 어떤 강제적인 단체나 힘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세계대전이 끝난 후엔 국제 연합이란 기구가 생겨날 수 있었고 국제법, 혹은 전쟁책임이란 단어를 우리가 들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이 전쟁책임을 지고 국제 재판에 섰을 때,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당연하게 여길 순 있지만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단지 일본과 독일의 제국주의적인 행동만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미국이 원주민을 몰아내고 아메리카 땅을 차지해버린 것이나 영국과 프랑스가 과거에 광대한 식민지를 지배한 것에 대해서도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국제 재판이 승전국이 패전국에서 부과하는 형벌일 뿐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20세기까지 도덕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어 왔던 과거의 인류사를 반성해야만 세계사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도 다시 봐야 한다.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던 사람들의 눈으로, 여성의 눈으로, 동성애자의 눈으로 등 이제껏 약자라 취급받고 무시당했던 입장에서도 역사를 조망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항상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서도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칸트의 말대로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가지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가 미래의 인간에 대해서도 목적으로 대할 수가 있다면 지금 마구잡이로 진행되어 가는 환경 파괴에 대해서도 다른 대책이 생길 것이다. 여기서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코뮤니즘’이 있다. 흔히 ‘코뮤니즘’은 ‘공산당 독재에 의한 국유화 경제’로 오해를 받는데 그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 연합사회’를 지향하는 것!! 바로 그것만이 지속 가능한 순환적 사회를 전 지구에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우리가 21세기에서 꼭 생각해야 봐야 할 여러 논제에 대해서 물 흐르듯이 전개해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나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그에 타당한 논리적 근거를 들기에 식견이 부족했던 것들에 대해서 충분히 개진해주어 내 머릿속이 명확해진 것 같다. 책 마지막 쯤에는 「트랜스크리틱」 1부가 수록되어 있어 그의 사상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21세기를 맞아 우리가 과거의 전쟁의 시대를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도덕과 윤리에 대한 테제를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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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21>, 가라타니 고진(2000) 도덕과 윤리에 관한 나의 견해를 정리하다 추석을 맞아 부산의 집에 내려왔다. 집에 오니 먹을 것이 풍족하다. 자취방과는 비교 불가다. 그래서 이것저것 먹으니, 곧 포만감에 맹해졌다.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너무 나른했다. 그래서 다른 책들을 읽었다. 그런데 이 <윤리21>의 재독을 마친 것이 벌써 사일 전이라, ‘생생할 때 얼른 써야 하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압박감을 느꼈다. 다음 책인 <트랜스크리틱>을 읽기 전에, 또 박노자 책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의 리뷰를 쓰기 전에, 도덕과 윤리에 대한 나의 정의와 관점을 확고히 하고 싶었다. 고진은 말한다. 어떤 책을 읽거나 철학을 접할 때, “중요한 것은 단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분별하는 일”이라고. 동의한다. 그래서 내게 그전에 해야 할 작업이 있다. 바로 내가 쓰는 단어를 뜻을 명확히 하는 것. 타인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도, 또 앞으로 사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지금 이 시점에 이 작업이 불가결하다. 사실 도덕과 윤리라는 추상적인 단어에 대한 생각과 느낌은 아직 모호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일단 쓰면서 정리해보려 한다. 나의 도덕과 윤리 먼저 내가 생각하는 단어의 정의를 명확히 밝혀보자. 이것은 사전의 통상적인 정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나는 일단 도덕과 윤리를 구분하겠다. 그리고 도덕을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누겠다. 첫째는 공정성·정의와 관련된 감정적인 도덕이다. 둘째는 전통·규범·습속 등으로 표현되는 문화적인 도덕이다. 그리고 (세계) 윤리는 석가모니나 예수 등의 선각자들이 주창한 절대적인 도덕률이다. 먼저 감정적 도덕에 대해 밝혀보자. 이것은 2H와 관련한 감정이다. 여기서 2H란 도움(Help)과 피해(Hurt)이다. 인간은 자신이 주거나 받은 도움과 피해를 매우 잘 기억한다. 그리고 도움(피해)을 받았다면 언젠가는 되돌려주고 싶어하고, 도움(피해)을 줬다면 언젠가는 되돌려 받고 싶어한다. 이런 기억과 행동은 감정으로 인해 촉발된다. 동정은 도움을 주는 행동을, 감사는 도움을 되돌려주는 행동을, 분노는 피해를 되돌려 주는 행동을, 반성을 피해를 되받는 행동을. 이런 감정들이 발달하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감정적) 도덕이 된다. 이 때, 도덕은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공정성·정의의 요구이다. 공평하게 도움을 주고받고 싶은 마음, 나아가 사회에 기여했을 때, 사회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받고픈 마음이 공정성의 요구로 모아진다. 그리고 피해를 당했을 때 그것을 정당하게 해소해주기를 바라는 감정은 정의에의 요구로 모아진다. 이런 공정성·정의의 요구가 점차 사회적 규범으로 반영되었고,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법률로 정착되었다. 결국, 법률은 공정성과 정의의 감정이 집약된 사회적 약속인 것이다. 이런 감정적 도덕은 공동체마다 다른 양상을 보인다. 평등이라는 이념에는 공정성의 요구가 큰 영향을 미쳤고, 질서라는 이념에는 정의의 요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두 가지 감정이 외부적 요소(환경·제도)와 상호작용하면서 한 사회의 평등과 질서를 조율한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수직적인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수평적인 사회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두 번째 도덕인 문화적 도덕은 인간이 실존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명제는 진부하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인간은 지난 몇 백 만 년을 소규모 혈연 공동체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앞의 명제를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인간은 공동체적 동물이다. 공동체는 인간의 실존조건이었다. 개개의 공동체는 바깥의 적으로부터 강하게 결집해야 했다. 문화적 도덕은 전통·규범·습속으로 구성된다. 이것들은 구성원 내의 차이를 제거하고 동질성을 높였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결집과 결속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결국 문화적 도덕은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 형성되었고, 공동체의 질서를 강화시켜 통일성과 동질성을 확립하는 역할을 해왔다. 질서를 바로잡고 결집을 강화시키는 문화적 도덕은 다소 강제성을 띠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공동체의 결집을 위협하는 자들은 추방으로 제거했다. 홀몸으로는 약하디 약한 인간에게 추방이란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또는 조금 약한 처벌로 무관심을 보이거나 따돌림을 가했다. 공동체 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런 상태는 사회적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추방과 배제’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전통·규범·습속의 작용력이 나왔다. 이것이 굳어지면서 문화적 도덕은 공동체를 통제하는 강력한 기제가 되었다. 문화적 도덕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공동체가 처한 자연 환경에 따라 다른 덕목이 힘을 얻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적 공동체에서 기능하는 것이다. 씨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국가로 넘어가면서, 가족에서 공동체로, 공동체에서 국가로 그 외연을 넓혀왔다. 또한 문화적 도덕은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변하면서 조금씩 수정되고 고쳐진다. 하지만 급변하는 시대에는 나름의 활동력을 확보하고 있는 문화적 도덕은 그 속도를 맞추지 못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문화적 도덕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경향이 있고, 현재 시점에서는 비합리적이고 소모적인 규범이 적든 많든 일부 존재한다. 마지막은 윤리다. 나의 정의 하에서 윤리는 절대적인 도덕률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를 최대화하고, 해를 끼치는 행위를 최소화하는 것. 아니, 아예 도움을 주는 행위만 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감정적 도덕 중 평등의 측면을 극대화/절대화한 것이다. 그리고 적용 범위를 세계 인류로 넓힌 것이다. 그리하여 보편적인 도덕률로서 윤리의 내용은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이며 세계주의적이다. (종교 선각자 외에) 이런 도덕률을 주창한 사람으로는 마르크스나 간디 등이 있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의 견해에 따르면, 칸트 역시 이런 방향의 윤리를 지향했다. 이제부터 나는 이것을 세계 윤리라 칭하고 싶다. 고진의 도덕과 윤리 고진은 이 책에서 “도덕이라는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를 ‘자유’라는 의무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한다. 고진의 개념을 나의 것과 비교하자면, 그의 도덕은 나의 문화적 도덕에 가깝고, 그의 윤리는 내가 말한 세계 윤리로 나아가는 실천적 행동을 의미한다. 그가 이 책에서 도덕과 윤리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이유는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주체를 발견하기 위해서다. 그는 칸트의 도덕관(윤리관)을 재검토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세상의 윤리적 토대를 구성한다. 먼저 그는 칸트의 논의를 빌려와, 자유와 주체에 대해 논한다. 실제로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 여기서 자유란 순수하게 자기원인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이미 주어진 환경에 기반해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자유로운 주체란 상상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실천적(윤리적) 차원에서는 주체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칸트가 내세운 ‘자유로워져라’는 지상명령을 숙지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자유가 없지만 자유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진정 주체적인 인간이다. 그리고 이렇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세상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자유와 인식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동에는 책임이 지워진다. 위의 도덕법칙은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자유로운 주체)으로 대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명제가 의미하는 바는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자 역시 자유로운 인간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란 현재 존재하는 인간뿐만 아니라, 과거의 인간 그리고 미래의 인간을 포함시킨 범위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윤리이다. 고진의 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을 수단뿐만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것은 자본제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고진의 생각에 이것이 가능 하려면 ‘생산-소비협동조합의 연합사회’가 되어야 한다. 헌데, 자본제 사회를 가만히 둔다면 그것은 더욱 공고화될 뿐이다.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윤리적인 개입이 요구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제 사회를 지양하고 ‘가능한 코뮤니즘’을 지향하는 실천적(윤리적) 행위가 필요하다. 결국 고진은 실천의 필요성을 윤리의 차원에서 규명해내었다. 내가 읽고 정리한 <윤리21>은 여기까지다. 이것이 칸트가 내세운 도덕이고, 종합 위에서 고진의 윤리는 내가 정의한 세계 윤리로 나아가는 실천적 행동의 기반이라 했다. 세계 윤리를 현실화 시키기 위해 어떤 행동들을 해야 하는지 고려해보자. 그전에 왜 우리는 세계 윤리를 지향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세계 윤리는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기득권/지배층이 아닌 이상, 또는 그곳으로 편입될 자질을 갖추지 못한 이상은 세계 윤리를 지향하는 것이 자신의 실존 조건에 있어서 합당한 태도라 생각한다. 일례로 반전·평화 운동은 국가 내에서 배척 받기 십상이다. 그것은 제국주의 전쟁의 수혜자는 일부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죽어나가는 건 서민인데 말이다. 다시 세계 윤리의 실현 방안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자. 세계 윤리는 감정적 도덕에서 평등의 측면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평등뿐만 아니라 질서를 원하는 것도 인간 본성이다. 평등과 질서는 서로 길항한다. 따라서 이것은 내부에 지난한 갈등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이상이 실현되기란 극히 어려워 보인다. 솔직히 세계 윤리는 매우 유토피아적이다. 하지만 실천적 차원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관념적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세계 윤리와 문화적 도덕을 일치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가? 이것은 배제·추방에 대한 두려움을 세계 윤리에 덧씌우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세계 윤리의 실천을 당위나 요구에만 맡기지 않고 강제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문화 자체를 세계 윤리적으로 바꾼달까.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일단 유혈 혁명으로 지배층을 뒤엎어버리기. 그 후에 세계 윤리를 문화적 도덕으로 설정해버리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 자본가인 것을 감안한다면, 또 서민들도 경쟁논리가 내면화된 소자본가인 것을 감안한다면, 유혈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다음 방법이 중요해진다. 둘째는 세계 윤리를 사회 내의 문화적 도덕으로 점진적으로 적용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문화적 도덕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고, 또 수정되는가. 어떤 물질적 토대에서 어떤 문화적 도덕이 만들어지는가 등을 말이다. 나가면서 <윤리21>은 고진의 다음 저서인 <트랜스크리틱>을 이해하기 쉽도록 현실사례에 대한 논의를 통해 사전지식을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이 리뷰는 고진의 논의와 약간 엇나간 방향으로 전개된 것 같다. 장장 네 시간, 네 차례에 걸쳐서 썼건만;; <트랜스크리틱>을 읽으면서 그가 이끄는 방향과 지점에서 치열하게 사유해보자. 구절 “우리가 사고방식을 바꾼다고 해도 자본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자본의 축적은 우리의 욕망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것이 우리의 욕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또 아무리 환경적 위기가 있다고 해도 자본의 운동이 멈추기는커녕 역으로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버릴 가능성이 더 크다. 다시 말해 미래의 위기에서 선진자본주의국가는 자국 ‘국민’의 행복을 위해 전쟁을 사양하지 않을 것이고, ‘국민’ 상에 내셔널리즘을 환기시킬 것이다. 그러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우리가 득을 보거나 미래의 인간으로부터 감사의 말을 듣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제다. 그것은 미래의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는 일이다.”(p190 “지속 가능한 순환적 사회를 전 지구에 형성하는 것, 그것은 자본제가 아닌 생산과 소비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소비-생산협동조합의 연합사회다. 그것이야말로 마르크스가 ‘가능한 코뮤니즘’이라고 부른 것이다. 자본과 국가에 대한 그러한 대항운동은 지금부터라도 가능하다. (…) 단 하나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자본제 단계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발전은 결코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자유로워지라’’,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는 윤리적 의무로부터 생겨난다. 역사에는 의미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실천적(윤리적)으로만 존재한다.”(p190~p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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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일본의 문학비평가로 한국 내에서도 한때 붐이 일었다. 비서구인이 가진 주변부적 문제의식을 서양의 근현대사상으로 풀이함으로써 세계적인 보편성을 얻는 것이 그의 사유 특징이다. 그의 저서들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책들에 치여,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러다 얼마 전 이 책 <윤리21>을 그의 책 중 가장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200페이지를 약간 넘는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그 안에 든 내용은 결코 녹록치 않다. 제목을 '윤리21'로 한 것은 지난 20세기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 종교와 인종간의 갈등, 빈부격차, 환경파괴 등으로 윤리성이 결여된 세기였기 때문에 앞으로의 21세기는 윤리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렇다면 윤리란 과연 무엇인가? 이 책에서 가라타니는 도덕과 윤리를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회나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 할 것을 '도덕', 세계시민(Cosmopolitan)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윤리'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윤리의 문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의 사고에 대해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공공적으로 생각하는 의지를 가진 세계시민은 우리 인류가 진정으로 도달해야 할 윤리의 도달점이지만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부정을 용기 있게 파헤칠 경우 그는 그 공동체 안에서 곤란한 처지가 되거나 심지어는 배제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과 '윤리'는 항상 서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며, 윤리적이라는 것은 이처럼 자신과 집단의 희생을 요하는 결코 쉽지 않은 가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인의 공동체의식, 천황의 전쟁책임을 예로 들어 일본인의 도덕관과 책임의식의 실체를 파헤치고, 동시에 칸트의 철학을 중심으로 한 실천윤리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적군파의 인질 살해사건의 예를 들며 왜 다른 나라와 달리 일본인들은 사건 관련자의 부모에게 사죄를 요구하는가 하는 의문점에 대해 다루며 그의 논의는 시작된다. 이는 일본의 특수한 상황으로 이른바 겉으로는 그럭저럭 사이가 좋은 것 같지만 단지 개인이 고립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인 것에 불과한, '마을공동체'라는 일종의 모호한 공동체의식에서 비롯된다. 사건과 관련도 없는 부모에게 책임을 물으며 사죄를 요구하지만 정작 도덕적, 법적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의 주체로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즉, 주체의 자유는 도덕적으로 어떠한 위치를 가지는지 이 고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윤리가 나오기 위해서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곧 자유의 관점에서 도덕을 인식하는 칸트의 실천윤리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지며 전쟁책임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가 시작된다.
참된 윤리는 진정한 자유에서 나오는데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가 있을까. 마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인과성에 의해 제어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행동은 모두 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자유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인간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는 말이 되고, 데카르트적 주체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칸트는 자유는 자연 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에 의해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주체적으로 되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이 어려운 철학적 논의를 굳이 한 이유는, 칸트의 철학을 통해 일본의 전쟁책임을 말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1장에서 8장까지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9장부터 12장까지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이 등장한다. 독일의 경우 전쟁 후 뉘렌베르크 재판에서 전범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물음으로써 정치적,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결과가 되었지만 일본은 그 당시 천황의 책임을 묻지 않고(이는 <히로히토 평전>에도 명백히 드러나 있다) 어이없게도 국민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켜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당시 1억은 일본 본토의 인구와 오키나와인, 아이누인, 대만인, 심지어는 재일조선인들까지도 포함한 것으로 반드시 고쳐져야 할 말이다. 재일조선인 등은 결국 일본에 의한 피해자인데 왜 그들이 함께 참회해야 하는가?) 결국 누구도 책임을 질 사람이 없게 되고 모두가 전쟁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모호하고 불투명한 '무책임 체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 등의 주변국들과도 과거사 문제를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이는 일본인들의 일종의 무관심(가라타니는 이를 '괄호에 넣어 버린다'로 표현하고 있다)이 원인이기도 하다. 여기서 가라타니는 천황에게 먼저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 천황의 명령을 따른 실무자들과 일본 국민들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천황 관련 이야기는 일본 내에서 거의 금기나 마찬가지인데 학자다운 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또한 저자는 '타자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칸트는 하버마스나 아렌트 식의 내부적 합의에만 주목하는 사상을 비판했는데, 결국 그 당시 사회 안에 존재하는 자들간의 합의만이 중시되어 집단의 외부인(이미 죽은 자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들)이 배제되는 결과가 되어 책임 문제는 또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주도한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식량위기나 큰 재해가 나타나게 되고, 그 피해를 받는 사람들은 환경오염에 책임이 없는 후진국 국민들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세대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선진국에서는 지속 가능한 순환적 사회를 제창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현재의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 미래의 인간에게 그 짐을 지운다면, 그들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칸트의 '자유로워지라',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윤리적 의무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책은 결코 쉽지 않은 담론들을 다루고 있고 그만큼 우리에게 수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전쟁책임, 식민지 문제, 환경오염, 신자유주의 등의 화두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칸트, 니체, 야스퍼스, 데리다, 헤겔, 키에르케고르 등의 철학적 향연이 꽤 인상적으로, 결코 쉽게 읽히지는 않겠지만 내친 김에 가라타니 고진의 다른 책들도 하나씩 읽어볼까 생각중이다. 사실 한두 번 읽고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 책을 몇 번 더 읽는 것이 먼저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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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학교에서 윤리를 배운다. 아니, '윤리' 란 과목을 배우고 있다. 동양의 사상, 서양의 사상, 철학자들의 이름....... 이런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머리가 뽀개질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위에서처럼 주제별, 부분별로 나눈다든지 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목 '윤리 21' 과 같이 저자는 '21세기의 윤리' 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책의 내용의 시발점이 바로 '칸트' 란 철학자에게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 그것은 여기에 적지 않겠다. 직접 이 책을 읽어보고서야 아, 그런 것이군 하고 무릎을 칠 독자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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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요즘에는 이래 저래 다시 읽는 책이 많다. 좋은 현상이다.
새로운 21세기에는 어떤 윤리학이 존재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칸트를 끌어들인다. 칸트에게 윤리는 자유라는 관점에서 본 도덕이다. 자유는 무엇인가? 구조주의의 시대에 인간은 정말 자유로울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해야 한다. 어떻게 인간을 둘러싼 구조를 괄호에 넣고 보는 것이다.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이. 그렇게 하면 여기서 '자유로워 지라'는 의무가 나온다. 자유를 의지해야 한다. 그 자유의지는 나에게 뿐 아니라 타자에게도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서 "너의 인격 또는 모든 타자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서만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는 말이 나온다.
그럼 어떻게 타자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할 수 있는가? 아니 그 전에 타자는 누구인가? 우리가 흔히 알듯이 타자는 나 이외의 사람뿐만이 아니다. 다른 국가 공동체의 사람, 죽음 사람까지도 포함된다. 여기서 역사적 책임의 문제가 나온다. 일본은 타자를 목적으로 대했는가? 아니다. 근거는 무엇인가?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임져야할 사람인 천황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다음,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을 마르크스를 끌여들여 신선하게 풀이하고 있다.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경제적 문제다. 사용자는 노동자를 목적으로 대하는가? 아니다. 단지 수단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목적으로 대할 수 있는가? 사민주의로? 국가에 의한 계획경젤고? 아니다. 임금노동자가 사라져야 한다. 어떻게? 여기서 마르크스의 코뮨주의가 나온다. 아직 오지 않은 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환경보호의 철학에서 단지 공공성으로는 미래의 타자에 대한 책임이 나오지 않는다.
새롭게 읽는 윤리 21은 약간은 다르게 읽혔고, 또 조금 더 정확하게 읽혔다. 재미있었다. 가리타니 고진의 윤리는 실천적 윤리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