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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한학기의 탈출기 나눔을 끝내고 3박4일의 연수에 다녀왔습니다. 새벽에서 새벽까지^^ 이어지는 일정 때문에 연수때 "풍요로운 가난"이란 책을 읽지 못하고 다녀와서야 보았어요.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의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 민족의 여정을 따라 미니 광야 체험을 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광야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야 할 여정 자체가 광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배신, 삶의 허무, 사별, 이별이 있는 현실 생활이 광야입니다. 인권 유린, 이기주의가 팽배, 물질의 풍요 뒤에 가슴을 쥐어뜯는 형제들이 있는 세상이 광야입니다. 소외당함 , 누군가를 미워함, 사랑에 목말라 함 , 몸부림치는 우리의 내면이 광야죠.
인생이란 광야를 걸어갈 때, 가난한 삶과 부유한 삶중에 가난한 삶을 택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임마누엘 수녀는 가난을 소망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많은 선지자들이 자진하여 헐벗음을 선택했습니다. 왜일까요? 광야는 고립되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며, 자신의 무력감을 철저히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더욱 하느님을 철저히 느낄 수 있는 곳이기에 그러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부는 빈곤하고 가난은 풍요롭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가난은 궁핍과는 다릅니다. 물질적 부에 매몰되지 않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충분히 소유하면 더 이상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가난의 풍요로움이란 물질적의 부의 추구, 과도한 쾌락 추구, 자아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전환되어, 타인을 향한 관심, 소유가 감소되고 존재는 강화됨,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헐벗음'을 통한 영혼의 상승야말로 행복의 사다리라고 합니다.
이번 연수는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위해 내가 선택한 작은 광야였습니다. 경제적 이득도 없고 솔직히 눈 맞고 감기 기운에, 오랜 시간 부동자세로 앉아 있느라 어깨, 허리가 너무 아파 지난번처럼 차분히 생각할 정신적 여유마저 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불평이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이쯤 되면 노래에서처럼 하느님을 알지 못했더라면 더 편한 세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느님을 향해 헐벗음을 선택할 때 겪어야 할 불편에 당면해 본 것이 탈출기의 의미 같습니다. 10번 이상 하느님의 무보수 스태프로 봉사해 온 연수봉사자들을 보고 겸양의 마음이 소득이고, 70명의 연수생들이 광야에서 나를 비우고 하느님을 채우겠다고 뜨건 가슴을 나눈 것이 앞으로의 여정에 든든함이 되어주리라 여깁니다.
헐벗음을 통하여 영혼이 고양되어 나간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을 생각할 때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두 걸음 물러나고 세 걸음 나아가는 식이죠. 임마누엘 수녀는 우리의 정체성이 물질적, 정신적, 지적 풍요로움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풍요로움에 토대를 두도록 하라고 권유합니다. 가난을 선택하여 높은 곳으로 나아가라며....
하느님께 자신을 모든 것을 맡기는 신학생이 된 지광이. 임마누엘 수녀님의 말처럼 선택한 가난이니 자신의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역경에 후퇴하지 않기를 기도 드립니다. 그리고 평신도의 길을 걸어갈 우리~ 언젠가 예비 수도자 찬권 오라버니가 말씀하셨듯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임을 떠올려봅니다. 상인은 열심히 장사하고 학생은 공부하고, 회사원은 자신의 회사가 최고의 물품을 만들도록 매진하고, 공무원은 행정서비스 친절히 하고, 교육자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재를 키우고, 의료인은 병을 잘 고쳐야 하겠죠,
*** 덧붙임 1
카톨릭은 행복의 정상을 향해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몇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1. 가난
우리를 든든하고 안정적이게 하고 우리의 뿌리를 내리게 해주는 것이라도 하듯, 본능적으로 주위에 있는 것들에 매달리게 된다. 가난은 소유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2. 정결
변덕 스럽고 혼란스런 관능적 탐심으로부터 해방이다. 누구의 마음을 끌고 유혹하고 정복하고 즐기는 행위들이 이제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는다.
3. 순종
자기 자신의 의지로부터 해방되기로 마음을 굳히는 것이다. 순종은 자기를 실현시키려는 욕구에서 벗어나 어떤 공동의 활동에 보다 큰 효율성을 주는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자신의 소비 습관을 바꾸고, 지금보다 검소한 생활을 받아들이고, 국제조직들이 공평성에 토대를 두기를 바라고 , 자신의 야심과 개인적 이득을 단호하게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되자. 지금 나는 소비의 노예가 되어 항상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가? 덜 소유함으로써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는가? 지금 이순간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서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의 삶에 고통을 덜어주고 있는가 아니면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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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지치기도 하고 춥기도 하여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이내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초저녁잠이었지요.
눈을 떴을 때는 새벽2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초저녁잠치고는 너무 길게 잔 터라 나는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습니다. 그곳에는 내가 읽고 싶어 사둔 책들이 가득 있기에... 가장 위에 있던 책이 바로 엠마뉘엘 수녀의 <풍요로운 가난>이었습니다.
밤을 꼬박 새면서 이 책을 읽고 일요일 한낮... 조용한 시간에 뒷부분까지 마저 읽었습니다. 뭐라고 말해야할까요? 나는 그녀를 닮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아직 나는 현실에의 욕구로 가득 차 있는데...
엠마뉘엘 수녀는 말합니다. 조금만 덜어내라고... '저 사람이 불쌍해서 내가 준다'는 식의 행동이 아니라 내게 넘치게 있어서 그걸 덜어준다는 식으로 일단 나서라고... 그리고 현장에서의 활동가인 만큼 엠마뉘엘 수녀는 다음의 두 가지를 경고합니다.
인도주의에 경도되어 행동을 하려면 첫째, 우월 콤플렉스를 버려야 한다. 둘째, 관료적 탁상업무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를 당부할 때에 나는 서늘해졌습니다.
우월 콤플렉스는 자기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앞에 서면 자기도 모르게 솟아나는 본능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이어서 이런 생각을 제거하는 일이 남과 더불어 공동행복을 추구함에 우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대륙에서건 가난한 이의 가장 절박한 욕구,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존중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p.73) "깊고 참된 우정은 가난한 이의 기본적인 욕구다. 이러한 우정은 평등의 감정을 낳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하며, 상호적인 믿음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p.74) 이런 마음가짐으로 상대방을 향해 두 손을 벌릴 때에만 "상대방의 자유를 믿는 것, 그것은 그가 다시금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에게 떠날 채비를 해주는 것과 같다."(p.74)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 앞에 자선의 행위를 하려고 섰을 때 과연 나는 상대방을 얼마나 동등한 나의 벗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평생을 남을 위해 살아온 엠마뉘엘 수녀 조차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보이는 첫 반사적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타인을 위하는 것일지라도 타인을 이용하는 것임을 예전에 나는 짐작도 못했었다. 세상과, 사람과, 사물에 달려들어 독점하려고 드는 거의 동물적인 이 반응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바로 딜레마가 있다.(중략) 이에 대해서는 매일매일의 자기성찰이 요구된다. 인도주의적 행동을 하면서 우리가 선을 원하고 행한다고 주장할 때는 우리의 본능적 권력의지가 제동없이 뻗어나가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은 크다."(pp.77-78)
엠마뉘엘 수녀의 '현장 중시'는 요즘 내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 화두와 닿아 있습니다. 요즘 나는 '대승불교'라는 제목의 강의를 일반대중들을 상대로 하고 있습니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공부한 것, 내가 생각한 것을 들려주면서 어쩐지 자꾸만 무엇인가가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불교기초교리를 설명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주체는 '보살'입니다. 자기의 번민을 완전히 해결하여 나고 죽는 괴로움을 완전히 극복한 성자인 아라한과는 또다른 차원의 수행자입니다. 아라한은 현재완료형입니다만 보살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영원히. 그런데 내가 읽어오고 생각해온 그 속에서 보살은 과거완료형으로만 자꾸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대체 이게 뭐지? 보살은 궁극의 경지에 들어설때까지 절대로 안주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대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살은 어째서 딱딱한 콘크리트보다 더 생명력이 없는 것이지? 나는 강의를 하면서도 연신 이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 엠마뉘엘 수녀의 책을 읽으면서 알았습니다. 보살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살의 현장은 어디일까요? 그건 책상 앞도 아니요, 조용한 산사도 아니요, 교수의 연구실도 아닙니다. 그건 끊임없이 욕심에 쫓기우고 분노에 치받치며 그러고도 하루하루를 똑같이 반복하며 살아가는 삶 그 속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지혜를 완성한다는 것.... 논리적으로 삼매 속에서 완성하는 것 뿐만이 아니요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꿈틀거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보살은 자신의 행위를 완성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하는 사람도, 그 행위의 덕을 입는 사람도 모두가 고정되고 항상불변한 성품이 없음을 확신할 때까지......
<풍요로운 가난>을 읽으면서 나는 자꾸만 화엄경이 떠올랐습니다. 화엄경의 '현수품'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보살이라면 숨쉬는 순간순간 어떤 소망을 품어야 하는지를 지루할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인, 논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현장체험을 통해 자꾸만 연습이 되어야하는 것임을 나는 왜 이제야 절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책의 뒤에 '나가면서'라는 제목으로 엠마뉘엘 수녀는 후기를 쓰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힘이 있고 솔직한 명문입니다.
책을 덮다가 다시 한번 읽으면서 나는 이 거칠기 짝이 없는 후기도 마감하려합니다. 더이상 내 생각을 옮겨놓으려고 버둥대다가는 성글지만 퍼득퍼득 살아있는 내 공감의 생명을 잃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 친구에게 권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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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옛날의 테레사 수녀를 떠올렸다. 이 책의 저자 엠마뉘엘 수녀는 '카이로의 넝마주이' 라고 불리운다. 지금 나이가 아흔이 넘었지만 그녀는 아직 '팔팔' 한 것 같다. '불의', 또는 '부당함' 을 보았을 때에는, 그녀는 자기 스스로를 '괴상한 오리' 라고 부르며 열을 올린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작가인 엠마뉘엘 수녀에게서 느낀 것은, 이 사람은 '가난'과 '모자람'과 '궁핍' 을 정말 증오하고 싫어하는 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궁핍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정말 참을 수 없는 화가 끓어오르며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준다. 한 마디로 감동적이다. |
| 이 책을 집어들었을때의 느낌은 역설적이라는것이었다. 제목부터가 '풍요로운 가난'이지 않은가? 어떻게 가난이 풍요로울수가 있을까? 가난은 불편한것이며 때로운 괴로움을 안겨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가난으로 행복해질수있다는 필자의 주장이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니 임마누엘 수녀의 주장이 어느정도 이해가가기 시작했다. 임마누엘 수녀의 가장 강력한 외침은 물질욕과 소유욕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욕심을 버릴수록 마음이 가난해지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과 풍요로워 질수있다는 이야기였다. 얼핏 보기에는 무척 단순한 이야기 같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몹시 어려우며 자기의 유익함을 양보하며 남에게 배려한다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다. 지은이가 극빈한 나라의 열악한 환경속에서 '궁핍'한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함께했던 경험담들을 읽으면서 가난하면서도 모든 것을 나눌수가 있고 웃을수가 있으며 행복감까지 느꼈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에서는 찾아볼수가 없는 여유가 있으며 정신적으로 풍요롭다는 것이다. 즉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집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욕과 자기자신에 대한 욕심을 억제하고 주위의 사람들과 나누고 함께하려고 할때 삶의 기쁨은 더욱 커진다는 일종의 행복론인 것이다.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현재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하기가 힘든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어떻게 하면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기고 남들보다 좋은 옷을 차려입으며 좋은집에 살고 멋진 차를 가질까 생각만 하고있는 판국에 남들을 챙기기란 아주 성가시고 귀찮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쫓고 있는 물질과 좋은것들이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희미해져만 가고 그것을 가지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능함과 공허함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지은이가 주장하고 있는 봉사의 기쁨과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그들과 교감할수록 자신이 빛이 나고 있다는 책속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을 때 그동안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베풀지 못하는 삶을 살았는가 하고 반성하게 된다. 진정한 풍요로움은 좋은 집도 차도 아닌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여러사람들과의 교류와 봉사속에서 마음을 풍요롭게 가꾸는것이다라는 생각이 깊게 새겨졌다. 중심이 삐뚤어 지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행복은 결코 오래가지못한다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된것같다. 머리로만 알고있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실천해갈 때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임마누엘 수녀의 밝은 미소만큼이나 깊게 내 마음을 비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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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상태가 풍요로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그 풍요로운 가난의 상태를 경험해 보고 싶은 충동으로 책을 잡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는 가슴 가득히 충만함과 기쁨이 솟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물질적 가난과 영혼의 부가 묘하면서도 선명하게 접점을 이루는 영역에 대한 얘기들이 이 책에 쓰여 있다. 가짐의 무상함을 깨닫고, 덜갖는 일상으로의 기꺼운 선회가 기쁘게 와 닿는다. 부와 미와 지성을 거부하라는 뜻이 담긴 책이 아니며, 다만 가장 일차적인 가치로 존재의 충만감과 풍요로움에 해당하는 영혼의 공허를 채우는 것에 관한 책이다. 좀 덜 쓰고, 좀 덜 즐기고, 좀 덜 소유함으로인해 존재가 느낄 수 있는 기쁨과 자유의 길이 이 책 속에 있다.
소유는 감소하고, 존재는 강화되는 특별한 예방주사 같은 이 책을 읽고 나서, 일상을 돌아보았다. 나름대로 단촐하게, 소박하게 지낸다고 했던 생활이지만 곳곳에 비대함과 거품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부턴 더욱 '풍요로운 가난'의 실천으로 존재가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생활을 꾸려나가야겠다. 엠마뉘엘 수녀님의 마지막 메세지처럼 나도 다짐해 본다. "앞으로 나아가자! 인생은 사랑할 때 아름답다."
'풍요로운 가난, 아름다운 가난'- 이 특별한 사건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경험하길 바란다.
[인상깊은구절] -'나의 존재는 보잘 것 없으며,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결코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이야말로 무엇보다 근본적인 빈곤인 것이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더불어' 하기를. -상대방의 자유를 믿는 것, 그것은 그가 다시금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에게 떠날 채비를 해주는 것과 같다. 깊고 참된 우정은 가난한 이의 기본적인 욕구다. -특정한 유형의 부는 특정한 유형의 가난을, 다시 말해 일종의 황무지화 현상을 퍼뜨린다. -가난은 지나친 무거움으로부터의 해방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에 그 무엇에도 소유당하지 않는 인간의 지혜 -크디큰 사랑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너무도 큰 풍요로움으로 영혼을 채우는 일이기에 이때 영혼은 원초적 샘에서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사물과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는 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섬세한 끝에서 나온다. -가난은 하느님,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훨씬 더 주의 깊게 귀 기울이게 해주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최상의 우리를 되찾도록, 본질로 되돌아가도록 이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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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병중이신 나의 아버지의 소원은 자식들이 큰 부자가 되는것이다. 병중에서도 늘 항상 자식들이 돈을 많이 벌어 남들앞에서 당당하게 살고 친척분들에게 한소리 하면서 사실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가난속에서 행복하고 평안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가 거짓말쟁이며 미치광이고 바보들이다.라고 말하는 전형적인 어른이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의 가장자리에는 늘 아버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아오신 나의 아버지와 그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자식들에게 엠마누엘 수녀는 역설적이게도 자발적 가난에 대한 메세지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온나라를 휩쓸고 집안의 교과서가 되고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라는 드라마가 일요일밤 온가족 앞에서 펼쳐지는 우리나라에서 부의 빈곤함과 가난의 풍요로움에 대한 믿음으로 한세기를 살아오신 엠마누엘 수녀의 기행적인 모습(?)은 하나의 불쾌한 코메디로 자리매김 되지는 않을런지
사실 이책을 읽으면서 얼굴이 화끈 거리고 부끄러웠다...그것은 아마도 엠마누엘 수녀가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행동과 언어들이 내가 추구하는 삶과의 건널수 없는 깊은 골로 패어져 있는데서 오는 자괴감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에게 이책을 권할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때때로 엠마누엘 수녀의 환영이 뒤따라 다니지도 모르겠다 [인상깊은구절] 루소는 인간이 한 평의 땅뙈기에 울타리를 치고서 니건 내것이야 라고 외치게 된 날부터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어째서 그것이 불행인가? 그것은 인간이 땅과 더불어 자신의 마음까지 울타리로 가두었기 때문이다. 그후로 인간은 타인을 경계하게 되었다. 타인에 대한 그의 시선이 변하게 된 것이다.-117p |